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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낸시 (스티커 포함)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2월
평점 :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음악시간에 선생님께서 3/4박자와 6/8박자의 차이가 뭔지 알아오라고 하셨다. 산수시간엔 3/4과 6/8이 같다고 가르쳐 주셔 놓고 음악시간엔 또 다르다고 트집이라니! 아무튼, 워낙 소심해서 혼나는 게 지독히도 싫었던 나는 숙제 하나만은 열심히 해갔었다. 요즘 같으면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바로 알아볼 수 있겠지만, 당시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책을 샅샅이 뒤져야 했다. 집에는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별로 없었는데 그때는 신기하게도 숙제의 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그 내용은 일절 기억나지 않지만(숙제를 잘했다고 했지 공부를 잘했다고 하진 않았다) 전부 해봐야 몇 줄 안 되는 분량이었던 건 확실하다.
어쩐지 운이 좋다 했더니 문제는 다음 음악시간에 생겼다. 선생님께서 지나가는 말처럼 숙제를 내시는 바람에 그걸 기억해서 조사해 간 사람이 반에서 나 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튀는 게 싫었던 나는 고작 몇 줄 베껴 간 걸로 생색내기 부담스러워서 차마 나서지 못했다. 선생님께서는 숙제를 해 온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냐고 호통치셨고, 반 전체가 혼나기 직전에야 짝꿍이 내 옆구리를 찌르길래 그제서야 하는 수 없이 발표를 했다. 모두가 야단맞는 가운데 혼자 받는 과한 칭찬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좋은 일로든 나쁜 일로든 혼자만 다르다는 건 위협적이다.
누군가는 관심을 받고 싶어서 별짓을 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남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쥐 죽은 듯이 지낸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특별함으로 여기는 사람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차이다. 시선을 너무 끄는 다름은 공격받기 쉽고, 시선을 피하기 위해 다름을 숨기려 들면 빛을 보기 어렵다. 그러니 둘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는 못하겠다. 확실한 건 둘 사이에 균형을 잘 잡으면 삶이 편할 것이고, 둘이 충돌하면 삶이 고달플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양이 낸시>는 차이가 훤히 드러나는데도 모두가 애써 남다름을 숨겨 주는 이야기다. 귀여움을 빼면 고양이로서는 보통으로 보이는 낸시에게 특별함과 두려움의 충돌이 생기는 이유는 쥐들만 사는 마을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쥐마을의 더거 씨와 아들 지미는 집앞에 버려진 아기 고양이 낸시를 외면하지 못하고 딸로, 동생으로 키우기로 한다. '냥줍'이라고 하기에는 덩치가 웬만한 어른 쥐보다 컸으니 몰래 키우려 해봤자 티가 안 날 수 없다. 더거 씨네 집에 몰려온 마을 사람들은 당연히 낸시를 키우는 것을 반대한다. 어리기는 하지만 엄연히 쥐의 천적인 고양이니까. 그런데 낸시의 귀여움에 홀딱 반한 어른들은 결국 다같이 아기 포식자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이들은 낸시의 키가 그렇게 큰 이유가 우유를 잘 먹어서라고 대충 둘러대도 아무 의심 없이 순순히 친구가 된다. 그렇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애나 어른이나 대책 없이 착하다.
낸시가 책에서 고양이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될까봐 불안했던 지미와 친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낸시의 인생에 도움이 안 될 페이지를 증거인멸한다. 연극에서 공주 역할을 맡고 싶었던 낸시는 역시 공주가 되고 싶어하는 친구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조용히 다른 역할에 지원한다. 눈에 안 띄게 배려하면서도 마음만은 충분히 전해지는 하나같이 따뜻한 명장면이다.
쥐가 고양이를 걱정하고, 고양이가 쥐에게 양보하는 착한 이야기지만 위기의 순간이 닥친다. 마을 밖에서 여행을 하다 돌아온 헥터가 등장하면서부터다. 그의 눈엔 귀엽다고 천적을 받아들인 마을 사람들이 정상으로 보일 리 없다. 헥터는 고양이의 위험성을 상기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이 만화의 유일한 악역이라 할 수 있는 그조차도 낸시와 마을 사람들의 진정성을 깨닫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게 된다.
나를 포함해서, 이미 '살벌한 현실'이라는 천적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고양이 낸시>의 동화 같은 순수함에 살짝 거부반응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만 보더라도 전세계적으로 중국에 대한 혐오가 들끓었다. 두려움은 우유를 먹지 않고도 쑥쑥 자라서 다른 나라에서 나고 자란 중국인까지 바이러스 취급했다. 우리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3/4박자와 6/8박자 만큼이나 다르다고 떼창을 불렀지만, 서양인들은 산수시간이었는지 둘 다 고만고만한 동양인이라고 같은 값으로 취급했다. 다름은 얼마든지 트집 잡을 수 있어서 편리하다.
그러던 중에, 바이러스 진원지에 거주하던 교민들의 수용을 결사반대하던 지역 주민들이 태도를 180도 바꾸는 동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교민들에게 편히 쉬었다 가라는 환영과 응원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큰 충돌 없이 '헥터'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특별한 가능성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런 경험이 많아지고, 동화 같은 순수함이 바이러스처럼 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름과 틀림은 다르다'라는 말은 (이젠 너무 흔해져서 울림이 덜해졌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한 줄 밖에 되지 않는 숙제를 모두가 귀담아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왕이면 <고양이 낸시>에서 그 숙제의 힌트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