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책읽기의 괴로움 (고전파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12 Sep 2026 06:47:54 +0900</lastBuildDate><image><title>고전파</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894961294871988.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고전파</description></image><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위선이 되고 마는 선의, 그리고 아이러니 - [행복한 소설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508304</link><pubDate>Thu, 10 Sep 2026 22: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50830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9987&TPaperId=1750830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20/10/coveroff/893643998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9987&TPaperId=1750830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행복한 소설가</a><br/>임현 지음 / 창비 / 2026년 07월<br/></td></tr></table><br/><br><br>위선이 되고 마는 선의, 그리고 아이러니<br><br><br><br>임현의 세 번째 소설집 『행복한 소설가』를 읽었다.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으며, 목차는 다음과 같다. 2026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인 「너는 나의 이야기」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고, 2026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은 수록되어 있었다.<br><br>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부딪히는 돌과 바위들에게느리게 흩어지기분재나를 아는 사람들행복한 소설가<br><br>여덟 편을 다 읽고 남은 첫인상은 글이 어쩐지 읽기 편해졌다는 것이다. 근래 한국 소설 전반에서 감지되는 '소설의 에세이화'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가독성이 좋아졌다는 점은 앞선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이나 『그들의 이해관계』와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느껴지는 차이였다. 두 소설집에는 중간중간 멈칫하게 되거나 쉬이 넘어가지지 않는 문장이 더러 있었다. 2014년에 등단해 13년째 작품 활동을 이어온 작가이니 문장이 더 유려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문장의 문제라기보다 소재의 차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br>앞선 소설집에서 임현은 독자가 불편해할 만한 소재를 거침없이 다루곤 했다. 나는 임현 작가가 건드리는 불편함을 좋아한다. 특히 「고두」를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고, 지금도 내가 읽은 한국 단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고두」나 「엿보는 손」 같은 작품은 결말에 이르기까지 차곡차곡 쌓아 올린 불편함과 긴장을 마지막에 기어이 터뜨린다. 반면 이번 소설집은 그 불편함과 긴장을 유지하되 끝내 터뜨리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난 뒤 오래 곱씹게 되는 불편함은 앞선 소설집보다 조금 옅게 남았다.&nbsp;<br><br><br>표제작「행복한 소설가」를 읽을 수 있는 문장 웹진<br><br><br><br><br>「행복한 소설가」 — 행복해서 쓸 수 없는 사람<br><br>그런 변화를 느끼며 읽어나가다 만난 표제작 「행복한 소설가」는, 어째서인지 작가의 오토픽션처럼 읽히기도 했다.<br><br>소설 창작 수업을 듣거나 작법서를 읽으면 글 쓰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쓰지 말라고 가르친다. 아마 그 주인공이 세상을 포착하는 시선과 사유가 작가 자신과 너무 밀착한 나머지, 시야가 좁아지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0년 넘게 활동한 소설가라면 예외가 아닐까.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야 하는 직업적 숙명 탓에 그들은 결국 자기 내면으로 침잠할 수밖에 없는데, 그 자신의 직업이 하필 작가이므로 '글 쓰는 사람'에 대한 탐구를 영영 피해 갈 수는 없어 보인다.<br><br>실제로 소설 곳곳에는 작가 본인을 연상시키는 문장이 더러 있다. 이를테면 임현 작가는 서울예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첫 소설집이 출간된 이후로 줄곧, 나는 일주일에 사나흘은 문예창작학과나 사설로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중이었다.<br>「행복한 소설가」, 254쪽<br>「행복한 소설가」의 '나'는 소설을 쓰며 대학과 사설 아카데미에 출강하는 강사다. '나'는 첫머리부터 선배 작가를 떠올리며 소설가라는 직업을 깊이 들여다본다. 개인적으로는 표면에서 흘러가는 사건(아내 연재의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나'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생각들이 훨씬 흥미로웠다. 성공한 사람은 자서전을 쓰고 여전히 안타까운 사람이 소설을 쓴다는 대목이 특히 그랬다.<br>오히려 이미 불행한 사람들 중 누군가 소설을 쓰는 거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똑같은 고생담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성공한 사람들은 자서전을 쓰고, 여전히 고만고만하게 안타까운 사람들이 소설을 쓴다. 심지어 나름대로 이름 좀 알려졌다는 성공한 사람들이 왜 자꾸 에세이를 출간하겠나. 소설가란 모름지기 자기 자신의 평범한 불행을 현재진행적으로 고백하는 존재들이다.「행복한 소설가」, 261쪽<br>'나'는 근래 소설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있는데, 그 이유를 스스로 '소설을 쓸 만큼' 충분히 불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를 그 상태로 밀어 넣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내 연재다. 연재는 사실 굉장히 이상적인 아내다. 소설가인 '나'의 수입이 변변찮아도 불평하지 않고, 소설이 잘 써지지 않는 고통에 공감하며, 그의 작업에 도움이 되려 애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나'에게는 딜레마가 된다.<br><br>내 행복의 근원. 나의 모든 것. 그리고 좀처럼 내가 무얼 쓸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행복한 소설가」, 267쪽<br><br>'나'는 연재 덕분에 불행하지 않고, 소소하게나마 행복하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불행한 자들의 전유물인 소설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슴슴하게 끝맺는다. 불행하지도 않고 그럭저럭 행복하기 때문에 소설을 쓸 수 없는 소설가의 이야기로.<br>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별로 화가 나지도 억울하지도 않은 무난한 날들을 보내는 중이다. 자주 내게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떠올리며 무언가를 써보려고 하지만 한결같이 잘 되지 않았다.<br>「행복한 소설가」, 296쪽<br><br><br>소설집 곳곳에 심어둔 아이러니<br><br>'아이러니'의 흔적은 소설집 곳곳에서 발견된다.<br>「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에서는 결말 부근에 흰 눈이 등장하는데, 흰 눈이 지니는 보편적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우리는 흔히 눈 덮인 풍경에서 추함과 상처와 아픔을 가려주는 화해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흰 눈은 추악한 현실의 문제를 아주 잠깐 덮어두는 역할에 그친다. 교묘한 위장술이라 불러도 좋겠다. 작중에는 '체호프의 총'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어찌 보면 이 흰 눈은 끝내 사라지지 않은 채 언젠가 기어이 격발되고야 말 문제들을 잠시 가려두고 있는 셈이다.<br><br>「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에서도 아이러니는 빠지지 않는다. 화자는 남자의 어머니 때문에 결별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후 금전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남자에게 큰 목돈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연락을 한다. 그런데 그 목돈의 출처가 바로 그 어머니의 보험금이다. 톰 포드의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가 함께 떠오르기도 했다.<br>그러나 재우는 기옥과 조금 달랐다. 오히려 선우에게 베푸는 마음을 가르치고 싶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할 줄 알고,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누군가를 더 측은하게 여기는 아이로 자랐으면 했다.「분재」, 195쪽<br>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아이러니는 「분재」 에 있다. 아이를 입양한 부부가 등장하고, 양부 재우는 선우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베푸는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버려진 아이인 줄 알고 데려와 몇 년간 정성껏 키웠는데, 어느 날 친모가 나타난다. 아이는 양부모와 친모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자리에 놓이고, 재우가 가르친 대로 '생각이 깊고 사려 깊은' 행동을 한다. 가르친 대로 자란 아이의 선함이 가르친 사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셈이다. 읽으면서 김영하 작가의 「아이를 찾습니다」와 짝을 지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찾습니다」는 잃어버렸던 아이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되찾았을 때 밀려오는 이상한 감정을 다룬 작품이다.<br>「나를 아는 사람들」 에서는 '선의'와 '위선'이 뒤섞인다.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선배를 돕기 위해 선뜻 선배의 빈 가죽 공방을 자신의 작업실로 빌린다. 선배네와 '나'의 부부는 함께 여행을 가고 반찬을 주고받는 사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나'와 아내는 그 반찬을 잘 먹지 않아 일종의 골칫덩어리로 여긴다. 공방이 있는 건물의 번영회 사람들과 얽히면서 '나'는 자기 선의가 어디까지가 선의였는지를 되짚게 된다. 선의의 선(線)은 어디쯤에 그어져 있는지, 겉으로 친밀한 관계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여러모로 곱씹게 만드는 작품이었다.<br><br>고백의 형식으로 돌아온 작품<br><br>「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는 이 소설집에서 이전 작품들의 경향을 가장 뚜렷하게 계승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나는 임현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면 고백체를 잘 쓰고 즐겨 쓰는 작가라는 인상을 함께 떠올리곤 한다. 「고두」와 「엿보는 손」, 「목견」,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이 모두 고백체로 쓰여 있고, 나는 이 작품들을 전부 좋아한다. 독자를 놀라게 하거나, 찝찝하게 만들거나, 끝내 충격에 빠뜨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br>이 작품은 앞선 작품들보다 한 걸음 더 '고백'의 형식에 가까워졌다고 해도 될까. 화자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신부이기에, 이 발화는 자연스럽게 고해성사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를 뒤섞으며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법이 피해자의 피해를 온전히 회복시켜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부각하고, 선과 악을 함께 품은 인물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간 뒤, 그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판단은 끝내 독자에게 넘긴다.<br>이 소설들을 다 읽고 나면 판결문 대신 진술서 한 장을 손에 쥔 기분이 된다. 어쩌면 그것이 이 소설집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자세인지도 모르겠다. 선의라 믿었던 것이 어느 지점에서 위선으로 미끄러지는지, 그 선을 각자 그어보라고.<br><br>읽고 나니 임현 작가의 장편 소설은 아직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장편 한 권 정도는 나온 것 같은데, 장편소설은 아직 없는 듯하다. 한국 문학이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단편을 위주로 돌아가긴 하지만, 그래도 장편을 꼭 쓰긴 하는데, 등단한 지 10년이 넘은 작가의 장편 소설이 없다는 점이 신기했다. 어쩌면 임현이 '행복한 소설가'여서 쓰지 못하는 걸 수도 있지만, 작가의 장편소설도 꼭 읽어보고 싶다.<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20/10/cover150/893643998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201009</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격동을 뚫고 일어선 화가들의 이야기 - [살롱 드 경성 -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91981</link><pubDate>Thu, 03 Sep 2026 17: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9198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22935161&TPaperId=1749198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328/3/coveroff/k92293516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22935161&TPaperId=1749198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살롱 드 경성 -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a><br/>김인혜 지음 / 해냄 / 2023년 08월<br/></td></tr></table><br/><br>나에게 '경성'은 강력한 매혹 중 하나다. 경성이라는 단어는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갈망과 금지된 것들에 도전하는 저항의식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나는 언제나 그 중력에 무람없이 끌려다닌다.<br>『살롱 드 경성』을 사실 처음 접한 건 칼럼이나 이 책이 아니었다. 유튜브 &lt;삼프로TV&gt;의 코너에서였다. &lt;삼프로TV&gt;의 전원경 교수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즐겨보았었는데, 그에 대한 연장 선상으로 시작된 프로그램이 &lt;살롱 드 경성&gt;이었다. 이 방송을 보다가 결국 책까지 구입하게 되었다.<br><br>이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다뤄진 작가가 이중섭인데, 회화나 미술에 무지하기 짝이 없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도 이중섭 작가의 &lt;흰 소&gt;다.&nbsp;<br><br>이 책의 매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가를 비롯해 잘 알지 못했던 화가들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게 만든다는 점이다. 또한 그림이 풍성하게 삽입되어 보는 맛을 더한다. 나아가 이 책 전반을 감싸는 것은 저자의 미술과 한국 예술가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라.<br>이인성의 사후 그에 대한 미술계와 학계의 평가도 지나치게 야박했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이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관전인 &lt;조선미술전람회&gt;나 일본의 &lt;제국미술전람회&gt;에서 주로 활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비판의 주된 이유인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이 가난한 화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사회 시스템이 그것뿐이었는데.(…)억울하다. 이인성의 울분이 전이된 듯 억울하다.『살롱 드 경성』, 252쪽<br><br><br>나는 금 산도 싫고 금 논도 싫다. 나는 화가가 될 것이다.『살롱 드 경성』, 144쪽<br>『살롱 드 경성』을 읽으며 등장하는 화가들에게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우선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게 예술에 대한 맹렬한 애정을 불태웠다는 점이다. 예술가는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산다. 대낮에 눈 뜬 채 꿈을 꾸기도 하고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도 홀로 별세계를 본다. 유영국의 일화는 이러한 예술가들의 이미지에 정확히 부합한다. 잘나가는 사업을 놔두고 상경해 팔리지도 않을 추상화를 그리겠다니. (유영국의 그림과 사업에 대해 적은 박준의 글이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에 실려 있어서 내심 반가웠다. 유영국 화가가 소주 사업을 할 때, 직접 소주병에 그림을 그려넣었는데, 박준 작가는 한때 이 소주병을 수중에 넣고 싶었던 적이 있다고 적었다.)<br>생활의 무거움을 온몸으로 느끼는 소시민인 나는 이렇게 모든 것을 내던져 부딪치는 이들에게 압도된다. 또한 이렇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의 이면을 보아주는 이들이 있어야 우리도 그들의 덕을 보게 된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다. 모든 예술가는 프리즘이다. 자신이 담은 세상이라는 빛을 여러 빛깔로 변환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때로는 자신이 본 것에 눈멀기도 한다. 나는 그런 예술가들을 사랑하는 것 외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br><br>이왕 아무도 안 알아주는 일을 할 바에야 마음껏 하고 싶은 멋진 일이나 하자는 생각!『살롱 드 경성』, 101쪽<br>김환기 작가의 파트에서 저자가 적어놓은 문장이지만, 실상 『살롱 드 경성』에 등장하는 모든 작가들에게 해당하는 표현인 것 같다.<br><br>도상봉과 나상윤 부부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예술가 곁에는 이를 믿고 지지하는 짝이 있었던 것 같다. 시대상 탓에 주로 여성이 헌신하는 쪽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많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도상봉과 나상윤 부부의 도자기 일화는 그야말로 '부창부수'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또한 박고석-김순자 부부의 일화도 흥미로웠다. 고고한 예술혼을 불태우던 박고석 화가를 대신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던 김순자는 한국을 넘어 유럽과 미국에서도 인정 받은 한복 디자이너가 되어 자식들을 건사한다. 그러다가 말년에 '남은 생을 박고석의 아내로 살고 싶다며'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br>그런데 그런 도상봉보다 도자기를 더 좋아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아내 나상윤이었다. 보통은 돈이 궁한 형편에 도자기를 사오면 대부분 아내는 잔소리가 앞서기 마련인데, 나상윤은 오히려 반대였다. 어떤 도자기를 더 구해 오라고 조르기도 했을뿐더러, 도자기 평가에서부터 관리에 이르기까지 누구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이며 철저했다.『살롱 드 경성』, 111쪽<br><br><br>얼마 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500권을 돌파했다. 이 시리즈의 1권, 100권, 200권 등의 순서가 되면 우리나라의 작품을 싣는다. 이번 500권에는 이미륵 작가의 『압록강은 흐른다』의 차례였다. 『살롱 드 경성』에도 이미륵 작가와 초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낸 김재원 작가 등이 1940년대에 유럽에 우리나라의 문화를 알린 선구자로 등장한다.<br>일제 강점기를 접할 때마다 자주 오류에 빠진다. 이미 정조가 안경을 쓰고, 고종이 커피와 와플을 즐겼고, 경성에는 전차와 자동차가 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때때로 이 시대의 자료를 읽거나 보다가 현대의 흔적을 발견하면 놀란다. 내가 잘 모르던 미술 분야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생경하다. 이를테면, 김재원을 비롯한 몇몇 한국 작가가 독일에서 체류하던 때, 무솔리니의 초청으로 로마를 여행했다는 일화는 마치 다른 두 세계가 이어지듯이 흥미롭게 다가온다.<br>또한 책 곳곳에 BTS의 RM의 일화가 출몰한다. RM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소장할 정도로 유명한 미술 애호가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br><br>글쓰기를 비롯한 예술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지만, 유독 미술은 자기치유적 효능이 강한 예술 분야인 것 같다. 