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마광수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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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쪽 남짓한 작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사색이 많이 담긴 책이란 점에서 화제의 인물 마
광수가 아닌 학자 마광수의 진면목을 되살필 수 있는 기회도 던지고 있다. 특히 그의 이론
적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문제의 소설 한 두권을 슬쩍 읽어보고 그에게 무자비한 비
난과 매도의 돌팔매질을 했던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저의 문학사상의 바탕은 서구적인 것이 아니라 동양의 음양사상 이나 주역 그리고 한방의
학이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마치 서양의 싸구려 문화를 무차별 수입한 것인 양 매도하
는 것이 가장 안타까웠습니다.』.
1993년 「즐거운 사라」 파문으로 연세대 교수직을 박탈당한 마광수씨(46)가 85년 펴낸 「상
징시학」과 함께 「마광수 미학론」의 양대축이라 할 수있는 카타르시스에 관한 성찰을 담
은 문학비평이론서 「카타르시스란무엇인가」(1997, 철학과 현실사 간)를 펴냈다. 상징과 카
타르시스는 「문학이론가 마광수」의 오랜 화두였다.

이 책에서 마씨는 서구의 전통적 미학개념인 카타르시스의 다양한 의미를 풀이하면서 불교에
서의 고통의 문제, 음양사상에서의 보-사관계 등과 연결지으려 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사
상을 바탕으로 서구사상의 한 핵심개념을 수용하려는 17년에 걸친 노력의 결실입니다.』 이
책에는 모두 네편의 글이 실려 있다.

물론 여기서도 「정신적 대리배설(「카타르시스」의 마광수식 번역어)로서의 예술」이라는
그 특유의 견해가 수시로 나온다. 예술에 대한 사법적 처벌이나 지식인사회의 엄숙주의와 이
중잣대에 대한 비판도 종종 눈에 띈다. 그러나 강단을 강제로 빼앗긴 한 교수의 넋두리 수준
을 훨씬 뛰어넘는 것은 나름의 일관된 체계를 유지한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분명히 말했다. 『나의 시나 소설은 야한게 아니라 내 식의 유미주의와 쾌락주의를 오
직 책에서만 활자로 추구해본 것일 뿐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요즘 시중에서도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유명 외국 작가들의 작품 중에는 마광
수씨의 작품 이상의 외설스러움을 담고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이 책과 제가 이전에 했던 작업은 하나입니다.그런데 아마도 이 책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
때와 같은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약간은
고상한 어휘들이 등장하니까요.』(<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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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
마광수 지음 / 해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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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허무의식의 기저(基底)
- <유혹>에 대하여

김성수 (연세대 교수, 평론가)


1. ‘마광수문학’의 이해를 위한 전제

‘마광수 문학’은 이제 한국문화의 한 상징적 코드이다. ‘야한 여자론’(<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으로 시작되어 우리 사회의 ‘성(性)의식’이 규율하는 금기에 적지 않은 기간 혈혈단신 고투를 벌여온 그의 문학적 행보는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논점을 형성하고 있다. 1992년의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에서 한 정점을 이루었던 ‘표현의 자유’ 문제는 이후에도 그의 작품이 출간될 때마다 사법 당국이나 문학계(文學界) 안에서 ‘뜨거운 감자’로 논쟁이 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문학이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성에 관한 정밀 묘사와 서술이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제한 수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회적 규범이 강력한 금제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에 관한 담론과 표현물들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광범위하게 표출되고 있는 오늘의 문화 현실에서도 언어적 기호로 상상된 문학적 구성물이 여전히 검열이라는 제동장치에 묶여 있음을 반증해 주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성에 관한 문학적 표현은 굳이 사드나 바타이유를 위시한 서구 작가들의 과격한 성 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 사회의 원리 안에서 유연하게 수용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예술에 관한 한 사법적 판단이나 윤리적 제약보다는 문학 시장의 구조 안에서 자율적으로 논의되고 수용되는 유통 과정이 우리 사회의 문화 체질과 자생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마광수문학, 더 나아가 성문학에 대한 사회 내부의 의식은 지금보다 훨씬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마광수의 신작 장편소설 <유혹>을 읽으면서 이 점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 경직된 의식이 그의 문학에 내장된 성적 무의식과 판타지, 미적 감각을 형성하는 구체적 항목들과 불필요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마광수의 문학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분방한 성적 상상력은 신작 장편소설 <유혹>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마광수는 이번 작품에서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89)의 30대에서 <즐거운 사라>(1992)의 40대를 거쳐 <광마잡담>(2005)과 <로라>(2005), <유혹>(2006)의 50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문학을 관통하고 있는 성적 상상력의 세밀한 감각들을 독창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문학 세계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들로 ‘페티시즘’, ‘탐미적 관능’, ‘관능적 상상력’ ‘관능적 일탈미’ ‘유미적 평화주의’ 등을 들 수 있을 터인데, 유미적 상상력 차원에서 탐미적 관능미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는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여 <유혹>에서는 성적 판타지의 문제를 카타르시스의 실제적 효용성이라는 차원에 접목시켜 형상화하고 있다.
이번 소설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 한 가지는 그의 분방한 성적 상상력을 구성하는 내면 원리로서 실존적 허무의식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의 문학적 내면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깊이 논의되지 못하고 간과된 것이 사실인데, 이번 소설에서는 그의 미의식과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실존적 허무의식이 성치료라는 독창적 모티프를 선명하게 노정되고 있다. 아울러, 마광수문학의 핵심 기제로 작동하는 카타르시스의 문제가 상징적 회로가 아니라 실제적 효용으로서 문학치료의 영역에서 논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시인과 소설가 이전에 문학연구자로서 오랫동안 카타르시스의 실제적 효용성 문제를 탐구해 온 그의 문학에 대한 기본 입장이 <권태>(1990, 개정판 2005년), <광마일기>(1990, 개정판 1996), <즐거운 사라>(1991, 개정판 1992), <불안>(1996), <자궁 속으로>(1998),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2000), <광마잡담>(2005), <로라>(2005) 등의 작품을 경유하여 <유혹>에서 자유롭게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미 <즐거운 사라>에서도 시도되었던 ‘열린 결말’의 구조를 그는 이번 작품에서 다시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유혹>에서 시작과 전개와 종결이라는 종래의 소설 기본 문법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닫힌 구조’의 이야기를 배제하고 있다. 결말이 완결되는 닫힌 소설이 아니라 끝이 결정되지 않는 순환 원리로서 무언가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지 않는 열린 소설의 구조에 대한 실험을 작가는 <유혹>에서 시도하고 있다.



2. 카타르시스의 문학적 효용론

마광수 문학은 기본적으로 그가 독자적으로 추구해 온 문학관에 토대를 두고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여러 이론서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는 ‘효용론’에 바탕을 둔 문학의 카타르시스를 강조한다. 문학이 인간의 정신에 실제적으로 어떤 효용성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주된 연구 주제였고, 이런 관심은 그의 문학 전반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그의 문학에 충만한 성적 판타지나 관능적 이미지, 유미적 상상력은 바로 문학의 궁극적 효용성으로서 문학을 통해 현실 속에서 억눌린 감정을 자연스럽게 배출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마광수의 문학관은 효용론이라는 관점에서 독자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 부각된다.
문학의 효용성에 관한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과 직결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6장에서,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을 통하여 감정을 카타르시스(catharsis)시킨다”고 말한 바 있는데, ‘정화’ 또는 ‘배설’을 의미하는 카타르시스는 문학이 독자에게 주는 직접적인 영향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마광수는 바로 이 카타르시스 이론의 중요성을 수용한 이후 이에 근거하여 ‘효용론으로서의 카타르시스 문제’를 집중 탐구해 왔고, 거기에 그의 주된 관심사인 성적 미의식과 결합하여 그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카타르시스와는 달리 동양사상에 뿌리를 두고서 음양사상과 한방의학 이론, 그리고 불교사상에 접목시켜 자신의 문학관을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다.
마광수의 카타르시스이론을 중심으로 한 문학관의 정체를 좀 더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서 는 정신적 개념으로서만이 아니라 의학적·육체적 개념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즉 그의 이론대로 카타르시스를 ‘배설’로 해석할 때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배설, 억압된 심리적 욕구의 해방이라는 정신적 의미만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를 아울러 포괄하는 인체의 종합적이고도 유기체적인 대사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활동을 물질적인 면이나 정신적인 면의 한쪽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육체와 정신의 상호작용으로 보아 일원론적으로 인식한 한방의학의 개념이 요청된다. 그는 서양의 비극적 카타르시스 개념 대신 희극적 카타르시스 역시 중요한 효용이 있다고 진단하고, 여기에 사상의학(四象醫學)에서 말하는 체질론(體質論)을 추가하여 독자 위주의 유연한 효용론을 전개한다. 카타르시스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현대인들에게 문학이 단지 심미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인간 치료의 실용주의적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해 보고자 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마광수는 자신의 독자적인 카타르시스이론을 줄곧 문학 작품에 반영하는 글쓰기를 해 왔는데, <유혹> 역시 이런 연장선 위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학병원 정신과 교수인 주인공 이경훈은 서양 의학에 자신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한방을 도입하여 치료를 하는데, 결국 이런 이단적 행위가 발단이 되어 그는 동료 교수들로부터 비판과 따돌림을 당학 병원을 그만둔다. 물론 경훈이 대학병원의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여성 환자와의 스캔들 때문이지만, 이 작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 한의학적 방법을 도입하는 그의 독특한 치료술이다. 이것은 아마도 작가 자신이 실제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양의학 혹은 한방의학에 대한 지식을 작품 안에서 주인공의 치료 행위에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효용론의 관점에서 일종의 치료제로 받아들일 때 정신과 의사라는 주인공의 직업 설정과 치료 행위는 자연스럽게 작가의 문학관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혹>은 성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로서 주인공이 다양한 유형의 성불구 환자들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과정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남녀 관계의 애증 및 성의 교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면 심리를 다루고 있다. 그림을 전공했고, 화랑을 경영하는 30대 중반의 독신 여성 타미, 아버지에 대해 품었던 적개심을 아버지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에게 투사하여 복수하려는 잠재의식을 위장하여 결혼하지만 그것이 원인이 되어 불감증 환자로서 부부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방숙,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여 상대하는 여자를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애증병존 심리로 인해 잠재의식에 축적된 죄의식 때문에 발기부전이 되어 이혼을 하고 그 충격으로 성적 고통에 시달리는 T교수, 여성 동경의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남자대학생 이성기 등의 여러 인물들은 경훈의 효과적인 성치료를 받고 병을 극복해나간다. 성치료 전문의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성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여러 유형의 환자들을 치료한다는 작가의 구도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장치로서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다. 특히 작가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인공 이경훈의 성적 취향을 환자 이성기의 성적 고민에 결부시키고 있는 발상은 문학의 효용론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주인공의 다음과 같은 생각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따져볼 때 이성기는 복장도착증에다가 나르시시즘, 그리고 관음증적 취향을 함께 가지고 있는 남자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의 몸뚱어리 전체를 하나의 미적 숭배 대상으로서의 물신적(物神的) 우상으로 보는 페티시즘(fetishism) 심리가 마음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경훈은 이성기를 보며, 어쩌면 자기도 이 환자와 비슷한 패턴의 인간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자기에게는 동성연애 심리가 전혀 없고, 또 복장도착 증세나 여성동경의 심리가 아주 심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217쪽)

