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르스나르 / 왕포의 예술
오디오북 '왕포는 어떻게 구원되었나'(유르스나르 지음)를 들었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1938년에 발표한 단편집 '동양 이야기' 수록작이다.
아래는 '동양 이야기'를 번역한 불문학자 오정숙 교수의 글로부터 발췌했다.
[그녀의 방대한 작품 창조의 근원에는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관심, 인간의 운명에 대한 명상, 그리고 예술에 대한 매혹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전주의’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유르스나르는 동시대의 실험적 예술, 추상 미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유르스나르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예술은 작품 구상 및 집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또한 ‘속텍스트 intra-texte’로서 등장인물들의 심리나 이야기의 전개를 복합적으로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주로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의 유럽 화가들의 작품을 접했던 작가가 왕포의 이야기를 통해 동양 화가와 산수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유르스나르는 생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인도, 중국, 일본의 철학 및 종교에 심취하게 되는데, 젊은 시절에 집필된 이 작품에서 마치 몇 십 년 후의 미래를 예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동양에 대한 매혹을 아낌없이 펼쳐 놓는다.
왕포는 집도 가족도 친구도 돈도 없이 그림 도구만을 달랑 메고 한나라의 길을 유랑하는 떠돌이 노화가다. 그는 일반적인 ‘저주받은 화가들’처럼 자신의 고독과 가난을 한탄하지 않는다. 그에겐 가족과 친구들 대신 하늘의 별과 들판의 잠자리들이 있고, 재물과 명예 대신 세상을 담을 수 있는 붓과 먹물 단지, 비단과 화선지 두루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왕포는 “사물의 모습을 좋아했지 사물 그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애써 그린 “그림을 좁쌀죽 한 그릇과 바꾸는”, 물욕으로부터 해방된 인물이다. 그의 떠돌이 방랑생활의 유일한 동반자는 젊은 제자 링 Ling이다. 링은 부유한 금환전상의 아들로 태어나 “풍요로움이 우연들을 없애버리는 그런 집에서” 걱정 없이 자란다. 링은 소심하여 벌레와 천둥소리를 무서워했고, 어리고 예쁜 아내를 사랑했으며, 다른 부자들처럼 찻집을 드나들며 적당히 유행을 따르는 평범한 젊은이였다.
어느 날, 한 선술집에서 왕포를 만나게 되면서 링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왕포 덕분에, 링은 그 동안 무심히 지나쳐왔던 사소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술기운에 붉어진 사람들의 얼굴, 잘 구워진 고기의 색깔, 식탁보에 흩뿌려진 술 얼룩, 번개의 창백한 줄무늬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게 되면서부터, 링은 더 이상 창문을 후려치는 폭풍우를, 떼지어 지나가는 개미를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 반대로 자신의 호화로운 집의 벽 색깔이 “생각한 것처럼 붉은 색이 아니라 썩기 직전의 귤 빛깔을 띠고 있음” 을 알게 된다.
“왕포가 자신에게 새로운 영혼과 지각력을 선물해 주었음을 깨닫자, 링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방에 정성스럽게 노인을 모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을 통한 구원의 개념이 ‘자기의 구원’에서 ‘타자의 구원’으로 점차 확장된 것을 볼 수 있다. 『알렉시』에서 『동양 이야기』로 이어지는 십 년의 삶의 경험과 작가로서의 성숙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왕포는 작가로서 어느 정도 자신감과 꿈을 갖게 된 유르스나르의 이상적 투영이라고 볼 수 있다.]출처: 오정숙, 유르스나르의 1930년대 소설에 나타난 예술의 역할, 예술가의 초상(2019)https://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2466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