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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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생각을 많이 하게되는 책이었다 . 중요하지만 간과했는 줄도 몰랐던 같은 사건 다른관점들. 끊임없이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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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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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사회적 폭력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 상처를 이해하는 일은 아프면서 동시에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그 상처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몸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한국 정부는 낙태를 음성적으로 권장하던 시기에도, 낙태금지를 실질적으로 고려하는 시기에도 계속해서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관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결정 과정에서 당사자인여성은 항상 배제되었습니다. 이 예민하고도 복잡한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여성이왜 낙태를 선택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그 고통스러운 당사자의 목소리에 차분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시작일 것입니다.

이런 연구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몸에 새겨진사회적 경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생애 초기의 경험일수록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배 속에 있는 태아나 막 태어난 아이가 굶주리는 것은 같은 기간 성인이 굶주리는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일 테니까요.
우리가 인간의 몸과 질병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그런 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공동체에서 특정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희로애락의 다양한 경험을 하지요. 그 경험들은 태아기의 굶주림처럼 우리가 인지하고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몸에 새겨져, 때로는 당뇨병의 원인이 때로는 우울증의 원인이 되어 우리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줍니다. 그렇게 오래전 사회가 남긴 상처가 인간의 몸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연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위험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금연에실패할 경우, 그 원인은 개인의 금연 의지 부족일까요, 아니면 금연 의지를 좌절시키는 위험한 작업환경일까요? 물론 둘 다 중요한 원인이고 함께 바뀌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자는 개인의 역할이고 후자는 작업장과 회사와 국가의 책임이지요. 한국사회는 전자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은지질문해봅니다.

이런 결과는 경제위기를 겪을 때 국가가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보다 구체적으로는 ‘효율‘이라는 이름하에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이행을 요구하는 IMF의 권고사항을 국가가 얼마나따랐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결핵 사망률이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데이비드 스터클러 교수는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공공의료 시스템과 사회안전망에 투자하는 비용이 감소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스템에 들어가는 돈을 줄이지 않고서는 IMF가 요구하는 경제적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을알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스터클러 교수는 이후 출판된 다른 논문에서 이러한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 이유로, 의료 인력이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노동시장을 보호하는 것과 같은 사회안전망이 축소되고, 빈곤층이 늘어나고, 질병 감시체계에 대한 사회적 투자가 줄어드는 것 등이 언급됩니다.

건강은 공동체의 책임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몸에서 나타나는 병리적인 변화는 항상 유전적인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함께 상호작용하며 나타나고 진행됩니다. 공동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에,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어 진행되는 병이란 존재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개개인으로만 바라볼 때 그런 사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난 100년간거대한 혁신을 이뤄낸 현대 의학으로도 알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병원에 찾아오는 개개인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병원의 임상진료 과정에서는 환자 개개인의 몸에 새겨진 사회구조적 원인을, 현상너머에서 작동하는 정치·경제적 구조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지역에서 금연하지 못하는 건설노동자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 시골 지역에서 AIDS로 사망한 여성도, 동유럽의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하던 나라에서 결핵에 걸린 어린이도, 개개인만을 바라본다면 특정 질환을 가진 환자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이들을 아프게 했던 ‘원인의 원인이 보입니다. 그 원인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위험한 작업장을 방치했던 일터가 금연율을 낮췄고, HIV 치료약 공급을 전적으로 민간보험에 맡겨둔 지역사회가 AIDS 사망률을 높였고, 경제위기 속에서 공공보건의료영역의 투자를 줄이기로 한 국가의 결정이 결핵 사망률을 증가시켰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진행되는 의사결정 과정을 지켜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어떤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것인가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는과정이 정당했는가에 대한 논의가 실종된 사회에서, 앞서 이야기한 과학적 합리성의 세 가 지 요소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집니다.

우리 모두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해고를 당했을 때, 한국사회가 나를 돌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요. 그래서 그 위기를 대비하고자 각자 준비를 하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에는 그동안 여러 참사가 있었습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9년 씨랜드 화재 참사,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까지요. 저는 세월호 생존 학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 한국에서 발생했던 여러 참사들에서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놀라울 만큼 기록이라 할 만한 게 없었어요. 간혹 발견되는 신문기사 말고는 그 참사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간에대해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픔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대책이 있을 리도 없었겠지요. 그 참사의 원인을 제공했던 국가는그 아픔을 개개인에게 넘긴 채, 계속 정권이 바뀌며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억되지 않은 참사는 반복되기 마련입니 다. 세월호 참사까지 기록 없이 이렇게 지나간 사건으로 남겨둘 수는 없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이 참사의 연쇄 고리를 끊었던 사건으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준비를 하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그토록 적극적이었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절반만, 아니 그 반의반만이라도 그때 열정의 10퍼센트를 가지고,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소득과 시간의 10퍼센트를 소외된 약자를 위해 쓰고 있다면, 사회가 지금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에요.