페미니스트이자 일종의 탐미적 페티시스트로서 이성기는 경훈이 고용한 성치료 보조원인 민자의 적극적인 치료를 받으면서 서서히 회복되어간다. 경훈과 이성기는 복장도착증과 나르시시즘과 관음증적 취향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여성을 미적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페티시스트라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경훈은 이성기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읽어낸다. 이 작품에서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점은 작가가 이전 작품에서 추구해 온 관능적 미의식으로서의 페티시즘이나 유미적 상상력을 성치료라는 구체적인 과정에 도입하여 적용하고 있는 장면이다. 특히 경훈이 독특한 성적 매력을 지닌 민자라는 여성을 우연히 만나 사귀게 되고, 이후 성치료 보조원으로 고용하여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이 무척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이런 장면들은 문학이라는 허구적 장치 속에서 작가가 구상하고 있는 상상력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문학의 실제적 효용성에 관한 그의 일관된 발언들이 작품 안에 깊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독자심리학적 맥락에서 생각할 때 <유혹>의 인물들의 행위가 연출하는 여러 계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권태로운 일상의 삶에서 일정한 활력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현실에서는 윤리적 억제로 인해 억압돼 있던 가학욕구를 문학작품이라는 장치를 통해서라도 대리배설시켜 울체(鬱滯)된 잠재의식을 해방시키려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일탈적이고 가학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문학 등의 예술작품을 ‘인공적인 길몽’으로 보고 있으며, 그 대리배설적 효용가치를 옹호하는 한에서 좋은 꿈을 인위적으로라도 더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작가는 <유혹>에서 성치료라는 모티프를 활용하여 반영하고 있다.
<유혹>의 주요 관심사인 문학의 실제적 효용성 문제와 관련하여 작가의 생각을 몇 가지 더 알아보도록 하자. 마광수는 여러 글에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세계를 “유미적(唯美的) 쾌락주의에 바탕을 둔 복지지상주의(福祉至上主義)”(<복지지상주의를 위하여>,<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라고 밝힌 바 있는데, 이렇게 될 때 이데올로기의 폐해와 독선적인 종교의 폐단이 가져다준 같은 인류간의 상쟁사(相爭史)가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여러 저술과 문학 작품에서 강조하고 있는 유미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평화주의는 그의 독특한 미의식과 어울려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보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며 관능적 상상력을 키워 준 것은 언제나 ‘손톱’의 이미지였다. 특히 나는 여인의 긴 손톱을 너무나 사랑한다. 손톱은 원시시대의 인류에게는 다른 동물의 경우처럼 일종의 가학적 무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비수처럼 날카로운 여인의 긴 손톱은 새디즘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가학적인 용도로 쓰이던 손톱이 이제 화사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변했다는 점, 그로테스크한 관능미의 심볼로 변했다는 점에서 나는 인류의 미래를 밝게 바라볼 수 있는 어떤 희망적인 예감을 얻는다. 인간의 가학성이 미의식과 합치되어 아름다운 환타지로 승화될 수 있을 때, 진정한 인류의 평화, 전쟁이 없는 세계가 건설될 수 있다. 주관과 객관, 감정과 사상, 관념과 사물의 대립을 지양하고 그것을 생동력 있게 통일시킬 수 있는 근원적 에너지가 바로 ‘환타지’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능적인 아름다움과 관념적 사랑이 아닌 성애적(性愛的) 사랑이 합치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질곡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당당한 쾌락추구에 기초하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책머리에>)

<누구나 잘 사는 사회, 누구나 스스로의 야한 아름다움을 나르시시즘으로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이 ‘괴로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즐거운 노동’, 이를 테면 화장이나 손톱기르기 등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노동에서 진짜 관능적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유미주의에 바탕을 둔 쾌락주의, 또는 복지지상주의(福祉至上主義)가 요즘의 내 신조라면 신조라고 할 수 있다. (…) 즐거운 권태와 감미로운 퇴폐미의 결합을 통한 관능적 상상력의 확장은 우리의 사고를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꿈이 없는 현실은 무의미한 것이고 꿈과 현실은 분리되지 않는다. 꿈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적 실천을 가능케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책머리에>)

한편 작가는 포르노 영화나 소설 같은 에로티시즘 예술이 실제로 성의학에 이용되고 있으며, 성적 공상이 성행위시에 더욱 큰 절정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누구나 편안하게 성적 공상을 하면서 거기에 덧붙여 에로틱 아트를 당당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성적 억압이나 성적 무기력증 때문에 생기는 정신적 병리현상이나 불행한 남녀관계는 해결될 수 있다. 자극적인 성희 장면이나 내용을 담은 영화나 소설 또는 사진 작품 등을 성적 흥분을 돕기 위해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전혀 죄될 일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어떤 형태로든 ‘자극’을 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에로틱 아트를 활용하여 성욕을 보다 더 ‘상승적으로’ 배설시킬 권리가 있는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켜 억압된 욕구들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카타르시스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물론 정신적 정화에 의한 일시적 망각이 아니라 시원한 대리배설로서 말이다. 예술이 경건주의를 벗어나 보다 더 솔직해질 수 있을 때 인간의 삶은 더욱 활기차고 건강해질 수 있고, 보다 더 밝은 사회가 이룩될 수 있다.>(<에로틱 아트의 긍정적 효용>, <문학과 성>, 315쪽)

위의 글에서 읽을 수 있듯이 마광수는 에로티시즘 예술이 자기 취향에 맞는 성적 환상을 죄의식 없이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에로티시즘 예술에 대한 논의는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신 건강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성의 문제가 지금보다 더 개방되고 논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성을 중심으로 한 에로틱 아트가 긍정적 효용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이제 성의 개방화 시대에 들어섰다. 하지만 성욕의 자유로운 대리배설은 아직은 머나먼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회는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와 집단적 기만으로 얽혀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솔직한 대중들은 점점 더 떳떳한 성욕의 대리배설을 원할 것이고, 거기에 발맞춰 에로티시즘 예술은 기존의 수구적 봉건윤리를 항상 앞서갈 것이 틀림없다. 합리적 지성이 주재하는 정치적·문화적 후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에로티시즘 예술을 시급히 양성화시킬 필요가 있다.>(<에로틱 아트의 긍정적 효용>, <문학과 성>, 317쪽)

<성의 자유, 또는 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한 나라의 정치적 민주화와 분배정의의 실현, 사회복지, 다양한 문화적 가치 발달과 정비례 관계에 있다. 이것은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다. 성에 대한 억압과 ‘이중 잣대’가 없어지고 성에 대한 법의 간섭이 최소화될수록, 그 나라의 구성원들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가 확대되고 불평등이 축소되어 경제적 재분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한국 성문화의 현황 및 진단>, 위의 책, 322쪽)


3. 실존적 허무의식의 발현

마광수는 여러 논문과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문학을 구성하는 사상적 자양분이 기본적으로 불교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우리들 인간이 비극에서 느끼는 심리적 고통과, 카타르시스 효과에서 오는 예술적 쾌감 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있는데 이 점을 그는 불교사상의 논리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 마광수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에서 불교의 진리는 중요한 논점을 제공해 준다. 이 점은 역시 <유혹>의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 준다.
그는 불교의 진리 가운데 이른바 사성제(四聖諦)의 진리와 오온(五蘊) 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자신의 문학에 반영한다. 즉 사성제(四聖諦) 개념의 핵심은 인간의 현실생활 자체가 생·노·병·사 등의 고통으로 가득 찬 비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고통의 원인인 마음의 집착, 즉 욕심을 없애기 위해서 바른 도를 지켜나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성불하기 위해 도를 닦으려면 먼저 고(苦)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선결과제가 된다. 즉 인생살이에서 누구나 추구하는 인생의 보람이나 행복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고 오직 비극적 고통만이 충만할 뿐이라는 사실을 선결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세계와 물질의 법칙을 지배하는 현상세계의 오온은 모두 다 빈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며, 원래 실체가 없는 텅 빈 것이기 때문에 온갖 허망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 현상들 가운데는 기쁨과 슬픔, 쾌락과 고통, 미움과 사랑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마광수가 파악하고 있는 고제(苦諦)란 것의 진정한 의미는, 실제로 우리의 본성 그 자체가 고통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비관주의적이고 염세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극히 낙관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개념에서 나오는 고(苦)의 진리를 우선 인정한 후 그것을 인간존재의 긍정적 의미를 깨닫기 위한 득도 과정에서의 과정적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것이 불교사상의 핵심이라고 이해한다. 아울러 이것은 곧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의 의미와도 합치된다고 파악한다. 고(苦)의 깨달음은 인간이 불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데, 그는 불교의 ‘고제’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일상의 삶에 내재된 실존적 허무의식을 도출해낸다.
비극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연민과 공포, 즉 비극적 고통의 감정이 어떻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그는 불교사상의 사성제(四聖諦) 개념인 고(苦)의 문제와 관련지어 설명하면서 카타르시스의 문제를 음양의 상징이론에 확대시켜 적용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특히 한방의학과 카타르시스를 연결시켜 논의한 것은, 마광수 문학론의 특징인 ‘연역적 상징 이론과 구체적 효용성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적 지평을 구체적으로 열어 보여준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행복감(幸福感)은 찰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일생은 무조건 비극이다. 석가가 깨달았다는‘고제(苦諦)’는 그래서 중요하다. 모든 중생들은 오직 고통스럽다는 진리…… 그것을 석가는 평생 동안 설파하였다. 그런 실존적 허무의식을 일단 깨달아야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해진다. 막연한 낙관주의처럼 인간을 허망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즉, 궁(窮)할대로 궁해져야만 ‘통(通)’의 상태가 온다. 비극이 실존의 전부라는 것을 알아야만 우리는 비로소 불행을 극복해 낼 수 있다. 절망보다 더 두려운 것이 희망이다. 희망을 죽여버려라.> (<마광쉬즘>, 2006, 98~99 쪽)

이렇게 볼 때 작가가 여러 글에서 강조하는 ‘야(野)한 자각’은 이와 같은 실존적 허무를 깨닫는 것이고, 따라서 ‘야한 정신’은 허무정신이면서 실존적 비극정신의 깨달음(<마광쉬즘>, 99쪽)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다양한 성치료의 양상을 표면에 과도하게 노출하고 있는 <유혹>에서 주인공 경훈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생의 이면에 잠복해 있는 비극성과 실존적 허무의식을 반영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존재 자체가 증오스럽다. 프로이트의 시대가 ‘성적(性的) 좌절’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실존적 좌절’의 시대다. 실존적 좌절은 권태를 낳고, 권태감은 사람들을 우울증으로 몰아간다. 갱년기에 찾아오는 무력감 때문에 생기는 우울증이나 어이없는 실연(失戀) 따위로 찾아오는 우울증, 또는 극도의 열등감에 기인하는 우울증 등은 차라리 치료하기 쉽다. 그러나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일상사와 거기서 누적된 권태감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만성적인 우울증은 오히려 치료하기가 어렵다.>(<유혹>, 47~48쪽)

실존적 허무주의는 이미 그의 앞선 작품들에서도 피력된 바 있는데, 영상시나리오로 구상된 <권태를 위한 메모>에서 “관능적으로는 무척이나 열정적이지만, 인생관 그 자체는 허무주의적이라는 것”(<야하디 얄라숑>)을 강조한 것이라든지, 시작품에서 “사랑을 하면 할수록 외로워져요/사랑을 하면 할수록 죽고 싶어져요/당신의 헛된 약속/나의 헛된 주절거림/아 모든 건 안개 속 술래잡기 놀이/같이 몸을 합쳐도 계속되는 고적감”(<사랑이 얼마나 사람을 고독하게 만드는지>)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작가의 뿌리 깊은 허무의식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성치료를 통한 관능적 상상력의 묘사에 바탕을 둔 <유혹>의 이야기 이면에는 세계에 대한 철저한 허무주의자의 비극적 인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4. ‘열린 결말’의 의미

마광수는 이미 <즐거운 사라>에서 결말을 의도적으로 해피엔딩과는 정반대인 비극적 결말로 처리하지 않았다. 흔히 죽음이나 파멸로 결말을 마무리하여 ‘사랑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주제로 삼는 기존 소설의 통념을 극복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주인공 사라가 추구하는 사랑의 ‘자유성’에 대한 인식을 열어 놓음으로써 주인공에게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생명력을 부여하는 동시에 독자에게도 역시 열린 상상의 계기를 제공해 주려는 의도에서 결말 처리를 그렇게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985172;즐거운 사라&#985173;에서 이야기의 결말을 열어놓음으로써 소설 속의 사라를 시대의 윤리에 희생되어야 할 속죄양이 아니라 확장된 자유를 누리며 스스로의 당당한 행복을 추구하는 적극적 인물로 만들어내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마광수의 소설 세계, --<즐거운 사라>의 이해를 위하여>(<마광수 살리기>)를 볼 것)
<유혹>에서도 작가는 역시 결말을 열어놓음으로써‘열린 소설’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 작가가 다음과 같이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데에서도 ‘열린 결말’의 구조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그 고민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갑자기 결말로 치닫기 위해 돌연한 교통사고나 돌연한 자살 같은 것이 곧 등장할지도 모른다 ……. 또는 내가 의료행위를 빙자한 매매춘을 시켰다는 죄목으로 잡혀가게 될지도 모르고…….경훈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288~289쪽)

