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국왕은 병사들에게 급료를지불할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영주가 국왕에게 봉토를 하사받고 그대가로 군역을 제공하는 봉건제도는12세기 이후 프랑스에서 점차 해체되고 있었다.
여러 세대 동안 많은 귀족들이 전쟁에 나가기를 거부했다. 전쟁에 나간 귀족들도 보수를 받기를 기대했고, 잉글랜드에서처럼 병사들도 갈수록 레트르 드 레테뉴lettres de retenue즉 고용 계약 방식으로 충원되었다.
그러나 필리프는 이럭저럭 강력한 군대를 일으킬 돈을 마련했다. 일례로1340 년에 그는 기옌 국경 지대에는 2만 명에 가까운 중기병을, 플랑드르국경 지대에는 4만 명이 넘는 중기병을 배치했다.
사실 백년전쟁 초기 국면의 진짜 드라마는 서로 맞붙기 위해난감할 정도로 삐거덕거리고, 통제가안 되는 국가의 자원을 뽑아내려고 두
주인공이 기울인 초인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느릿느릿 힘겹게 전쟁에 돌입했다. 1337년 5월24일 필리프 국왕은 특히 에드워드가주술을 행한 아르투아의 로베르에게도피처를 제공한 것을 거론하면서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와 짐에게 거역하고 불충을 저질렀기에"에드워드한테서 기옌을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일반적으로 이 선언은 백년전쟁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10월 에드워드는 "프랑스 국왕을 참칭하는 발루아의 필리프"에게 정식으로 도전하며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공식 서한으로 응수했다.
필리프 6세는 즉시 기옌에 가공할공세를 개시했고, 이 공세는 3년간 이어진다. 1339년 그의 병사들은 지롱드강 하구 북안의 블라예를 점령하여
보르도와 바다를 잇는 통로를 위협했고, 1340년에는 도르도뉴강 어귀에있는 부르를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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