그리고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점점 그런 인간을 시대에 뒤떨어진 천연기념물처럼 만들고,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꿈을 펼치기를 권장하고경쟁이 모든 사회구성의 기본 논리라고 주장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게 저는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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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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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개인주의인가. 이 복잡하고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우리가 서구에서 수입한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개인들을 전제로 성립되어 있다. 우리 사회 존립의 근거인 가장 근본적인 사회계약, 즉 우리 헌법 질서의 근간이 그렇다. 이건 모두 유치원 때부터 배워온 지루할 정도로 상식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슬플 만큼 이 사회에 내면화되어 있지 못한 이야기다. 뭔가 오랜 역사를 가진 명품을 수입하기는 했는데, 장식용에 그치고 있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집착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는 이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그냥 남을 안 부러워하면 안 되나. 남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건가. 배가 몇 겹씩 접혀도 남들 신경 안 쓴 채 비키니 입고 제멋으로 즐기는 문화와 충분히 날씬한데도 아주 조금의 군살이라도 남들에게 지적당할까봐 밥을 굶고 지방흡입을 하는 문화 사이에 어느 쪽이 더 개인의 행복에 유리할까.

예민하고 내향적인 사람들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 함부로간섭하지 않고 배려하는 성숙한 개인주의 문화의 사회라면 이들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집단의 강요 없이,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취향이 맞는 작은 인간관계들의 고리 속에서 말이다.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똥개들이 짖어대도 기차는 간다.

체질이 소시민적이다. 야심도 없고 남들에게 별 관심이 없고, 주변에서 큰 기대를 받는 건 부담스럽고, 싫은 일은 하고 싶지 않고 호감 가지 않는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 내 일을 간섭 없이내 방식으로 창의적으로 해내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내가 매력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걸 좋아하고, 심지어 가끔은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을 갖길 원한다.
정말이지 공부라도 잘했으니 망정이지 한국사회에서 먹고살기 힘들 뻔했다. .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지고 빈곤이 대물림되는 사회는 역사가 증명하듯 근본적 기반이흔들린다. 모든 곳에 희망이 있어야 사회가 유지된다. 이를 위해서는 형식적 평등을 넘어 실질적평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 현재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에 관한 원칙인 존롤스의 『정의론』은 사회의 최소 수혜자를 배려하기 위한 불평등은 정의에 부합한다고 하여 실질적 평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급변하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자칫 좋은 의도로 최악의 결과만 낳을 수 있다. 지금입시제도가 이렇게 복잡해진 것도 알고 보면 그런 결과가 층층이 쌓여서인지 모르겠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뭔가를 할 용기도 없었고, 당시 대학가를 지배하던 이데올로기에 동의하는 것도 체질적으로 어려웠다. 역사의 필연이 어떻고 민족이 어떻고 계급이 어떻고 하는데 나는 개인의 자유와행복이 가장 중요한 인간이다. 아무리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심하다지만 거창한 이념을 다 떠나서나 자신은 한국에서도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 것 같고, 미국에서도 잘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북한, 소련, 중국 같은 전체주의사회에 사는 것은 상상만도 끔찍했다. 자기 자신이 살고 싶지 않은 체제를 남들에게 권하는 건 죄악이다.
당시 대학가를 지배했던 이념은 ‘사회과학‘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 마르크스주의였다. 사회과학 서점에 있는 대부분의 책이 이 시각으로 사회, 경제, 역사, 문화, 교육 등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냉철하게 파헤치는 측면에서