주인공 경훈으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소설의 결말이 꼭 비극적이거나 일정한 매듭을 지으며 종결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문을 작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우푸트만이나 브레히트의 드라마가 추구하는 이른바 ‘개방형 종결’ 형식의 드라마에서 극의 결말이 앞에서 진행되어 온 이야기와 사건의 완벽한 마무리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미결정’이나 ‘미해결’을 의미하듯이, 작가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이야기의 분명한 결말을 어떤 형태로든 확정하여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즐거운 사라>와 마찬가지로 <유혹>에서 작가는 ‘닫힌 소설’의 구조만이 플롯을 잘 짠 소설로 간주되는 문학 풍토에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해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5. 마광수 문학의 불온성

마광수의 문학은 우리 사회의 통념이 강요하는 현실에서 근본적으로 불온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가 밝히고 있듯이 본질적으로 문학은 불온하며, 문학은 항상 현실에 대해 일탈적이고 가치전복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본질적으로 문학은 불온하다>, <야하디 얄라숑>).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반란”으로서 문학은 “즐거운 저항”이며 “과거에 대한/끊임없는 회의요/미래에 대한/끊임없는 꿈꾸기”를 할 수 있는 정신의 탈주 장치이기도 하다. 동시에 문학은 “우리를 억압하고 순치(馴致)시키는/권력과 윤리에 대한/끊임없는 조소”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불온한 문학은 시대와 불화하고, 작가는 시대와 사회의 금제로부터의 고통을 피하기 어렵다.
인간의 내적 체험의 소산인 금기와 위반들은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우리 내부에 감추어진 욕망들로부터 생겨난 것들이다. 조르주 바타이유가 금기와 관계하는 근본적인 것들로 ‘죽음’과 ‘성’을 들면서(<에로티즘>), 금기의 구심력과 위반의 원심력 사이에서 억압된 본능을 현시하며 사회적 금기를 간접적으로 위반함으로써 우리들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을 탈주시키는 계기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문학의 본질적인 특성으로서 ‘불온성’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마광수의 문학 역시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진정한 섹슈얼리티는 ‘윤리’와 ‘정상’을 거부하는 ‘창조적 불복종’에 있는 것이다.(<마광쉬즘>, 115쪽). <유혹>에서 작가는 세상의 감시에 움츠리지 않고 이 점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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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마잡담
마광수 지음 / 해냄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 관능적 일탈을 향한 현대판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유쾌한 실험 >

- 마광수의 <광마잡담>에 대하여

김성수(연세대 교수, 문학평론가)


1. 마광수 문학의 모태

마광수 문학의 모든 것은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1989)에서 발원하고 있다. 그로테스크하게 화장을 한 여인의 강렬한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있는 파격적인 표지의 이 시집에는 작가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핵심 정보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어 보면 마광수의 에세이와 시와 소설의 주제 및 모티프들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창작된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상상력의 모태를 발견하게 된다. 이를테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권태>, <자궁 속으로>, <사랑받지 못하여>,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등의 시들은 이후 에세이집이나 장편소설의 표제 및 주제로 확장되며,<손톱>, <그 여자의 손톱>, <뾰족구두>, <사랑하는 이여, 난 당신 손톱이 좋았지> 등에서 피력된 관능적 상상력은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나, 장편소설 <권태>(1990)와 <즐거운 사라>(1992)에서 마광수 문학의 핵심 모티프 가운데 하나인 ‘손톱 페티시즘’으로 묘사된다. <모든 것이 불안하다>, <불편한 것은 아름답다>, <거꾸로 본 세상은 아름답다> 등에 녹아 있는 ‘불안함’ ‘불편함’ ‘거꾸로 보기’와 같은 시상(詩想)들에도 세상의 사물과 현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관찰하여 다시 해석해내려는 마광수 문학 특유의 개성적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2000)를 비롯하여, 전기소설의 양식에 관능적 상상력을 한껏 발휘하여 창작된 <광마일기>(1990)와 신작 장편소설 <광마잡담(狂馬雜談)>(2005)에 이르기까지 마광수 문학의 고유 브랜드라고 할 수 있는 ‘관능적 상상력’ ‘페티시즘’ ‘유미적 쾌락주의’의 문학관 또한 <가자, 장미여관으로>에 그 원천을 두고 있어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한 작가가 한 권의 시집으로부터 시종일관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과 모티프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은 우리 현대문학의 흐름에서 볼 때에 무척 흥미로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마광수가 이 시집에서 자신의 문학관을 포함하여 향후에 전개해 나갈 작품 세계에 대해 선언적으로 피력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발언은 그의 시와 에세이를 비롯한 일련의 소설들과 <광마잡담>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좋은 지표가 된다.

[ 누구나 잘 사는 사회, 누구나 스스로의 야한 아름다움을 나르시시즘으로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이 ‘괴로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즐거운 노동’, 이를 테면 화장이나 손톱기르기 등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노동에서 진짜 관능적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유미주의에 바탕을 둔 쾌락주의, 또는 복지지상주의(福祉至上主義)가 요즘의 내 신조라면 신조라고 할 수 있다. (…) 즐거운 권태와 감미로운 퇴폐미의 결합을 통한 관능적 상상력의 확장은 우리의 사고를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꿈이 없는 현실은 무의미한 것이고 꿈과 현실은 분리되지 않는다. 꿈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적 실천을 가능케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가자, 장미여관으로>의 <책머리에> 중에서)

이 시집에는 10대 중반의 청소년기에서부터 3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창작된 마광수의 시들이 망라되어 있어 그의 관능적 미의식의 기저와 유미주의적 문학관의 원천을 뿌리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는 출간 당시 ‘성(性)’을 소재로 한 독특한 주제 의식과 감각적인 표현으로 우리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 시집은 마광수의 문학에 대한 호불호와 견해 차이와는 별도로 그의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작가의 창조적 상상력과 문학적 입장의 원천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텍스트 역할을 하고 있어 꼼꼼히 재음미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유미주의'와 ‘관능적 상상력’의 확장을 통해 ‘실용주의적 쾌락주의’나 ‘복지지상주의 이론’을 문학적 현실 속에서 실현해보려는 작가의 소망적 사고가 이번 신작 장편소설 <광마잡담>에서도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이후 만 5년 만에 새롭게 내놓는 <광마잡담>에는 그의 초기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에서 피력된 개성적 문학관이나 세계를 이해하는 독창적 관점이 <권태>와 <광마일기>를 계승하며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2. 현대판 ‘전기소설’의 실험

그의 첫 장편소설 <권태>가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을 받도록 ‘페티시즘’을 주요 모티프로 하여 판타스틱한 묘사에 치중한 작품이었다면, <광마잡담>은 관능적 묘사와 아울러 서사적 스토리텔링이 주는 속도감 넘치는 재미를 느끼도록 의도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광마잡담>에는 모두 아홉 편의 이야기가 연작 형태로 연결되어 각 작품의 독립된 내용 사이에 유기적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배열되어 있다. <광마잡담>에 배열된 아홉 편의 이야기 가운데 일인칭 ‘나’가 주인공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인어 이야기>, <두 여인>, <무덤 속의 여인>, <다이아나 이야기>, <별은 멀어도> 다섯 편이고, 삼인칭은 <모란꽃 이야기>, <공처가 이야기>, <노루 이야기>, <도깨비집 이야기> 네 편이다.
<광마잡담>은 ‘전기소설(傳奇小說)’ 양식의 현대적 적용, ‘사소설’ 기법의 도입, 그리고 ‘가벼움’의 서술미학 실험 등 몇 가지 면에서 작가의 창작 의도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우선 이 소설은 우리의 전통소설 양식인 ‘전기소설’을 실험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작가는 <광마잡담>의 선행 작품인 <광마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내가 몽환적인 얘기를 사이사이에 끼워 넣은 것은 전기소설적(傳奇小說的)인 흥취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체 줄거리와도 상관성이 있게 함으로써 소설에서의 ‘상상적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꽃의 요정이 나오는 얘기인 <꽃과 같이>의 무대는 설악산 백담사가 되었고, 내 친구가 선녀의 핏줄이었다는 모티프로 이루어진 <꿈길에서>는 6.25 동란이 시대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처녀 귀신 야희와의 연애담인 <달 가고 해 가면>에서는 연세대학교 뒷산인 무악산이 등장하게 되었다.]
(<내 소설 <광마일기>에 대하여>, <사라를 위한 변명>, 열음사, 1994, 135~136쪽)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광마일기>의 창작 의도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사소설 기법을 빌려 ‘현대판 전기소설’을 시도해 보고자 한 데 있다. 그리고 소설의 주된 정서로는 ‘고급한 센티멘탈리즘’을 위주로 하고, 거기에 ‘세련된 에로티시즘’을 가미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작의(作意)는 서양의 문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 이론에 근거하여 쓰여진 ‘재현(representation)의 문학’임에 비해, 동양의 문학은 현실과 현상을 뛰어넘어 본체의 신비를 캐보려고 노력한 ‘표현(presentation)의 문학’이라는 작가의 문학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동양 문학의 본령이 ‘전기문학(傳奇文學)’에 있으며, 따라서 주제도 사회 비판이 아니라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소재를 통하여 근원적 진실을 알아보려는 데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문학의 흐름에서 볼 때 전기소설은 매우 광범위하고 뚜렷한 내적 전통을 지니고 있는 소설 양식이다. 이가원 교수가 지적했듯이, 조선시대 전체를 통하여 전기적(傳奇的)인 경향을 띠지 않는 작품이 없을 정도로 전기가 조선조의 소설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전기소설은 대체로 신괴(神怪)·염정(艶情)·우언(寓言)·호협(豪俠) 등의 유형을 특징으로 하여 현실의 인간 생활을 벗어나 천상(天上), 명부(冥府), 용궁(龍宮) 같은 환상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비현실적 무용담이나 연애담 같은 기이한 사건들을 다룬다. <금방울전>, <금령전>, <금오신화>, <삼설기> 같은 우리 고전소설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광마잡담> 속의 여러 편들이 소재와 모티프로 빌려오고 있는 중국 청대의 문언단편소설집 <요재지이(聊齋志異>)는 요정이나 신선, 여우, 귀신 등을 주요 등장인물들로 삼아서 이색적인 내용을 서술한 전기소설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광마잡담>에 수록된 아홉 편의 이야기 가운데 「인어 이야기」, 「모란꽃 이야기」, 「공처가 이야기」, 「무덤 속의 여인」, 「노루 이야기」, 「도깨비집 이야기」 일곱 편은 모두 전기소설적인 기법에 의해 현실과 비현실적인 공간을 넘나들며 벌어지는 환상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이들 일곱 편의 각각의 이야기들은 주인공(일인칭 ‘나’ 혹은 작가를 연상시키는 삼인칭 화자)이 용궁에서 추방된 암갈치 인어(「인어 이야기」), 여우의 정령이나 유령(「두 여인」, 「도깨비집 이야기」), 모란꽃 요정(「모란꽃 이야기」), 백사(白蛇)의 정령(「무덤 속의 여인」), 노루 요정(「노루 이야기」) 등과 나누는 유현(幽玄)한 분위기의 관능적인 러브스토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작가는 <광마잡담> 가운데 여러 편들을 포송령의 <요재지이>에 있는 작품들을 참조하여 재구성하고 있는데, <두 여인>, <모란꽃 이야기>, <공처가 이야기>, <노루 이야기>, <도깨비집 이야기>는 <요재지이>의 <연향(蓮香)>, <갈건(葛巾)>, <마개보(馬介甫)>, <화고자(花姑子)>, <소사(小謝)> 이야기를 각각 패러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마잡담>은 <인어 이야기>나 공상과학 소설의 모티프를 차용한 <다이아나 이야기>, <별은 멀어도> 두 편을 제외하면 이전의 <광마일기>가 그랬듯이 소설의 전기성에 ‘고급한 센티멘탈리즘’과 ‘세련된 에로티시즘’을 가미한 ‘현대판 전기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비현실성과 황당무계함을 내용으로 하는 전기소설의 특징은 그 유현성(幽玄性)에 있다. 여기서 ‘유현(幽玄)’이란 현실의 세계가 아닌 상상적 세계, 환상의 세계를 말한다. 현실의 모든 양상을 인과와 전생의 업보에 연결시켜 생각하는 윤회사상이 동양 생활철학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의 문학은 우리의 인생 자체가 이미 ‘꿈’으로 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불가지론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마광수, <상징시학>, 청하, 1985, 135쪽.)
그래서 현실을 영원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보지 않는 일종의 ‘상징적 계시’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그의 문학에서 자연스럽게 성립되는 것이다. 이전의 <광마일기>나 이번의 신작 <광마잡담>에서 작가가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현대판 전기소설의 실험은 여러 면에서 오늘의 우리 문학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3. ‘사소설’ 기법의 도입

