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멀리 떠나온 것 같지도 않았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것 같아 회의와 비관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수는 없었다. 이른바 청춘의 방황만이 아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나는 내 앞의 문을 열지 못하고 번번이과거의 나로 굴러떨어지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세계의 부당한 규율에 복종했던 미성년 그대로였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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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춘도 기성이 됩니다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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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P9

그 시절의 자신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그것은 내가 동창회 같은 데에 나가지 않는 이유와 비슷했다. 남들에 의해 소환되는 그 시절의 나도 싫었고, 그들이 알고 있는 그 시절의나인 척하고 있을 게 분명한 현재의 나도 싫었다.
여러 사람과 공유한 시간이므로 누구도 과거의 자신을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편집하거나 유기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을까. P18

그러나 내가 그 시절 겪었던 것은 다름이라기보다 수직적인 위계와 시비是非였다. 그때그때 적용되는 일관성 없는규율이 있었고, 없으면 교사나 반장이나 힘센 애들이 만들었다. 남과 다른 것이 그대로 결격사유가 되는 단체 생활에서 내가 누군지 따위를 고민할 기회는 아무에게도 주어지지않았다.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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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의 세계는 순수한 정신의 세계, 언어의 구조물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미래의 인간들이 경험할 사랑의 모습, 연애의 양상일지도 몰랐다. 육체를 옷 사입듯 구매하는 시대가 올 때, 성형수술에서 더 나아가 아예 육체를 디자인하는 시대가 될 때, 어쩌면 연애란 인간의 육체가 배제된, 정신과 정신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비로운 게임으로 변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P35

그리스 수사학자들은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연설을 할 때는 감동을 주든가 아니면 지식을 줘라. 그것도 안 되면 즐겁게라도 해줘라. P54

형광등아, 조명의 세계에서 다른 모든 조명들을 이기고 살아남은 국민조명 형광등아. 별로 분위기도 안 나고 켜는 데도 오래 걸리고 툭하면 스타터가 나가는, 그러나 전기료가 싸게 먹히고 수명이 긴, 그래서 살아남은 조명계의 우세종아. 내가 이 세계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니?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 말 같은 말을 하고, 집 같은 집에서 잠들고, 밥 같은 밥을 먹으며 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 P94

수족관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많은 게 함께 따라오는 것 같다. 장소도 그중 하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가 살아온 장소와 만나는 경험이기도 하다. P204

그렇다. 사람들은 남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냥 할말이 없으니 그런 뻔한 질문들을 던질 뿐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취직했냐, 결혼 안 하느냐 묻는 것도, 사실은 아무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의 나는 누가 나에 대해서 물으면 정말 궁금해서 묻는 줄 알고 온 힘을 다해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사람들은 그저 떠오르는 대로 지껄이는 거였다. 적당한 대꾸만 해주면 그들은 즉시 다른 질문으로 넘어간다. 뻔한 질문만 입력된 사이보그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사이보그들은 젊고 만만한 사람들을 만나면 단 몇 개의 질문으로 버틴다. 넌 취직은 안 하냐, 국수는 언제 먹냐 등등. 그럴 때는 그냥 딴생각을 하면 되는 것인데, 나는 언제나 "취직이 꼭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저 자신에 대해 좀더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게 우선인 것 같아서요. 그럼 취업도 자연히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같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런 사이보그들이 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그냥 그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었는데. P259

왜 아름다운 것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무심할 때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p263

고요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질량을 가진 고요가 우리 두 사람을 짓누르고 있었다 p267

나는 사람이 두 종류라고 생각해. 자기만의 벽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모든 게 얇아.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그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절대로 믿지 않아. 현실만이 그들의 신앙이고 종교야. 한번 판단이 내려지면 그들은 가차없고 냉혹해. 물론 그런 사람들이 편할 때도 있지. 자기보다 강하고 부유한 사람에게 약하니까.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친교를 쌓는 건 너무 지루하고 피곤한 일이야.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라든가, 그게 도대체 나한테 무슨 득이 되나, 같은 질문만 던지는 사람들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 같은 사람이야. 너는 무용한 걸 좋아하잖아. 지식, 퀴즈, 소설 같은 것들 말야." P273

