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너의 '버베나 향기'(쏜살문고 '헛간,불태우다' 수록)를 읽고 '버베나 향기'로 검색하다가 마주친 이디스 워튼의 '헛된 기대'('올드 뉴욕' 수록)는 미와 예술을 중심 소재로 하여 세계와 정신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성장담으로서 그랜드 투어를 떠난 주인공이 실존 인물 존 러스킨과 단테 로세티-라파엘 전파를 만나는 설정이 흥미롭다. 네 편으로 구성된 '올드 뉴욕'의 첫 소설 '헛된 기대'(원제 'False Dawn')에 버베나 향기가 두 번 나오는데, 첫 문장 - “건초, 버베나, 목서초에서 나른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6월 어느 날이었다.”에 등장하고 아래 발췌한 부분에 또 언급된다. 


Cover of first edition of False Dawn: The 'Forties, a novel by Edith Wharton. Part 1 of 4 in the series Old New York. By Edward C. Caswell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즈 https://en.wikipedia.org/wiki/Old_New_York_(novellas)

Verbena (Verbena chamaedrifolia) 1890 CC0,위키미디어커먼즈

그렇다고 루이스가 1년 전의 모든 기억과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었고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사람이 된 자신에게로 옮겨온 셈이었다. 예컨대 트리시 켄트에 대한 애정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그는 둥근 이마와 미간이 넓은 눈, 광대뼈가 튀어나온 트리시의 무뚝뚝하고 음울한 얼굴이 어느 전설적인 마을의 거리나 나른하고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난데없이 자신에게 뛰어오는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다. 때때로 그가 이국적인 정원에서 고향 집의 베란다 아래 핀 버베나의 향기를 맡고 꼼짝하지 못했던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트리시는 이제까지 그가 본 어떤 여성적인 아름다움의 패턴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루이스의 새로운 심장과 마음에 트리시가 예전보다 더 깊이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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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리 큐브릭: 미국인 영화감독'(데이비드 미킥스 / 김경진) 중 영화 '롤리타'(나보코프 원작) 이야기로부터 옮긴다. 나보코프는 처음에는 시나리오 집필 제안을 거절했다가 마음을 바꾸고 '롤리타' 영화화 프로젝트에 뛰어든다.

영화 '롤리타'(1962) 포스터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즈  


[Russian writer Vladimir Nabokov in Rome to work on the film screenplay of his most famous book, Lolita.]By Keystone/Getty Images - Getty images,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6640348 파리리뷰 인터뷰집 '작가란 무엇인가' 2권에서 나보코프는 자신이 오리지널 각본에서 제시하고 지시한 바를 큐브릭 감독이 따르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롤리타』를 영화로 만들었을까?" 1962년 6월 영화가 개봉했을 때 예고편은 이렇게 묻는다. 좋은 질문이었다.

프로듀서인 마틴 러스는 긴가민가하며 큐브릭에게 물었다. "나보코프가 영화 대본을 쓴 적이 있어요? 그가 영화나 영화의 구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나요?… 당신이 나보코프에게 이런 영화적 관점을 직접 가르칠 작정인가요? 그가 배우려고 할까요?"

나보코프의 대본은 전통적 시나리오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소설 구절을 길게 늘린 것처럼 읽힌다.

큐브릭은 소설가에게 그의 대본이 일곱 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어도 될 정도라며 주의를 주었다. 그래서 나보코프는 9월에 축약판을 넘겨주었다.

결국 큐브릭은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던 나보코프의 대본을 크게 수정했다.

나보코프가 쓴 「롤리타」의 시나리오는 험버트의 돌아가신 어머니("피크닉, 번개")*가 양산을 든 메리 포핀스처럼 구름 속으로 날아오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런 식의 냉소적인 엉뚱함은 큐브릭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소설에서 험버트의 어머니는 피크닉에서 번개에 맞아 죽은 걸로 묘사된다.