심리치료 과정 중에 미술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 중에도 내면의 결핍과 상처를 견디고 치유하기 위해 그림에 몰두한 경우가 많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죽음의 충동에 시달리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든 작품들이 다른 이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아니, 어쩌면 바로 그러한 고통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이 진정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br>이런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예술의 영역에서 AI가 가장 먼저 인간에게 도전장을 내민 분야가 미술/회화다. 누차 고백한대로, 미술에 대한 조예가 없는 나로서는 AI와 인간의 작품을 구별해낼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두 작품 사이에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AI가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그려낸 사람의 사연, 이야기다. 예술 지상주의자들은 어쩌면 대관절 그게 무슨 상관이냐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작품 뒤의 녹아든 창작자의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러니 선 하나를 긋는데 하루를 고민하고, 내키지 않으면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조금 더 가져봐도 되지 않을까.<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328/3/cover150/k92293516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3280394</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박준을 읽는 마음 -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 박준의 시를 읽는 마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89455</link><pubDate>Wed, 02 Sep 2026 16: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8945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32130255&TPaperId=1748945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98/4/coveroff/k23213025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32130255&TPaperId=1748945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 박준의 시를 읽는 마음</a><br/>박준 지음 / 난다 / 2026년 08월<br/></td></tr></table><br/><br><br><br>박준을 읽는 마음<br><br><br><br><br><br>누군가 좋아하는 시인을 대라고 하면, 윤동주, 이상, 이육사, 정지용, 백석, 소월을 대겠다. 이후 시대의 시를 접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지금 활동하는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겠다고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 시집을 붙잡고 매달려본 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박준' 외에는 저 목록에 다른 시인을 추가하지 못한다.<br>나는 마음대로 박준을 한국 서정시의 적장자라 여긴다. 누군가 이를 치명적인 오독과 무지라 비난해도 아랑곳않는다. 나는 그래미어워즈나 아카데미 시상식의 심사위원이 아니고 오로지 나 자신에게 기분 좋은 울림을 주는 시인들만 편애하기 때문이다.<br><br><br><br><br>박준을 왜 편애하느냐는 질문에는 그의 시를 읽어보라고, 또는 그가 출연한 방송을 보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또한 위에 인용한 글처럼 사랑에 대한 그의 표현이 무척이나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출연한 방송이다. 나는 언제나 작가들이 쓰는 글과 그들의 목소리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종종하곤 하는데, 박준은 평소의 말투나 목소리가 어쩐지 그의 시를 닮아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시가 그의 목소리를 닮아있는 것이겠지만, 내가 먼저 접한 것은 박준의 시이니, 내게는 시를 닮았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br><br><br>이번 신작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를 사고 나서 나는 또 한번 박준이라는 시인에 대해서 괜히 혼자 애틋해졌다. 게으름으로 다 읽지도 못할 것이고, 몇 년후에나 이런 책이 있었지, 하고 들춰보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애호하는 문인들의 신간을 꾸역꾸역 사는 경우가 있다. 초판 한정으로 사인본이 증정되는 경우다. 대체로 신간 초기 판촉을 위해 초판본은 양장이거나, 엽서가 들어 있거나, 사인이 들어있다. 어릴 적에는 양장이 멋들어져 좋아했지만 요즘 나는 양장본의 각진 폼에 자꾸만 밀려난다. 엽서는 애당초 수집하거나 써보내는 취미 없어 그다지 흥미도 없다. (아, 내가 엽서를 적어 보내는 재미를 알았다면 달랐을까?)<br>나의 소장용을 자극하는 건 언제나 사인본이었다. 직접 대면해서 받은 사인본보다도 그렇게 수중에 넣은 사인본이 더 많다. 하지만 서명은 고된 노동이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작가가 심혈을 기율여 멋들어지게 서명을 하면 그걸 인쇄해 삽입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런 서명 역시 귀하겠지만서도 나는 영 그런 사인'인쇄'본에는 손이 가질 않았다.<br>『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는 신간 출간 알림이 오자마자 구매했는데, 사실 사인본이 있는지도 몰랐다. 내게 박준이라는 작가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꼭 사서 읽어야 하는 작가였다. 책을 받아 첫 페이지를 열어보자 나는 좀 놀랐다. 박준의 서명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게 아닌가. 사실 인쇄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반대편을 보자, 덜 마른 서명에서 묻어나온 하얀 잉크가 묻어 있었다. 한 번만 서명하면 수 천개로 복사할 수 있는 이런 편한 시대에 박준은 직접 서명해서 보낸다. 낭만은 불편의 다른 이름이라던데, 나는 여전히 낭만에 젖은 이 시인을 좋아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br><br><br>『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의 인상적인 지점은 '시'와 '그 뒤에 달아놓은 박준의 글' 사이에 도약이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책은 그 시에 대한 시인의 해석이나 시에 얽혀 있는 시인의 개인적인 일화 같은 게 담겨 있기 마련이다. 물론 그런 글들도 수록되어 있지만, 어떤 시와 글들은 서로 거리감이 있다고 느낀 글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정지용의 &lt;호수&gt; 같은 시 뒤에는 연인(박준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미인)에 대한 글이 있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점점 흐려지는 그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마음에 남는 그림에 대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부족한 식견으로는 &lt;호수&gt;가 독자에게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인상을 자아내니 여기서 착안한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시와 흐려진 그림은 감상하는 이에게 선명한 이미지를 준다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쓰인 게 아닐까 한다.<br>첫 시집 제목을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로 지을 만큼, 박준은 이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 같다. 흔히 어떤 사람의 이름까지도 앓게 되는 게 사랑의 대표적인 증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나는 종종 참 쓰는 시에 꼭 맞게 어떻게 이름도 박준일까, 생각해온 적이 있는데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에 수록된 이름에 담긴 내력은 그런 낭만과는 전연 달라 퍽 재밌다.<br><br><br>작중 유영국 화가의 전시회에 다녀온 일화도 있는데, 요즘 같이 읽는 책인 『살롱 드 경성』에도 이 화가에 대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또한 근래 예술가는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내는 프리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에 대해 다룬 부분이 있어서 오래 곱씹게 되었다.<br>예술이 규범과 불온함을 동시에 내포한다고 정의할 때 누구나 한눈에 받아들일 수 있는 규범과 달리 불온함을 감지할 수 있는 눈은 저마다 다릅니다. 불온은 한 예술가가 대상을 재인식하는 과정에서 담지되는 것이며 감각을 물질화하는 방법에 따라 분화되기 마련이니까요.『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62쪽<br>당연하지만 한번도 새삼스럽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박준뿐만 아니라 시인의 글을 읽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번 책에선 꿀에 대한 문장이 내게 그랬다.<br>꿀. 식물에서 왔지만 더이상 식물은 아니고 동물의 몸에 속해 있었지만 결코 동물은 아닌.『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39쪽<br>또한 위안을 받기도 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몇몇 예외적인 시인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시를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인이자 시집을 편찬하는 일에 인생의 많은 시간을 할애해 온 박준마저도 시가 어렵다고 하니, 괜히 나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여 위안이 되었다.<br><br><br><br><br><br><br><br>이 책을 다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내가 더는 박준의 시를 사랑하지 못하는 날이 올까 두렵다. 그렇게 된다면, 미워할 것 투성이인 이 세상에서 더는 사랑할 것을 찾지 못했다는 소리일 테니까.<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98/4/cover150/k23213025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980455</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시대가 흘러도 여전한 문장론의 고전 - [문장강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77330</link><pubDate>Fri, 28 Aug 2026 16: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7733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71007&TPaperId=1747733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4/81/coveroff/8936471007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71007&TPaperId=1747733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문장강화</a><br/>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 / 창비 / 2005년 03월<br/></td></tr></table><br/><br><br><br>시대가 흘러도 여전한 문장론의 고전<br><br><br><br><br><br>글을 쓰다보면, 필연적으로 문장에 대한 고민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 표현이 맞을까, 더 좋은 표현이 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고민해서 뺀 쉼표를, 다시 읽어본 후에 넣었을 때에야 소설이 완성되었다고 느낀다는 레이먼드 카버만큼의 고민은 아니겠지만, 글을 쓸 때 어느 정도 고민은 필연적이다.<br><br><br>이번에 문장론에 대해서 공부하다보면 한 번쯤은 마주치게 되는 이태준, 『문장강화』를 읽었다. 여기서 강화는 수준을 높인다는 강화(強化)가 아니라 쉽게 풀어서 이야기한다는 뜻의 강화(講話)입니다.'강화(講話)'의 의미다.<br><br><br>1939년에 처음 나온 글쓰기 교본을 팔십몇 년이 지난 지금 읽는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몇 장 넘기지 않아 그런 걱정은 사라졌다. 오히려 요즘 나오는 글쓰기 책들보다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대목이 여럿이었다.<br><br><br>이태준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이 책에서는 문장가로서의 면모가 훨씬 두드러진다.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단순했다. 좋은 문장을 쓰는 법을 가르치겠다는 것. 그런데 그 방법이 요즘 흔히 보는 작문 지침서와는 결이 다르다. 문법책처럼 규칙을 나열하지 않고, 실제 문인들의 글을 붙잡고 하나하나 왜 좋은지, 왜 고쳐야 하는지를 짚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바로 다음과 같다. 이는 직접적인 문장 작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근본 철학에 가깝다.<br><br><br><br><br><br><br><br>"생활이 있어야 말이 있고, 말이 있어야 글이 있다."<br><br><br><br><br>처음 읽었을 때는 당연한 소리처럼 들렸다. 삶이 먼저고 언어가 그다음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책을 끝까지 읽고 다시 이 문장으로 돌아오면 무게가 달라진다. 이태준은 이 순서를 뒤집어서 쓰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글을 먼저 예쁘게 꾸미려 하고, 그 글에 맞춰 생각을 짜맞추는 태도 말이다. 그는 글이란 삶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 삶과 무관하게 조립되는 물건이 아니라고 본다. 지금 시대에 이 말을 곱씹어보면 더 아프게 다가온다. 요즘 우리는 문장을 다듬는 기술만 배우고 그 문장이 나온 자리, 즉 생활을 돌아보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br><br><br>이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핵심은 일물일어주의다. 하나의 사물에는 그것을 정확히 가리키는 말이 하나뿐이라는 생각. 이태준은 비슷비슷한 단어를 되는대로 골라 쓰는 습관을 경계한다. '아름답다'와 '곱다'와 '예쁘다'가 사전에서는 얼추 비슷해 보여도 실제 문장 안에서는 전혀 다른 자리에 놓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작가가 할 일은 그 정확한 한 단어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대충 비슷한 말로 때우면 문장은 흐릿해지고, 흐릿한 문장은 독자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br><br><br>솔직히 이 대목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좀 돌아보게 됐다. 글을 쓸 때 정확한 단어를 찾기보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어디서 본 듯한 표현을 가져다 쓰는 일이 얼마나 잦았던가. 이태준은 이런 습관을 게으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게으름을 고치는 유일한 방법은 관찰이라고 말한다. 사물을 오래 들여다보고, 그것과 가장 가까운 말을 찾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 태도. 요즘 식으로 말하면 디테일에 대한 집요함이다.<br><br><br>책의 구성도 흥미롭다. 문장의 기초, 문체, 각종 글의 종류, 퇴고에 이르기까지 순서대로 다루기 때문에 처음 글을 쓰는 사람도 접근하기 쉽다. (물론 시대상의 옛스러운 말투는 감안해야 한다.) 또한 당시에 발표된 다양한 글들을 실제 예문으로 쓰며,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함께 짚는데, 이 부분이 이 책을 지금 읽어도 재미있게 만드는 이유다. 이론만 늘어놓지 않고 손으로 잡아 보여준다.<br><br><br>문체에 대한 장에서는 개성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이태준은 좋은 글이란 규칙을 다 지킨 글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목소리가 살아있는 글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규칙을 무시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규칙을 충분히 익힌 다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튀는 문장을 쓰려는 사람들에게 이 대목은 뜨끔할 것 같다. 기본기 없이 특이함만 좇으면 그건 개성이 아니라 미숙함일 뿐이라는 게 이태준의 진단이다.<br><br><br>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든 생각은, 글쓰기를 기술로만 접근하는 사람과 태도로 접근하는 사람의 차이다. 요즘 많은 글쓰기 책들이 문장을 짧게 써라, 접속사를 줄여라, 수동태를 피해라 같은 규칙을 나열한다. 물론 이런 규칙도 쓸모가 있다. 하지만 이태준은 규칙 이전에 삶을 보는 눈, 사물을 정직하게 관찰하는 태도를 먼저 요구한다. 규칙은 그다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식이다. 이 순서가 이 책을 다른 작문 교재들과 구분 짓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br><br><br>물론 지금 시점에서 읽으면 낡은 부분도 있다. 예로 든 글들이 대부분 1930년대 문인들의 작품이라 요즘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고, 문장 자체도 옛투가 많이 섞여 있어 처음에는 리듬을 잡기가 쉽지 않다. 한자어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쓰였고, 일부 표현은 요즘 맞춤법과 다르다. 하지만 이런 낯섦이 오히려 이 책을 천천히 읽게 만든다. 빨리 훑고 지나가는 대신 한 문장 한 문장 곱씹게 되는데, 이게 이태준이 원했던 독서법과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br><br><br>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남는 건 결국 처음 인용했던 그 문장이다. 생활이 있어야 말이 있고, 말이 있어야 글이 있다는 말. 요즘처럼 글쓰기 기술이나 문장 스킬을 검색 몇 번으로 배울 수 있는 시대에, 이태준의 이 순서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는 종종 이 순서를 건너뛰고 곧바로 좋은 문장을 흉내 내려 한다. 근사한 표현, 있어 보이는 어휘를 먼저 모으고 거기에 내용을 끼워 맞춘다. 이태준이 봤다면 이런 글쓰기를 순서가 뒤집힌 글쓰기라고 불렀을 것 같다.<br><br><br>일물일어주의도 결국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정확한 단어를 찾는다는 건 단순히 어휘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물과 그 순간을 얼마나 진지하게 마주했느냐의 문제다. 대충 비슷한 말로 넘어가는 건 사물을 대충 본 것이고, 정확한 말을 찾아낸다는 건 그만큼 오래 들여다봤다는 뜻이다. 이태준에게 글쓰기란 결국 얼마나 정직하게, 얼마나 오래 보았는가의 기록이었던 셈이다.<br><br><br>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혹은 글쓰기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책을 붙잡고 밑줄을 그어볼 만하다. 당장 써먹을 문장 팁을 찾는 사람에게는 조금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장 이전에 무엇을 봐야 하는지, 무엇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책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내가 쓴 글들을 다시 열어보고 싶어졌다. 거기 쓰인 단어들이 정말 내가 찾아낸 단어였는지, 아니면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던져둔 말이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54/81/cover150/893647100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48161</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용감한 사람은 도박장의 손님이 되고 - [노름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62106</link><pubDate>Thu, 20 Aug 2026 17: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6210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0286&TPaperId=1746210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28/56/coveroff/893291028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0286&TPaperId=1746210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노름꾼</a><br/>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재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01월<br/></td></tr></table><br/><br><br>용감한 사람은 도박장의 손님이 되고<br><br><br><br><br>올해 세운 목표 중 하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는 것이었다. 