단순하게 동방이란 의미로 이해 했던 오리엔탈리즘이
서유럽 중심의 선진국가에서 바라보는 그렇지 않은
지역의 것들에 대한 비하적인 의미가 있는 듯하다

중화라는 국뽕의 중국이 동이, 서융, 남만, 북적으로
구분해서 불렀지만 어쨋든 오랑캐라 폄하했거나
로마말을 사용하지 않아 알아들을 수 없어, 어버버하는
소리로 말을 하는 것들을 통칭하여 바바리안이라 비하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 중국을 정복하여 지배 했던 선비, 거란, 몽고, 여진
등을 문화적으로 동화시키고 그들의 대부분의 영토
까지 통합한 다민족 중국인데, 그럼에도 한족이
90%나 되는건 어떻게 가능했나 ?
서구권의 경우 이민족 비율이 점점 많아 지느데...

이는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 하기위한 나름의 인류학 연구이며 그러나 부족한 정보로 인해 피지배자들을 한덩어리로 범주화한 무지의 발상이거나
굳이 현지인 맞춤 서비스의 필요성이 없었다는 것은
피지배인의 인권이나 인격을 경시 했음을 말한다.

미지의 동방이란 좋게보면 신비한 지역이나
자기들의 선진적인 것들과는 정반대로 분리되는
철저히 이분법적 논리다. 우월과 열등, 기독교와 이슬람 과 기타, 좋음과 나쁨, 바름과 틀림, 근면과 게으름 etc

열등한 것들을 선교하고 계몽하며 개발을 통하여 잘살게 해주었다는 말같지도 않은 논리를 못된 송아지 일본이
답습하고 아직도 그따위 소리를 지꺼린다.
설사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을 지언정 원하지 않았던 결정과 선택할 자유가 전혀 없었던 피해자을 설득 하겠다는 지극히 무지하고 무도한 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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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고 - 대국의 민낯 세종 X-파일 시리즈 1
조병인 지음 / 정진라이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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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의 안하무인은 오랜 서사가 있었음을 알았다.
입바른 소리하는 꼬장꼬장한 사대부 유학자들은 왜
부당 하다는 말을 못했을까?
이 모든게 황제의 뜻이 아니었을 것이고 또한 인의 장막으로 가려져 사실이 왜곡되거나 악용됨 으로써
겪지 않아도 될 고초를 자처 했지 않았나 싶다. 중과부적이라 감히 전쟁을 할 수는 없었더라도 아국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알려 조정하고 협상하는 등 양국간 관계조성을 위한 외교의 전략도 전술도 없었던 거다.
그들도 금수는 아니었을 것이므로 소통을 통해 신뢰
하고 협력하는 관계조성이 충분히 가능했었으리라 생각된다.

小中華로 자처하며 근엄을 떨던 성리학 선비들 조차
공자, 주자의 나라인 중국을 上帝國으로 숭상한 것은
사대를 넘어 주체성이라고는 눈꼼만큼도 없이 유교라는 편협한 사고의 틀속에 갇힌 우물안 개구리일 뿐이었다.

조정에서 공녀, 화자 등 백성을 잡아 보내며 가졌던 마음 아픔정도로 괴로웠다는 피해자 코스프레는 아니지 싶다.
자신이나 자녀의 운명에 아무런 자기 결정권 없이 따라야
했던 백성은 조공을 보내라는 명나라 황제보다는 아무말도 못하고 잡아다 남겨주는 조선이 더 밉고 원망 스러웠을 듯 싶다.
백성 입장에서 조정은 적국을 이롭게하는 친중 부역자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필요함에도, 15C 당시에는 단지
조정을 위해 수단으로서의 국민이 소요되던 비인권적인
禽獸의 시대 였다]

仁, 禮조차도 없는 자들을 上國으로 숭배했던 조정은
인민의 눈귀가리고 정권만을 지키려는 북한의 김씨 정권이나,
무슨 짓을 저질러도 우리편은 괜찮다는 잘못된 신념을
가진 우리사회의 좀비와도 같은 먱목적인 정치 집단과
다르지 않다.

고려는 썪어 망한 왕조라 이해가 되지만, 신생국가인
조선이 시작부터 저리도 허망한 것은 전두환의 쿠테타 5공 정권이 미국으로 부터 정당성을 인정 받으려 많은 것을 포기했던 경우와 같다
한반도 국경이었던 요동지방 철령을 포기한 위화도 회군으로 만들어진 조선, 광활한 영토와 함께 나라의 주체성 마저 포기한 이성계의 반민족적 행위는 이기적인 반란군인들의 쿠테타로 이완용의 매국행위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전쟁보다 낫다고 하는 더러운 평화는 굴종이고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초하는 거다.
기가 죽어 눈치만 보는 겁쟁이 행동이 노예근성 이다.
힘이 약하다고 모두 왕따가 되는건 아니다.
힘이 부족하면 테크닉이 필요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자국 군대가 없는 이탈리아
공국이 어떻게 외교를 통하여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제왕의 리더십에 대한 지침서다

