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당대인의 묘사에 따르면 생김새가 "신의 얼굴 같았다".

대영주들은 직무상 장군이었다. 1338년 원정을 준비하면서 국왕이 여섯 명에게 새로이 백작 작위를 내린 것은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사람들의주요 활동 거점이었던 셰르부르, 르아브르 등이 대표적이다.

필리프가 로베르를 비호하는 자는 자신의 적이라고위협했는데도 에드워드는 로베르를리치먼드 백작으로 삼고 그에게 연금과 세 채의 성을 하사했다. 

그러나 1330년 로베르는 그의 친척 아주머니가 상속한 아르투아를 위조문서를 이용해 손에 넣으려다 사기 행각을 발각당했다.

에드워드의 호화로운 궁정, 정기적으로 열리던 연회와 마상 창시합은 그에게 뛰어난 참모들을 안겨주었다.

태생으로나 계급상으로나 직업 군인이었던 그의 친구들은 그가 어떤 식으로생각하고 판단하는지 알았고,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검증받았다. 비록 오래된 봉건 구조는 와해되고 있었지만 사회는 여전히 군사적 위계 사회였으며, 대영주들은 직무상 장군이었다. 

당대에 그토록 칭송받던 그의 비의적인 기사도 숭배는 겉모습 아래에 감춰진 인물 됨됨이를 가려왔지만 그럼에도 그의 개성은 드러난다-우아함이흘러넘치고, 친교에서는 따뜻하지만반목하는 상대에게는 가차 없이 모질고 냉혹한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방종하고 끊임없이 여자를 탐하다가 결국에는 건강을 망치고 말았다.

그가내면에 품고 있던 나폴레옹적 자신감과 영웅왕이 되려는 기묘한 자의식적결심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짐작만 할수 있을 뿐이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역사상가장 강력한 국왕 중 한 명으로, 대략에드워드 1세와 헨리 8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모티머를 몰아낸 뒤 재빨리 봉건영주들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확립했고, 20대 중반이 되었을 때 권력의 정점에 섰다.

무엇이 에드워드가 끝내 전쟁을 일으키게 만들었을까? 현대의 일부 논평가들은 에드워드한테서 지나칠 정도로 복잡하게 머리를 쓴 정책, 즉 현상유지 작전을 읽어낸다. 그들은 에드워드가 프랑스를 공격함으로써 프랑스의 관심을 기옌에서 다른 데로 돌리려고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록 함대 자체는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사략선들이 영국해협과 비스케이만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노로추진되는 갤리선들은 바람이 잦아들어 오도 가도 못하는 잉글랜드 상선들을 쉽사리 따라잡을 수 있었다.

7월 루앙의 대주교는 설교에서 필리프가6,000명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9월 노팅엄에 모인 대평의회Great Councilia*는 상인회합의 지지를 받아, 프랑스 국왕의 배반을 규탄하고 에드워드가 프랑스와 맞서 싸울수 있게 ‘십일조‘와 ‘십오일조‘ 특별세를 걷는 안을 가결했다.

프랑스 국왕의 배반을 규탄하고 에드워드가 프랑스와 맞서 싸울수 있게 ‘십일조‘와 ‘십오일조‘ 특별세를 걷는 안을 가결했다.

반면 잉글랜드의 전적은 암울했다.
가스코뉴에서 켄트 백작이 보여준 형편없는 전과는 이미 언급했다.

1327년 젊은 에드워드는스코틀랜드인과의 전쟁에서 굴욕적일만큼 불운한 결과를 받아들고 눈물을흘려야 했다. 

심지어 그들은 잠시 동안이긴 해도 이교도들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탈환하기도 했고, 무어인들로부터 에스파냐를거의 재탈환했다. 지난 300년 동안 프랑스는 거대한 규모의 기사 계급을 보유했고, 그들에게 전쟁-마상 창시합에서든, 국왕의 군대에서든 아니면 용병으로서든은 삶의 방식이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에 불행이 닥쳐오고, 그는 왕위에서 쫓겨날것"이라고 지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1329 년 아미앵의 대성당에서 "우리의 매우 소중한친족"에게 "기옌 공국을 걸고 프랑스국왕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는 충성 신서를 해야 했다. 그는 솜강 어귀에 있는 영지인 퐁티외 지방도 걸고충성 신서를 했다. 그곳의 수도는 아베빌이었고, 그 지역의 또 다른 도시로는 크레시가 있었는데, 이곳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룰 것이다. 

프랑스만큼 이런 발전이 뚜렷하게 이루어진 곳도 없어서, 1330년대 프랑스의 인구는 2,100만 명에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1329 년 아미앵의 대성당에서 "우리의 매우 소중한친족"에게 "기옌 공국을 걸고 프랑스국왕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는 충성 신서를 해야 했다. 그는 솜강 어귀에 있는 영지인 퐁티외 지방도 걸고충성 신서를 했다. 그곳의 수도는 아베빌이었고, 그 지역의 또 다른 도시로는 크레시가 있었는데, 이곳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룰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