일년의 반이 훌쩍 지나가고, 2/3이 다 끝나가는 지금도 읽지 못하고 있다. 『노름꾼』은 훌륭한 작품성과 함께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 관계도에 대한 예행 연습으로 읽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제야 겨우 읽었다. 읽는 내내 난무하는 러시아 이름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과연 올해가 가기 전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을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br>도스토옙스키의 걸작이라 불리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보다 『노름꾼』이 더 큰 흥미를 끈 이유는 분량이 더 적기도 하지만, 『노름꾼』이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실제로 룰렛 도박에 상당히 중독되어 있었고, 당장 출판사에 새 소설을 납품하지 않으면, 그가 쓴 모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이 9년간 출판사에 귀속될 위기에 처했다. 결국 노름빚 앞에서 절망한 도스토옙스키는 타자수를 고용해서 약 한달동안 구술로 소설을 써내려가는데, 그게 바로 『노름꾼』이라고 한다. 또한 이 타자수는 훗날 도스토옙스키와 결혼을 하는 안나다.<br>『노름꾼』을 다 이해했느냐, 하고 물어보면 솔직히 나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통에 나는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장광설이 상당히 현란하고 매혹적이라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나도 같이 미쳐가는 것만 같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도박장에 같이 있는 생생한 현실감을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는데 나도 그런 것 같았다.<br>이 작품은 모든 인물들이 광기에 서려 있다. 도박이 모두를 그렇게 만들기도 하거니와, 도박과 비슷한 짜릿함을 주는 사랑에 미쳐있다. 장군이나 주인공 알렉세이가 그렇다. 특히나 주인공이자 화자인 알렉세이는 도박과 사랑 모두에 사로잡혀 있어서 정말로 따라가기가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될 지가 궁금해서 따라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물론 『노름꾼』이 엄청난 걸작이냐,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도대체 인물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걸 기세와 분위기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긴 하지만 정작 다 읽고 나면 "광기" 밖에 느껴지는 게 없다. "광기"가 곧 작품에서 추구한 바인 것 같아서 실패한 작품은 결코 아닌 것 같다.<br><br><br>용감한 사람은 도박장의 손님이 되고, 똑똑한 사람은 도박장의 직원이 된다.<br><br><br>나는 이 말을 좋아하는데, 정말 『노름꾼』의 인물들은 모두가 돈을 잃을 걸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다. 그 모습은 아마도 도스토옙스키 본인의 모습이었으리라. 이러한 자신의 부끄러운 면모까지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이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믿음과 흥미를 키우는 부분이다. 또한 나는 아이러니는 사랑하는데, 『노름꾼』이 노름꾼이었던 도스토옙스키의 노름빚을 갚기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이 작품에 대한 흥미를 키운다.<br><br><br>인물관계도<br><br>1. 알렉세이 이바노비치<br>소설의 서술자이자 장군 집안의 가정교사.<br>장군의 의붓딸 뽈리나를 맹목적이고 광기 어린 감정으로 짝사랑하는 중. 뽈리나의 부탁과 환심을 사기 위해 룰렛에 손을 댄다.<br>2. 뽈리나 알렉산드로브나<br>장군의 의붓딸. 장군의 전처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뽈리나의 동생들은 장군과 전처(뽈리나의 생모) 사이에서 얻은 아이들.<br>알렉세이의 맹목적인 사랑을 알면서도 냉담하고 가학적으로 대하지만 내면에는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 양부의 빚 때문에 드 그리외 후작에게 얽혀 있으며, 미스터 에스틀리와도 비밀스런 관계를 유지한다.<br>3. 장군<br>퇴역 러시아 장군이자 알렉세이의 고용주.<br>도박과 방탕한 생활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 드 그리외에게 저당 잡힌 상태. 모스크바에 있는 부유한 백모(할머니)가 사망해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기만을 기다리며, 젊은 프랑스 사교계 여성 블랑슈와의 재혼을 꿈꾼다.<br>4. 안토니다 바실리예브나 (할머니)<br>장군의 부유한 모스크바 백모이자 가문의 실질적 기둥.<br>모두가 유산을 위해 사망 소식만을 기다린다. 그런데……….<br>5. 마르키 드 그리외<br>프랑스인 고리대금업자이자 가짜 후작 행세를 하는 야심가.<br>장군의 채권자로 일가를 쥐락펴락하며, 뽈리나를 빚으로 옭아매 정부로 만들었다.<br>6. 블랑슈<br>신분 상승과 돈을 노리는 프랑스 출신 사교계 여성.<br>장군이 목을 매는 사교계의 여성.<br>7. 미스터 애스틀리<br>여행 중 만나게 된 영국 신사.<br>알렉세이의 친구이자 관찰자. 뽈리나와 비밀스런 관계를 유지하며, 알렉세이와 그와 얽힌 이들에게 곧잘 호의를 베푼다.<br><br><br>화폐단위<br><br>소설에는 다양한 화폐 단위가 나오는데, 이를 제미나이를 통해 정리했다.<br>소설에 등장하는 화폐들 중 가장 가치가 낮은 러시아의 보조 동전 '꼬베이카(Kopeck)'를 1로 잡고, 1860년대 당시 환율을 바탕으로 각 화폐의 상대적 가치를 정리해 드립니다.<br>최하위 단위(꼬베이카) 기준 환산표<br>1 꼬베이카 (러시아 동화): 최하위 기준 단위1 프랑 (프랑스 은화): 약 25 꼬베이카1 굴덴 / 플로린 (남독일·오스트리아 은화): 약 60 꼬베이카1 탈러 (북독일 은화): 약 95 ~ 100 꼬베이카1 루블 (러시아 기본 통화): 정확히 100 꼬베이카 (1루블 = 100꼬베이카)1 프리드리히스도어 (프로이센 금화): 약 500 ~ 525 꼬베이카<br>한눈에 보는 교환 비율 (근사치)<br>1 프리드리히스도어 (최고액 금화) = 약 5 탈러 = 약 5 루블 (500 꼬베이카) = 약 8.5 굴덴 = 약 21 프랑<br><br><br>*작중 알렉세이가 한 번에 20만 프랑을 따는데, 이를 현대적 가치로 환산하면 이렇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제미나이에게 물어봤다.)<br><br>1860년대 20만 프랑의 현대 원화 가치 환산<br>19세기 중반(1860년대)의 통화를 현대 화폐로 환산할 때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3가지 경제학적 기준으로 20만 프랑을 직접 계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br>1. 순금 실물 가치 기준 (약 70억 원)<br>1860년대 프랑스는 '프랑 제르미날'이라는 철저한 금본위제 화폐를 사용했습니다.1프랑의 법정 순금 함유량: 약 0.29032g20만 프랑의 순금 무게: 200,000 x 0.29032g = 58,064g (약 58.06kg)현대 원화 환산: 현재 국내 순금 시세(1g당 약 12만 원 기준)를 적용하면 58,064g x 120,000원 = 69억 6,700만 원 (약 70억 원)<br>2. 소득 및 사회적 경제력 기준 (약 70억 ~ 85억 원)<br>당시 사람들의 소득 수준과 비교해 그 돈이 가진 '사회적 위력'을 환산하는 방식입니다.1860년대 프랑스 소득 수준:일반 도시 노동자 연봉: 약 1,000 ~ 1,200 프랑부유한 부르주아 신사의 1년 생활비: 약 4,000 ~ 5,000 프랑20만 프랑의 가치: 일반 노동자가 한 푼도 쓰지 않고 약 170~200년간 일해야 버는 돈. 유한계급이 40~50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치스럽게 살 수 있는 거금.현대 원화 환산: 현재 한국 임금근로자 평균 연봉(약 4,200만 원)을 기준으로 170~200년 치 소득을 계산하면 4,200만 원 x 170~200년 = 71억 4,000만 원 ~ 84억 원<br><br>3. 단순 장바구니 물가(CPI) 기준 (약 13억 ~ 15억 원)<br><br>프랑스 통계청(INSEE) 및 경제사학계의 역사적 소비자물가지수(CPI) 환산율을 적용한 방식입니다.<br>1860년 1프랑의 현대 유로 구매력: 약 4.0 ~ 4.5 유로 (19세기에는 공산품과 식료품의 생산 단가가 지금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에 단순 물가 배수는 낮게 나옵니다).20만 프랑의 유로 환산: 약 80만 ~ 90만 유로현대 원화 환산: 1유로 당 1,600원 기준으로 계산하면 850,000유로 x 1,600원 = 13억 6,000만 원<br>4. 부동산 및 실제 사치 규모 (약 80억 ~ 100억 원)<br>1860년대 파리 부촌(8구 등)의 최고급 저택 한 채 매매가가 약 10만~20만 프랑이었습니다.파리 중심가의 대저택이나 서울 핵심지의 고급 주택 1채 가격이 현대에 80억~120억 원을 호가하는 점을 감안하면, 블랑슈가 저택을 빌리고 최고급 마차와 보석을 쓸어 담으며 한 달 만에 태워버린 20만 프랑의 파괴력은 약 70억~100억 원 규모의 벼락부자 당첨금으로 보는 것이 소설의 맥락에 가장 잘 들어맞습니다.<br><br>요약<br>단순 식료품/생필품 구매력(CPI)으로만 보면: 약 13억 ~ 15억 원순금 실물 가치(금본위제)로 보면: 약 70억 원부동산, 노동 가치, 실제 사치 규모로 보면: 약 70억 ~ 100억 원<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28/56/cover150/893291028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285620</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기담집 - [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57772</link><pubDate>Tue, 18 Aug 2026 15: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5777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9247&TPaperId=1745777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off/k692139247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9247&TPaperId=1745777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a><br/>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br><br>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기담집<br><br><br>성해나의 신작 소설집 『인비인』을 읽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기담집'이라는 타이틀이 달렸다. 기담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으나 이번에 명확한 의미를 찾아보았다. 당연히 괴담과 비슷한 결을 지닌 무섭고 기이한 이야기일 줄 알았으나 의외로 이상야릇하고 재밌는 이야기라고 설명되어 있었다.<br><br>기담1 奇談/奇譚<br>명사1.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표준국어대사전<br><br><br>어제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9)인비인(人非人) (27)소돔의 의로운 혈육들 (53)<br>오늘매일(買日) (95)프랭크 오자와 (121)윤회 (당한) 자들 (139)<br>내일아미고 (207)#유령 (235)고(蠱) (251)<br><br>그래서인지 총 9편의 작품이 실린 『인비인』도 괴담집은 아니다. 앞에 실린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인비인」은 괴담에 가깝긴 하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괴담이라기보다 신기한 이야기 정도의 느낌이다. 구태여 비유하자면, 옛날 우리 설화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설화의 구조가 현대의 시점에서, 한국과 미국 등의 공간으로 펼쳐져 있는 것 같다.<br>9편의 기담은 3개의 분류로 나뉘어져 있다. 어제, 오늘, 내일이다. 어제에 실린 3편은 모두 일제강점기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까지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일들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오는지에 대해 담고 있다.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은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우선 근래 시끄러운 여배우 때문이다. 친일파 조상의 행적에 대해서 무지했던 여배우가 그들이 누렸던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다가 결국 그들이 친일파였음이 낱낱히 밝혀진 사건이다.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주인공이 등장하고, 현실의 여배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문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가 이를 부정하다가 죽기 직전에는 부끄러워한다. 이 모습이 겹치면서 지금 여배우는 어떤 심정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br>작가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이 작품은 성해나 작가의 첫 소설집인 『빛을 걷으면 빛』에 수록된 단편소설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의 초안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선 친일 행적에 대해 자랑스러워 하는 가족을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하나의 소설이 어떤 형식으로 변해가는지를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br>"어제"에 실린 3편의 소설이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성해나 작가가 다루는 일본(식민지 시절)의 이야기가 내 취향에 맞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빛을 걷으면 빛』에 실린 작가의 신춘문예 등단작 「오즈」에도 일제 강점기 시절의 피해자 할머니가 등장한다. 이때부터 성해나 작가는 이런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다.<br><br><br><br>오늘 섹션에 실린 글들은 기담에 가까운 이야기가 많았다. 누군가의 인생을 경매로 사고 파는 이야기나 윤회를 믿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내일 섹션에 실린 글들은 현재도 무섭게 발전하고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를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윤회 (당한) 자들」, 「고(蠱)」가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특히 「고(蠱)」는 「혼모노」를 떠올리게 한다.<br>「혼모노」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가짜가 진짜를 이기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진짜 가짜는 누구고 가짜 진짜는 누가 되는가? 진짜와 가짜의 경계선이 소설의 결말에서 흐릿해져버린다.<br><br>「고(蠱)」는 마찬가지로 주인에게 종사해야 할 고가 주인의 주인이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주인에게 종사하는 이야기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치 하이데거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떠올리게 하지만, 「고(蠱)」는 한층 더 나아가 아예 우로보로스처럼 머리가 꼬리를 물어버려서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모르게 되어버린다. 이렇듯 본질의 경계를 흐려버리는 성해나의 이야기는 특히 흥미롭다.<br><br><br>이 소설을 읽고 느낀 점은 성해나 작가는 확실히 순문학 작가 중에선 장르소설 쪽으로 나아가려는 힘이 강한 작가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순문학과 장르소설 사이에 어떤 우위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장르소설은 소설이란 형식이 지니고 있던 본연의 서사성, 이야기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순문학은 의미나 서정성을 더 강화한 쪽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성해나와 김기태 같은 작가가 순문학의 본령을 지키면서도 서사성과 이야기의 즐거움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으로 그 생각은 더 단단해졌다. (김초엽 작가나 천선란 작가, 정세랑 작가도 그런 편에 속하는 것 같은데, 직접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다.)<br>또한 『인비인』에는 작품마다 작가의 후기가 달려 있어서 좋았다.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해당 작품을 썼는지를 읽어보는 것은 평론가들의 해설 지면과 다른 솔직한 창작관을 엿볼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성해나 작가의 관심폭이 상당히 넓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양한 장르나 소재를 다루면서 적재적소에 필요한 어휘와 지식을 담을 수 있는 재능이 부러웠다. 성해나 작가의 다음 작품들도 기대가 되는 이유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150/k69213924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812549</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세상에 애매한 재능은 없다, 그러나 - [GV 빌런 고태경 - 2020 한경신춘문예 당선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52207</link><pubDate>Sat, 15 Aug 2026 15: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5220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82137852&TPaperId=1745220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69/44/coveroff/k48213785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82137852&TPaperId=1745220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GV 빌런 고태경 - 2020 한경신춘문예 당선작</a><br/>정대건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04월<br/></td></tr></table><br/><br>세상에 애매한 재능은 없다. 그러나&nbsp;<br><br><br><br>근래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강의를 듣고 있다. 그렇다보니, 오랫동안 미루어두었던 『GV빌런 고태경』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얼마 전에 읽은 『아코디언』의 천명관 작가는 오랫동안 영화 감독을 꿈꿔왔으나 소설가로 먼저 세상에 알려지고, 영화 감독이 되었다. 정대건 감독은 그 반대인데, &lt;투 올드 힙합 키드&gt;로 먼저 감독을 데뷔한 후 소설가로도 이름을 알리게 된 케이스다. 나는 &lt;투 올드 힙합 키드&gt;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당시에는 힙합에 경도되어 있었고, 실제 래퍼들의 삶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야 『급류』의 작가 정대건이 그 감독이었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라고 반가웠었다. 정확히 찾아서 따져본 것은 아니지만, 정대건 작가 이후로 영화나 드라마 쪽에서 일하던 작가나 감독들이 소설을 출판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괴물, 용혜』나 『무덤까지 비밀이야』 같은 작품의 작가들도 비슷한 출신을 가지고 있다.<br><br><br><br>* * *<br><br><br><br>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작가가 쓴 화제작인 『급류』를 일 년 전쯤에 읽었다. 나는 대체로 읽었던 모든 책에 대해서 짧게라도 감상평을 남기려고 하는 편인데, 『급류』는 실패했다. 서평을 쓸 때, 장점만을 언급하는 주례사 비평은 나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가능하면 내가 느낀 장점과 단점 모두를 적으려고 한다. 다만, 『급류』에선 어느 장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책의 서평에 쓸 수 있는 말은 온통 부정적인 것밖에 없었다. 