는 탁월했다. 아름다운 말로 포장된 인간사회 구조의 곳곳에 탐욕과 이기심, 지배와 피지배 구조가 있다는 걸 일깨워주었다. 의문점은 그렇게 냉철하고 날카롭고 실증적이던 비판의식이 대안 제시 단계에서는 갑자기 종교 수준의 낙관주의로 돌변한다는 점이었다. 인간이 그렇게 역사 내내 그이기적이고 탐욕스러웠다면 어떻게 갑자기 노동계급에 대한 헌신과 희생정신에 불타는 전사로돌변하며, 당(즉 지배 엘리트)은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은 채 인민을 위해 헌신하고, 사람들은 사유재산과 이윤 동기 없이도 모두를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이라는 말인가. 그게 근본적으로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 과학적인 설명이 너무나 부족했다. 자본주의의 허위의식에서 깨어나 사회주의적 인간형으로 거듭나면 된다는 식인데 이건 종교일 뿐이다. 개미 연구로 유명한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평이 정확하다. "이론은 훌륭한데 종種이 틀렸다." 1989년 동구권 붕괴가 시작되어 이론과 전혀 다른 사회주의국가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대학사회의 분위기는 더욱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얼마나 투철한지 늘 생각해왔던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운동권의 논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당시 운동권의 이상주의적 열정 자체는 순수했음이 명백했고, 한국사회의 모순이 극심하다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심정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죄의식과 부채의식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이념과 무관하게 불의임이 명백한 일도 사회에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음을 대학에 와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가를 지배한 이념에 동의하기 어려웠다는 말은 그래서 변명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은 속이지못한다. 나는 그저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의지까지는 없었던 거다.

행한다. ‘선비‘가 모멸적 용어인 세상이다. 위선 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 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위선이 싫다 며 날것의 본능에 시민권을 부여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생각해보면 후배 세대의 위악은 선배 세대인 나 같은 사람들의 위선이 낳은 것이다. 열린 교육과 인간화를 주장하며 뒤로는 내 자식만 잘되라고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의 조직적 커닝을 시키느라 고전을 읽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권위주의와 싸운다는 명분으로막말과 냉소가 주는 쾌락에 도취했고, 그 결과 진보와 보수라는 탈을 쓴 반지성주의가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는 인터넷 생태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한사코 권하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남들이 한사코 감추고 있는 게 세상의 비정한 이치다.

협소한 상식에만 갇혀 있는 인간은 비상식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인간과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데 실패하기 십상이다. 아무리 첨단과학이 발달해도 여전히 더 많은 문학이 필요한 이유다.

경쟁이 낳는 부작용을 비판하기 위해 경쟁이 낳는 효율성을 악으로 재단 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렇다고 효율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그림자를 무시하는 것도 어리석 .
다. 효율성에 ‘지속가능성‘ 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부가하여 부작용을 완화하며 보다 높은 단계로질적인 발전을 도모하도록 유도하는 현실적인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려는 경향은 심지어 과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라는 신념의 페미니스트들 중에는 선천적인 양성 간의 차이 일체에 관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성차별이라며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그러니까 당연한 거다‘가 아니라, 그러니까 더더욱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라고 생각할 수도있다. 그러려면 우선 정확히 우리 존재와 그 작동 원리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남성의 성욕이 본능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성범죄도 이해해줘야 한다는 결론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니까 더더욱 그로 인한 위험성을 통제하기 위한 정교하고 강력한 장치들이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인간의 지능, 성격에 유전적 차이가 있다는 말은 기계적평등만으로 부족하고 실질적 평등을 위한 적극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실재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자신의 관점에 따라 한쪽 측면만 이야기하고 다른 측면은 애써 외면하는 진영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 (중략)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은 비극이다. 역사의 두 측면을 있었던 그대로 직시하면서도 얼마든지 지금 현재 우리가 겪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림자를 강조하기 위해 빛을 애써 지울 필요도 없고, 빛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자를 외면할 필요도 없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출발점이다.

1980년대에는 많은 사람이 세상에 정답이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 선의를 가지고 헌신하면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선악과 옳고 그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옳은 가시밭길을 선택하느냐 비겁한 안락함을 선택하느냐의 윤리적 결단만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명쾌하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쉽게 말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아예 생각하지 않거나 양극단에 서서 자기만 옳다는 독선에 빠져 있게 되어버렸다. 한국사회에대해 저주에 가까운 절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고 먼 나라에는 지상낙원이 펼쳐져 있는것처럼 믿는 이들도 있지만 현실을 조목조목 따져보면 모든 사회는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고 나름의 특수성이 있다. 그대로 가져다가 베끼면 되는 정답 같은 건 없다.
이런 시대일수록 집단의 논리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건 위험하다. 어느 집단도 이 복잡하고급변하는 세계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남의 판단으로 자기 판단을 대체하지 말고 각 개인이 눈을 부릅뜨고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실사구시 정신이필요하다. 막연한 믿음보다 실증적 근거를 들어 토론하고 최선이 안 되면 차선,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재판을 해보아도 다투는 양측 모두가 진실의 일부분씩을 자신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조각 그림을 맞춰야 비로소 진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느 한쪽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승리란 존재하기 어렵다.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관계, 다른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상대를 몰살시키는 전쟁이 아닌 이상 중간에서 타협하는 게 현실적이다. 당파적 진영 논리는 이런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생략하려는 게으름이다.
문제의 다층적인 구조를 직시하자고 하면 대뜸 비겁한 양비론이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양비론아니라 삼비론 사비론이더라도 맞는 건 맞는 거고 아닌 건 아닌 거다.

