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의 세계사 대모험 15 - 몽골 편 : 칭기즈 칸의 꿈 설민석의 세계사 대모험 15
설민석.김정욱 지음, 박성일 그림, 김장구 감수 / 단꿈아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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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에서 가장 큰 영토를 정복한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 민족의 역사를 안 짚고 넘어가면 섭섭하죠. 우리나라 고려에 미친 영향도 크고요. 설민석이 보여주는 몽골 역사 여행 두근두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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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이것이 이 설화에 서사화된 민중의 역사다. 

나서서 지켜주지못할망정 스스로 희망의 싹을 짓밟은 굴종과 좌절의 역사 전설특유의 비극적 세계인식을 반영한 의미요소다. 

이에 대하여 다수 연구자들은 이 설화가 무력한 패배감을 확인하는 것이라고말하지만,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람들이 저 쓰라린 패배를 말하는 것은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자기비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아픈 과거를 되새기면서 스스로 거듭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다시 그렇게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 슬픈 좌절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전설의 궁극적의미는 텍스트 안이 아니라 텍스트 밖에 있다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이에 대하여 다수 연구자들은 이 설화가 무력한 패배감을 확인하는 것이라고말하지만,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람들이 저 쓰라린 패배를 말하는 것은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자기비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아픈 과거를 되새기면서 스스로 거듭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다시 그렇게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 슬픈 좌절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전설의 궁극적의미는 텍스트 안이 아니라 텍스트 밖에 있다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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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너무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기성세대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윤리도 좋다지만 아이가 죽어버린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설화 해석의 관건은 ‘아이 묻기‘ 화소의 서사적 상징을 읽어내는 데 있다. 

지금 사람들이 땅에 묻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 하면그냥 아이가 아니라 ‘고집쟁이‘ 아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자료가 보고된 이야기는 무엇일까? 

아마도그건 <아기장수>일 것이다. 

<아기장수>는 전국 각지에서 수백 편의 자료가 보고돼 있다. 

지난 시절 시골 사람들 가운데 이 전설을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좋다. 

이야기를 보자면 내용은 무척 단순하다. 

그 서사를 핵심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 예전 한 마을에 가난한 사람이 살았다. [문제적 상황]

B. 그 집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알고 보니 겨드랑이에 달린 날개장수였다. [변혁의 계기]

C. 부모는 후환이 두려워 무거운 물건으로 아기를 눌러 죽였다. [변혁가능성 말살]

D. 용마가 나타나서 슬피 울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또는 울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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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원형적 속성이자 존재적 본질이다. 

이 설화는 이를 상징적 형상과 정합적 서사로 생생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그 자체로 인간존재의 축도이자 인생의 본원적 모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마음에 새기고 있다는 것은인간과 삶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내면적으로 체화하고 있다는것과 같다.

이제껏 우리는 구비전승으로 이어져온 한 편의 이야기가 정교한 관계구도 속에 인간과 세계의 이면적 역학관계를 담아내면서존재론적 의미를 실현하고 있음을 보았다. 

공상적 허구로 치부되는 설화적 상상의 이면적 참모습이다. 

앞서 보았던 구렁덩덩신선비가 뱀의 외양 안에 신선이라는 자질을 오롯이 지니고 있었던 것과 같은 면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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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왕은 병사들에게 급료를지불할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영주가 국왕에게 봉토를 하사받고 그대가로 군역을 제공하는 봉건제도는12세기 이후 프랑스에서 점차 해체되고 있었다.

여러 세대 동안 많은 귀족들이 전쟁에 나가기를 거부했다. 전쟁에 나간 귀족들도 보수를 받기를 기대했고, 잉글랜드에서처럼 병사들도 갈수록 레트르 드 레테뉴lettres de retenue즉 고용 계약 방식으로 충원되었다.

그러나 필리프는 이럭저럭 강력한 군대를 일으킬 돈을 마련했다. 일례로1340 년에 그는 기옌 국경 지대에는 2만 명에 가까운 중기병을, 플랑드르국경 지대에는 4만 명이 넘는 중기병을 배치했다.

사실 백년전쟁 초기 국면의 진짜 드라마는 서로 맞붙기 위해난감할 정도로 삐거덕거리고, 통제가안 되는 국가의 자원을 뽑아내려고 두

주인공이 기울인 초인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느릿느릿 힘겹게 전쟁에 돌입했다. 1337년 5월24일 필리프 국왕은 특히 에드워드가주술을 행한 아르투아의 로베르에게도피처를 제공한 것을 거론하면서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와 짐에게 거역하고 불충을 저질렀기에"에드워드한테서 기옌을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일반적으로 이 선언은 백년전쟁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10월 에드워드는 "프랑스 국왕을 참칭하는 발루아의 필리프"에게 정식으로 도전하며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공식 서한으로 응수했다.

필리프 6세는 즉시 기옌에 가공할공세를 개시했고, 이 공세는 3년간 이어진다. 1339년 그의 병사들은 지롱드강 하구 북안의 블라예를 점령하여

보르도와 바다를 잇는 통로를 위협했고, 1340년에는 도르도뉴강 어귀에있는 부르를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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