아주 가끔 그런 책들을 만나게 되고, 나는 그럴 때마다 서평 적기를 생략한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남이 각고의 노력을 들여서 만든 작품에 대해 쉽게 험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br>그래서 『GV빌런 고태경』에 대한 관심도 조금은 식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이 환기된 것은 영화 리뷰 쓰기 강의도 있지만, 올해 재밌게 보았던 &lt;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gt;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동안 영화 감독 입봉을 준비했지만, 번번이 실패해 점차 진상이 되어간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lt;모자무싸&gt;의 결말보다는 『GV빌런 고태경』의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lt;모자무싸&gt;는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동만의 성공을 보여주지만, 『GV빌런 고태경』에선 고태경이 작중 스스로 지향했던 것처럼, '그는 여전히 도전하고 있다.'라는 결말로 끝나기 때문이다.)<br><br><br>어쨌든, 나는 『GV빌런 고태경』이 『급류』보다 좋았다. 내가 느낀 『급류』의 유일한 덕목은 잘 읽힌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두 사람의 연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결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천명관도 그렇고, 앞의 두 작품 작가들도 그렇고, 영화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의 글은 쉽고 이미지화가 잘된다는 장점을 공유한다. 『GV빌런 고태경』 역시 그런 장점이 잘 묻어난 데다가, 작가가 오래 몸담았던 업계의 일이다 보니 자전적이어서 좀 더 솔직하고 현실감 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아래와 같은 문장은 쉬워보이고 당연해보이는 문장이지만, 업계에서 살펴보지 않는 한 쓸 수 없는 문장처럼 느껴진다.<br><br><br>영화는 기본적으로 통제다. 위대한 영화 감독들은 대부분 통제광들이다.<br>『GV빌런 고태경』, 50쪽<br>아무리 세상에 동기부여되는 말이 많이 있다지만 '나도 하겠는데?'만큼 효과적인 동력은 없다. 그래, 쟤도 했는데 내가 왜 못해. 나는 남은 맥주를 원샷으로 비웠다.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나 감독이지.<br>『GV빌런 고태경』, 55쪽<br>말하다보니 어쩐지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요약하는 것만 같았다. 노 굿(NG)을 오케이하면서 살아온 인생, 변명 같은 인생. 관객들은 그런 사정에 관심이 없다. 영화는 영화로 말하는 것이다.<br>『GV빌런 고태경』, 77쪽<br><br>유머 역시 재밌었다. 관심의 공산주의나, 잃어버린 자아가 인도가 아닌 아이슬란드에 있다는 점 등이 그러했다.<br><br>관심의 공산주의가 필요하다. 관심의 재분배, 최소 생계 유지처럼 최소 관심 유지가 되는 사회.<br>『GV빌런 고태경』, 66쪽<br><br>예전에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인도에 갔는데 요즘에는 잃어버린 자아가 아이슬란드에 가 있잖아.<br>『GV빌런 고태경』, 124-125쪽<br><br><br>감독은 선택의 프로<br><br><br>감독이 똑바로 잘해야 하는 한 가지라면 역시 선택이겠지.『GV빌런 고태경』, 151쪽<br>작중에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사안은, 감독은 선택을 하는 직업이란 사실이다. 여러 컷들 중에서 최고의 컷을 골라내고 이어붙이고. 감독이 편집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강의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들었다. 영화는 이처럼 편집의 예술인데, 한국이 유독 특이한 환경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영화 감독은 편집과 촬영에 모두 전적인 권한을 갖는데, 미국의 할리우드에서는 촬영은 감독이 하되, 편집권은 스튜디오가 갖는다고 한다. 수백 억이 투자된 영화의 흥행을 결정짓는 것이 편집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주는 듯하다. (재밌는 점은 예고편만 전문적으로 편집하는 감독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예고편과 본편의 내용이 전혀 다른 '예고편 사기', '터저 사기' 같은 헤프닝이 생기기도 한다.)<br>『GV빌런 고태경』의 주인공인 조혜나는 이 선택의 문제 앞에서 번번이 좌절한다. 감독으로써 영화를 편집할 때, 늘 선택의 기로 앞에서 고뇌하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선택의 문제 앞에서 고뇌하기도 한다. 예컨대, 가장 중요한 영화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결정을 끝내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조헤나는 영화에 어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만두어야 하는가. 아주 가끔은 재능이 아니라 일에 대한 사랑이 그 자리에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br><br>어떤 것에 대한 사랑보다는 조롱과 냉소가 더 쉬우니까.<br>『GV빌런 고태경』, 126쪽<br>나는 극장을 정말 사랑해. 나는 영화를 정말 사랑해.<br>『GV빌런 고태경』, 133쪽<br><br>고태경이란 문제적 인물<br><br><br><br>"선생님, 한때 영화인이기도 하셨잖아요. 과거에 영화인이셨던 분들이 현장을 떠나서도 어떻게 영화와 극장을 사랑하며 지내는지 담고 싶-""나 아직 영화인이요."<br>『GV빌런 고태경』, 64쪽<br>『GV빌런 고태경』은 고전적인 소설의 형태를 차용한다. 이를테면, 근대 소설이 발화하던 시기에 많은 작품들은 소설 주인공 이름을 제목으로 쓴다.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리나』처럼. 『GV빌런 고태경』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플롯도 전통을 잘 따른다. 주인공이 문제적 인물을 만나게 되고, 그 인물과 가까워지다가 그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를 통해 마침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깨달음을 얻는 구조다. 전형적이고, 전형적인 만큼 보편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플롯이다.<br>어떤 의미에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lt;로마&gt; 같기도 하다. 현대에 영화를 찍는 감독이 고전 영화의 기법들을 모두 교과서적으로 차용해 적용해 만든 영화 같이 『GV빌런 고태경』은 근대소설의 교과서적 문법을 착실하게 따른다.<br><br>어김없이 극장 맨 뒤에 앉아 대학노트를 펼친 고태경에게 물었다."선생님은 왜 영화를 뒤에 앉아서 보세요?""나는 내용에 몰입해서 보려는 게 아니라,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전체를 보려는 거야."그는 두 시간 동안의 영화 관람이 유희가 아니라 공부 시간인 것처럼 말했다.<br>『GV빌런 고태경』, 109쪽<br>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고태경이 정말 흥미로운 인간인가. 필경사 바틀비처럼 관심을 가질만 한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 처음에는 그저 이 GV 빌런이 어떤 사고를 또 벌일까, 이게 궁금했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고태경 역시 조혜나와 마찬가지로 감독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지망생이었음이 밝혀지며 한단계 더 나아가며 전환된다. "도대체 저 빌런은 왜 저렇게 무례할까?"에서 시작된 질문은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아직도 영화를 떠나지 못할까?"라는 질문으로 전환된다. 그는 여러 역경을 거쳐서 결국 극장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었던 셈이다.<br><br>극장이 곧 그의 영화학교였다.<br>『GV빌런 고태경』, 120쪽<br>고태경은 늘 베레모를 쓰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적을 대학노트를 무릎에 올리고, 이 베레모를 벗는다. 노트까지야 그럴 수 있다쳐도, 베레모는 굳이 왜 벗는가. 실내라서? 그렇다기에 고태경은 식당 같은 곳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는다. 우리가 쓴 모자를 구태여 벗을 때에는 예의를 차릴 때이다. 프로야구에서 데드볼을 맞춘 투수가 타자에게 모자를 벗어 정중히 사과하듯이.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것이, 타인의 노력이 담긴 영화를 보는 것이 고태경에겐 일종의 의식인 것이다. 다음 대사에서 그의 생각이 여실히 드러난다.<br><br>"나는 그 사람 싱정 알아. 누구보다 잘 알아. 그 사람 인생은 영화야. 종교 영화야. 십 년 넘게 무언가를 기다리고 손에 잡힐 듯하다. 멀어지고 반복하다 보면 결국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돼."<br>『GV빌런 고태경』, 88-89쪽.<br><br>그의 영화인적 태도는 후배였던 민현석 대표에게 면박을 당했을 때 단적으로 드러난다.<br><br><br>고태경은 눈치보는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지금 뭐하는 거야?""네?"고태경의 무표정한 얼굴에 잠시 화가 스쳤다."조 감독. 감독 일 똑바로 해. 카메라를 들이대야지."<br>『GV빌런 고태경』, 171쪽<br>그는 면박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조혜나보다도 더 냉정하게 영화를 생각한다. 조혜나가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에 카메라를 들이밀지 못하자, 오히려 "찍으라며", "너의 일을 하라고" 다그친다. 그가 얼마나 영화에 진지한지를 단번에 보여주는 좋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디를 갈 거냐는 물음에, 극장으로 간다! 이런 점에선 영화를 꿈꾸다 끝내 영화가 된 남자 같기도 했다. 무엇이든지 인생에 환유하는 건 시시하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선 "life goes on"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아무리 역경과 좌절이 찾아와도 인생은 흘러간다. 아무리 멈추고 싶고, 아무리 별로인 장면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저 흘러가는 영화처럼.<br>또한 『GV빌런 고태경』의 결말이 &lt;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운다&gt;나 『급류』보다도 좋았던 점은 바로 그런 그의 태도와 열정이 남긴 채로 끝났기 때문이다. 솔직히 조혜나 이 영화, &lt;GV빌런 고태경&gt;으로 대박을 쳤다거나, 고태경이 마침내 모든 역경을 딛고 감독에 데뷔했다면 나는 이 소설이 그저 그렇게 기억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태경은 아직도 그 태도를 유지하며 도전하는 중이고 (작중에서 본인이 조혜나가 만드는 다큐가 그런 방향에서 끝나면 어떨까 했던 것처럼.) 조혜나도 도전 중이다. 그리고 결말은 마치 영화의 엔딩처럼 그가 다시 돌아와 GV에서 질문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엔딩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려진다.<br>또한 그는 &lt;GV빌런 고태경&gt;의 GV와 결말에서 자신의 태도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지점이 아닐까, 하면서도 깊이 공감되는 장면이었다.<br>"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꿈과 열망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제 영화를 상영하는 겁니다."<br>『GV빌런 고태경』, 278쪽<br><br>조 감독, 영화를 만들자! 극장에서 다시 영화를 상영하자. 우리는 빛을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빛을 보려면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지.<br>『GV빌런 고태경』, 291쪽<br><br><br>세상에 애매한 재능은 없다, 그러나 우리만의 바르샤바 영화제는 있다.<br><br>"재능이니 뭐니 하는 건 이십대에나 하는 말 아냐? (…) 꾸준히 계속하는 의지야말로 진짜 재능이지.""어쭙잖은 재능은 저주라던데요."<br>『GV빌런 고태경』, 117쪽<br>어른이 되다는 건 수많았던 꿈의 목록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종 "꿈을 포기 못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아이 같다는 말을 칭찬으로도, 비난으로도 사용한다. 『GV빌런 고태경』은 1차적으로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소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고태경이란 인물로 하여금,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너도 한 번쯤 이런 애정을 품은 대상이 있지 않았느냐고. 이 "영화"의 자리에 자신이 좋아하는 걸 넣어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GV빌런 고태경』을 좋아할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문학을 겹쳐 생각했다.<br><br>또한 애매한 재능의 문제는 많은 사람을 심란하게 한다. 꿈이냐, 현실이냐. 이 문제에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아마도 재능일텐데, 재능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메시의 재능을 가진 이가 농구에 꽂혀서 농구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마이클 조던이 골프나 야구를 했던 것처럼.<br>근래 오래 곱씹는 말이 있다. "세상에 애매한 재능은 결코 없다." 재능이란 건 단연 눈에 띄어서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지 못하다면 재능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br>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세상 모든 일에 재능을 가지고 있을 순 없다. 그렇다면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좋아하는 일에 꾸준히 도전하고 사랑하는 게 재능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lt;저궤도인간&gt;의 동재처럼 말이다.<br><br>저 이제 알겠어요. 내가 뭘 하려는 건지요.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는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꼭 성공으로 결론나지 않아도 돼요. 돈 좀 못 벌면 뭐 어때. 그냥 … 내가 좋아하는 일을 … 계속 좋아하는 거. 그게 제가 이번 생에 하기로 한 일이에요.&lt;제궤도인간&gt; 6화<br>그러한 엉덩이 재능은 제법 중요한 덕목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은 "바르샤바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장면이다. 조혜나는 수상에 대한 희망도, 사전 예고도 없어서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그 자신이 없을 때 뜻밖의 수상을 한다. "내가 없는 시상식에서 수상하게 된 것, 내 노력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호명해준 것." 구태여 고흐를 끌여들이지 않더라도 우리 생은 언제나 작은 일이더라도 뒤늦은 반응을 얻기도 하고, 아예 그런 반응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모르기도 한다. 하지만, 어딘가에선, 우리의 노력을, 우리의 꿈에 대한 정진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우리에게 재능은 없어도, 세상에서 B급으로 치든, C급으로 치든 상관없는 우리만의 바르샤바영화제가 있는 게 아닐까?<br><br>* * *<br><br>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영화학교 조 교수는 끝까지 1차원적인 악인으로만 묘사된다. 바르샤바영화제도 뜬금없기는 했다. 그런데 고태경과 대비하려면 필요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문제는 바르샤바에서 종현의 태도였다. 갑작스런 변화는 너무 납작하다. 이전까지 다정하고 착하게만 그려졌던 종현이 갑자기 너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군다. (차라리 이전 연애에서 결별의 원인이 혜나가 아니라 종현에게 있었다는 식으로 묘사가 된다면 좀 더 이해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혜나는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밝힌다.) 바르샤바에서의 종현은 화가 나서 화난게 아니라, 주인공인 혜나에게 고난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았다. 마치 대본을 읽는 배우처럼 말이다.<br>모든 시네필이 감독이 되는 건 아니지만, 모든 감독은 시네필이다. 이를 본격적인 기류로 만들어낸 "새로운 물결"이라는 사조가 프랑스의 누벨바그다. 작중에서 누벨바그의 기수인 트뤼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트뤼포의 명언으로 알려진 '영화를 사랑하는 세가지 방법'이 언급된다.<br><br>"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br><br>그러나 이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만들어낸 오해다. 『GV빌런 고태경』에도 등장하는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에 정성일이 추천사를 썼는데, 여기서 자신이 어느 일본 잡지에 실린 트뤼포에 관한 글을 읽다가 오해해 한국에 이를 트뤼포의 말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는 말이 한국에는 폴 발레리의 말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소설가 김영하 작가가 『빛의 제국』에서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작가 스스로 오류를 바로잡으며, 이는 폴 발레리가 아니라 폴 부르제의 말이라고 고쳤다.)<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69/44/cover150/k48213785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694431</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찰나의 순간에 영원을 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을 만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운 -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개정합본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48900</link><pubDate>Thu, 13 Aug 2026 17: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489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42139662&TPaperId=174489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72/57/coveroff/k54213966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42139662&TPaperId=174489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개정합본판</a><br/>김보영 지음 / 래빗홀 / 2026년 05월<br/></td></tr></table><br/><br>롤랑 바르트를 빌려와 볼까.<br><br><br>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br>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br><br>『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서로를 사랑하고 기다리는 연인'에 관한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흔하디 흔한 주제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소재를 가진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의 독특한 점은 두 가지다. 우선 이 소설이 김보영 작가의 팬이었던 커플이 있는데, 그 중 남자 팬이 여자 팬에게 프로포즈를 하기 위한 '낭독용 소설'을 써달라는 '사적인 청탁'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이다. 이런 소설 밖의 이야기는 흥미로우면서도, 소설 내에서 어떻게 달성되었는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충분한 조건이 된다. (다만, 나는 프로포즈용으로 쓰여졌다는 첫번째 소설이자 표제작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다 읽고 나서는, '이게 정말 프로포즈에 써도 되는 소설인가?'하는 일말의 의문을 품었다. 재밌게도, 이 소설들 뒤에는 그 청탁의 당사자들의 소감 같은 것도 적혀있는데, 결론적으로 내 의문과 기우와는 다르게, 부부는 결혼을 했으며,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br>『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흥미롭게 만드는 두 번째 조건은 다음과 같다. '서로를 기다리는 연인'이 시간 여행 속에서 엇갈린 거라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부터 본격화된 '광속'과 '시간 여행'의 이론은 &lt;인터스텔라&gt;를 비롯한 영화나 소설을 거쳐 이제는 상식의 반열에 올라 있다.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그 무한에 가까운 시간 속을 서로 엇갈리고 있는 거라면, 우리는 상대방을 끝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가 SF이면서 동시에 로맨스 소설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질문에 있다.<br><br>소설 내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수도 없이 반복된다. 