인터넷 세상은 마치 해방 직후로 타임슬립한 듯하다. 좌빨, 종북, 수꼴, 극우, 보수, 진보, 그런데 이 구별에 관한 공인 기준은 없는 듯하다. 발언 몇 가지만으로 양쪽에서 병아리 감별하듯 용 감무쌍한 단정을 내린다. 조금 과장하면 이런 식이다. 어느 교수가 조선일보에 글을 쓰면 수꼴,
글 서두에서 햇볕정책을 옹호하면 종북, 그런데 그 근거로 1970~80년대 경제성장으로 인한 대 북 우위 확고화를 들면 극우, 경제성장 이면의 빈부격차와 인권침해를 지적하면 좌빨, 그런데 그 가 대치동에 살고 있으면 강남 좌파, 알고 보니 쪽방 사글세면? 글쎄다. 아마도 간명하게 원적지 기준설을 취하지 않을까. 호남인지 영남인지.
구체적으로 무슨 이념과 무슨 이념이 대립한다는 것일까? 정말 우리나라에 공산주의자와 파시 스트들이 스페인내전 때처럼 대립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나라 양대 정당이 이념정당인가? 두 정 당의 공약집을 표지 가리고 읽어서 구분하기란 펩시 챌린지 이상의 도전이다. 한쪽의 인기 공약을 곧바로 다른 쪽이 따라하는 일도 흔하다. 이념정당은 고사하고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 정도의 차이도 찾기 어렵다.
국민 대상 여론조사 결과들을 보면 대체로 다수 의견은 보다 많은 복지 혜택은 원하되 세금은 더 내길 원치 않고, 어떤 문제든 정부가 나서서 강력히 해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식이다. 서구정치학자를 데려다 한국의 정치이념 분포도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시켜보면 난감해할 것 같다.
‘이념적인 미분화 상태‘라고 할 것이다.
보수, 진보란 보통 정부의 역할, 복지정책, 조세정책 등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구별한다. 그런 데 대한민국사회에서 가장 열렬히 대립하는 사항은 실은 이념, 정책이 아니라 어느 대통령을 ‘사모’ 하느냐와 애향심 아닐까. 여기에 세대 문제가 결합된다. 조용필 세대와 서태지 세대가 서로 울 오빠의 업적이 더 뛰어나다고 싸우는 꼴이다. 자기 세대의 우상이란 결국 자신의 청춘 시절 에 대한 자기애다. 객관적이기 어렵다.

이념 문제 아닌 것을 이념 문제화하는 강박증은 두 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첫째, 실제적으로 필요한 토론과 의사결정을 방해한다. 각 방안의 장단점을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따지는 머리 아픈과정을 ‘우리 편의 주장인지 적들의 주장인지’로 광속 대체하는 반지성주의를 낳는다. 둘째, 삼인성호三人成虎. 몇몇이 떠들어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진다. 몇몇 소수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념투쟁을 벌이는 것을 보다보면 마치 이 사회에 진짜 심각한 이념 대립이 있는 것처럼 착시 현상이생긴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인류는 속을 만큼 속았다. 좌우자판기‘를 철거해야 하는 이유다.

현실의 조폭에게 의리 따위는 없다. 이익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조직의 이익이 아니라, 보스와간부들의 이익이 있을 뿐이다. 말단 조직원들은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조직에 이용당하는 호구에 불과하다. 이득을 분배받는 공범씩이나 되지도 못한다. 내부고 발자들은 그들이 어떤 동기를 가졌든 결과적으로 당신의 몫을 가로챈 권력자들의 치부를 폭로하 여 당신에게 이득을 주는 사람이다.

