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주로 옮긴 조영일이 차린 1인 출판사 '비고(vigo)'에서 가라타니의 신작 <세계사의 실험>을 냈다.

 책의 내용은 <유동론>의 연장선 혹은 보론처럼 느껴진다. 가라타니가 야나기타 구니오를 다시 탐구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트랜스크리틱>을 거쳐 <세계사의 구조>로 진입하면서 가라타니의 사상에서 교환양식에 대한 논의는 너무 커져 버렸다. 지금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교환양식 X를 제시하면서 가라타니는 교환양식 X가 기존의 교환양식과 다른 점을 제시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교환양식의 유형을 체계화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러한 논증 방식이 굉장히 이상한데, 미지의 교환양식 X를 설명하기 위해 교환양식 X가 아닌 다른 교환양식을 탐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소거법으로 지우고 남은 잔해들 사이에서 혹은 가정된 역사 속에서 교환양식 X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게 <역사와 반복>이다. 역사에 패턴이 있기 때문에 과거를 통해 미래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가라타니는 이제 더 먼 과거로 돌아가서 더 많은 잔해들을 파헤치고 거기에 상상력을 불어넣는 방식을 택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철학의 기원>이다. 실증적인 자료가 별로 없는, 잔해만 남은 시대일수록 상상력으로 메울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진다. 소거를 할 게 별로 없으니 교환양식 X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풍부해진다. 이제 교환양식 X는 소거를 통해 이것이 아닌 저것이 되는 게 아니라 이것이면서 저것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된다. 이 부분에서 가라타니는 더이상 사회과학적인 방법을 택할 필요가 없어진다.

 가라타니는 항상 네이션과 스테이트를 분리해서 생각하기를 제시하지만, 가라타니 스스로가 철저히 일본인이다. 가라타니는 근대문학의 기원을 생각할 때 일본 문학이 그 중심에 있었고,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할 때도 그 중심에는 소세키의 <문학론>과 나카가미 겐지의 죽음이 있었다. 2000년대에 한국 문학계에서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불러와서 한국 문학의 위기를 이야기했던 그 수많은 논의는 가라타니의 방법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 게 아닐까. 가라타니를 이해하거나 반박하려면 한국인인 우리는 나츠메 소세키 대신 이광수를 불러오고, 후타바테이 시메이를 대하듯이 염상섭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도 철저히 일본인인 가라타니는 역사 이전 시대에서 가능성을 찾기 위해 일본의 민속학을 불러와서 야나기타 구니오론을 쓰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트랜스크리틱>을 처음 읽었을 때, 가라타니가 헤겔을 설명하기 위해 헤겔 앞뒤로 놓인 철학자인 칸트와 마르크스를 불러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유물론을 관념론으로 바꾸기 위해 유물론을 추구한 마르크스의 사상과 관념으로만 이루어진 칸트 철학을 이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가능성을 위해 실증을 포기하는 지점이 바로 <트랜스크리틱>인 것이다.

 나는 20대를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읽으며 보냈다. 이제 나는 30대에 들어섰고, 나의 20대를 바라보듯이 멀리서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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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날 2021-04-06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4-06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진의 생각이 옳았으면 좋겠습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