말에도 한계 효용이 있는 법이어서, 너무 잦은 빈도로 사용되는 말은 그 효용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이 처한 극한의 상황 때문인지 수없이 반복되는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그 효용을 잃지 않으며 내내 서글픈 감정을 전달하는 데 번번이 성공한다.<br><br>기다린다는 것은 왜 슬픈 것일까. 누군가를 기다리려면, 우선 내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야 함을 함의한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화자는 계속 이동한다. 그게 타의든, 자의든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이동해야만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이 기다림이 결코 수월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누군가를 "계속" 기다릴 수 있으려면, 바로 그 누군가가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주인공이 가진 단단한 믿음이 소설의 초반을 이끌어가는 힘이라면, 이 단단한 믿음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흔들리기 시작하는 게 소설의 중후반을 이끌어간다.<br><br><br><br>* * *<br><br><br><br><br>트릴로지 중 두번째로 등장하는 소설인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앞선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의 남자 주인공이 기다리던 '상대방/누군가'가 주인공이다. 앞선 소설이 남자 주인공이 고독에 처해 한없이 자기 자신으로 침잠해 들어가면서도 여자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이 소설은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지 못해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br>「당신에게 가고 있어」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의 향기가 한껏 느껴졌다. 예를 들어, 여주인공에게 우호적인 '항해사'는 아이들을 가르쳐 재래식 항해법을 존속시킨다. 광속에 도달해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인간의 배에게 그 무슨 소리인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배는 현재 지구의 멸망으로 인해 돌아갈 곳을 잃은 상태다. 지금은 과학 기술의 발달로 AI와 컴퓨터가 다 해주지만, 이것들이 고장난다면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위대한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파인만은 자신의 저서(『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에서 인류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면, 살아남을 아이들에게 전수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밝힌 적이 있다.<br><br>"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들은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작은 입자들로, 서로 조금 떨어져 있을 때는 끌어당기고, 너무 밀착되면 서로 밀쳐낸다."<br><br>이는 곧 모든 물질의 상태의 변화 (기체·액체·고체)를 담고 있으며, 압력과 밀도에 관한 직관, 화학 반응과 생명 현상에 대한 이해를 알려주는 문장이기 때문이라고 한다.<br><br>당신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명이자 흔적이 바로 나니까. 내가 당신의 유적이니까.<br>『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151쪽<br>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생사에 대해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스스로 다짐하는 장면은 이 소설집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해도,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 깨달음은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의 "나는 단수가 아니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결국 내가 곧잘 세트처럼 떠올리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분인의 죽음'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br><br>"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 앞에서만 가능했던 나의 분인의 삶도 끝난다.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고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 수 없다."&nbsp;<br>히라노 게이치로<br><br>또한 이 단편의 흥미로운 지점은, SF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인식의 전환에 있다.<br><br><br>그 애들은 배가 정박하면 당황해서 어른들에게 왜 시간이 말라붙어 있느냐고 물어.그 아이들은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변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아침에 눈을 떴는데 어제 있었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고, 어제 보았던 하늘이 그 자리에 있으면 어리둥절해해.<br>『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152쪽<br><br>이는 소설 밖의 현실을 살아가는 독자들과 소설 속 인물들의 커다란 인식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끊임없이 광속 여행을 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시공간이 변해 있는 것이 '당연하고도 평범한 현상'이다. 소설 밖의 우리는 외부 풍경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 더군다나 그것이 하룻밤 사이의 변화라고 한다면, 사실상 하룻밤 사이에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게 평범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소설 속의 규칙을 통해서, 소석 밖의 독자의 상식과 인식을 뒤집어버리는 장면이 '좋은 SF 소설'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믿는 편이다.<br><br><br>* * *<br><br><br>이제 이 소설에서 나를 가장 강력하게 충격했던 대목을 이야기해야 할 차례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에게 가고 있어」 이 두 소설을 하나로 정리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물론, 앞서 언급한 롤랑 바르트의 말도 가능한 방법이다. 그러나 나는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우주를 떠도는 두 연인의 이야기니 우주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사람의 말을 빌려와 볼까.<br><br>"In the vastness of space and the immensity of time, it is my joy to share a planet and an epoch with Annie."<br>"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 속에서, 앤과 한 행성, 한 시대를 함께 공유할 수 있음은 나의 기쁨이었다."<br>칼 세이건, 『코스모스』<br><br><br>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고백처럼,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속 두 연인은 끊임없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태어나 같은 "시절"을 공유한다는 게 얼마나 가없는 축복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 인연을 더 잘 표현한 것은 영화 &lt;번지점프를 하다&gt;의 대사다.<br><br><br>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저 하늘에 밀씨를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바로 그 계산도 안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니들이 지금 이곳,지구상의 그 하고많은 나라 중에서도 대한민국,그중에서도 서울, 서울 안에서도 세현 고등학교,그중에서도 2학년,그거로도 모자라서 5반에서 만난 거다.지금 니들 앞에, 옆에 있는 친구들도다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또 나하고도 그렇게 만난 거다.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인연이란 게, 좀 징글징글하지?<br>영화 &lt;번지점프를 하다&gt;<br><br><br><br>거기서 나와. 과거에 붙들려 있지 마. 당신은 나와 함께 있잖아.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야지. 같이 시간을 흘러가야지.<br>『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158쪽.<br><br>여자 주인공의 환상 속에서 남자 주인공이 건네는 말은 이 모든 말들을 압축하고 있다. 억겁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걸 함께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 사진 예술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우리나라에서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로 유명하다. 브레송은 스쳐 지나가는 1/125초의 아주 짧은 '찰나'를 포착하여, 그 안에 사물의 본질과 조형적 완벽함을 담아냄으로써 '영원'으로 만드는 사진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브레송은 사진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br><br>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br><br>나는 이 말을 사랑하는데,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을 그의 말을 빌려 요약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찰나의 순간에 영원을 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을 만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운이라고."<br><br><br>* * *<br><br><br>세번째 작품인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다양한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우주 항법사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lt;듄&gt;을 떠올리게도 하고, 여러 장소를 떠돌아다닌다는 점에서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도 한다. 또한 웹소설이나 서브컬처의 유구한 떡밥인 '현대인이 지금의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가면 어떻게 될까?'를 정면에서 다룬 흥미로운 소설이기도 하다. 나아가 마지막 결말은 SF 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최후의 질문』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최후의 질문』에 대한 작가 나름의 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br>마지막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가 흥미로웠다면, '인류 최대 스케일의 쌍방삽질'을 다루는 이하진 작가의 『마지막 증명』도 읽어보길 권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72/57/cover150/k54213966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725725</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영화를 닮은 소설, 영화를 담은 소설 - [아코디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46864</link><pubDate>Wed, 12 Aug 2026 18: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4686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9960&TPaperId=1744686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53/98/coveroff/893643996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9960&TPaperId=1744686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코디언</a><br/>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06월<br/></td></tr></table><br/><br>영화를 닮은 소설, 영화를 담은 소설<br><br><br><br><br>천명관의 신작 장편 소설인 『아코디언』을 읽었다. 2004년 『고래』로 한국문단 최고의 문제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작가인 만큼, 이번 신작에 쏠리는 기대도 남다른 것 같다. 『아코디언』도 『고래』와 비슷한 민담 같은 분위기를 유지한다. 또한 두 작품 모두 역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홀로 정글과도 같은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주인공이 이 험난한 운명을 극복해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래』의 주인공이 여성이었다면, 『아코디언』은 동이라는 남성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br>이러한 천명관 소설의 주제는 '가난', '외로움', '인간찬가'이라 이름붙여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는 한국소설의 '한'의 원형을 닮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고래』의 금복이나 춘희가 겪었던 불행처럼 『아코디언』의 동이가 겪는 불행이 개인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가 겪어온 특수한 상황 속에 얽혀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br>천명관 작가는 이런 한국의 특수성을 담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신작 소설의 제목과 주요 소재가 된 아코디언은 특이하다. 이국의 악기가 어째서인지 한국의 한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또한 오랫동안 영화 감독을 꿈꾸어왔던 그가 입봉작으로 선택한 원작 소설인 『뜨거운 피』만 해도 그렇다. 김언수 작가의 소설 『뜨거운 피』는 부산의 조폭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2000년 대 초 한국의 영화 계보 중 하나로 '조폭' 영화가 있는데, 천명관은 자신의 2020년 대 데뷔작으로 바로 그 '조폭' 영화를 택한다. (나는 지금 조폭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폭 영화'가 '조폭'을 다루는 방식은 한국 고유의 방식이 있고, 이는 일본의 야쿠자나, 미국의 마피아, 중국의 삼합회처럼 무언간 '한국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는 소재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고래』나 『아코디언』은 2000년 대의 소설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만이라고 할 수도 없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현대적 문체로 훌륭하게 풀어내는 작가들은 많다. 다만 천명관은 그런 문체로 빚어내는 현대화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작가 본인이 구사하는 문체가 민담스럽다면, 구태여 그걸 현대화하는 데 공을 들이느니, 이야기 본연의 재미에 집중해 소설의 장점을 살리는 게 낫지 않겠냐는 장인의 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br>또한 『아코디언』과 『고래』, 『뜨거운 피』의 공통점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천명관이 천착하는 주제는 '한국적인 가족'이란 것도 알 수 있다. 세 작품은 모두 혈혈단신의 주인공이 자신만의 가족을 이루려는 이야기라고 정리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교롭게도 천명관의 소설이자 영화화된 작품이기도 한 『고령화 가족』 역시 지극히 한국적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br><br><br>영화를 닮은 소설, 영화를 담은 소설<br><br><br>나는 천명관이란 작가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니, 그의 꿈이나 문학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함부로 주장하는 건 할 수 없다. 그의 글에서 내가 느낀 몇 가지 인상만 주워 섬길 수 있을 뿐이다. 익실과 물 흐르듯이 쉽게 읽히는 문장, 그러니까 시쳇말로 쿠세도, 강세도 없는 듯한 문장들이 그의 문학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장의 강세는 주로 한 소설의 문학성을 가장 많이 담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김승옥의 이런 문장은 단 몇줄만으로 '무진'이라는 상상의 공간을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히 가져다 놓는다.<br><br>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br>김승옥, 「무진기행」<br><br>그러나 천명관의 소설은 탁월한 가독성에 비하여 문장으로 기억되지는 않는다. 기이한 이야기 자체, 사건의 연속으로 기억된다.<br>『아코디언』은 특히나 초반부가 영화 &lt;국제시장&gt;과 드라마 &lt;야인시대&gt;를 연상케 한다. 전후의 빈곤상을 다루고 있기도 하거니와, 동이가 &lt;국제시장&gt;의 덕수(황정민)처럼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피난온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작중에 숱하게 등장하는 유행가는 이 소설이 마치 유행가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렵지 않고, 통속성을 한껏 담고 있으며, 그를 통해 듣는 이/읽는 이로 하여금 손쉽게 공감하게 만든다. 어쨌든 재밌고 뒤가 궁금해지게 만든다. 소설의 기원은 흥미라는 사실을 천명관 작가는 놓치지 않는 것 같다.<br><br><br><br>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 동이.<br><br><br>양 목사가 돌아왔지만 도망친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자유가 아니었다. 죽지 않고 살아남는 거였다.<br>『아코디언』, 162쪽<br><br>- 나중에 죽어서 천당에 가면 뭘해. 씨발, 여기가 바로 지옥인데……<br>『아코디언』, 170쪽<br>위의 문장처럼 '생존'이 유일한 정언명령이고, 이를 위해선 그 어떠한 행동도 정당화되는 배경을 지닌 『아코디언』에서 유난한 인물이 딱 한 사람 있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가 눈치를 채겠지만, 그건 주인공 동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참혹한 시대와 운명 앞에 순응하고 선한 마음을 망가뜨려서라도 살아남는 사람, 순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저버리는 사람. 전자에는 깜상, 거북이 같은 인물이고, 후자는 상이군인과 연이일 것이다. (물론 연이는 시도에 그치긴 했다.)<br><br>동이는 이들과 다르다. 참혹한 시대와 운명 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건 앞의 인물들과 마찬가지이지만, 동이는 끝까지 선한 본성을 꺾지 않는다. 맨몸으로 저항한다. 그런 점에서 동이는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주인공의 자질을 갖췄다. 그가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하며 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홍이가 자신의 아코디언을 불자 뺨을 걷어올리지만, 그날밤 홍이를 불러내 아코디언을 직접 가르쳐준다.<br>물론, 동이가 마냥 선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 인물을 외려 한심하게만 여길 수도 있다. 얼마간은 그런 감정도 생긴다. 왜냐하면, 연이에 대한 잔정 떄문에 일생 일대의 면접도 놓치게 된다. 현실적인 감각에서 동이는 멍청하다. 그러나 그게 동이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선택된 이유이며, 읽는 내내 그를 응원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매력이다.<br>그런 동이의 순수함 때문에 이런 의문도 생긴다. 하우스보이가 되든, 음식점 보조가 되든, 기지촌에서 출퇴근하는 이들처럼 해방촌에서 출퇴근하면 안 되는 건가? 미군 부대에 취직하면 무조건 움막을 떠나야하는 것처럼 그려진 건 소설 내에선 정확한 설명이 없어서 내내 지울 수 없는 의문이었다. 그냥 동이가 취직해서 그 돈으로 움막의 아이들을 돌보는 게 보다 합리적인 선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br>결국 동이는 마냥 선함을 추구하지는 못하고, 생존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나가려고 한다. 그 갈등과 고뇌 속에서 오야지가 되어가며 양 목사의 방식을 차용하게 된다. 악한 면도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선 필요한 덕목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양 목사나 아미처럼 모질어지지는 못한다.