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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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표지가 예뻐서 책을 살 때도 많다. 전경린의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는 제목도 예쁘고 표지도 넘 예쁘다. 문학동네 카페에서 연재할 때 잠깐씩 읽다 말았다. 좀 더 열심히 읽을 걸 그랬다. 연재랑 소설로 나온 게 아주 똑같은 건 아니겠지만 ㅎ 전경린 작가의 이름은 익숙한데 소설은 처음인가 생각했는데 <풀밭 위의 식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그래서 이 소설도 연애소설이기를 기대했는데.  담담한 성장소설같기도 했다.

 

라애와 나애로 불리는 여자의 유년시절의 이야기. 도이, 상, 종려할매. 가족과 떨어져 병원집에서 살게 된 나애의 친구. 도이와 상은 유치원을 같이 다녔다. 상은 젊은 나이에 스스로 죽음을 맞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어린시절 친구들도 생각났다. 골목을 누비고 엄마가 만든 간식을 같이 나눠먹고 재미있게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 지금은 뭐 연락이 되지 않지만.

 

주인공 나애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처가 난 자리가 아물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건 추억일까. 아니면 그리움일까. 잘 모르겠다. 전경린이 소설을 좀 더 읽어봐야겠다.

 

산다는 건 계속해서 동작을 바꾸며 적절한 균형을 잡는 일이다. 상황은 이내 바뀌고, 또다시 동작을 바꾸고 또다른 균형을 잡는다. 나무처럼, 뿌리에서 줄기 끝까지 바람에 대한 반응의 무늬를 제 몸에 새기는 것이다. 세계와 삶 사이의 균형, 삶과 나 사이의 균형, 나와 타인 사이의 균형. p.96

 

자신의 고독을 받아들이고 침묵할 때 부유하는 여행이 끝나고 삶이 시작된다. 방과 몇 개의 사물을 소유하며 거기에 기대어 살듯, 사람은 고독에 기대어 자신의 삶에 정착한다. 그렇게도 완전한 자신만의 질서가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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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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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간은, 그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임을 예견하게 한다. 어떤 하루는, 떠올리면 언제라도 눈물이 날 것이라는 걸 미리 알게 한다. (p.194)

 

잔잔하고 조용한 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표지다. 정미경의 소설을 잘 알지 못했는데 유작이라서 용기를 내봤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은 섬에서 버려진 소금창고를 도서관으로 만드는 정모와 고등학생 이우와 말 못하는 섬 소년 판도가 등장한다. 친구 연수의 딸이라서 무조건 데리고 있겠다고 했지만 정모는 이우에게 간섭을 하지 않는다. 이우는 바닷가를 돌아다다 판도의 도움을 받는다. 이우는 말 못하는 판도에게 자꾸만 자기 속마음을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조금씩 정모가 하는 일을 돕는다. 재미도 있고.

 

정모도 이우도 판도도 모두 아프다. 섬을 떠나 성공한 예술가 된 연수도. 정모는 시력을 잃어가고 이우는 마음이 아프다. 그들이 섬에서 서로에게 위로를 받는다. 특히 판도를 키운 이삐 할미가 좋았다.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우를 품는 할머니. 복잡한 도시를 떠나 멀리 남도의 한적한 섬에 살아도 좋겠다. 소설을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유작이라서 그런지 책 말미에 남편의 글이 애틋하다. 덕분에 나는 잘 몰랐던 정현종 시인의 좋은 시를 알게 되었다.

 

누군가 거대한 입을 벌리고 검은  구름을 토해내는 것 같다. 그 틈 사이로 붉은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디선가 커다란 나무이파리가 휙휙 날아왔다. 창고 지붕들이 들썩거렸다. 갯벌의 풀들이 바닥을 쓸 듯 엎드렸다가 가볍게 일어나곤 했다. 바람의 머리카락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갯둑에 서 있는데 몸이 주춤주춤 뒤로 밀려났다. 입고 있는 옷이 파닥파닥 소리를 내며 나부꼈다. 바다가 하얗게 일어섰다. 내가, 마지막으로 담아두고 싶은 풍경이야.(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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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사람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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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늘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 빈약하고 허름한 트랙에서조차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불안은 순식간에 번지는 곰팡이와 같아서 쉽게 눈에 띄었고, 그러면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느끼는 것과 정말로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건, 굉장한 차이였으니까. (p. 88)

 

책 표지랑 비슷한 그림을 본 기억이 있다. 그래서 처음에 이 소설집을 봤을 때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입술에 엑스표를 한 게 말을 하지 말라는 건지 말할 수 없다는 건지 모르겠다. 또 하나 작가의 이름이 독특해서 더 끌렸던 소설집이다. <괜찮은 사람>은 무서운 소설이 많다. <호수 - 다른 사람>에서는 데이트 폭력을 당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괜찮은 사람>은 결혼까지 생각한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얼마나 될까 생각하게 되었다. 좋아하고 사랑해서 만났던 사람인데 그게 폭력으로 이어진다니 섬뜩하다.