세계는 혹시 무수한 방으로 이루어진 게 아닐까? 신생아실에서 태어나 교실에서 배우고 소주방에서 술 먹다가 노래방에서 노래하고 찜질방에서 목욕하고 채팅방에서 채팅하다 고시원의 쪽방에서 잠드는, 그리고 끝내는 대형 병원의 영안실에서 마감하는 삶. P306

한 인간의 진심을 온전히 전달하기에 문자메시지나 음성통화 모두 여전히 태부족이었다 p310

말을 안 한다는 거지. 시선도 마주쳐서는 안 돼. 시선도 대화야 p335

역시 승자의 기쁨은 패자의 굴욕 위에서 더욱 달콤해지는 것 같았다. P380

나보다 키가 이십 센티미터는 작은 유리의 경고를 심각하게 듣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나처럼 키가 큰 남자들은 방심이 생활화돼 있다. 어떤 나쁜 일도 자기에게는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일은 여자나 힘이 약한 남자들에게나 일어난다고 믿는다. 실제로는 팔굽혀펴기 열 번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말이다. 그들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약한 존재들의 집요함을 자주 간과하기 때문에 끝내 낭패를 당한다.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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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는 유디트에게서 민족주의와 영웅주의를 거세하고 세기말적 관능만을 남겨두었다. P16

토요일 오후에 시계를 들여다보는 일도 없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림 보는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나는 주시한다. 그들은 갈 데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만날 사람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다. 그리고 그들이 오랫동안 발길을 멈추게 되는 그림은 은연중에 그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준다 p10

여행안내책자들은 복잡한 사실들을 간단하고 명쾌하게 축약해놓는다. 한 도시에는 수십만 개의 인생이 있고 수백 년의 역사가 있고, 인생과 역사가 교직하면서 만들어온 흔적이 있다. 그 모든 것을 여행안내책자들은 단 몇 줄로 줄여버린다 p8

여행을 떠난 후에도 여행책자를 읽는 사람은 지루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여행을 떠난 후에는 소설을 읽는다. 대신 이 도시에서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 소설은 삶의 잉여에 적합한 양식이다.p8

이런 게 인생일까. K는 생각한다. 어차피 패는 처음에 정해지는 것이다. 내 인생의 패는 아마도 세 끗쯤 되는 별볼일없는 것이었으리라. 세 끗이 광땡을 이길 가능성은 애당초 없다. 억세게 운이 좋아서 적당히 좋은 패를 가진 자들이 허세에 놀라 죽어주거나 아니면 두 끗이나 한 끗짜리만 있는 판에 끼게 되거나. 그 둘 중의 하나뿐이다. P22

사람들은 누구나 봄을 두려워한다. 겨울에는 우울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봄은 우울을 더이상 감출 수 없게 만든다. 자신만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커지는 것이 당연하다. 겨울에는 누구나가 갇혀 있지만 봄에는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만이 갇혀 있는다. P43

그러나 비디오카메라는 블랙홀처럼 궁전을 삼키고 궁전 앞 연못을 빨아들인다. 그들 기억 속의 벨베데르는 흐릿하고 푸른 기 감도는 사각의 영상으로 수렴된다. 그들은 기억의 불멸을 꾀하느라 생생한 현재를 희생한다. 처량하지만 인간의 숙명이다.p51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P107

비엔나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많은 곳이 이곳을 통해 다른 곳으로 삼투된다. 종교개혁, 표현주의, 나치즘과 같은 이념들이 이 도시를 통해 세상으로 번져나갔다. 지금은 이 도시를 흔히 동유럽과 서유럽을 잇는 관문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이 도시에서 비자를 받아 체코나 헝가리 등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한때 이 도시에서 화가가 되려고 했다고 한다. "운명이 나를 총통으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는 미켈란젤로가 되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반면에 모차르트는 이 도시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히틀러는 파시즘과 대중심리 분야에서 천재가 되었고 모차르트는 작곡과 연주로 이름을 높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대중을 미혹하는 데 천부적 재질을 타고났다는 점이었을 게다. 하기야 그 시대는 무엇으로든 사람의 마음을 울리기 쉬운 때였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절절할 수었던 것이 유태인 대학살이라는 배경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그런 일이 도통 가능하지 않다. 이제 죽음은 TV로 생중계되는 일종의 포르노그래피가 되어 있다. 과거엔 풍문으로 전해지던 학살이 이제는 상세하고 신속하게 위성을 통해 중계된다. P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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