<광마잡담>에서 두드러진 또 하나의 특징은 소설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허구성’, 즉 ‘그럴 듯한 거짓말’ 효과를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사소설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광마일기>의 창작 의도에 대해 설명한 작가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참고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이 소설을 ‘거짓말이 많이 섞인 사소설(私小說)’ 형식으로 썼다. 그래서 남주인공이 꽃의 요정과 연애하기도 하고 고려 때 죽은 처녀 귀신과 연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식의 전기적(傳奇的) 성격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하더라도, 남주인공이 친구 부부와 부부 교환의 정사를 벌이거나, 또는 극장에서 자살을 기도한 정체불명의 여성과 연애하는 등 거의가 허구적 스토리로 되어 있다.]
(마광수, <내 소설의 주인공들>, 같은 책, 264쪽)

전기소설적인 성격에 ‘사소설’형식을 도입하여 활용한 <광마일기>에서 작가는, 조선조의 <금오신화(金鰲新話)>나 <수성지(愁城誌)>, 그리고 <화사(花史)> 등이 주로 삼인칭 시점을 활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작가 자신을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바 있고 있다. ‘사소설’이 작가 자신이 직접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는 경향의 소설을 가리킨다고 할 때, <광마일기>를 비롯하여 <광마잡담>에서 사소설 기법을 작가가 즐겨 채택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소설의 본질인 ‘그럴듯한 거짓말’을 한층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인어 이야기>에서 작가 자신의 본명을 그대로 노출시키면서, 거기에다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현존 작가‘하일지’를 함께 등장시킨다든지, <두 여인>에서는 작가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서울 시내의 아파트촌과 그 주변의 카페를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다. <공처가 이야기>에서도 주인공을 작가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마광서(馬光瑞’)로 설정하여 서술하고 있는 등 작가는 자신의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 삼인칭조차도 작가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나 정황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실제의 작가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임을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이런 ‘그럴듯한 거짓말’은 모방론의 입장에서 볼 때 ‘개연성(probability)’과 ‘박진성(verisimilitude)’이라는 서술 미학적 요구를 충족시켜 준다. 동시에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뿔 있는 암사슴’ 그림이 그림으로써 잘 그려져 즐거움을 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사실과 꼭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 것과도 관련된다. (이상섭, <문학이론의 역사적 전개>, 연세대출판부, 1985, 77쪽.)

플라톤의 입장과 달리 효용론의 관점에서 문학의 쾌락적 기능을 중요하게 여겼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이 최악의 경우 철학적 진리를 담고 있지 않더라도 문학적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가지고 있으면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처럼 예술적 가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름다움을 무시하고 오직 진리만 과도하게 드러내려는 문학에 그다지 높은 가치를 두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마광수가 자신의 소설에서 ‘그럴듯한 거짓말’을 도입하고 있는 것은 사실성을 기대하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배려하려는 의도적 장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도가 사소설 형식을 통해 형상화 되고 있는 작품이 <광마일기>였고, 이번 <광마잡담>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광마잡담>에 수록된 아홉 편의 이야기들은 비현실적이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작가 자신이 겪었던 실제 체험담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점이 그의 소설에서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는 서술미학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4. ‘가벼움’의 서술미학

<광마잡담>에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가벼움’의 서술미학이다. 작가의 이런 서술 의도는 이미 <광마일기>나 <즐거운 사라>. 그리고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서도 활용된 바 있으며, 이 작품에도 그대로 채택되고 있다. 그러나 ‘가볍다’는 말이 문학에서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많은 술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언급한 작가의 생각을 참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현대소설은 지금까지 대체로 ‘무거움의 미학’으로만 일관해 왔다. 나는 교훈주의를 바탕에 깐 경건주의가 우리나라 현대 소설의 가장 큰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무거운 소설’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벼운 소설’을 경시하거나 폄하하면서 ‘무거운 소설’만을 소설의 본령(本領)으로 삼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광수, <내 소설 [광마일기]에 대하여>, 같은 책, 136~137쪽)

우리 소설 전통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서구의 문학과는 달리 주제나 형식 면에서 대체로 ‘가벼운 소설’에 그 정서적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의 고전작품인 <흥부전>이나 <춘향전>에서 보이는 걸직한 육담이나 해학적 표현, 그리고 현대소설에 와서 김유정이나 채만식의 소설에서 보이는 골계미와 풍자는 바로 내용적인 면에서 현실의 억압과 구속을 형식적으로나마 극복해 보고자 한 데서 나온 서술미학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에서 보이는 몽환적 세계의 유현한 분위기 또한 무거운 현실을 가벼움의 서술 형식에 의지하여 극복해 보고자 한 것이라고 할 때, 가벼움의 서술미학은 현실적 질곡의 무거운 무게를 가상적인 현실 속에서나마 극복하고 풀어내려는 작가의 소망에 의해 채택된 기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작가가 전기소설적인 형식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시도하려는 의도는 지나치게 이념 일변도의 ‘무거운 주제’만을 ‘무겁게’ 다루고 있는 우리 문학의 한 경향에 대한 비판적 실험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문학이론에 대한 입장, 즉 동양문학론에 기초한 문학의 이해 방식과도 상통한다. 그것은 ‘상징’에 관한 이론서 <상징시학>에서 그가 강조한 바와 같이, ‘재현적 입장’으로서의 문학관보다는 ‘표현적 입장’으로서의 문학관을 가지고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앞서 <광마잡담>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거론한 ‘전기성’은 ‘가벼움’의 서술미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여기서 ‘가벼운 소설’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작가의 주장을 조금 더 들어 보자.

[‘가벼운 소설’은 또한 도덕적 당위성이나 작가의 도의적 책임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창작된다.‘무거운 소설’이 다소 위선적인 태도를 밑바탕에 깔고서 제작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가벼운 소설’은 다소 위악적(僞惡的)인 태도를 밑바탕에 깔고서 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거운 소설은 작가가 철학자나 사제(司祭) 같은 태도로 창작에 임하는 것이요, 가벼운 소설은 작가가 단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인간의 입장으로 창작에 임하는 것이다.]
(마광수, <내 소설 [광마일기]에 대하여>, 같은 책, 138쪽)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문학이 독자들에게 진리나 교훈을 주지 않더라도 미적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을 개연성 있고 박진감 있게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도덕적 당위성’이나 작가의 ‘도의적 책임’을 ‘무거운 소설’의 범주에 넣고, “작가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인간의 입장”을‘가벼운 소설'로 분류하는 태도는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만이 가지고 있는 매우 독창적인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벼움이 경박함이나 천박함과 구별되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의 고전소설, 특히 전기소설에 많이 나타나는 ‘가벼움’의 주제 정신을 작가 자신이 <광마잡담>을 통해 지속적으로 구현하려고 하는 태도는 의미 있는 시도로 받아들여진다.
‘가벼움’의 서술미학은 다시 문체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요청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에서 문학작품을 만들어 내는 행위 자체가 문체행위인데, 이 문체는 그 형성 요인을 네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언어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문체 개념, 주제, 장르, 기타 형식에 의해 형성되는 문체, 수신자나 수신 상황에 따라 형성되는 문체, 작가의 품성에 따라 형성되는 문체가 바로 그것이다. (김상태, <문체의 이론과 해석>, 집문당, 1993, 48~54쪽.)
문체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가가 선택하는 말의 문제이기 때문에 <광마일기>를 비롯하여 <광마잡담>에 보이는 ‘가벼움’의 서술미학은 결국 작가의 문체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권태>에서 손톱의 길이를 65센티미터로 길게 붙이게 하는 과장된 행위라든지, ‘나’가 ‘희수’에게 건네는 상스러운 말, 그리고 중간 중간에 내뱉는 희극적이기까지 한 대사들은, 페티시즘에 관한 사변적이고 장황한 <권태>의 담론과 주제가 ‘나’와 ‘희수’의 대화에 의해 더 지루해질 수 있는 여지를 해소시켜 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광마잡담>에서도 가볍고 구어적인 대사나 문장이 많이 나와 작품 전체의 이야기와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어 가는데, 이는 기존의 적지 않은 소설들이 문장 언어와 문체 면에서 독자에게 무거운 부담감을 주도록 의도됨으로써 작가의 정신적 무게나 깊이를 과잉 제시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창작 태도라 할 수 있다. 작품 제목 가운데 ‘잡담(雜談)’이란 어휘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당장의 현실적 효용성에 목적을 두지 않고 쏟아내는 일상의 잡담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카타르시스 되어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잡담 속에서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듯이, 소설도 꼭 무거우 주제나 교훈적 메시지를 주지 않더라도 탈현실적 상상의 과정 속에서 역설적으로 현실의 삶이 부과하는 고통을 극복할 수도 있다. 아마도 소설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벼운 잡담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방심의 상태에서 상상의 나래를 경쾌하게 펼쳐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마광수 소설의 속도감 있는 문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권태>에 비해 <광마일기>나 <광마집담>의 문체는 전기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하고 있어 소설을 찬찬히 음미하여 읽어 본 독자들이라면, 마치 3.4조나 4.4조의 산문시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본래 마광수의 문장이 길지 않은 호흡으로 쉽게 읽히면서도 경쾌한 리듬감을 주는 것도 이런 내재적 율격이 그의 문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어 이야기>는 이런 그의 문장과 문체적 특징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나’와 ‘염희(艶姬)’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작품 안에 삽입된 시편(詩篇), <공처가 이야기>에 나오는 유머러스한 주문(呪文), <모란꽃 이야기>의 단아한 서정적 문장들과 유현한 분위기를 북돋우는 장면들은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이야기 전개 면에서 현실과 비현실을 왕래하는 작품 배경을 설득력 있게 지원하고 있다.


