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을 통한 자아? 행복? 찾기인가….
남표니만 불쌍했따.

버뜨 코엘료의 여타 작품등과 같이 제네바에 대한 묘사나 우울증, 권태감 등등 일반적 감정 상황에 대한 정의와 묘사는 생각할꺼리를 준다.

"무감각 상태랄까? 행복한 척, 슬픈 척, 오르가슴을 느끼는 척, 즐거운 척, 잠을 잘 잔 척, 살아 있는 척. 그러다보면 가상의 한계선에 다다르는 순간이 있는데, 그 한계선을 넘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닫게 돼. 그러면 더이상 불평을 안 하게 되지. 불평을 한다는 건 아직도 무언가를 대상으로 최소한 싸우고는 있다는 뜻이거든. 결국 불평도 없는 식물인간 같은 상태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감추려고 노력하게 돼. 그게 정말 힘든 일이야." - P25

인생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 나를 선택한다. 인생이 왜 내게 기쁨과 슬픔을 안기는지 물어봐야 아무 소용 없다.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기쁨과 슬픔으로 무엇을 할지는 결정할 수 있다. - P88

명확하게 끝나지 않은 것들은 늘 일말의 여지와, 미처 탐사하지 못한 가능성과, 모든 것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회를 남기기 때문이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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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 대한 묘사

취향이 멋지다고 애써 말하지 않는 도시. 유리와 철로 된 거대한 고층건물이 없고, 고속도로가 많지 않은 도시. 나무뿌리들이 인도의 콘크리트를 뚫고 나와 행인의 발을 걸고, 공원의 신비스러운 작은 나무 울타리 주변으로 ‘자연은 원래 그런 법’이라며 방치해둔 잡초가 무성하게 웃자라 있는 곳. 간단히 말해, 현대화되어 그 매력을 잃어버린 다른 모든 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도시.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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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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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은 좋은데 문체가 이렇게 현학적(?) 논문적(?) 이어야 했을까? 타자, 부정성, 과잉가시성 등의 단어를 풀어서 썼다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몰입해서 읽을 수 있을텐데 라는 아쉬움

사유는 고요함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고요함 속으로의 탐험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이론의 위기는 문학과 예술의 위기와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프랑스 누보로망의 대표자였던 미셸 뷔토르Michel Butor는 한 인터뷰에서 정신의 위기를 확인한다. 그것은 또한 문학의 위기로도 나타난다. "경제만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문학의 위기도 겪고 있습니다. 유럽 문학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유럽에서 경험하는 것은 정신의 위기입니다." 무엇에서 정신의 위기가 드러나느냐는 질문에 뷔토르는 이렇게 대답한다. "지난 십 년 혹은 이십 년 동안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책은 홍수처럼 출간되지만 정신은 정지 상태입니다. 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위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하는 정보의 더미,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소음으로 표출된다.66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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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때 자신이 계급적 인간이라는 것을, 자신이 속한 계급이라는 걸 알았다. 이런 거였구나. 이웃의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방법이 없다는 거. 계급이란 이런 거였고 나는 이런 계급이었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더 많은 돈을 가져서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테니까. 더 좋은 집에서 산다는 것은 더 좋은 골목, 더 좋은 동네에 살게 된다는 것이고 더 좋은 동네라는 것은 이웃의 소음과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동네일 테니까. 그런 동네에서는 서로 간섭하거나 간섭되는 일이 없으니 사람들의 표정은 편안하고 너무하네, 라고 외친다거나…… 너무 친절하게 구는 일도 없을 것이고 지속적인 소음에 시달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 P116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사람이 옆에서 쓰러져도…)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 P172

내가 여기 틀어박혔다는 것을 아는 이 누구인가.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나가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그것을 생각해왔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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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기도할 때는 없지만, 우리가 그를 모독할 때는 강렬하게 현전해. 69p

프랑스어로 유령은 revenant이며, 이를 직역하면 ‘다시 돌아오는 자’라는 뜻이다. 떠나간 이가 미처 영영 떠나지 못하고 또다시 돌아오는 일. 부재하는 이가 현전하는 일. 드나들고 출몰하고 배회하는 일. 아마도 할 말이 남아 있어서.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있어서. 그 죽음이 개운한 안녕일 수 없어서. 납득하고 단념할 수가 없어서. 아파서. 아픔이 말이 되지 않아서. 산 자만이 그 말을 해줄 수 있어서. P74


돌이켜보면 많은 비극은 이처럼 귀환의 구조를 띠고 있다. 숨겨진 아픔이 들추어지고, 잊힌 진실이 폭로되는. 평이했던 나날이 꽃잎 하나의 무게로 무너지는. 세계의 신음이 비로소 들려오는. 박탈당한 원주민의 언어가 검은 잉크와 함께 토해지고, 원시인의 SOS가 객석을 뒤흔드는. 당신이 돌아오는. 그런 의미에서 연극은 유령적이며, 비단 실제 유령의 역할이 아닐지라도, 없고도 있는 모든 연극 속 인물들은 유령과 같다. P74