핑하다보면,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다들 참 명쾌한 정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진보, 보수, 좌파, 우파. 결국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 문제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다층적인 면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목소리는 오히려 귀한 것 같다.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고 이야기하면, "간단히 말해서 누구 잘못이란 말이냐! 너 이런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저쪽이지!"라고 윽박지르는 목소리가 당장 튀어나온다.
특히,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이 오히려 그러한 도그마에 더 빠져 있다. 연수 시절, 미국에 연구하러 온 어느 사회운동가이자 사회학자인 분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실,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을 동료들이 알면 나를 변절자라고 욕하겠지만, 전문직 종사자들의 기득권도 일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면이 있다고 생각이 점점 바뀌고 있다." 아니, 인간사회를 바라보고 연구하는 학자가 저 정도를 인정하기 위해 변절자라는 비난을 감수하는 용기를 내야 한다면, 도대체 중세 암흑시대의 가톨릭과 뭐가 다른 걸까?
인간사회는 참 묘해서 교과서처럼 정의가 늘 승리하지도 않고, 거기 앞서 무엇이 정의인지도정의하기 어렵고, 분명히 선의에서 비롯한 정책이 오히려 사람들의 고통만 심화하기도 하고, 인간의 능력과 노력에는 슬프지만 많은 격차가 있고, 빈곤과 불평등에는 사회가 책임질 부분도 있지만,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이런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뭔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훼손되는 것일까? 결국은 직시할 문제와 모색할 해결책 두 가지가 있을 뿐 아닐까?

평범한 동네 양아치들은 순식간에 학살자로 변신했다. 정치적 목적으로 문명의 작동을 정지하면 인간이란 쉽사리 동물에 가까운 원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인간본성이 90퍼센트 침팬지에 가깝다고 본다. 침팬지는 영장류 중 가장 포악하다. 영역권을 침범한다른 무리 침팬지를 발견하면 떼로 공격하여 찢어죽여 먹어치운다.

독재자들은 그런 정서를 잘 자극하여 적절한 가상의 적을 던져줌으로써 대중의 맹목적 분노를 _정치적 지지기반으로 활용한다.

지금 그 사회에서 다수의 의견이라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만약 다수의 의견이 늘 옳다면 인류는 아직도 천동설을 믿고 잔인한 사적 보복을 허용하며 인종 간 결혼은 금지하고 성적 소수자를 박해하고 있지 않을까. 다수결의 원칙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에서 다수에 대한 정교한 견제장치도 같이 마련하고 있는 이유다.
대의제, 법률보다 개정이 어려운 헌법, 권력 분립과 견제, 표현의 자유 보장…… 하지만 이런장치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폭넓게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내면화하려면 끊임없이 대화하고, 토론하고, 잘못된 생각들과 싸워야 한다.

세금 문제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2014년 연말정산 방식 변경 후 시민사회에서 벌어진그 격렬한 반발을 생각해보면 북유럽 모델은 우리 사회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높은 세 부담을 북유럽 사람들이 감수하는 것은 내가 낸 세금이 효율적으로쓰여서 반드시 내게 혜택이 돌아온다는 신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렴하고 유능한 정부와공무원들이 오랫동안의 실적으로 그런 신뢰를 얻어낸 것이다. 사회를 바꾸려면 도덕적인 것만으로 부족하고 유능해야 한다. 우리나라도 국민이 높은 세율을 감수하게 하려면 먼저 세금이 효율적으로 사용되어 국민에게 골고루 그 혜택이 돌아온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구축되어야 한다.
중산층에게도, 부자에게도, 기업가에게도 득이 되는 측면이 있어야 하고, 그런 점을 신뢰감 있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가진 자’니까 마땅히 내놓아야 한다, 어차피 부의 축적 과정에서사회에 빚을 진 것 아니냐는 식의 논리만으로는 타협이 불가능하다.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심을 인정하면서 어떤 정책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설득하고, 필요하면 타협하고 양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잡은 사회에서도 꼭 필요한 국면에서는 한 발 물러나 다른 처방을 써보고 타협하는 것이 그들이택한 현실 정치인 셈이다. 그리고 그 처방의 문제점이 대두되자 다시 사민당이 집권하고 있다. 진영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각 상황, 국면에 따른 처방을 냉정하게 선택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거의 종교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 절대선 절대악의 구도로 서로를 바라보니대화가 불가능하다.

과연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질 수 있는 가치관‘은 어떻게 배양되는가.
보통은 ‘사회지도층, 어른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거나 ‘윤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등등의 답이 나올 듯하다. 내 의견은 ‘작은 책임부터 부담 없이 맡을 수 있어야 한다‘다. 우리 사회는 타인의 시선에 극도로 예민한 집단주의 문화의 사회다. 나서는 걸 죄악시하고 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누가 뭘 잘했을 때의 칭찬보다 그가 뭐 한 가지 잘못했을 때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달려들어 돌팔매질하는 광기가 훨씬 뜨겁다. 당연히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면 책임을 맡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는 존재다. 어릴 때부터 잘하든 못하든 뭔가를 책임지고 하는 것 자체에대해 아낌없이 칭찬하고 못한 부분은 감싸주고 격려하는 문화가 기꺼이 책임지는 어른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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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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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리를 참 잘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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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잘돼가? 무엇이든
이경미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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