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이효석문학상 작품집에 수록된 김채원의 단편 '흐름 속으로-등잔'으로부터 옮긴다. 아래 글 속 정과 연은 자매로서 정이 언니, 연은 동생이다. 김채원의 언니 고 김지원도 소설가였고 둘 다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김채원 '흐름 속으로-등잔' 돌림노래처럼..시간에 새겨진 '다른 나'를 바라보다] https://v.daum.net/v/20190723171201261
소설가 김채원의 단편 영화「거울 속의 샘물」2015. 1. 9. https://youtu.be/usq1MAtilGg 동명의 단편이 소설집 '쪽배의 노래' 마지막 수록작이다.
어느 때던가 연은 여름방학 숙제인 일기를 《학원》 잡지에서 베꼈다. 나중에 그것을 본 정이 연에게 사정하였다. 이것을 절대로 내면 안 된다고, 자신이 전부 다시 써주겠다고 했다. 연은 일기가 수준 높게 써진 듯하여 마음이 흡족하였기에 싫다고 했다. 일테면 이런 문장들이었다. ‘오늘 오후 강가에 나갔다. 오수의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오수의 태양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썼던 것이다. 그때 정이 그렇게 열심히 연을 설득하며 사정하던 모습,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도 자신을 송두리째 양보하는 손이 있을 수 있을까. (흐름 속으로-등잔 | 김채원)
김채원의 〈흐름 속으로-등잔〉은 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생의 이야기 속에서 인생 전체의 스케일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질문까지 도달하고 있어 매우 감동적인 작품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연륜과 내공이 담뿍 느껴지는 작품이다. 언니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차원의 문제까지 성찰하게 만드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스케일이 크고 깊다. 자전소설적 요소가 느껴지지만 그런 점이 작품의 완성도에 방해되지는 않는다. 급속한 경제 성장을 겪으며 자기 과거를 돌아보면, 이것이 정말 과연 우리가 진짜 겪은 이야긴가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이런 시간적 이질감, 역사 속의 개인의 삶이라는 문제의식을 잘 녹여낸 작품으로 보인다.
김채원의 작품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다가오는데, 이 주인공들의 삶은 책 속에 빠짐으로써 책과 일치해 마침내 책이 되어가는 인생이었다. 그들은 글을 쓰고, 글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그 엄혹한 시간의 고통을 이겨냈던 것이다. 언니가 죽고 나서야 언니에게 자신이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깨닫는 동생의 마음은 여전히 슬프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칠순 넘은 노작가인 김채원 선생이 이 작품을 씀으로써, 글을 써야만 견딜 수 있는 어떤 순간과 조우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읽고 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두 자매 이야기, 그렇게 한 시대를 견디고 분투한 두 자매의 이야기는 단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사랑함으로써 한 시대를 견뎌온 사람들을 위한 위로처럼 다가온다. 문학을 사랑함으로써, 책을 사랑함으로써 한 시대를 견딜 수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가 아닐까. -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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