5. 관능적 상상력의 글쓰기

<광마잡담>에서 보이는 이와 같은 서술 미학적 특징들은, 작가가 모든 문학 작품을 낭만적 자유정신에 토대를 둔 ‘인공적인 꿈’이라고 보는 한에서, 앞의 여러 인용문에 나타난 그의 소설 미학적 진술들을 매우 설득력 있는 요소들로 수용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인공적인 꿈’의 효과를 발휘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이 소설 전체의 유쾌한 재미를 받쳐 주고 있다. 교과서적인 소설 이론의 공식에 맞춰 마광수의 소설을 볼 때, 구성의 입체성이나 갈등의 양상이 아예 없거나 약화되어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은 동양문학의 전통과 작가의 독특한 서술 미학적 관점에 바탕을 둔 소설 양식을 의도적으로 실험하는 데서 나온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광마잡담>에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순간이동 방법’이나 ‘타임머신’을 이용하여 과학이 발달한 미래 세계에 다녀온 진기한 경험을 보여주는 <다이아나 이야기>와 <별은 멀어도> 두 편이다. 작가는 이 두 편의 이야기에서 현재의 시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하여, “문명과 합리적 지성과 복지가 거의 완벽하게 구현되고”, “성의 해방이 완전히 이루어져” “개인의 개성과 성을 가장 중요시”(174쪽) 하는 “행복한 지상낙원”(181쪽)을 꿈꾸고 있다. <다이아나 이야기>에서 화자인 ‘나’(작가 자신)는 우주의 ‘섹사 별’에서 날아온 ‘다이아나’라는 여인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관으로 놓고서 모든 일을 처리할 때 사람들의 마음은 평화로워지게 되고 또 사이좋은 재분배가 가능해 지게 되”는 ‘탐미적 평화주의’를 주장한다. 완전한 성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학교교육도 없으며, 유전자 복제기술이 발달해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천 살쯤 되는 완전한 유토피아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성의 해방이 이루어지면 ‘먹는 것’은 자연히 해결돼요. 기아의 문제는 식량의 생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른 ‘분배’에 있는 것이니까요. 성적으로 배불러지면 사람들은 마음이 너그러워지게 되고, 따라서 식량의 재분배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돼죠. 또 전쟁 따위로 성적 기아증을 해결하려는 마음도 없어져서 군사비에 쓸 예산을 식량 증산에 다 쓰게 되구요.](180쪽)

공상과학이나 유토피아를 다루는 작품의 내용들이 그렇듯이. 위의 인용문을 기조로 삼고 있는 <다이아나 이야기> 속의 상상력은 당연히 현실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일들로 ‘소망적 사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소설이 어차피 그 자체로 ‘현실 도피’라고 전제하는 한에서는 소설 속의 현실에서 상상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다이아나 이야기> 뿐만 아니라 <광마잡담>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모두 이런 전제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한편, 작가는 <별은 멀어도> 편에서는“완벽한 과학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이 생활의 풍요와 안락을 보장받고 있는 곳”, “건강한 정신상태 유지를 위해 관능의 쾌락을 철저하게 추구하고 향유하는 곳”(277쪽), “사이버네틱스(인공 두뇌학)의 발달에 의해 이룩되는 진정한 파라다이스”(281쪽)‘에로티카 3000’이라는 혹성을 설정하여 ‘실용주의적 쾌락주의’와‘복지지상주의 이론’을 펼친다. <가자, 장미여관으로>에서 일찍이 피력된 바 있었고, <광마잡담>의 <별은 멀어도>에서 다시 인용하고 있는 산문시 <신·4 >는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그려본 ‘신들의 나라’”(282쪽)라고 작가가 견지하고 있는 상상의 거점을 다음과 같이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神)들이 사는 나라에 가보았다. 신들은 마치 진시황과도 같은 쾌락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다만, 수많은 시녀나 노예가 모두 생물학적 로봇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로봇은 모두 다 잘생기고 예뻤는데, 인간과 똑같은 모습, 똑같은 지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들에게 자유의지가 없는 것만이 달랐다. 그들은 명령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거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어떠한 개인적 욕구도 갖지 않고 자기의 전문적인 일에 열중하는 이외에는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않는다. 남신(男神)은 절대복종하는 여자 로봇을 수십 개라도 가질 수 있다. 여신(女神)도 마찬가지로 남자 로봇을 수십 개라도 가질 수 있다. 로봇 제조 장치는 소유자의 취향에 따라 여러 종류의 로봇을 만들어낸다. 어떤 로봇에 싫증이 나면 그것을 파괴해 버리면 된다. 그래서 신들의 나라엔 결혼 제도 같은 것이 없다. 각자가 신나게 즐길 뿐이다. 내가 처음 보기엔 신들의 나라는 노예들이 우글거리는 나라였다. 아, 이상하고 신기한 신들의 나라, 어떤 사디스틱한 쾌락도 절대로 보장되는 즐거운 나라.](281~282쪽)

그렇다면 작가가 이와 같은 무애(無碍)한 상상의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 한 것은 무엇일까?
작가에 따르면 꿈과 환상은 우리들에게 정신적·심리적 진정제, 즉 카타르시스의 구실을 한다. 제도적 금기 때문에 현실 생활에서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 가령 폭력이나 마약에의 충동, 성적 욕망 등이 예술 작품이라는 상상적 세계를 통해서 상상적으로 충족되는 과정을 대리만족 혹은 대리배설로서의 카타르시스로 인정할 때, 역설적으로 예술 혹은 문학은 일종의 ‘무위적(無爲的)’ 속성을 갖게 된다. 그런데 문학의 이런 무위적 속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한다면 예술적 활동은 현실에서의 실질적 목적과는 무관하다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무목적의 목적’을 지향하는 이러한 무위성에서 예술은 유희, 즉 놀이와 서로 통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예술의 이 무위성은, 꿈이 현실에 대한 아무런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현실적 윤리와 억압에 대한 위반으로서의 ‘일탈행위’를 보장해 주는 개념이다. ‘현대판 전기소설’인 <광마잡담>에서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이런 문학적 입장은 여러 논의의 가능성을 남겨 두고 있긴 하지만, 소설을 ‘현실 도피’ 그 자체로 간주하는 마광수만의 독자적 문학관이 유쾌하게 구현된 하나의 실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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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愛論
마광수 지음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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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광수의 性 이론 >......<성애론>을 읽고


#. 마광수의 글쓰기: 그는 이론가인가?
그의 글을 읽을 때 미리 염두해 두어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그의 글을 철학서같은 이론서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마광수의 저서는 문학작품(시, 소설)과 몇권의 문학이론서나 평론을 제외하고는 모두 에세이식으로 씌여졌다. 여기서 에세이란 흔히 '수필'로 번역되는 그런 장르가 아니다. 오히려 서구장르의 '에세이'에 가깝다. 간단한 수필류는 분명히 아니고 그렇다고 이론서라고 하기엔 약간 느슨한 글이다. 따라서 그의 에세이류의 글을 읽을 때 등장하는 개념들을 곧이곧대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엄격한 문서가의 눈으로 보면 마광수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순전히 오류 투성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는 그런 개념들을 자기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글을 문학작품을 제외한 에세이들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특히 최근 저작 <<성애론>>을 주된 근거로 사용하겠다.

1. 사랑?
마광수의 성담론의 시작은 '사랑'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이란 좀더 명확하게 규정될 필요가 있다.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성애(性愛)'의 의미로 한정시켜 사용하는 게 낫다고 본다. 그러니까 '사랑'은 곧 '성애'이지 '정'은 아닌 것이다. '정'은 물론 사랑보다 훨씬 더 큰 결속력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사랑'같은 열정은 없다. 성애로서의 사랑은 '정신적 결속감'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관능적 경탄'의 감정으로부터 출발한다.>

마광수는 일단 '사랑'이란 개념에 자신만의 한계를 설정한다. 일단 사랑은 육체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이 아니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가 정신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육체적인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일반적인 세가지 구분인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중에 에로스만이 진정한 사랑이고 나머지는 에로스의 대용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마광수는 그 예로 황순원의 단편소설 '별'을 분석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누나와 소년과의 우애 - 필리아
2) 소년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 - 아가페 + 에로스
여기서 소년이 누나를 끝까지 미워한 것은 이들 사이에 에로스가 빠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미인이라고 믿는 소년은 못생긴 누나에게 에로스의 감정이 없고 단지 오누이라는 필리아만 허락되었기에 애증병존의 심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똑같은 결결과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마광수가 암시하는 것은 에로스가 빠진 명목상의 '사랑'은 항상 증오를 동반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소유욕으로서의 사랑'이나 '번식욕로서의 사랑'이 아닌 '놀이로서의 사랑'을 주장한다.

2. '野하다'라는 것?
마광수의 모든 주장은 결국 '야한 것'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루소와도 약간 비슷하다. 이것은 결국 원시시대의 생명력을 가정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가서 다루겠다. 그렇다면 마광수가 말하는 '야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보다 솔직하게 스스로의 본능을 드러내는 사람, 자연의 본성을 거스리지 않는 사람, 자기자신의 아름다움을 원시적인 정열을 가지고 천진난만하게 가꿔가는 사람이 '야한 사람'이다..... 이를테면 허위와 가식이 없이 자연스런 본능에 충실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야한 정신'이다...... 그러므로 야하는 것은 그런 다양성을 일정한 틀에 가둬버리려는 수구적 보수성에 대립하는 진보적 의미를 가진다.>

즉 제도화된 '정신적 의식'보다는 육체가 반응하는 본능에 충실하는 것이 야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야함'은 다양성을 산출할 수 밖에 없고 결국 수구적 기존체계에 반하여 진보적이다는 주장이다.

3. 성욕과 식욕
마광수의 커다란 전제 중에 하나가 바로 성욕과 식욕라는 구분이다. 이 구분은 크게 두가지 상황에서 사용되는데 하나는 인간구분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구분적 의미이다.
1)성욕적 인간/ 식욕적 인간
마광수는 이 두 인간형 구분을 성서에서 끌어낸다. 누가복음 10장과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일화를 보면 전자는 예수의 말에 경청하는 마리아와 집안일에 바쁜 마르타가, 후자에선 비싼 향유로 예수의 말을 씻기는 마리아와 그걸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한다는 유다가 대립된다. 예수는 물론 전자들을 택한다. 다시말해 중요한 것은 식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이다.
2)식욕적 사회/성욕적 사회
마광수는 현대 이전의 사회와 현대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이 개념을 사용하는데 전자는 경제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해 먹는 것에 연연해하던 시절을 말하고 후자는 식욕문제가 해결되어 이젠 성욕에의 관심이 증폭된 사회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개념적 구분을 명확한 것으로 한정시켜선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논리대로라면 마광수는 본질을 너무 간단하게 본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그러나 우린 이 구분을 명확한 사회학적 개념이 아닌 일상적 언어사용으로 보기로 하자. 왜냐면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4. 야한 성애 = 노출증 + 관음증
그렇다면 야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이에 대해 마광수는 다음같이 말한다.

<나는 야한 사람을 만드는 근본 심리가 '노출증'에 있다고 본다. 노츨증과 나르시시즘이 합쳐져 당당한 개성으로 발전할 때 그 사람이 '야한 사람'이 될 수 있고, 타인에게 관음(觀淫)의 충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니까 '노출증'과 '관음증'의 결합이 곧 '야한 성애'인 셈이다.>

이것은 다소 황당한 주장같이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마광수가 애초에 가정한 '사랑 = 성애'라는 등식을 생각한다면 이해되지 않을 것도 없다. 즉 '관음증'도 '노출증'도 모두가 생애를 원하는 본능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솔직한 '노출증'은 솔직한 '관음증'을 겸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들에 당당하게 민감한 사람이 곧 '야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노출증'은 보편적인 것으로 그렇다치더라도 '관음증'은 자칫 변태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그럼 왜 관음증이 생기는 것일까? 그리고 마광수는 왜 관음증을 사랑의 한부분으로 긍정적 입장을 취하는가?

<인간은 일년 내내 섹스를 할 수 있지만, 그러다 보면 에너지의 소모가 많아 직접적인 성행위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잠재의식 가운데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관음증'은 병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기절제적인 행위에 다름아니다. 더구나 남자에게 이런 관음증이 많은데 이는 현대국가에선 남자에게 '노출증'에 대한 욕구가 여자보다 더 억압되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마광수는 스스로의 노출증을 당당한 나르시시즘으로 즐겨라고 말한다.

5. 페시티즘(fetishism)
통상적으로 '절편음란증(節片淫亂症)'으로 번역되는 페티시즘은 흔히 변태로써 간주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예를 들어 이런 심리가 일상적인 심리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페시티즘을 여전히 병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성 대상을 대체하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성 목적을 위해서는 매우 부적절한 신체의 일부(발이나 머리칼 같은) 또는 성 대상을 대신하여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성행위와 연관지을 수 있는 무생물(즉, 옷이나 속옷 등)이다. 이러한 대체물은 야만인들이 자기들의 신(神)을 구현시키는 것이라고 믿는 물신(物神)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상적인 성 목적에 대한 충동이 어느정도 감소하는 것(생식기의 기능 부전)은 모든 사례에서 불가피한 전제 조건처럼 드러난다.

이와 같이 프로이트는 페시티즘이 정상적인 성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을 때 다른 것으로 대치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의 생각으론 이런 성욕의 고착이 정상적인 성욕을 완전히 벗어나면 결국 변태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광수는 이런 프로이트의 생각에 반대한다. 우선 그는 '절편음란증'이란 번역어가 변태성욕같은 인상을 주기싶다고 '고착적(固着的) 탐미애(耽美愛)'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이성을 볼 때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어떤 마술적 주물(呪物) 즉 페티쉬(fetish)에 흘려, 그것에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져든다고 할 수 있다...... 페티쉬는 '성적 상징 역할을 하는 일부분'이라는 의미에서 심볼리즘(symbolism)과도 관계가 깊다. 어떤 특정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거나 암시하는 것이 상징인데,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페티쉬는 '관능적 상상력의 확신을 위한 상징적 자극물'이다.>

그리고 이런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야말로 획일적인 균형미에서 다양한 개성미로 발전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와 마광수가 페티시즘을 보는 시작이 다름을 느끼게 된다.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이 정신병을 유발시킨다는 부정적 관점에서 보는 반면, 마광수는 오히려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여 페티시즘이 다양한 개성화를 촉구한다고 본다. 이 둘 중 누구의 이론이 옳은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에서 억압의 그림자를 본반면, 마광수는 해방의 그림자를 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보면 명확히 이 두 입장이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이 일종의 결여로써 발생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 결여를 채워야한다고 보고 결여를 만든 억압구조와 비슷한 다른 강압구조가 필요함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마광수는 페티시즘을 '야하게' 되려는 욕구로 본다. 그래서 여기엔 강압적으로 강요되는 보충이란 없다.

