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ecution of Lady Jane Grey, 1833 - Paul Delaroche - WikiArt.org

처음은 양 눈이 침침해서 사방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어둠 속 한 곳에 확 불이 당겨진다. 그 불이 점차 커지며 속에 사람이 움직이는 기색이 느껴진다. 그 다음, 그것이 점점 밝아지더니 마치 쌍안경 도수가 맞추어지듯 똑똑히 비쳐온다. 그런 뒤 무대 정경이 차츰 크게, 차츰 가깝게 다가온다. 정신이 번쩍 들어 바라보니 한복판에 젊은 여자가 앉아 있다. 왼쪽 끝에는 남자가 서 있는 것 같다. 둘 다 어디선가 본 듯 낯익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어느새 불쑥 다가와 내 코앞에 우뚝 서 있다. 남자는 앞서 굴속에서 노래를 부르던, 움푹 패인 눈에 검누런 얼굴을 한 키 작은 놈이다. 방금 간 도끼를 왼손에 짚고 허리춤에는 자그만 단검을 늘어뜨린 자세로 서 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온몸이 오그라지는 듯하다. 여자는 흰 손수건으로 두 눈을 가린 채 두 손으로 목이 얹힐 받침대를 찾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목이 얹힐 받침대는 일본의 장작패기판만한 크기로 앞부분에 쇠고리가 달려 있다. 그 앞쪽에 지푸라기가 어수선히 흐트러져 있는 건 흐르는 피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보인다. 여자 두엇이 뒷벽에 매달려 정신없이 울고 있다. 시녀인 걸까. 흰 털을 댄 외투 안을 깃처럼 접어꺾은 법의를 질질 끄는 승려가 머리를 떨군 채 여자 손을 받침대쪽으로 이끈다. 여자는 눈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어깨까지 치렁거리는 금발을 가끔 구름처럼 흔든다.

두 왕자가 유폐된 장면과 제인의 처형장면에 대해서는 들라로슈의 그림이 적잖이 내 상상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덧붙이며 감사를 표한다. - 런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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