 

<벌레들>은 집주인과 두 명의 세입자의 이상한 관계가 나온다. 집주인이랑 세입자 한 명이 친했다가, 세입자 두 명이 친해다가 다시 집주인과 다른 세입자가 친하게 지낸다. 친구처럼 지내다가 갑자기 등을 돌린다고 해야 하나. <방>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상상인데 언제라도 현실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공포가 마구. 단편 제목에 계속 사람이 나온다. 다음 소설제목으로 이상한 사람도 나오지 않을까. 한겨레문학상을 탄 장편소설 <다른 사람>도 꼭 읽어보고 싶다. 그 소설도 무서울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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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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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아몬드가 있다. 당신에게도 있다.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거나 가장 저주하는 누군가도 그것을 가졌다. 아무도 그것을 느낄 수는 없다. 그저 그것이 있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구병모 작가의 <위저드 베이커리>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그 뒤로 창비청소년문학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손원영의 <아몬드>는 진짜 빨리 읽었다. 술술술 읽었다는 거다. 주인공 윤재는 열여섯 살 생일인 크리스마스 이브에 할머니가 죽고 엄마가 식물인간이 된다. 묻지마 폭력에 희생 당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윤재는 그 일을 지켜보면서 아무런 슬픔과 분노를 느끼지 못했다. 윤재는 ‘감정 표현 불능증’ 환자였다.

 

엄마는 병원에 누워서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 고아원이나 시설에 가지 않고 윤재는 혼자 엄마가 운영하던 중고서점에서 지낸다. 학교에서 윤재는 괴물이라고 소문이 났다. 친구도 없다. 그런 윤재에게 곤이와 달리기를 좋아하는 도라가 나타난다. 곤은 윤재가 연기한 박사의 진짜 아들이다. 어렸을 적 잃어버린 부모를 찾았는데 기쁨은 없고 화가 많다. 곤은 윤재에게 싸움을 건다. 서점에도 찾아오고 괜히 시비를 건다. 서점에 자주 들리는 도라는 윤재에게 바람, 꿈, 자연의 향기, 감정에 대해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상처가 많은 소년 곤과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윤재와 도라의 우정이 예쁜 소설이다. 윤재를 돌바주는 심박사가 있다는 점도 좋았다. 드라마 학교 시리즈에 이런 소재가 등장해도 좋을 것 같다. 친구들과의 관계에 점점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많이 읽으면 좋을 소설이다. 손원평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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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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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눈으로 문학을 바라보는 훈련을 통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상처와 천천히 작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토록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그 첫 번째 동기는 '내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예전에는  그저 '아름다운 작품'이라고만 생각했던 소설이 심리학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무의식을 이해하는 데 특별한 관점을 제공하는 작품'이 된다. (p.36)

 

엄마는 뭐든 괜찮다는 말을 달고 산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도 괜찮다고 하고 가계가 몹시 힘들어도 괜찮다고만 한다. 그때는 몰랐는데 내가 어른이 되고 가고 싶은 직업을 갖지 못하고 힘들게 생활하다 취직을 해 보니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정여울의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를 읽으면서 나는 내내 엄마가 생각났다. 마음을 상담하는 심리학을 생각하면 조금 어려울 것도 같지만 이 책은 무척 편안했다.

 

정여울은 소설을 통해 주인공이 겪은 다양한 트라우마를 소개하면서 심리학으로 설명한다.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극심한 스트레스를 달고 사는 현대인에게 상처는 매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는 스트레스, 돈 때문에 힘들고 어둡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두렵다. 그 상처를 어떻게 다독이느냐가 중요하다. 정여울은 마음 속 상처나 트라우마에 대해 문학을 접목시켜서 가만히 다독이고 어루만지다. 따뜻한 책이다. 직접 읽지 못한 소설이 무척 많았는데 정여울의 글을 통해서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어졌다. 영화로만 보았기에 소설에서는 스칼렛의 불안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잘 모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말이 할 수 있기까지 스칼렛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어쩌면 이토록 우리네 인생을 닮았을까?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는 그 모든 방어기제들, 즉 자존심과 명예욕과 질투심과 자기연민이야말로 우리에게서 용기를 빼앗아 가는 '내 안의 적들' 아닌가? 우리는 그들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관계의 허무를, 무의식의 반격을 성찰할 수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가슴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자기 안의 스칼릿'을 잘 다독이고 설득하며, 때로는 눈물을 쏙 빼도록 혼구멍을 내야 할지도 모른다. (p.110)

 

정여울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고백하는 순간에 그 상처가 반 정도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누가 알까 감추었던 콤플렉스를 드러내라는 말이다. 우선은 내게 솔직하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 있는 트라우마를 직접 꺼내어 본 적이 없다. 친구나 가족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과 상처가 있다. 지난 과거가 후회스럽기도 하고 왜 그때 그렇게 행동했을까 화가 난다. 그런데 여직까지 털어내지 못하고 속상해만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끔 울기도 하는데 정여울의 책을 읽고 나니 그렇게 울어도 괜찮은 것 같다. 좋은 책을 만났다.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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