6. 원시주의
이 말은 현대 과학문명이 만들어낸 폐해를 극복하고 가정된 개념에 불과하다. 이는 루소가 <<인간불평등기원론>> 1부에서 말한 '원시상태'의 정신에 해당된다. 루소도 '원시상태'란 가정을 당시 문명사회와의 대립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시상태에 알맞는 인간을 '자연인'이라 생각했다. 이는 시민과 대립된다.

자연인은 완전히 자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그는 수의 단위이고 절대적인 정수(整數)이며, 단지 자기 자신이나 또는 그의 동료하고만 관계를 갖는다. 시민적 인간은 분모(分母)에 좌우되는 분수의 분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 가치는 정수(整數)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정수란 결국 사회공동체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회제도란 인간을 가장 부자연스럽게 하고 또 개인으로부터 절대적인 존재를 탈취하며 대신 상대적인 존재로 만들어 <자아>를 한 공동체 속에 몰입시킬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그 결과 각 개인은 이미 자기를 한 개체로 생각치 않고 전체의 일부분으로 믿게 되며 또 전체의 일부분으로밖에 자신을 의식하지 않게 마련이다.

마광수의 '야한 사람'도 결국 '자연인'과 같은 의미다. 마광수 자신도 이 점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합리성이란: 인용자) 결정론에 대한 저항이지요. 제가 당한 결정론, 즉 '섹스는 나쁘다'는 편견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합리성의 회복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어요. 우리나라엔 새로운 계몽주의가 필요해요. 여태까지는 계몽주의를 도덕적 경건주의와 동일시해 왔어요. 이광수식으로 정직해라, 순결해라, 뭐 그런 거죠. 그러나 원래 루소의 계몽주의는 기존의 중세기적 신본주의로부터의 탈피를 외치면서 합리성의 회복을 강조한 것이거든요. 그리고 또 '자연으로 돌아가자'고도 했는데, 제가 말한 '야하자'와 비슷한 거예요.">

그렇다면 루소과 마광수의 생각엔 차이가 없는가? 물론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그러나 난 근본적인 이념(획일적인 사회체계에 대한 거부와 개인성의 옹호)은 같다고 생각한다. 세부적인 것은 이곳에서 논할 내용이 아니기에 이쯤에서 그만 둔다. '자연/문화'란 이 구별은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레비스트로스, 데리다 등)

7. 프리 섹스/ 프리 인터코스
마광수는 사랑(섹스)의 개념을 확대하길 원한다. 그래서 '섹스 = 성교; 인터코스(intercourse)'라는 등식을 거부한다. 그리고 단순히 사정(射精)을 위한 성교보다 페팅(petting)을, 생식적 성교보다 구강성교(fellatio, cunnilingus)를 중요시 여긴다. 이와같은 생각은 섹스를 사회적인 의미에서 분리시켜 '놀이로서의 섹스'로 만들기 위해 나온 것이다.

8. 사디즘과 마조히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성적표현 양극점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전부터 '사도마조히즘'이라는 용어가 생겨나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한 몸에 나타나는 두가지 상극적인 성향으로 여겨졌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사디즘은 마조히즘과 합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는 당연히 완전히 자족적이며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개별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고 잇으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이 양자 간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들뢰즈의 분석과는 상관없이 마광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사용하고 있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디스트는 마조히스트와 성행위를 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 있고, 마조히스트는 사디스트에 의해서만 성적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사디스트가 능동적인 자아확장을 통해 행복해지려고 한다면, 마조히스트는 수동적인 자아포기를 통해 행복해지려고 한다.>

마광수는 이런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관능적 성애'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사회제도 자체를 사도마조히즘식으로 뜯어 고치지는 것은 아니라고 단서를 단다. 다시 말해 그는 이런 사도마조히즘식 욕구가 '놀이적 섹스'를 가능하게 하는 대표적인 심리임을 밝힐 뿐이다.
여기서 잠시 집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마광수와 들뢰즈의 마조히즘에 대한 입장이다. 우선 마광수는 사디스트가 마조히스트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오히려 그 역이 참이라고 보고 있다. 남성이 일반적으로 사티스트적인데 반해 여성은 마조히스트적이다라는 가정하에 그는 마조히스트의 전복적 성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조히즘을 여성 특유의 특권으로 향수(享受)할 때 남성혐오증은 불식될 수 있다. 사실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불쌍하다고 봐야 한다. 사디스트는 과도한 책임감에 짓눌려 있기 쉽다. 여자는 모든 책임을 남자에게 미룰 수 있는 국외자적(局外者的)방관자로서의 느긋함을 즐길 수 있으며, 한껏 야하게 화장할 수도 있고, 약쟈(弱者)임을 핑계삼아 보호받을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보면 못마땅해할 구절이다. 그러나 마광수는 남자와 여자가 절대 같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못박고 논의를 진행한다. 마조히즘은 '자궁회귀본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론 이것이 성차이로 나누어지는 절대적 진리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결국 같은 것이고 어느 쪽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들뢰즈가 보는 마조히즘은 어떤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가. 일단 그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를 각각 사드와 마조흐의 작품을 분석한다. 우선 사드의 작품에서 고통을 가하는 가해자는 고통을 받는 피해자가 자신의 행위에 의해 거부하려고 할 때만 쾌감을 느끼는 것이지, 피해자가 오히려 고통을 자처하려 든다면 그것은 사디스트에게 아무런 쾌감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낸다. 마조흐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마조히즘도 마찬가지다.

마조히즘에서의 박해자 여성은 결코 사디스트가 될 수 없다. 그 여성은 마조히즘적 상황 내에 존재하며 그 상황의 일부로서 마조히스트가 투사하는 환상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들뢰즈는 사디즘보다 마조히즘에 중요성을 더 부여한다. 왜냐면 마조히즘이 사도마조히즘이라는 엉터리 실체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양한 해석과 직관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사디즘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결정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사드 작품에 나오는 것같이 피해자가 자신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거기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끼는 박해자의 모습을 마조흐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특이한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해 박해자를 교육시키고 설득하며, 제휴를 맺으려 찾아 다니는 피해자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사디스트는 제도를 필요로 하며 마조히스트는 계약관계를 필요로 한다.

9. 카타르시스
마광수의 성애론 핵심은 '카타르시스 이론'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마광수는 본래 그대로의 개념적 의미를 버리고 자신만의 개념으로 바꾼다. 이에 대해 마광수가 <'즐거운 사라' 사건 항소 이유서>에서 밝힌 '카타르시스'에 대한 대목을 길게 인용해보기로 한다.

<'카타르시스'는 그리스어로 '배설'을 뜻하는 말인제, 마치 사하제(瀉下劑)에 의하여 장내(腸內)의 불순물을 청소해 주면 병이 낫듯이, 우리의 정신적 억압과 축적된 스트레스들을 문학 또는 기타 예술 작품에 의하여 배설시켜 주면 정신적 울체상태(鬱滯狀態)가 해소되어 건강한 정신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저는 카타르시스를 '정화'라는 말보다 '대리배설'이라는 말로 번역하여 학술용어화한 바 있습니다. 장내의 숙변을 청소, 즉 정화해주면 병이 낫듯이 정신 역시 억압된 본능 등에 의한 각종의 콤플렉스들을 정화시켜주면 오히려 정신이 평형을 유지할 수 있는데, '정화'라는 용어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도덕적 설교 위주의 예술만이 그 기능을 한다고 오해되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를 설명하면서 카타르시스의 효용을 낳은 비극 작품의 중요 요소로 '파토스' 즉 '고통'을 뽑았습니다. 즉 관객은 극중 인물의 고통을 보면서 원초적 본능 중의 하나인 가학성을 대리 충족받는 동시에 현실에서의 실제적 가학(이를테면 살인 등)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면역 이론'이라고 하는데.....>

마광수의 주장은 '카타르시스' 작용을 통해 본능이 왜곡되지 않도록 하자는 말이다. 이때 '카타르시스'를 흔히, 그리고 본뜻에 가까운 '정화'라는 뜻으로 사용하면 도덕적 의미가 침투하여 원래적 본능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대리배설'로 해석하여 말그대로 본능이 왜곡되지 않는 한도에서 본능을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만약 본능이 '대리배설' 행위로라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엄청나게 왜곡된 괴물의 형태로 나타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 보면 마광수는 라이히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이히도 성이 억압되면 대중들이 그 에너지를 배설하기 위해 완전히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의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인 심리 반응은 오늘날 만족에 도달하지 모한 성 에너지를 다른 곳에다 병적으로 환치시킨 것이 틀림없다......... 성 에너지의 억압이 특정한 사회에서 어떻게 사회적으로 표현되고 있는가? 그것은 다름아니라 목표에 상응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행동, 광기, 신비주의 그리고 자발적인 전쟁 참여 행동 등이다.

따라서 라이히는 성해방을 주장하고 새로운 성교육을 이야기한다. 이와 비슷하게 마광수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성에너지가 왜곡되지 않고 배설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나온 것이 바로 '카타르시스' 즉 '대리배설'이란 개념이다. 기존의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은 항상 도덕과 그로인한 초석적 폭력(violence fondatrice)을 담지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광수는 이런 폭력적인 내포의미를 과감히 잘라내어 바로 제도적 힘이 미치지 않는 개념으로 다시 만들어 냈다.

10. 고독 <= 의타심
마광수가 자신의 논의에서 성애를 넘어선 상위개념으로 다루는 것이 '고독'이다. 그는 고독에 대해 '성과 무관하게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절대적 고립감'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럼 이런 고독의 근원은 무엇일까? 마광수는 '영양과잉에 따른 잉여에너지가 제대로 분출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때 잉여 에너지란 결국 '성욕'이다. 그래서 고독은 결국 '성 에너지'가 제대로 분출되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윤리적 제도는 이 에너지를 억압하고 이 에너지를 '숭고한 사랑'이란 대상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숭고한 지향점이란 성에너지를 배설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마광수는 '오르가즘'이란 말 자체도 거부한다. 그는 이 개념도 의사들이 만들어낸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딱 잘라 말한다.

<있는 것은 오직 '기계적인 자극과 배설'뿐이다.>

그리고 정신적 사랑이든 육체적 사랑이든 모든 사랑은 결국 나르시시즘적 자위행위에 불과하다고 못 박는다. 헛된 희망을 갖기보다 차라리 현실적 절망을 인정하라고 충고한다. 그래서 마광수가 이른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고독'이란 결국 '의타심(依他心)'에서 온다. 의타심을 완전히 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독으로부터 당당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 타인들(가족을 포함하여)에게 기대봤자 남는 것은 환멸 뿐이다.
요행히 죽이 맞는 짝을 만났다 하더라도 '고상한 사랑'을 하지 말라. 동물적인 자세로 '즐기는 사랑'만 하라. 본능에 '솔직한 사랑'은 아낌없이 즐기는 것이 그 본질이다.>

마광수는 고독을 만드는 것이 '의타심'이라고 판단한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이외에 다른 누구일 수 없다는 생각, 그러므로 타인은 나와 전혀 다르다는 '타자성의 철학'과 비슷하다. 그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 성애, 즉 에로스이다.

우리는 관계 가운데에서도 에로스적 관계의 예외적인 위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타자성의 관계요, 신비화의 관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미래와의 관계, 모든 것이 현존해 있는 세계 안에서는 결코 현존해 있지 않은 것과의 관계요, 모든 것이 현존해 있을 때는 그곳에 있을 수 없는 것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현존하지 않는 존재와의 관계가 아니라 타자성의 차원 자체와의 관계이다........ 사랑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며 우리의 주도권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랑은 아무런 이유가 없이 존재하고 우리를 엄습하고 상처를 준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자아는 보존된다.