너무도 처참했던 사실을 알게된 데 의미가 있지만
참으로 부끄럽고 구린역사다
자치권이 있었으나 자주적이지 못했고 백성을 지켜주지 못하는 조정은 차라리 없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시각이 아닌 다른 나라의 시각으로서의 사실이
궁금해진다. 명나라에 조공했던 티벳이나 베트남
그리고 여진 등의 나라에서는 어떻게 대응을 했는지
우리만 찌질한게 아니었다면 그나마 조금의 위안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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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변찬린의 개천사상




종교에서 말하는 하늘은 ‘마음의 열림‘과 ‘자각의 차원‘
을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이 개명(開)되는 정도에 
따라 그 개천하는하늘도 각각 다르다. (・・・) 모든
종교는 마음의 개명에 비례하여 하늘을 개척하였다. 
인간의 마음을 닦는 정도에 따라 개천되는 하늘이 
다르며, 하늘의 열림에 따라 응감되는 신들도 다른 
것이다. 
불교와 유교와 도교와 기독교가 개천한 하늘이 같은 
하늘인 듯하면서 그 차원이 차이가 있음을 깊이 깨달
아야한다. 다신(多神)이 존재하는 하늘과 유일신이 
존재하는 하늘이 같은 차원일 수 없다.
우리는 이날까지 하늘이라면 다 같은 하늘로 동일시
하는 하늘관에서 탈피하여 하늘의 실상을 깨달아야 
한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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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2 - 한니발 전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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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았다

포에니 전쟁 기간 동안의 이야기이다 (BC264~BC146)
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섬의 주도권 확보에 있었다.

카르타고와의 완충지역인 시칠리아섬은 여러 도시 국가로 형성되어 있었고 사라쿠사의 위협에 로마의 지원을 요청한 메시아는 로마의 동맹국은 아니었으나
친 카르타고화로 인한 위협요소를 간과 할 수 없었다

지중해 지역의 제해권 확보하고 있는 해상강국인 카르타고와의 23년간의 전쟁을 통하여 시칠리아섬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한다

1차 포에니 종점후 카르타고의 해외파인 하밀키르는 아프리카 에스파냐의 식민경영을 추진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카르타고를 회복시킨 한니발은 시칠리아섬이 아닌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지방을 통하여 이탈리아를 침공한다

한니발은 2차 포에니전쟁 16년간 본국 카르타고로부터 1, 2번의 보급만으로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로마군 10여만명의 전사자를 만들어 내는 전과를 기록한다
한니발은 로마 동맹국 포로는 방면하는 전술을 통하여 로마 동맹의 이반을 꾀하여 마케도니아 및 시라쿠사와의 동맹을 체결한다
로마는 하니발의 보급을 끊기 위하여 아프리카 에스파냐로 출병한 로마군까지 궤멸상태가 되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에스파냐를 경영하던 하니발 동생 하스두루발은 하니발의 행군길을 이용해 지원에 나서나 정보가 노출되어 로마군에 궤멸된다

로마는 한니발과 전투는 피하면서 압박하는 전술을 취하고 보급망 단절을 위하여 시칠리아 및 해외식민지인 아프리카 에스파냐를 공략하여 한니발을 압박하게되자 결국 한니발은 로마장군 스키피오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고 동맹을 맺게된다

16년간 전쟁에서 로마를 폐허로 만들었던 카르타고였으나 자치권을 부여하고 전비에 대한 일부만을 보상케 하는 등 상당히 온정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협상을 주도했던 스키피오는 [우리 로마는 알고 있다 신들이 주신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행운이든 불행이든
우리의 힘으로 말미암은게 아니라는 것을 결과가 좋게 나와도 교만하지 않고 나쁘게 나와도 절망하지 않는다]
고 했듯이 로마는 한 전투에서 7만명을 잃고도
책임자를 문책하지 않고 다시 한마음이 되어 대처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하다

29살 나이에 원정을 시작하여 16년간제대로된 지원도 없이 로마를 쥐락펴략한 하니발은 포에니 전쟁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르타고와와 동맹이후 시리아 마케도니아 등 그리스 국가와의 전쟁이 이어졌고 마케도니아는 4개국으로 분할되기에 이른다

카르타고와의 동맹이후 약 50여년이 경과하여 카르타고와의 3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다 로마의 동맹국과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동맹을 카르타고 어겼고 불가피성 에 대하여 여러번의 협상과 반복되는 협정위반으로 3년간의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된다(BC146년)