공연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사라짐에 있다. 회화와 같은 공간예술이 한번 완성되고 나면 공간 속에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달리, 연극과 같은 시간예술은 시간에 깃들어 발생했다가 그 흐름과 더불어 종결된다. 작품의 존재는 그것이 발생하고 있는 오직 그 시간 속에서만 유효하다. 관객은 사라짐의 목격자가 되어 영영 혼자만 알아볼 흐릿한 여운을 안고 극장을 나선다. 더 이상 존재가 없으므로 점차 기억은 희미해진다. 그중 어떤 기억은 되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몸에 기입된다. 그렇다 해도 흔적이 남는 것과 존재가 남는 것은 아득히도 다른 일이다. 시간예술의 근본에는 슬픔이 있다.

언젠가 매우 뚜렷하게 완전한 행복을 체감한 순간, 나는 그 순간의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하는 것이 아닐지 격렬하게 망설인 적이 있다. 그때 그 공간의 구조, 햇살의 농도, 바닥의 온도와 내 몸의 기울기를, 그 순간을 둘러싼 모든 지나온 시간의 적확한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토록 좋은 것을 잊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기록하기 위해 몸을 움직임으로써 행복의 구체를 깨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모든 것을 잊었다. 이토록 좋은 것을 잊을 수가 있을까, 생각하고 이내 고개 저었던 내 안의 순전함만을 기억할 뿐.

P77


망자를 애도함은 마땅하며, 그 죽음들은 발생하지 않았어야 함이 자명하지만, 단지 자유로운 유럽인의 삶을 침해하는 절대악의 행위로 테러를 간주할 만큼 세상의 선악은 자명하지 않다. 어떤 밑바닥까지 가보면 모든 진실은 모순적이게 마련이지 않던가. 우리는 그 모순적이고 혼탁한 것들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테러와 같이 광폭한 무언가가 마침내 세계를 뒤흔들었을 때는 특히나 말이다.
P92


신기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래, 비극이란 관객보다 고귀한 인물의 고통을, 희극이란 그보다 저급한 인물의 고통을 다루는 것으로 규정된다. 모두 고통인 것은 매한가지이나 인물에 대한 나의 거리가 다른 것이다. 고귀한 이의 고통에는 몰입하므로 슬퍼지고, 저급한 이의 고통에는 거리를 두므로 웃음이 난다. 그리고 이 원리가 나는 언제나 기이했다. 사람은 어째서 늘 당연한 듯 거룩함 쪽에 이입하는가. 윤리적 우위라는 허상에 마음을 기대는 일은 어쩌면 그리도 쉬운가.p96

<누가 이 말들을 가지고 돌아갈 것인가?>(1974)에서 수용소의 인물들은 자신이 살아낸 아픔에 대해, 기어코 돌아간다 해도 끝내 믿어지지 않을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

비르지니 데팡트에 따르면 여성성의 첫번째 조건을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트라우마다.4 요컨대 여성으로 사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품고 사는 것과 같다. 여성으로서 나는 내 몸이 수치를 당했던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값싼 욕망에 휘둘려 함부로 만져지던 때마다 내 몸에 찢기듯 새겨진 역겨움과 두려움을 기억한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은 아무도 없었지만, 세상은 우리의 비명을 듣지 못했다. 그것을 발설할 수 없도록, 발설한다 하더라도 경청될 수 없도록, 우리의 목소리를 말살하는 방식으로 세계가 이미 구조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p110

열등의 조건을 스스로 체화하며 살았다. 세계가 가르친대로 겁탈당한 내 몸을 치욕스러워했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스스로의 자유를 결박했다. 그렇게 가부장제의 명예 남성이 되어 제 목을 조르고 있었음을 깨닫는 일은 그 자체로 또 한 번 트라우마가 된다. P113

때로 자유롭게 치우친 불공정한 사랑이야말로 귀하고 벅찬 것이 아니겠는가. P138

누군가 ‘믿는 체 하려는 것’은 결국 그가 ‘믿고 싶은 것’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싶은가. 아마도 나로부터 먼 것. 멀어서 찬란한 것. 그것을 꿈꾸게 해주는 데 본디 예술의 임무가 놓여 있던 것은 아닌지. 애초에 그래서 인간은 허구를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닌지. P139

춤추는 동안 그들은 자기 자신인 것에 조금도 겁먹지 않는다. 자기 자신인 채로 반드시 아름답다. 춤을 잘 추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춤추기 위해 우리 모두가 무용수일 필요는 없다. 어떤 몸을 가질 필요도 없다. 우리는 춤추는 관객이다. 나는 그것이 경이로웠다. 춤을 보는 관객이 저마다 춤추어본 경험을 가진 세계. 예술과 이토록 가까운 삶.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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