이같이 레비나스는 에로스가 본질적으로 타자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면 성행위에서는 완벽하게 하나됨의 융합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욕은 우리들(이성)에 의해 통제될 수 없는 순수함 그 자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미끄러져 나가는 놀이이다.

애무(愛撫)는 주체의 존재 방식이다. 애무를 통해 주체는 타자와의 접촉에서 단지 첩촉 이상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감각활동으로서의 접촉은 빛의 세계의 일부를 형성한다. 하지만 올바르게 말하자면 애무를 받는 대상은 손에 닿지 않는다. 이러한 접촉에서 주어지는 손의 미지근함이나 드러움, 이것이 애무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애무의 추구는, 애무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본질로 구성한다. <모른다>는 것, 근본적으로 질서잡혀 있지 않음, 이것이 애무에서 본질적인 것이다.......애무는 아무 내용 없는, 순수한 미래를 기다리는 행위이다. 애무는 거머쥘 수 없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 주는 이러한 배고픔의 증대, 점점 더 풍요해지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애무는 헤아릴 수 없는 배고픔을 먹고 산다.

이와 같이 레비나스도 에로스가 영원히 지연되는 무엇인가로 결정화되는 어떤 것(숭고함)이길 거부한다. 그리고 이런 '사랑 안에서의 의사소통 실패로 제안된 것'이야말로 이 관계가 안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틴 부버의 생각과도 크게 구별된다.

코스모스, 즉 플라톤의 세계와 맞서서 정신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에서는 에로스가 함축하는 의미를 유(類)의 논리로 환원하지 않을뿐더러 자아(le moi)는 동일자(le meme)를, 타인(autrui)은 타자(l'autre)를 대치한다.

그리고 이런 세계가 되야 인간은 고독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점에서 마광수는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과 거의 같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물을 지도 모른다. '마광수의 생각은 옳다. 의타심에서 동일자의 사고가 나온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런 의타심마저 없다면 인생이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 ' 그러나 마광수는 아마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당신은 외로움이 의타심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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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愛論
마광수 지음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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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광수의 性 이론 >......<성애론>을 읽고


#. 마광수의 글쓰기: 그는 이론가인가?
그의 글을 읽을 때 미리 염두해 두어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그의 글을 철학서같은 이론서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마광수의 저서는 문학작품(시, 소설)과 몇권의 문학이론서나 평론을 제외하고는 모두 에세이식으로 씌여졌다. 여기서 에세이란 흔히 '수필'로 번역되는 그런 장르가 아니다. 오히려 서구장르의 '에세이'에 가깝다. 간단한 수필류는 분명히 아니고 그렇다고 이론서라고 하기엔 약간 느슨한 글이다. 따라서 그의 에세이류의 글을 읽을 때 등장하는 개념들을 곧이곧대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엄격한 문서가의 눈으로 보면 마광수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순전히 오류 투성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는 그런 개념들을 자기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글을 문학작품을 제외한 에세이들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특히 최근 저작 <<성애론>>을 주된 근거로 사용하겠다.

1. 사랑?
마광수의 성담론의 시작은 '사랑'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이란 좀더 명확하게 규정될 필요가 있다.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성애(性愛)'의 의미로 한정시켜 사용하는 게 낫다고 본다. 그러니까 '사랑'은 곧 '성애'이지 '정'은 아닌 것이다. '정'은 물론 사랑보다 훨씬 더 큰 결속력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사랑'같은 열정은 없다. 성애로서의 사랑은 '정신적 결속감'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관능적 경탄'의 감정으로부터 출발한다.>

마광수는 일단 '사랑'이란 개념에 자신만의 한계를 설정한다. 일단 사랑은 육체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이 아니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가 정신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육체적인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일반적인 세가지 구분인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중에 에로스만이 진정한 사랑이고 나머지는 에로스의 대용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마광수는 그 예로 황순원의 단편소설 '별'을 분석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누나와 소년과의 우애 - 필리아
2) 소년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 - 아가페 + 에로스
여기서 소년이 누나를 끝까지 미워한 것은 이들 사이에 에로스가 빠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미인이라고 믿는 소년은 못생긴 누나에게 에로스의 감정이 없고 단지 오누이라는 필리아만 허락되었기에 애증병존의 심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똑같은 결결과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마광수가 암시하는 것은 에로스가 빠진 명목상의 '사랑'은 항상 증오를 동반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소유욕으로서의 사랑'이나 '번식욕로서의 사랑'이 아닌 '놀이로서의 사랑'을 주장한다.

2. '野하다'라는 것?
마광수의 모든 주장은 결국 '야한 것'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루소와도 약간 비슷하다. 이것은 결국 원시시대의 생명력을 가정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가서 다루겠다. 그렇다면 마광수가 말하는 '야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보다 솔직하게 스스로의 본능을 드러내는 사람, 자연의 본성을 거스리지 않는 사람, 자기자신의 아름다움을 원시적인 정열을 가지고 천진난만하게 가꿔가는 사람이 '야한 사람'이다..... 이를테면 허위와 가식이 없이 자연스런 본능에 충실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야한 정신'이다...... 그러므로 야하는 것은 그런 다양성을 일정한 틀에 가둬버리려는 수구적 보수성에 대립하는 진보적 의미를 가진다.>

즉 제도화된 '정신적 의식'보다는 육체가 반응하는 본능에 충실하는 것이 야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야함'은 다양성을 산출할 수 밖에 없고 결국 수구적 기존체계에 반하여 진보적이다는 주장이다.

3. 성욕과 식욕
마광수의 커다란 전제 중에 하나가 바로 성욕과 식욕라는 구분이다. 이 구분은 크게 두가지 상황에서 사용되는데 하나는 인간구분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구분적 의미이다.
1)성욕적 인간/ 식욕적 인간
마광수는 이 두 인간형 구분을 성서에서 끌어낸다. 누가복음 10장과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일화를 보면 전자는 예수의 말에 경청하는 마리아와 집안일에 바쁜 마르타가, 후자에선 비싼 향유로 예수의 말을 씻기는 마리아와 그걸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한다는 유다가 대립된다. 예수는 물론 전자들을 택한다. 다시말해 중요한 것은 식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이다.
2)식욕적 사회/성욕적 사회
마광수는 현대 이전의 사회와 현대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이 개념을 사용하는데 전자는 경제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해 먹는 것에 연연해하던 시절을 말하고 후자는 식욕문제가 해결되어 이젠 성욕에의 관심이 증폭된 사회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개념적 구분을 명확한 것으로 한정시켜선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논리대로라면 마광수는 본질을 너무 간단하게 본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그러나 우린 이 구분을 명확한 사회학적 개념이 아닌 일상적 언어사용으로 보기로 하자. 왜냐면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4. 야한 성애 = 노출증 + 관음증
그렇다면 야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이에 대해 마광수는 다음같이 말한다.

<나는 야한 사람을 만드는 근본 심리가 '노출증'에 있다고 본다. 노츨증과 나르시시즘이 합쳐져 당당한 개성으로 발전할 때 그 사람이 '야한 사람'이 될 수 있고, 타인에게 관음(觀淫)의 충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니까 '노출증'과 '관음증'의 결합이 곧 '야한 성애'인 셈이다.>

이것은 다소 황당한 주장같이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마광수가 애초에 가정한 '사랑 = 성애'라는 등식을 생각한다면 이해되지 않을 것도 없다. 즉 '관음증'도 '노출증'도 모두가 생애를 원하는 본능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솔직한 '노출증'은 솔직한 '관음증'을 겸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들에 당당하게 민감한 사람이 곧 '야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노출증'은 보편적인 것으로 그렇다치더라도 '관음증'은 자칫 변태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그럼 왜 관음증이 생기는 것일까? 그리고 마광수는 왜 관음증을 사랑의 한부분으로 긍정적 입장을 취하는가?

<인간은 일년 내내 섹스를 할 수 있지만, 그러다 보면 에너지의 소모가 많아 직접적인 성행위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잠재의식 가운데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관음증'은 병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기절제적인 행위에 다름아니다. 더구나 남자에게 이런 관음증이 많은데 이는 현대국가에선 남자에게 '노출증'에 대한 욕구가 여자보다 더 억압되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마광수는 스스로의 노출증을 당당한 나르시시즘으로 즐겨라고 말한다.

5. 페시티즘(fetishism)
통상적으로 '절편음란증(節片淫亂症)'으로 번역되는 페티시즘은 흔히 변태로써 간주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예를 들어 이런 심리가 일상적인 심리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페시티즘을 여전히 병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성 대상을 대체하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성 목적을 위해서는 매우 부적절한 신체의 일부(발이나 머리칼 같은) 또는 성 대상을 대신하여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성행위와 연관지을 수 있는 무생물(즉, 옷이나 속옷 등)이다. 이러한 대체물은 야만인들이 자기들의 신(神)을 구현시키는 것이라고 믿는 물신(物神)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상적인 성 목적에 대한 충동이 어느정도 감소하는 것(생식기의 기능 부전)은 모든 사례에서 불가피한 전제 조건처럼 드러난다.

이와 같이 프로이트는 페시티즘이 정상적인 성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을 때 다른 것으로 대치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의 생각으론 이런 성욕의 고착이 정상적인 성욕을 완전히 벗어나면 결국 변태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광수는 이런 프로이트의 생각에 반대한다. 우선 그는 '절편음란증'이란 번역어가 변태성욕같은 인상을 주기싶다고 '고착적(固着的) 탐미애(耽美愛)'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이성을 볼 때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어떤 마술적 주물(呪物) 즉 페티쉬(fetish)에 흘려, 그것에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져든다고 할 수 있다...... 페티쉬는 '성적 상징 역할을 하는 일부분'이라는 의미에서 심볼리즘(symbolism)과도 관계가 깊다. 어떤 특정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거나 암시하는 것이 상징인데,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페티쉬는 '관능적 상상력의 확신을 위한 상징적 자극물'이다.>

그리고 이런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야말로 획일적인 균형미에서 다양한 개성미로 발전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와 마광수가 페티시즘을 보는 시작이 다름을 느끼게 된다.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이 정신병을 유발시킨다는 부정적 관점에서 보는 반면, 마광수는 오히려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여 페티시즘이 다양한 개성화를 촉구한다고 본다. 이 둘 중 누구의 이론이 옳은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에서 억압의 그림자를 본반면, 마광수는 해방의 그림자를 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보면 명확히 이 두 입장이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이 일종의 결여로써 발생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 결여를 채워야한다고 보고 결여를 만든 억압구조와 비슷한 다른 강압구조가 필요함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마광수는 페티시즘을 '야하게' 되려는 욕구로 본다. 그래서 여기엔 강압적으로 강요되는 보충이란 없다.

6. 원시주의
이 말은 현대 과학문명이 만들어낸 폐해를 극복하고 가정된 개념에 불과하다. 이는 루소가 <<인간불평등기원론>> 1부에서 말한 '원시상태'의 정신에 해당된다. 루소도 '원시상태'란 가정을 당시 문명사회와의 대립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시상태에 알맞는 인간을 '자연인'이라 생각했다. 이는 시민과 대립된다.

자연인은 완전히 자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그는 수의 단위이고 절대적인 정수(整數)이며, 단지 자기 자신이나 또는 그의 동료하고만 관계를 갖는다. 시민적 인간은 분모(分母)에 좌우되는 분수의 분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 가치는 정수(整數)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정수란 결국 사회공동체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회제도란 인간을 가장 부자연스럽게 하고 또 개인으로부터 절대적인 존재를 탈취하며 대신 상대적인 존재로 만들어 <자아>를 한 공동체 속에 몰입시킬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그 결과 각 개인은 이미 자기를 한 개체로 생각치 않고 전체의 일부분으로 믿게 되며 또 전체의 일부분으로밖에 자신을 의식하지 않게 마련이다.