1962년 5월 말, 「롤리타」가 정식 개봉하기 며칠 전 나보코프가 영화를 봤을 때 그는 "큐브릭이 위대한 감독이라는 것을, 그의 「롤리타」는 훌륭한 배우들과 함께한 최고의 영화라는 것을, 그리고 들쑥날쑥한 차이가 좀 있을 뿐 내 대본의 결말을 활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시나리오에서 상당히 벗어난 큐브릭에 대한 짜증 탓에 이 영화를 그저 "마지못해 기꺼운" 마음으로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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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보코프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롤리타
    from 에그몬트 서곡 2023-09-30 20:25 
    '작가란 무엇인가' 2권에서 나보코프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62년 영화 '롤리타'를 위해 원작자인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출판하고 싶다고 말한다. 영화화 과정에서 제작진이 많이 고쳤기 때문에 원래 각본을 세상에 공개하고 싶다고. 외서 검색 결과, 나보코프의 오리지널 각본이 출판되어 있다. 우리 나라도 요새 각본집을 활발하게 책으로 내는 추세이니 외국 시나리오 또한 언젠가 정식번역출간될 수도 있겠지.
 
 
 

내일부터 10월, 올해의 마지막 석 달이 시작된다. 어제 마시다 남긴 무알콜맥주에 뜨거운 물을 타 홀짝이며 읽다 만 책들을 살핀다. 나보코프 단편집도 그 중 하나. 1925년 12월에 공개된 '베를린 안내'란 수록작은 [1.하수도관 2.노면전차 3.일 4.에덴 5.맥줏집]이라는 차례를 품고 있다. 이 소설과 현재 사이를 달리는 백 년 가까운 시간이 아득하다. * [네이버 지식백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Vladimir Nabokov] (해외저자사전, 2014. 5.)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77386&cid=44546&categoryId=44546 나보코프는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1923년에 베를린으로 왔고 1940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the Berlin Tramway (year of construction 1907) modernized in 1925 By Christian Liebscher (Platte) - Own work, CC BY-SA 3.0, 위키미디어커먼즈 cf. 2006년 사진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Trams_in_Berlin

Berlin Tatra KT4D trams (2009) By Murgatroyd49 - Own work, CC BY-SA 4.0, 위키미디어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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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문고 '헛간,불태우다'(김욱동 역)에 실린 포크너의 '버베나 향기'로부터 발췌한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Annette Meyer님의 이미지 *[네이버 지식백과] 버베나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00585&cid=40942&categoryId=32726

말을 다루던 팔목과 팔꿈치 힘을 가진 두 팔을 내 두 어깨에 올려놓고 팔목으로 내 얼굴을 자기 얼굴 쪽으로 끌어당겨, 마침내 더 이상 팔을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바로 그때 나는 예로부터 영원한 사탄의 상징인 그 서른 살의 여성, 그리고 그런 여성에 관해서 글을 써 온 남성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삶의 현실과 글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남북 전쟁이 어떻게 그녀와 같은 세대, 같은 계층에 속한 모든 여성을 모두 한 전형으로 만들려 했는지, 또 어떻게 실패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 버베나 향기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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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문고 '헛간,불태우다'(김욱동 역)에 실린 포크너의 '버베나 향기'로부터 발췌한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Ingrid Bischler님의 이미지 * [네이버 지식백과] 버베나 (한국화재식물도감, 하순혜, 탕카)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71952&cid=46694&categoryId=46694 버베나꽃을 화분으로 본 기억이 난다. 


“식민시기 세계문학 번역·소개는 일제 저항 수단이었죠”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74289.html 미국에서 포크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번역자 김욱동 교수의 올해 초 인터뷰 기사이다. 작년 말부터 현재까지 나온 그의 저서도 담아둔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돌아와 거세한 황소처럼 정부 연금으로 살아가는 너무나 많은 남자들과는 달랐다. 거세한 그들은 동일한 경험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 그런데 그 경험이라는 것은 잊어버릴 수도 없으며 잊으려 해도 감히 그럴 수 없었는데, 만약 잊는다면 그 순간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을 터였다.

되풀이할 적마다 점점 누적되어가고 반동적이며 절대로 반복할 수 없는 것, 매번 그럴 적마다 기억은 경험을 배제하고, 또 매번 그럴 때마다 경험은 기억에 선행한다. 싫증 나지 않는 기교, 아무리 과도해도 물리지 않는 지식, 팔뚝과 팔꿈치로 눌러 말을 잠재울 수 있듯이 인도하고 통제하는 교묘한 비결을 지닌 근육. - 버베나 향기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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