<br><br>동이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동안 오갈 데 없는 앵벌이들을 위해 애써왔는데 아무도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화도 났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br>- 그럼 나가고 싶은 사람은 여기서 나가! 나가서 혼자 빌어먹든 말든 마음대로 해!<br>그것은 양 목사가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br>『아코디언』, 137쪽<br><br><br>몇 가지 단상들 - 연이, 아코디언, 그리고 희망.<br><br>이 소설의 핵심은 연이의 사연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자 소경 가수라는 점은 언뜻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아미를 통해서 들은 연이가 시력을 잃게 된 경위도 그러하다. 그러나 진실을 알 수 없다. 여기에 도대체가 믿을 만한 선인이 있긴 한가? 악인과 피해자들만 있을 뿐인데 말이다. 연이가 낳은 '돈이'는 과연 누구의 자식인가? 연이의 할아버지는 정말로 악인인가? 소설에서 드러나는 연이의 사연에는 명확한 진실을 찾을 수 없다. 연이의 할아버지는 친할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연이를 이용해 먹으려는 악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실에 대해서 털어놓는 이들이 모두 아미거나 양 목사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믿을 수 있는가. 그들을 통해서 얻은 진실은 입증되거나 쉬이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다. 독자들은 이 사연을 접하고 딜레마에 빠지며, 이 시절의 혼란함, 아노미를 연이를 통해서 극적으로 보여준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진실은 아득하고 생존은 목구멍에서 다그친다.<br>또한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아코디언은 어떤가. 처음에는 아코디언이 특별히 환상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라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코디언이 들려줬다는 이야기는 어딘가 틀린 부분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는 마치 동이가 스스로 만든 추론 같다. 동이와 거북이가 '돈이'의 아버지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 장면을 살펴보면 그렇다. 거북이는 연이와 양 목사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동이는 차마 그런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코디언이 들려줬다는 이야기는 동이가 스스로 다다른 결론일 것이다. 동이가 그것이 아코디언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동이가 스스로 만들어낸, 그 시대에 정말 의지할 만한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 번도 보지 못한 진정한 어른 말이다.<br>- 내 얘기 잘 들어, 홍이야. 넌 잘 모르겠지만 너에겐 남다른 재주가 있어.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너 자신을 믿어야 돼.<br>『아코디언』, 270쪽<br>이는 결말 부근에 동이가 홍이를 송별하면서 건네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이 말은 어쩐지 동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처럼 보인다. 동이는 쟈니에게 들었던 '재주가 있어서 사는 게 쉽지 않겠다느니, 분수에 맞는 자리가 있다느니' 이런 말 때문에 스스로를 끝내 믿지 못했다. 그건 동이를 짓누르는 말이었다. 동이가 가장 간절하게 원했던 말은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동이는 자신이 아코디언을 통해 스스로에게 해왔던 말을 그 스스로가 '홍이의 아코디언'이 되어 해준 것이다.<br><br>희망을 품는다는 건 언제나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br>『아코디언』, 155쪽<br>마지막으로, 희망에 대하여 말해야만 할 것이다. 전후의 혼란상 속에서 희망을 품는다는 건 정말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그저 하루 하루를 연명해나가는 것이 최선의 행복이자 최대의 희망이다. 그러나 동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쟈니의 말에 짓눌리고, 육손의 폭력에 좌절되긴 하여도 끝내 스스로 꿈꾸는 삶을 찾아나갔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앵벌이 가족'들을 육손에게서 해방시키고 부산으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그것은 생존, 그 다음을 가족들에게 보장해준 것이다.<br>깜상은 동이와 악수를 나누며 자신들이 더는 어리기만 한 앵벌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맹수와 맞서 싸웠고 마침내 상대를 유인해 우물에 빠드렸다. 그것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지만 결국 이번에도 살아남은 것이다.<br>『아코디언』, 260-261쪽<br>또한 홍이에게 스스로 아코디언이 되어, 희망을 물려준다. 동이의 꿈은 홍이를 통해 실현되려 한다. 결국 동이의 아코디언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던 희망을 연주하고자 했던 꿈을 꾸었던 것인지도 모른다.<br>『아코디언』을 읽으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소설이 필요했다고. 꼬마가 소년이 되고 그 소년이 다시 사내가 되고, 마침내 아버지가 되는 소설이.<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53/98/cover150/893643996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539828</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어쩌면, 쇠의 노래 - [현의 노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44638</link><pubDate>Tue, 11 Aug 2026 15: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44463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7255&TPaperId=174446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462/94/coveroff/895461725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7255&TPaperId=1744463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현의 노래</a><br/>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01월<br/></td></tr></table><br/><br>어쩌면, 쇠의 노래<br><br><br><br>최근의 화제작인 영화 두 편을 보았다. 나홍진 감독의 &lt;HOPE(호프)&gt;와 &lt;스파이더맨 4: 브랜드 뉴 데이&gt;다. 두 편에 대해 전체적인 감상을 별점으로 남기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lt;호프&gt;는 워낙에 많은 악평을 먼저 접하고 감상한 것이라 예상보다 별점이 높고, &lt;스파이더맨&gt;은 전작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감으로 인하여 예상보다는 별점이 낮았다. 두 작품의 개별적인 영화적 성취에 대하여서 나는 말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서로 정반대의 이유로 비슷한 지점에 나의 별점이 수렴하는 현상이 흥미로웠다.<br>김훈 작가의 『현의 노래』를 읽었다. 이 작품을 앞서 언급한 두 영화에 빗대어 말해보자면, &lt;스파이더맨&gt;에 가깝다. 나는 김훈 작가를 좋아한다. 그가 쓴 『칼의 노래』는 내 문학의 만신전에 올라와 있으며 생각이 날때마다 재독하는 소설이다. 또한 『하얼빈』, 『남한산성』 같은 작품 역시 좋아한다. 그가 쓰는 역사소설은 그의 불가지론, 생의 허무함과, 그가 구사하는 건조한 문체가 절묘하게 어울리는 정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의 노래』는 의외로 아쉬웠다.<br>우선, 『현의 노래』은 다분히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이 『칼의 노래』의 후속편 같다. 정신적인 후계라 해도 좋을 것이다. 김훈의 역사 소설을 거대한 사건(대문자 정치 혹은 역사적 풍랑) 속에서 한 인간이 허무한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라 감히 정리해볼 수 있을까. 『현의 노래』 역시 이전의 『칼의 노래』와 그 후에 쓰여진 『하얼빈』처럼 이러한 계보 속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의 노래』의 서사는 한줌 같다. 가야의 멸망과 우륵의 귀순, 그로 인한 가야금의 탄생 등이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굵직한 서사이겠으나, 어쩐지 이 서사가 잘 잡히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내달렸던 안중근 의사나 일본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충무공의 일대기 같은 면모가 보이지 않았다. 우륵, 안중근, 충무공의 죽음으로 소설이 귀결된다는 점만 같다.<br>또한 『현의 노래』는 『칼의 노래』의 문체와 표현을 다수 답습하고 있다. 김훈이 다른 작품에서 흔히 '김훈체'라고 불리는 호흡이나 표현, 리듬을 구사하는 것과 다른 이야기다. 생의 허무함, 인간의 불가해함을 다룰 때 특히 『현의 노래』에는 『칼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들이 다수 등장한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칼의 노래』에서는 충무공의 고뇌와 굵직한 서사로 인하여 이 문장들이 강렬하게 파고든다. 두 작품 모두 전쟁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다루기는 한다. 그러나 궁에서 기악을 하는 악사와는 다르게, 전선에서 복무하는 장군이 주인공이라는 점이 우선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전쟁이라는 생과 사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무대, 시대의 격랑 속에 선 인간의 불가항력, 부조리와 이해불가능한 일들이 난무하고, 그 속에서 매번 옳고 그름을 따지며 고뇌하는 것이 『칼의 노래』의 매력이다. 반대로 『현의 노래』에서는 마치 작중 내내 반복되는 '소리'처럼 흩어지고 사라지는 서사 때문에 『칼의 노래』에서 빌려온 듯한 문장들이 개별적으로만 다가온다. 그로 인하여 하나의 총체적인 인상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일종의 '감각'만 만들어내는데 그치는 듯하다.<br>또한 『현의 노래』는 인물이 여럿 나뉘어 등장한다. 우륵과 우륵의 안티 태제같은 야로, 이사부, 아라, 비화 등. 이렇게 파편화된 인물들은 당대의 시간 속에서 제각각의 방법대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그려내지만, 이로 인하여 어느 인물 하나에 집중해서 공감하기 어려웠다.<br>『현의 노래』에서 도드라지는 부분은 대소변과 같은 '살아있는 몸'의 일이다. 야로로 대변되는 '불/쇠의 일', 우륵으로 대변되는 '소리/현의 일' 역시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작품은 내내 설파한다. 육체와 정신 중 무엇이 앞서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육체 없이는 정신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육체의 일들에 작가가 천착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br>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191~192쪽에 등장한다. 신라의 장수 이사부가 가야 고을 다로를 점령한 장면이다. 다로의 왕은 늙은 자신을 죽이고 어린 아들을 살려 햇볕을 쪼이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이사부는 늙은 왕을 살려 햇볕을 쪼이게 하고, 어린 아들을 죽인다. 물론, 아들의 맹랑한 대답이 그 결정을 비트는 데 한 몫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원숭이손' 괴담처럼 다가온다. 소원을 이루었으나 그 소원은 기이하게 뒤틀려 있다. 이러한 기이한 뒤틀림은 부조리 같이 보이기도 한다. 다만 이 장면이 나에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동안 작품에서 등장했던 '부조리'는 전쟁과 같은 거대한 시류의 몫이었다면, 이 장면에서 빚어진 부조리는 전적으로 이사부라는 개인이 자행한 부조리였기 때문이다.<br><br><br>쇠의 일, 현의 일.<br><br><br>『현의 노래』를 읽으며 내가 주인공으로 느낀 인물은 우륵이 아니다. 우륵보다는 야로가 현실적이고 공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신라와 가야, 그리고 백제 사이에서 그는 살아남기 위하여 고군분투한다. 세 개의 국가 사이를 바삐 오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군종 사이에서도 바쁘게 오간다. 보병에게 기병에 대적할 가지극을 만들어주고, 가지극에 대항해 기병의 안장을 정비하거나, 기병이 가지극을 든 신란의 보병을 상대할 반달도끼를 만들어준다. 나는 차라리 이 소설은 『현의 노래』가 아니라 『쇠의 노래』라 해야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br><br>쇠는 형체가 제각각이지만, 불을 빌려 가지런히 한다. 반대로 현은 소리를 만들어내되, 이윽고 제각각으로 흩어지게 한다. 또한 쇠는 현실/땅에 발닿아 있는 일이다. 농사를 짓고, 병사를 죽이고, 땅을 얻는다. 반면에 현은 이상/허공에 매여 있는 일이다. 몸과 현을 통해 소리를 내지만, 그 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져 결코 땅에 매어둘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제목은 소설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완강한 저항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야로이며, 야로를 통해 현현하는 쇠의 일, 전쟁이야 말로, '살아있는 인간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륵은 야로의 현실적이며 약은 태도를 알고 있으나 이를 애써 외면하고 침묵한다. 이는 마치 &lt;백로가&gt;를 떠올리게 한다. 예술/이상은 현실의 더러움에서 필연적으로 거리를 두려하기 때문이다.<br><br>까마귀 싸우는 골짜기에 백로야 가지 마라<br>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샘낼세라<br>맑은 물에 기껏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br>&lt;백로가&gt;<br><br>그렇다면, 어째서 야로는 이사부의 손에 죽고, 우륵은 살아남았는가. 이 대답은 우륵과 이사부의 대화 속에 있는 듯하다.<br><br>- 소리는 주인이 없는 것이냐?- 소리는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고 울리는 동안만의 소리니 아마도 그러할 것이오.- 너희 나라 대장장이 야로를 아느냐?- 가야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소.- 그 늙은 대장장이가 말하기를, 병장기는 주인이 따로 없어서 쥐는 자마다 주인이라 하였다. 소리는 병장기와 같은 것이냐?- 소리는 없는 세상을 열어내는 것인데, 그 세상은 본래 있는 세상인 것이오. 병장기가 어떠한 것인지는 병부령께서더 잘 아시리이다.<br>『현의 노래』, 276쪽<br><br>우륵과 야로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서 비중있게 다뤄지는 이사부, 아라는 모두 '운명을 개척하려는 자들'로 묶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사부는 칼을 들어 임금이 꿈꾸는 부처의 나라를 만들려고 하고, 아라는 제 몸 하나를 건사하기 위하여 도망치나 결국 운명에 희생된다. 야로는 쇠를 통해 운명을 헤쳐나가려 하였다. 그러나 쇠는 현실에 깊이 얽매인 일이다. 우륵의 소리는 이상에 파묻힌 일이다. 다만, 두 사람은 제 손에 든 쇠와 소리가 모두 주인이 없기를 꿈꿨다. 그러나 쇠와 소리가 지니는 태생에서부터 그 꿈의 결말이 암시된다. 야로는 제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으나, 그의 재능(쇠를 다루는 일)이 전쟁에 쓸모 있기에 죽었다. 쇠에게는 명백한 주인이 있어야 한다. 주인이 없는 쇠는 주인의 적이 아니라 주인 그 자체를 겨눌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륵 역시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했으나 가야를 패망시킨 신라의 진흥왕과 군장들의 웃음거리로 삼을 만큼 전쟁에 하등 관련이 없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덮는 순간까지 우륵보다는 야로에게 더 마음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을 나 혼자만이라도 『쇠의 노래』라고 몰래 고쳤다.<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462/94/cover150/895461725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629416</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과거를 청산하는 7가지 방법 - [약속의 세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391387</link><pubDate>Tue, 14 Jul 2026 15: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39138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32137187&TPaperId=173913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29/70/coveroff/k73213718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32137187&TPaperId=1739138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약속의 세대</a><br/>백온유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03월<br/></td></tr></table><br/><br><br>과거를 청산하는 7가지 방법<br><br><br><br><br><br><br><br>백온유의 이름을 지난 &lt;젊은작가상&gt; 대상으로 처음 마주했다면, 내 독서 범위가 너무 얄팍하다는 걸 자백하는 걸까. 이번에 젊은작가상 대상작인 「반의반의 반」이 포함된 단편집 『약속의 세대』를 읽었다. 『약속의 세대』는 다음의 7편으로 구성된 작품집이다.<br><br>「나의 살던 고향은」「광일」「의탁과 위탁 사이」「반의반의 반」「회생」「사망 권세 이기셨네」「내가 있어야 할 곳」<br><br>다 읽고 나서 이 이야기가 범박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될 수도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과거를 청산하는 7가지 방법'이라고.<br>우선 「나의 살던 고향은」은 '한서'라는 시골 마을 출신의 영지가 돌아가기 싫은 고향에 돌아가게 되고,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면서 결국 마을의 산에 불을 질러버리는 이야기다. 자신을 늘 속박했던 과거를 청산하는 방법으로 영지는 불을 질러버린다.<br>가장 좋았던 작품은 「광일」과 「내가 있어야 할 곳」 두 편이다. 이 두 작품은 내가 좋은 단편 소설이라고 여기는 미덕을 갖춘 작품이었다. 좋은 단편 소설은 적은 분량 안에서 한 인물이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고, 그로인해 "현재"에 이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독자에게 짐작케 한다. 이러한 기준에서 「광일」과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훌륭한 단편처럼 읽혔다.<br>특히나 「광일」의 주인공 '박광일'의 캐릭터가 흥미로웠다. 노인네와 흥정을 해서 이득을 취하려는 인물인 것 같지만, 노인이 잘못 건넨 5만원은 돌려주고, 노인을 봉변에서 구해준다.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기 힘겨워하지만, 실상은 아내만을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일정구간까지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같은 엔딩을 기대했다. 물론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운수 좋은 날」의 다른 버전인 것 같기도 할 만큼 다소 의외의 엔딩을 갖고 있긴 하다.<br>잠은 죽음에 대한 예습이자 복습 같았다.「광일」, 119쪽<br>「광일」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행은 왜 마음 약한 이들에게만 찾아오는가? 그런 이들에게 불행은 꼭 산사태의 형태로, 감당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으로 다가온다. 광일은 구태여, 산장으로 갈 필요가 없었음에도 마음이 약하고, 과거에 손님을 길에서 내려준 기억 때문에 결국 스스로를 다독이며 산장으로 향한다. 이런 마음 약한 인물에, 도덕적인 선들과 자신의 이익 앞에서 깊게 갈등하는 인물들에게 나는 깊은 애착을 느끼곤 한다. 광일은 스스로 과거에 길에 내려준 손님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산장에 갔다가 결말을 맞이한다.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뜻대로 되진 않은 인물일 것이다.<br><br><br>그들은 그때 나를 찾아가지 않았듯 이번에도 나에게서 할머니를 찾아가지 않으리라.「의탁과 위탁 사이」, 152쪽.<br><br>「의탁과 위탁 사이」는 「반의반의 반」의 짝패처럼 읽히기도 한다. 