마광수의 '야한 사람'도 결국 '자연인'과 같은 의미다. 마광수 자신도 이 점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합리성이란: 인용자) 결정론에 대한 저항이지요. 제가 당한 결정론, 즉 '섹스는 나쁘다'는 편견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합리성의 회복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어요. 우리나라엔 새로운 계몽주의가 필요해요. 여태까지는 계몽주의를 도덕적 경건주의와 동일시해 왔어요. 이광수식으로 정직해라, 순결해라, 뭐 그런 거죠. 그러나 원래 루소의 계몽주의는 기존의 중세기적 신본주의로부터의 탈피를 외치면서 합리성의 회복을 강조한 것이거든요. 그리고 또 '자연으로 돌아가자'고도 했는데, 제가 말한 '야하자'와 비슷한 거예요.">

그렇다면 루소과 마광수의 생각엔 차이가 없는가? 물론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그러나 난 근본적인 이념(획일적인 사회체계에 대한 거부와 개인성의 옹호)은 같다고 생각한다. 세부적인 것은 이곳에서 논할 내용이 아니기에 이쯤에서 그만 둔다. '자연/문화'란 이 구별은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레비스트로스, 데리다 등)

7. 프리 섹스/ 프리 인터코스
마광수는 사랑(섹스)의 개념을 확대하길 원한다. 그래서 '섹스 = 성교; 인터코스(intercourse)'라는 등식을 거부한다. 그리고 단순히 사정(射精)을 위한 성교보다 페팅(petting)을, 생식적 성교보다 구강성교(fellatio, cunnilingus)를 중요시 여긴다. 이와같은 생각은 섹스를 사회적인 의미에서 분리시켜 '놀이로서의 섹스'로 만들기 위해 나온 것이다.

8. 사디즘과 마조히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성적표현 양극점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전부터 '사도마조히즘'이라는 용어가 생겨나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한 몸에 나타나는 두가지 상극적인 성향으로 여겨졌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사디즘은 마조히즘과 합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는 당연히 완전히 자족적이며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개별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고 잇으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이 양자 간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들뢰즈의 분석과는 상관없이 마광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사용하고 있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디스트는 마조히스트와 성행위를 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 있고, 마조히스트는 사디스트에 의해서만 성적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사디스트가 능동적인 자아확장을 통해 행복해지려고 한다면, 마조히스트는 수동적인 자아포기를 통해 행복해지려고 한다.>

마광수는 이런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관능적 성애'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사회제도 자체를 사도마조히즘식으로 뜯어 고치지는 것은 아니라고 단서를 단다. 다시 말해 그는 이런 사도마조히즘식 욕구가 '놀이적 섹스'를 가능하게 하는 대표적인 심리임을 밝힐 뿐이다.
여기서 잠시 집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마광수와 들뢰즈의 마조히즘에 대한 입장이다. 우선 마광수는 사디스트가 마조히스트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오히려 그 역이 참이라고 보고 있다. 남성이 일반적으로 사티스트적인데 반해 여성은 마조히스트적이다라는 가정하에 그는 마조히스트의 전복적 성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조히즘을 여성 특유의 특권으로 향수(享受)할 때 남성혐오증은 불식될 수 있다. 사실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불쌍하다고 봐야 한다. 사디스트는 과도한 책임감에 짓눌려 있기 쉽다. 여자는 모든 책임을 남자에게 미룰 수 있는 국외자적(局外者的)방관자로서의 느긋함을 즐길 수 있으며, 한껏 야하게 화장할 수도 있고, 약쟈(弱者)임을 핑계삼아 보호받을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보면 못마땅해할 구절이다. 그러나 마광수는 남자와 여자가 절대 같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못박고 논의를 진행한다. 마조히즘은 '자궁회귀본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론 이것이 성차이로 나누어지는 절대적 진리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결국 같은 것이고 어느 쪽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들뢰즈가 보는 마조히즘은 어떤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가. 일단 그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를 각각 사드와 마조흐의 작품을 분석한다. 우선 사드의 작품에서 고통을 가하는 가해자는 고통을 받는 피해자가 자신의 행위에 의해 거부하려고 할 때만 쾌감을 느끼는 것이지, 피해자가 오히려 고통을 자처하려 든다면 그것은 사디스트에게 아무런 쾌감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낸다. 마조흐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마조히즘도 마찬가지다.

마조히즘에서의 박해자 여성은 결코 사디스트가 될 수 없다. 그 여성은 마조히즘적 상황 내에 존재하며 그 상황의 일부로서 마조히스트가 투사하는 환상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들뢰즈는 사디즘보다 마조히즘에 중요성을 더 부여한다. 왜냐면 마조히즘이 사도마조히즘이라는 엉터리 실체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양한 해석과 직관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사디즘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결정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사드 작품에 나오는 것같이 피해자가 자신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거기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끼는 박해자의 모습을 마조흐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특이한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해 박해자를 교육시키고 설득하며, 제휴를 맺으려 찾아 다니는 피해자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사디스트는 제도를 필요로 하며 마조히스트는 계약관계를 필요로 한다.

9. 카타르시스
마광수의 성애론 핵심은 '카타르시스 이론'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마광수는 본래 그대로의 개념적 의미를 버리고 자신만의 개념으로 바꾼다. 이에 대해 마광수가 <'즐거운 사라' 사건 항소 이유서>에서 밝힌 '카타르시스'에 대한 대목을 길게 인용해보기로 한다.

<'카타르시스'는 그리스어로 '배설'을 뜻하는 말인제, 마치 사하제(瀉下劑)에 의하여 장내(腸內)의 불순물을 청소해 주면 병이 낫듯이, 우리의 정신적 억압과 축적된 스트레스들을 문학 또는 기타 예술 작품에 의하여 배설시켜 주면 정신적 울체상태(鬱滯狀態)가 해소되어 건강한 정신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저는 카타르시스를 '정화'라는 말보다 '대리배설'이라는 말로 번역하여 학술용어화한 바 있습니다. 장내의 숙변을 청소, 즉 정화해주면 병이 낫듯이 정신 역시 억압된 본능 등에 의한 각종의 콤플렉스들을 정화시켜주면 오히려 정신이 평형을 유지할 수 있는데, '정화'라는 용어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도덕적 설교 위주의 예술만이 그 기능을 한다고 오해되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를 설명하면서 카타르시스의 효용을 낳은 비극 작품의 중요 요소로 '파토스' 즉 '고통'을 뽑았습니다. 즉 관객은 극중 인물의 고통을 보면서 원초적 본능 중의 하나인 가학성을 대리 충족받는 동시에 현실에서의 실제적 가학(이를테면 살인 등)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면역 이론'이라고 하는데.....>

마광수의 주장은 '카타르시스' 작용을 통해 본능이 왜곡되지 않도록 하자는 말이다. 이때 '카타르시스'를 흔히, 그리고 본뜻에 가까운 '정화'라는 뜻으로 사용하면 도덕적 의미가 침투하여 원래적 본능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대리배설'로 해석하여 말그대로 본능이 왜곡되지 않는 한도에서 본능을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만약 본능이 '대리배설' 행위로라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엄청나게 왜곡된 괴물의 형태로 나타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 보면 마광수는 라이히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이히도 성이 억압되면 대중들이 그 에너지를 배설하기 위해 완전히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의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인 심리 반응은 오늘날 만족에 도달하지 모한 성 에너지를 다른 곳에다 병적으로 환치시킨 것이 틀림없다......... 성 에너지의 억압이 특정한 사회에서 어떻게 사회적으로 표현되고 있는가? 그것은 다름아니라 목표에 상응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행동, 광기, 신비주의 그리고 자발적인 전쟁 참여 행동 등이다.

따라서 라이히는 성해방을 주장하고 새로운 성교육을 이야기한다. 이와 비슷하게 마광수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성에너지가 왜곡되지 않고 배설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나온 것이 바로 '카타르시스' 즉 '대리배설'이란 개념이다. 기존의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은 항상 도덕과 그로인한 초석적 폭력(violence fondatrice)을 담지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광수는 이런 폭력적인 내포의미를 과감히 잘라내어 바로 제도적 힘이 미치지 않는 개념으로 다시 만들어 냈다.

10. 고독 <= 의타심
마광수가 자신의 논의에서 성애를 넘어선 상위개념으로 다루는 것이 '고독'이다. 그는 고독에 대해 '성과 무관하게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절대적 고립감'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럼 이런 고독의 근원은 무엇일까? 마광수는 '영양과잉에 따른 잉여에너지가 제대로 분출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때 잉여 에너지란 결국 '성욕'이다. 그래서 고독은 결국 '성 에너지'가 제대로 분출되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윤리적 제도는 이 에너지를 억압하고 이 에너지를 '숭고한 사랑'이란 대상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숭고한 지향점이란 성에너지를 배설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마광수는 '오르가즘'이란 말 자체도 거부한다. 그는 이 개념도 의사들이 만들어낸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딱 잘라 말한다.

<있는 것은 오직 '기계적인 자극과 배설'뿐이다.>

그리고 정신적 사랑이든 육체적 사랑이든 모든 사랑은 결국 나르시시즘적 자위행위에 불과하다고 못 박는다. 헛된 희망을 갖기보다 차라리 현실적 절망을 인정하라고 충고한다. 그래서 마광수가 이른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고독'이란 결국 '의타심(依他心)'에서 온다. 의타심을 완전히 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독으로부터 당당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 타인들(가족을 포함하여)에게 기대봤자 남는 것은 환멸 뿐이다.
요행히 죽이 맞는 짝을 만났다 하더라도 '고상한 사랑'을 하지 말라. 동물적인 자세로 '즐기는 사랑'만 하라. 본능에 '솔직한 사랑'은 아낌없이 즐기는 것이 그 본질이다.>

마광수는 고독을 만드는 것이 '의타심'이라고 판단한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이외에 다른 누구일 수 없다는 생각, 그러므로 타인은 나와 전혀 다르다는 '타자성의 철학'과 비슷하다. 그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 성애, 즉 에로스이다.

우리는 관계 가운데에서도 에로스적 관계의 예외적인 위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타자성의 관계요, 신비화의 관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미래와의 관계, 모든 것이 현존해 있는 세계 안에서는 결코 현존해 있지 않은 것과의 관계요, 모든 것이 현존해 있을 때는 그곳에 있을 수 없는 것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현존하지 않는 존재와의 관계가 아니라 타자성의 차원 자체와의 관계이다........ 사랑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며 우리의 주도권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랑은 아무런 이유가 없이 존재하고 우리를 엄습하고 상처를 준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자아는 보존된다.

이같이 레비나스는 에로스가 본질적으로 타자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면 성행위에서는 완벽하게 하나됨의 융합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욕은 우리들(이성)에 의해 통제될 수 없는 순수함 그 자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미끄러져 나가는 놀이이다.

애무(愛撫)는 주체의 존재 방식이다. 애무를 통해 주체는 타자와의 접촉에서 단지 첩촉 이상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감각활동으로서의 접촉은 빛의 세계의 일부를 형성한다. 하지만 올바르게 말하자면 애무를 받는 대상은 손에 닿지 않는다. 이러한 접촉에서 주어지는 손의 미지근함이나 드러움, 이것이 애무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애무의 추구는, 애무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본질로 구성한다. <모른다>는 것, 근본적으로 질서잡혀 있지 않음, 이것이 애무에서 본질적인 것이다.......애무는 아무 내용 없는, 순수한 미래를 기다리는 행위이다. 애무는 거머쥘 수 없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 주는 이러한 배고픔의 증대, 점점 더 풍요해지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애무는 헤아릴 수 없는 배고픔을 먹고 산다.

이와 같이 레비나스도 에로스가 영원히 지연되는 무엇인가로 결정화되는 어떤 것(숭고함)이길 거부한다. 그리고 이런 '사랑 안에서의 의사소통 실패로 제안된 것'이야말로 이 관계가 안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틴 부버의 생각과도 크게 구별된다.

코스모스, 즉 플라톤의 세계와 맞서서 정신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에서는 에로스가 함축하는 의미를 유(類)의 논리로 환원하지 않을뿐더러 자아(le moi)는 동일자(le meme)를, 타인(autrui)은 타자(l'autre)를 대치한다.

그리고 이런 세계가 되야 인간은 고독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점에서 마광수는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과 거의 같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물을 지도 모른다. '마광수의 생각은 옳다. 의타심에서 동일자의 사고가 나온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런 의타심마저 없다면 인생이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 ' 그러나 마광수는 아마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당신은 외로움이 의타심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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