당시 로마의 정책은 타민족을 속국화 하기보다는 로마와 동등의 권리를 갖는 연합화를 추진하였고 패자에게도 상당한 수준의 관용을 베풀었던 것은 근대의제국주의의 식민지와는 매우 다르고 집정관이나 시민들의 국난에 대처하는 모습이 오늘날 이상으로 성숙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로마군단은 시민군과 동맹국의 병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맹국의 군량지원에 대하여도 그 값을 치루어 주는 등 동맹국 대비 로마 시민군이나 로마의 비용부담을 더 크게 했다는 점과 원로원의 여러 활동 또한 현대의 정치인보다 훨씬 성숙되어 있는 것이 BC200년경의 상황이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포에니전쟁은 크게보면 시칠리아 주도권으로 시작하여 이탈리아에서의 로마의 존립을 위협했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로그리고 아프리카로의 확대를 통하여 결국 신생로마가 강력한 지도국가가 되는 과정을 통하여 오늘날 미국의 역할과 유사한 점이 많은 듯 보인다

 중화를 표방하며 동서남북 주변국가를 오랑케로 지칭했던 중국황실이 주변국을 대했던 마음에는
그 국가 백성들의 삶에 대한 배려도 있었을까?

[무협지같은 삼국지보다 Real하고 전략에 대한 판세에 읽을 수 있는 거시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생각의 폭을 키울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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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로마인 이야기 1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인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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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BC753년에 로물루스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조금더 각색하고 미화된 이야기로는 BC1,250년경의 트로이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패전후 트로이왕의 사위 아이네아스만이 일족과 함께 탈출하여 로마 근처에 정착한다. 그의 아들 아스카니오스는 아미농가라는 도시국가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것이 훗날 로마의 모체가 되었다.
아비농가왕이 죽자 그의 동생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조카인 왕녀를 처녀인채 신을 섬기는 무녀로 만들어 버린다 (왕녀의 아들에게 왕위가 계승됨)
그러나 왕녀는 꿈속에서 군신 마르소와 사랑을 나누고 잉태하여 쌍둥이 로물루소와 레무소를 출산하게되자 왕은 왕녀는 투옥하고 쌍둥이는 버려지게 된다
마침 지나던 늑대가 발견하여 젖을 물려 굶주림에서 구해주고 이후 양치기에게 발견되어 양치기의 우두 머리로 성장한다
후에 출생비밀을 알게된 형제는 아비농가왕을 죽이고 로마를 건국한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만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 (갈리아인)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재력에서는 카르타고인 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융성
할 수 있는 요인을 여러 역사가들은 다음의 3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번째요인으로는 종교에 대한 유연한 사고였다
로마의 종교는 민중을 지도하는 힘이 아닌 버팀목이었다
광신적이지 않으므로 다른 민족을 포용 할 수 있었고 다른종교나 인종을 인정하였다 즉 종교는 수용하거나 공유하지 않으면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하나 법은 가치관이 틀린 경우라도 보편적으로 적용 할 수 있다
다시말해 인간의 행동원칙을 유대인은 종교에서 그리이스인은 신이 아닌 철학에서 찾은데 반해 로마는 신이나 철학이 아닌 법과 제도를 근간으로 하였다

둘째로는 로마의민주적인 정치체제이다
건국이래 244간의 왕정을 거쳐 공화정의 정치체제를 운영하였던 로마는 이후 소수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왕정, 귀족정, 공화정을 고집하지 않고 각 체제의 장점을 융합하여 집정관, 원로원, 민회라는 독자적인 정치조직의
거국일치 내각을 구성하여 민의를 반영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더 낳은 제도개선을 위하여 선진 그리스에 1년동안 사절단을 파견(BC453)하여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을 제정하는 등의 노력으로 민주 체제를 발전시켰다.
로마는 王조차도 순수 로마인을 고집하지 않아 로물루스 사후에는 첫번째로 합병된 사비니족의 덕망이 있는 인재인 루마를 2대왕으로 등용 하였으며 이후에도 에트루리아인이 왕이 되기도 하였다

세번째로 전쟁을 치루면서도 패자까지 포용하여 동화시키는 개방성에 있다
그리스인은 타민족을 모두 야만인으로 취급하였으나 로마인은 모든 라틴족은 물론 타민족에 대하여도 일정 요건이 만족되면 시민권을부여 하였다
비록 노예라도 방면되거나 비용을 지불한 해방노예는 평민이 될 수 있었다
추가로 로마인의 유연한 상황대처 능력과 명예존중에 있다.
로마 또한 귀족과 평민간 각자의 이익을 위하여 대립하였으나 위기시에는 일치 단결하는 모습과 명예를 소중히 하는 사회 저변의 분위기가 있다
평시 임기 1년의 2인의 집정관에 의하여 통치되며 2인의 집정관의 합의가 필수이므로 전시 등의 위급 상황에는 2명중 1인을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신속하게 대처하는 등 융통성있는 조직운영과 명예를 위하여 목습을 거는 충성스런 로마인의 긍지를 보여주고 있다.
로마는 설립 당시 아무도 욕심내지 않은 땅이 었으나 내륙으로 해안으로 大路 아피아를 건설하며 소통하고 교통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 간다
우리 또한 지정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나 그만큼 중요한 요충지임을 잘 활용하여 세력의 균형을 맞춰가는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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