할머니-손녀의 관계가 등장하는 것도 그렇고, 할머니가 병든 환자인 것도 그렇다. (이 지점에서 백온유의 또다른 관심사가 드러나는데, 작가는 (병든) 노인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도 그러하거니와, 「광일」, 「나의 살던 고향은」에서도 이러한 인물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두 작품 역시 할머니, 엄마, 나 사이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현재를 억압하고, 결말 부근에 이르러서 각자 이 과거를 어떻게 청산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의탁과 위탁 사이」와 「반의반의 반」은 그런 청산 과정에 있어서도 유사성을 띠는데, 나름대로 명확한 선을 가지는 다른 수록작들과 다르게, 「의탁과 위탁 사이」는 틀니를 통해 할머니의 과거를 보존하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며, 「반의반의 반」은 상당히 모호한 결말로 끝난다. 두 작품은 어떤 일을 해결한다기보다는 그 일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하는 데 깊은 관심을 할애한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br><br>"이젠 내가 안 만나주지. 세 시간을 기다렸잖아. 내가. 세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데, 노인한테."「의탁과 위탁 사이」, 148-149쪽.<br><br>「회생」은 읽는 동안 좀 재밌었다. 제목과 다르게 연지 - 수영은 회생이 불가하다. 애초에 없던 아이를 뱃속에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바닥에 떨어져 (아마도) 깨진 그릇도 결코 회생시킬 수 없다. 마치 어설픈 솜씨로 '킨츠키'를 한 듯한 두 사람의 관계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형성하다가 그런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가볍고 경쾌한 느낌마저 주는 결말 부근에서 산산히 박살난다. 이는 과거의 실수는 결코 청산될 수 없으며, 유일한 방법은 억지로 붙여놓거나, 산산히 깨지거나, 라는 걸 암시하는 듯 하다.<br>「사망권세 이기셨네」는 「회생」처럼 두 친구가 등장하는데, 이는 또 다르게 읽힌다. 사이비 종교 2세들의 이야기다. 사이비 종교 간부의 딸이었던 '나'와 그런 간부의 비서 같은 역할을 했던 신도의 딸 세주는 엄마들의 권력 관계에 전염된 듯 이를 모방한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의 거짓말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나'와 세주는 냉정한 세상 앞에 서게 된다. 이 둘의 관계는 기이하게 역전되는데, 과거 부모들의 권력 관계나, 자신이 간부의 딸로써 가졌던 일종의 우월감 때문에 '나'는 세주에게 꼼짝을 못한다. '나'의 보살핌은 어쩐지 채무자가 채권자를 대하는 듯이 변한다. 과거가 현재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이 둘은 결말에서 (「회생」의 연지와 수영과 달리) '회생'에 이르며, 처음으로 대등한 관계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br>「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떤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담담한 화자의 서술과 다르게 극도로 잔인한 소설이다. '나'는 한국의 학창시절, 친구를 컨테이너에 가두고, 학폭위에 회부된다. 또한 '나'가 화재 소동을 겪으면서 먼저 간 딸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나는 이 단편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사건을 배치할 수 있는지 놀랐다. 이모의 딸이자 '나'의 사촌은 컨테이너에 갇힌 채 화마에 희생되었다는 점을 분할해 사건을 배치했지만, 참 잔인한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br>나는 한국 집에서 사촌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고, 엄마가 그애를 안고 있는 사진이 내 사진첩에 있어서 한동안은 당연히 그 아이가 나라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아니더라고 고백했다. 사촌과 내가 어렸을 떄 부모가 바뀐 것은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는 말은 다행히 하지 않았다.「내가 있어야 할 곳」, 309쪽.<br>'나'는 이모의 딸이 되는 것을 이모에게 거절당했다고 진술하지만, 이 부분은 외려 이모가 '나'를 정말 딸로 받아들인 것처럼 읽힌다. 자식이 품에서 어리광만 부리는 게 아리나 자립하기를, 더는 '갇힌' 게 아니라 스스로 세상과 대면하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그 자신이 먼저 앞세운 딸에 대한 미련 때문에 조카인 '나'에게 집착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말이다.<br>그리하여, 이모부도 죽고 한국에 돌아온 이모와 '나'가 나눈 문답은 일종의 뒤늦은 대답 같이 느껴진다. (이 부분은 이 소설집 전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br>"이모. 봄이 오면 우리 마당에 꽃 심는 게 어때요?""좋지. 나도 너랑 같은 생각.""무슨 꽃 심을까요?""너랑 같은 생각."<br>「내가 있어야 할 곳」, 317쪽.<br>'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라는 말은 곧 '너는 내 딸이야.', '나도 보내고 싶지 않았어.', 처럼 읽히지 않는가. 이모의 귀국은 결국 하나 남은 가족에게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나 남은 가족, 조카이자 딸인 '나'에게로. 또한 이 진술은 무척 흥미롭다.<br>그리고 라디오를 틀자 거짓말처럼 마이클 볼턴의 &lt;Lean on Me&gt;가 나왔다. 이모부가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 중 하나였다. 그 사람이 좋아하던 노래네, 이모가 중얼거렸다. 이모가 좋아하는 가수여서 이모부가 자주 불렀던 건데 그건 모르는 모양이었다.<br>「내가 있어야 할 곳」, 321쪽.<br><br>가족 구성원 간에 한 쪽이 모르는 다른 한쪽의 행동 이유를 알고 있는 이는 가족이라는 말 외에 표현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br><br>그러니까, 『약속의 세대』는 거칠게 축약하자면, 과거와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이야기라고 모아볼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내 과거를 살펴보면서 괴로워하고, 때로는 깨닫기도 하고, (마음 속으로나마) 불을 질러보기도 했다. 뒤늦게 알았지만, 백온유 작가를 알게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br>'무뎌지지 않겠다'는 내지 첫 페이지의 글처럼,나는 이 작가가 무뎌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29/70/cover150/k73213718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297059</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복제품은 원본을 넘어설 수 있을까 - [혐오도 복제가 되나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340200</link><pubDate>Wed, 17 Jun 2026 16: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3402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12137281&TPaperId=173402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30/55/coveroff/k41213728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12137281&TPaperId=173402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혐오도 복제가 되나요</a><br/>윤혜성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03월<br/></td></tr></table><br/><br>복제품은 원본을 넘어설 수 있을까<br><br><br><br>윤혜성 작가는 이전에는 카피라이터로 일했으며, 작년에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lt;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gt;의 극본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혐오도 복제가 되나요』가 소설 데뷔작이라고 한다.<br>『혐오도 복제가 되나요』는 주인공 이수한은 사별한 아내와의 사이에 있는 아들 재이를 두고 장모와 양육권 다툼 중이다. 재이를 만나기 위해 아내의 고향인 '리벨리우스(아마도 우크라이나를 염두에 둔 가상의 국가인 것 같다.)'에 가려고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어 가지 못한다. 이에 리벨리우스랑 인접한 러시아 법인장이 되어 조금이라도 재이의 곁에 가까이 가려고 고군분투 중이다.<br>소설은 이수한이 죽은 아내가 보낸 정체불명의 택배 박스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택배 박스 안에서 죽은 아내의 글씨체로 '너도 너같은 새끼랑 살아봐'라고 적힌 쪽지가 나와 충격을 받은 이수한은 연이어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수한을 본뜬 불법 복제인간인 '리(re)수한'이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이다.<br>복제인간인 리수한을 죽여야 할지, 신고해야 할지 망설이던 와중, 리수한에게서 그도 어쩔 수 없는 '생명'이라는 징표를 발견한 '수한'은 그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러시아 법인장이 되기 위한 면접과 재이와의 만남이 겹쳤을 때, 수한은 리수한에게 도움을 청한다. 리수한은 면접을 성공적으로 치뤄내 수한은 러시아 법인장에 가까워지지만, 직접 나간 재이와의 만남에서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렇게 수한은 '원본인 나'보다 뛰어난 '복제인 나'를 마주하면서 복잡한 심경을 갖게 된다.<br>이후 이야기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그리고 복제 인간에 대한 질문을 파고들면서 전개된다.<br>'나와 똑같은 나'에 대한 이야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서양에서는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면 죽게된다는 '도플갱어' 괴담이 있고, 한국에는 내 손톱을 먹은 쥐가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해 나를 대신하게 된다는 민담이 있다. 이는 인류의 무의식 속에 오랜 시간 잠재해 온 공포가 표면화된 것 같다.<br><br><br>이 드넓은 세상에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없을까?<br><br><br>이전의 복제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손톱-쥐'의 이야기처럼, 누가 진짜 '나'인지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로 귀결된다. 하지만 근래에 나오는 복제인간 이야기는 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파고드는 것 같다.<br><br>복제품은 원본을 넘어설 수 있는가?<br><br>이를테면, 영화 &lt;광해, 왕이 된 남자&gt;는 조선의 왕 광해군을 대체한 가짜 광대의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광대 하선은 광해군의 부재 기간동안 요구된 현상 유지를 넘어서 '진짜 왕'이란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인물들인 도승지와 도 부장에게 진정으로 충심을 이끌어내는 결말은 인상적이다.<br>소설의 예로 들어가보자면, 서유미 작가의 단편 소설인 「저건 사람도 아니다」는 '나'를 꼭 빼닮은 로봇이 나를 대신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보다 뛰어난 나, 가족과 동료들이 인정해주는 가짜 나가 겪는 심리적인 갈등은 결국 '복제품이 나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귀결된다.<br>또한 근래에 읽었던, 『혐오도 복제가 되나요』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테세우스 패러독스』 역시 비슷한 주제를 다룬다. 『테세우스 패러독스』에서는 세 갈래로 나뉜 '나'가 등장하고, 이들 중 무엇이 진짜인지를 증명하는 과정이 주를 이룬다. 이렇듯 오랜 역사를 지녀온 장르에서 시대에 따라 변주가 생기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흥미롭다.<br><br><br>개인적으로 『혐오도 복제가 되나요』의 펀치라인인 '너도 너 같은 새끼랑 살아 봐'는 조금 아쉽다. 물론 한눈에 독자의 시선을 끌어들이기에는 강렬한 라인이다. 다만, 이로 인하여 독자는 이 작품에서 수한이 정말로 자신과 똑같은 성격을 가진 여자를 만나 고통을 겪고 거울 치료를 받는 과정이 전개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책을 펼친다. 하지만, 리수한과 수한은 너무 다르다. 이를테면, 리수한이 수한을 대신해 회사에 나갔을 때, 수한보다 일처리나 대인관계에서 능숙한 면모를 보인다. 또한 아이와의 갈등에서도 적재적소에 개입한다. 작품 말미에 드러나는 '너도 너 같은 새끼랑 살아 봐'라는 메모의 전말은 그 메모가 지니는 내적 정합성을 스스로 무너뜨린다. 또한 작품에 떡밥이 산발적으로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정리가 더디고, 반복적인 구간들이 독서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했다. 이런 아쉬움들이 남긴 했지만, 첫 소설임에도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들었다.<br><br><br><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30/55/cover150/k41213728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305570</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더는 올라갈 곳이 없는 난장이들의 절규 - [구름 사람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338969</link><pubDate>Tue, 16 Jun 2026 22: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33896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82136416&TPaperId=1733896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46/14/coveroff/k18213641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82136416&TPaperId=1733896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구름 사람들</a><br/>이유리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02월<br/></td></tr></table><br/>더는 올라갈 곳이 없는 난장이들의 절규<br><br><br><br><br>『구름 사람들』은 21세기에 다시 쓰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저) 같다.<br>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구름 사람들'은 구름 위에 사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언가 동화나 신화의 이야기 같고, &lt;원피스&gt;와 같이 만화에 나오는 신비로운 무리를 지칭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구름 사람들』에서의 구름 사람들은 땅에 집이 없어서 구름으로 올라가 삶을 꾸리는 인물들이다. 그 구름 역시 정상적인 구름이 아니라, (당연하게도 자연적인 구름은 수분 결정체여서 그 위에 올라설 수 없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환경 오염으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구름이다. 땅도 집도 없고, 겁마저 없는 사람들이 이 구름 위에 모여 주거구역을 형성한다.<br>이는 곧 『난쏘공』의 인물들처럼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개발의 물결에 떠밀린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개발의 열풍에 희생된 영세민들은 수평적으로는 서울의 다른 변두리로, 그도 아니라면 근교로 자꾸만 밀려난다. 수직적으로는 고지대에, 즉 달동네에 몰린다. 여전히 서울 한복판에는 빼곡하게 집들이 자리잡은 달동네가 존재한다.<br>돈이야 먹고 죽을래도 없었지.『구름 사람들』, 35쪽<br>달이 닿을 만큼 높은 곳이라서 달동네랬는데, 『구름 사람들』은 한발 더 나아간다. 아예 구름 위로 올라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징은 이 소설이 가지는 특이지점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비슷한 계급 우화를 그리는 영화 &lt;기생충&gt;에서 가난한 이들은 결국 지하실로 향한다. 이는 계급이 지니는 상하관계를 그대로 차용한 장면이다. 하지만 『구름 사람들』은 이들을 하늘 위로 올려버린다. 부유한 이들의 머리 위로. 이는 경제적 계급의 기묘한 반전을 그리며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br><br>여긴 땅보다 높잖아. 땅 사람들보다 더 빨리 천국에 도착할 수 있어.『구름 사람들』, 121쪽<br>구름 사람들 중 하나인 춘 여사의 대사는 이들의 처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구름까지 쫓기어 온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천국", 그러니까 죽음 뿐이라는 사실을 잔인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br><br>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남의 후원이나 바라고. 좆 같은 일해서 돈 벌 생각이나 하고. 글러 먹었다.『구름 사람들』, 51쪽<br>『구름 사람들』의 주인공인 '오하늘'은 나중에 커서 BJ가 되겠다는 동생이 벌써부터 남의 후원이나 바란다고 짜증을 낸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잠시 멈춰야 했다. 우리가 흔히 인터넷 방송에서 사용하는 '후원'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서비스 비용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후원'이라는 말이 주는 의미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자 이 대목과 이런 하늘의 인식이 왜 필요했는지도 알게 되었다.)<br><br><br>사람은 왜 좌절했을 때 미소 지을까. 그런다고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면서.『구름 사람들』, 85쪽<br>『구름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 균열을 일으키면서 진행된다. 우선, 외부적 요인. 구름이 존재하는 시에서는 인공강우제를 살포해서 구름을 없애려고 한다. 이는 곧 구름 사람들의 거주지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행위다. 물론 불법 점거에 가까운 상태이기 때문에, 보호받거나 구제 받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하늘의 아빠는 구름 사람들을 규합해 시위에 나선다. 이 시위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br>"뭘 하라는 거야."(…)"넌 보이지도 않냐.""뭘 보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그래, 아무것도 안 보이지.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구름 사람들』, 180~181쪽<br>공권력은 그들의 시위를 철저히 비가시화시킨다. 마치 '상자 안에 잡아 가둬놓은 쥐'처럼 무력화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시키려 한다.<br>두 번째 균열은 가족에 있다. 엄마가 땅 사람들의 집에 취직하면서 이 균열은 본격화된다. 세 번째 균열은 '오하늘'의 안에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다. 이렇게 세 가지 균열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 소설 전체를 구성한다.<br>인공강우 살포가 다가올수록, 이 균열들은 본격화된다. 오하늘의 거의 유일한 친구이자, 애인의 역할을 담당한 원과도 말다툼을 하게 되면서 이 균열이 결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보여준다.<br><br><br>야, 우리가 무슨 세균이냐.땅 사람들이 보기엔 세균이나 다름없지. 얼마나 눈엣가시곘어. 인공강우제를 뿌려서 없애고 싶은 게 당연해.<br><br>『구름 사람들』이 유독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지점은 이 소설에는 절대적인 악인이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사실이 이 소설 자체를 더 지독한 "악인"처럼 만든다. 소설의 인물들은 제각각 처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나마 악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꼽는다면, 오하늘의 아빠인 것 같지만, 그는 어쩐지 소설 내내 처연하게만 그려진다.) 선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이 다를 뿐이다. 애당초 입장(立場)이라는 말도 그런 뜻이질 않는가.<br>주인공 오하늘은 동생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하지만 이를 반성하고 후회한다. 나아가 오하늘 역시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할 뿐이다. 하지만 균열들은 오하늘을 결코 가만히 두지 않는다.<br>내가 아는 사람 중에 니가 제일 열심히 사는데…… 제일 착한 것도 넌데…… 왜 너한테만 이런 씨발 개같은 일만 생기는 거냐고.『구름 사람들』, 255쪽<br>또한 『구름 사람들』은 언뜻 '원숭이손 괴담'의 변형 같게도 느껴진다. 오하늘이 문득 내뱉었던 어떤 말이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결과를 맺게 되는데, 이 결과가 참 아이러니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에서 지난 세기의 『난쏘공』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가 된다는 구분점이 생긴다.