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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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이름으로 된 제목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를 실망시켜온 건 대개 주인공 이름으로 된 영화들이었다. 보기 전부터 이름이 지닌 가치에 공감하기도 어렵거니와, 실컷 보고 나서도 제목의 가치가 묘연하다면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럴싸한 의미로 조합된 이름일수록 참을 수 없는 작위성에 손발이 저렸다. 소설 <유원> 역시 주인공 아이의 이름이다. 지금껏 쌓아올린 취향이 하찮을 만큼, 이 책의 제목은 참 다정하게 잘 지은 제목이었다. 제목을 붙인 이가 참 다정한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나도 그처럼 유원이를 그리고 내 사람들을 바라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주인공 ‘유원’은 여섯 살 때 사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 같이 있던 언니의 기지 덕에 어린 유원은 살 수 있었지만, 언니는 화염을 피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뉴스에 크게 보도될 만큼 유명해져, 유원을 둘러싼 모든 이들이 유원을 대하는 태도에는 늘상 연민과 선의가 묻어있다. 유원과 재난을 떨어뜨려놓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가족을 비롯해 사고 전부터 유원을 알던 이들은 하나를 더 덧붙인다. 바로 사고로 죽은 언니 ‘예정’이다. 이런저런 대회에서 상을 흠씬 타왔다는 언니 이야기를 들은 이후 유원은 나갈 수 있는 대회는 모두 나갔다.

유원에게는 취향과 적성이 없었다. 그런 것들은 유원에게 ‘여유’에 가까웠다. 재난에서 누군가들을 대신해 살아남은 만큼, 유원은 다른 사람의 몫을 대신 해내고자 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무람없이 자랄 권한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유원의 존재는 희미해졌다. 언니의 선함을 증명하는 마지막 증거품, 자신 빼고 다른 사람들이 큰 손해를 본 것 같다는 생각. 유원은 언제까지나 ‘죽은 예정의 동생’으로 살아가고있었다.

언니가 미워질까 겁이 나던 찰나, 유원은 자신을 자체로 온전히 봐주는 친구 수현을 만나게 된다. 다른 친구들이 해맑기만 한 선의로 유원을 모자란 친구마냥 챙길 때, 수현은 유원을 ‘재난의 생존자, 혹은 위대한 언니의 동생, 불쌍한 스토리의 당사자’ 따위로 보지 않았다. 어찌보면 누구보다도 유원의 스토리를 익히 알고 있을 사람임에도 말이다. 유원은 수현과 함께 있을 때 유일히 죄책감으로부터 해방감을 느꼈다.

수현과 우정 그리고 얽힌 관계를 풀어나가며 유원은 용기를 얻는다. 죄책감에 스스로 자격없다고 생각했오던 유원이 겨우 회복한 미워하고 용서할 용기다. 유원은 자신에게 다른 존재를 덧붙였던 사람들과 대면하고 솔직해진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시도이며 동시에 다른 사람을 더욱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유원은 스스로 해방하고 더 높은 곳에 올라선다.

유원이 느끼는 감정은 꼭 대형사고 희생자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을 지우려는 시도들에게 위협받고 있다.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서 학교를 지나 사회에 이르기까지, 힘의 구조에 의해 혹은 다수의 논리에 따라 소신을 굽히고 입을 다물게 되는 상황들은 너무나 일상적인 풍경이다. 물리적 위험이 아닐 지라도 나 자신을 위협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최근 코로나로 확진자들의 동선이 드러나면서부터는, 사각지대 많은 이들이 오래 전부터 맞서 온 ‘저마다의 재난’들도 드러났다. 전화기 너머 얼굴 없는 누군가들은 좁고 밀집한 반경에서 일하고 있었고, 어떤 이는 이동이 멈춘 사람들 대신에 발로 뛰며 물품을 나르다 위험에 쉽게 노출되기도 했다. 열악한 고용조건은 위기가 발생하거나 불만을 제기하면 손쉽게 해제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손쉽게 대체되었다. 코로나 이전부터 계속되어왔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아 스스로 견뎌야하는 ‘을’들의 안부였다.

재난에 재난이 겹쳐 모두가 우울한 이 시기. 자신을 지킬 용기, 때로는 서럽기도 한 내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는 자격, 내가 나로 살아갈 권리를 유원을 통해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유원의 이름은 원할 원. 모두가 그런 존재다. 다른 누군가 대신하는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또 누군가에 의해 쉽게 대체될 수 있는 덧없는 존재가 아니라, 모두가 원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이 책의 다정한 제목처럼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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