<br>『구름 사람들』은 결국 '더는 올라갈/도망칠 곳이 없는 난장이들의 절규'처럼 읽혔다. 그리고 어쩌면 소설의 시작부터 이 이야기의 결말이나 전개가 정해져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구름이란 어쩌면 흩어지는 게 당연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씁쓸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었다.<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46/14/cover150/k18213641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6461410</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 [옐로페이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338705</link><pubDate>Tue, 16 Jun 2026 20: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33870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125744&TPaperId=1733870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348/72/coveroff/897012574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125744&TPaperId=1733870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옐로페이스</a><br/>R. F. 쿠앙 지음, 신혜연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08월<br/></td></tr></table><br/><br>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br><br><br>R.F 쿠앙의 『옐로페이스』는 네이버 웹툰 &lt;저궤도인간&gt; 후기에서 알게 되었다. 유사한 소재를 다룬 작품이라고 해 흥미가 생겼다. &lt;저궤도인간&gt;을 워낙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지인의 작품을 훔치게 된 주인공이라는 점에선 유사하기는 했다. 하지만 표절이라고 보기엔 어렵고 그저 소재가 겹친 정도에 불과해보인다.실제로 편집 과정을 그리는 장면에선 비슷한 감정선이 그려지기도 했다.<br><br>지금 잘라내고 있는 글이 내 글이 아니라 남의 글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자기 자식을 죽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었으니까.『옐로페이스』, 52쪽<br>다니엘라는 이런 나의 방향 전환에 답을 보내왔다. 정말 좋네요. 놀라울 정도로 함께 일하기가 편해요.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을 죽이자고 하면 아주 별나게 굴거든요.『옐로페이스』, 67쪽<br>&lt;저궤도인간&gt;에서도 주재열의 원고 &lt;그만두어야 할 때&gt;의 편집을 맡은 장예주도 이런 넋두리를 내뱉는다.<br><br>그거 아세요? 1교가 이렇게 순조로웠던 적은 처음이에요.자잘한 교정 의견은 손발톱 다듬듯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도 하시지만, 어떤 의견은 생살을 베는 느낌이라고들 하세요.&lt;저궤도인간&gt; 34화주재열 역시 '자신의 살'이 아니기 때문에 장예주의 편집 의견을 수용할 수 있다는 독백을 하기도 한다.<br>다만 두 작품의 성격을 확실하게 구분짓는 것은 주인공의 태도다. 준 헤이워드는 &lt;최후의 전선&gt;을 훔쳤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정도가 주재열에 비하면 작은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 사실이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면이 더 자주 부각되어 준을 동정하기 어려웠다. 물론, 준은 아테나의 초고를 자신이 재탄생시켰다고 믿기에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긴 하다. 또한 준 - 아테나의 관계와 주재열 - 이동재의 관계 역시 대조적이다. 준 - 아테나는 서로 대학 동창이기는 하나, 이해관계로 연결된 사이에 가깝다. 주재열 - 이동재는 주재열이 이동재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후원해주던 관계로 더 친밀했다. 이러한 관계성과 인물 자체의 성격이 작품을 훔친 행위에 대해 갖는 죄책감의 무게를 서로 다르게 만들고, 이에 따라 작품의 장르 자체가 달라지게 만든다.<br><br><br>&lt;저궤도인간&gt;이 인간이 가지는 내면 심리를 드러내보여주는 '드라마'에 가깝다면, 『옐로페이스』는 일종의 블랙코미디다.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사뭇 진지한 고찰도 녹아있지만, 전반적으로 출판업계, 미디어업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br>주인공인 준 헤이워드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중국계 미국인 '아테나 리우'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다. 그리고 그 혼란한 와중에 아테나의 차기작 초고를 손에 넣게 되고, 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br>준 헤이워드는 이미 데뷔를 한 작가였지만, 업계에선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입지를 비롯해, 복합적인 감정으로 얽힌 아테나와의 관계는 독자가 준 도둑질에 관해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br><br>아테나는 글을 완전히 마치기 전에는 작품에 대해 밝히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베타 독자들에게 읽히는 법도 없었다. 인터뷰도, 소셜미디어에 슬쩍 정보를 흘리는 일도 없었다. 에이전트도, 편집자도 작업을 다 마치기 전까지는 줄거리조차 알 수 없었다.『옐로페이스』, 24쪽<br>내가 아는 작가들은 다들 누군가에 대해 이런 식으로 느꼈다. 글을 쓴다는 건 매우 고독한 작업이다.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고, 극심한 무한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징후가 조금만 보여도 끝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다.『옐로페이스』, 18쪽글쓰기는 진정한 마법에 가장 가깝다. 글쓰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며,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 것이다. 현실 세계가 너무 고통스러울 때 글을 쓰면 새로운 자신의 세계를 만들 힘이 생긴다.『옐로페이스』, 310쪽나는 내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세상이 숨죽이고 기다리기를 원했다. 내 말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했다. 영구적으로 존재하기를 원했다. 죽은 후에도 산더미 같은 페이지를 남기고 싶었다. 여기 주니퍼 송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말을 우리에게 들려줬다, 라고 소리치는 페이지를.『옐로페이스』, 357쪽하지만 이것이 이야기꾼의 운명이다. 우리는 그로테스크한 것들의 교차점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살짝 엿볼 뿐 온전히 마주하지 못하는 어둠을 "여길 보라!" 하고 외치며 활짝 펼쳐 보이는 존재다. 누구도 분석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명확히 밝히는 존재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존재다.『옐로페이스』, 152쪽<br><br>도덕적인 문제, 작가의 고뇌와 더불어 『옐로페이스』가 천착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포지셔닝'이다. 준 헤이워드는 아테나의 작품, &lt;최후의 전선&gt;을 출간하면서 필명을 '주니퍼 송'으로 정한다. 물론 이는 준의 미들네임이기에 완전한 거짓은 아니다. 다만, '주니퍼 송'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것은, 준을 중국계 미국인으로 독자들이 '착각'하게끔 만드는 '미필적 고의'다. &lt;최후의 전선&gt;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중국인 노동자를 다룬 작품이고, 이에 대해 정당한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중국계여야만 한다는 출판계의 암묵적인 합의에 바탕한 행위다. 실제로 준, 아니 주니퍼 송은 독자들과의 만남에서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공격을 받는다.<br><br>"왜 백인 작가가, 그러니까, 중국인이 아닌 작가가 이런 얘기를 써서, 그걸로 이익을 얻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를요. 작가님은 왜 자신이 이 이야기를 쓸 적임자라고 생각하셨나요?"『옐로페이스』, 150쪽<br><br>당사자성은 중요하다. 작중 캔디스 리 편집자가 강조하듯 당사자의 눈에는 보이는 결함이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선 주니퍼 송의 편을 들고 싶긴 하다. 당사자가 아니라고 특정한 이슈에 대해서 작품을 쓸 기회부터 박탈하는 건 해당 당사자성을 가진 이들이 스스로 타인을 규정짓고 배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br>또한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출판 업계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한국 문학계 역시 트위터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데, 특정 이슈에 대한 공론장으로써도 기능하기도 하지만, 독서인구가 주로 모이는 곳이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의 악재를 대할 때에도 출판사는 관리가 가능한 리스크인지, 리스크로부터 어떠한 이익을 취할 수 있는지를 계산해보고 이를 활용하는 것을 보면서 어쩔 수 없는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는 곳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br><br>아니, 트위터는 현실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이다. 왜냐하면 그 영역에 출판이라는 사회경제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업계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옐로페이스』, 215쪽"그들은 이 건을 문화전쟁 문제로 끌고 가고 있어요. 이런 경우는 늘 관심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책 판매량이… 늘어납니다. 판매량이 늘어나는 건 언제든 좋은 일이죠."『옐로페이스』, 300쪽<br><br>『옐로페이스』는 쉽고 재밌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 역시 짚어야할 것 같다.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준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악재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의 대안을 떠올린다. 나는 이 아이디어가 정말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야기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br>문학적 구원과 엄청난 성공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길. 내내 이토록 명백한 답이 있었는데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옐로페이스』, 365쪽<br>또한 작품 자체가 너무 길고 필요없는 군더더기가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간 중간 빼는 것이 더 이야기의 호흡이나 집중도를 향상시킬 수 있어보이는 군살이 많았다. (물론, 영미 문학이 대체로 장황한 묘사와 느린 서사 전개를 선호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br>『옐로페이스』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주니퍼 송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과오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전 실수의 씨앗이 된 방법을 자꾸만 반복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설의 결말에 이른다. 이러한 지점이 어쩌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우리 스스로의 우둔함이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과 함께 책을 덮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348/72/cover150/897012574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3487232</link></image></item><item><author>고전파</author><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title>끝내 다시 타오르는 불씨 - [화씨 451]</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338643</link><pubDate>Tue, 16 Jun 2026 19: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9496129/1733864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739084&TPaperId=1733864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9/coveroff/898273908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739084&TPaperId=1733864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화씨 451</a><br/>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03월<br/></td></tr></table><br/><br>끝내 다시 타오르는 불씨<br><br><br><br><br><br>레이 브레드버리의 『화씨 451』을 알게 된 경위는 조은영 작가의 웹툰 &lt;저궤도인간&gt;을 통해서다. 작중 여주인공인 편집자 장예주는 남주인공 재열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편집자로 진로를 결정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말한다. 그때 그녀는 『화씨 451』을 읽고 나서 진로를 결정했다고 말한다.<br><br>"내가 바로 플라톤의 「국가」라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시몬스가 바로 마르쿠스라오!"<br>&lt;저궤도인간&gt; 41화 / 『화씨 451』, 261쪽<br><br>&lt;저궤도인간&gt;에서 장예주의 대사에는 '!'이 달려 있는데, 내가 읽어본 판문에는 없었다. 아마도 장예주가 어렸을 적에 도취되었던 문장을 읊다가 첨가된 억양인 것 같다. 사실 '!'과 '책이 금지가 된 시대'라는 『화씨 451』의 설정 때문에 이 장면이 대단한 클라이맥스일 것이라 기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 대사가 나오는 장면이 너무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마주한 장면은 격정적인 느낌은 아니었지만, 충분한 울림을 주었다.<br><br><br>* * *<br><br><br>『화씨 451』의 주인공은 '가이 몬태그'다.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유닛 중 하나인 파이어뱃 영웅 캐릭터의 이름은 '구이 몬태그'인데, 『화씨 451』의 주인공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직업은 방화수(fireman)로 금지된 물건인 책을 읽는 사람들이 발견되면 책과 집을 태우는 일을 맡고 있다.<br><br>불태우는 일은 즐겁다.<br>『화씨 451』, 15쪽<br>『화씨 451』은 가이 몬태그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책을 태우는 것에 희열까지 느끼는 몬태그는 어린 소녀 클라레스를 만나면서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br><br>『화씨 451』 속 사회는 불쾌함이나 슬픔을 유발하는 모든 요소를 통제한다. 갈등을 피하고 대중의 평안함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깊은 사색과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책은 유해 물질로 규정되어 제거 대상이 된다. 책의 자리를 채운 것은 벽면 전체를 가득 채운 대형 텔레비전 화면과 귀에 꽂는 소형 라디오다. 몬태그의 아내, 밀드레드는 완전히 중독되어 소통 능력을 사실상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브래드버리가 묘사한 이 풍경은 스마트폰과 숏폼에 온 시선을 빼앗긴 현대 사회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생각하지 않는 사회, 즉 질문이 사라진 사회는 통제하기 가장 쉬운 사회가 된다.<br>아는 것은 힘이지만, 동시에 모르는 것이 약이 될 때도 있다. 너무 많이 아는 것은 때론 독이 되기 때문이다. 『화씨 451』에서는 지적 능력에 대한 평등성을 위하여 책을 읽는 것을 금지했다는데, 실상은 우민들이 통제하기가 쉽다는 권력자들의 의도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분서갱유나, 한국 군사정권이 실시했던 3S 정책이 이를 뒷받침하는 실증적인 근거다.<br>반면에 몬태그가 만난 클라레스는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명제를 부정하고, '아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 같다. 벽걸이 TV 대신 자연을 만끽하고, 무슨 일이든 "왜"를 궁금해 하며, 타인에게 "시간"을 할애한다. 몬태그에게 삶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던 클라레스는 어느날 갑자기 실종되고, 이로 인해 몬태그는 자신의 삶이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br><br>몬태그가 정신적 멘토로 의지하게 되는 '파버' 교수는 책이 이 디스토피아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br><br><br>1. 정보의 질<br>2. 이 정보들을 소화할 시간<br>3. 위의 두 조건의 상호작용으로 얻어지는 배움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권리<br>『화씨 451』, 156쪽<br><br><br><br>책이 가진 질 좋은 정보들, 그리고 이를 독자가 소화할 충분한 여가 시간, 이 두 가지를 통해 깨달은 바를 자유롭게 실천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책은 이 사회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런 시기는 요원해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희망을 잃지 않는다. 언젠가 올 그 날을 고대하며, 그들은 스스로가 '결코 태울 수 없는 책'이 되자고 결심하게 된다.<br><br><br>* * *<br><br><br>『화씨 451』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제쯤이면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화씨 451』을 범박하게 정리하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인간이 우연히 하나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서 이전의 삶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이야기'라고 말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에 매혹당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형태의 플롯이기에, 이 플롯은 오랜 시간동안 변형, 발전되어 왔다.<br>이러한 플롯 하에서 나는 『화씨 451』을 읽으며,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소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작품은 이러한 공통점을 공유한다.<br>1. 주인공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이 진실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협이 된다.<br>2. 기존 질서의 권력자들이 필사적으로 감추려는 진실을 추적하게 된다.<br>3. 이전까지 그려온 삶의 궤적과는 전연 다른 삶을 살게 된다.<br><br>가이 몬태그가 스스로 책이 되기로 결심한 방랑자들을 찾아서 떠나듯이, 『비명을 찾아서』의 '기노시다' 역시 '상해 임시 정부'를 찾아서 떠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두 소설에 내가 왜 이토록 매력을 느끼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대체로 용기없이 사는 편이고, 그리하여 나의 용기없음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br>모든 소설은 한 인물의 변화를 따라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씨 451』에서 몬태그는 처음에는 불로 만악의 근원인 책을 태우는 일에 희열을 느꼈지만, 결말 부근에 이르러서는 불이 사람의 몸을 추위로부터 녹여줄 수 있으며, 음식을 조리하는 데 쓰일 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이는 그가 소설의 시작 부근과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리하여, 몬태그는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되기로 결심하면서 다시 불씨를 지핀다. 그 불씨는 책을 불태우는 불씨가 아니라, 인류의 희망을 지피는 불씨다. 권력자들이 그토록 다 태워버리려고 했지만, 불씨는 끝내 다시 타오르는 것이다.<br><br><br><br>* * *<br><br><br><br><br>『화씨 451』의 후기가 생각보다 재밌었다. 『화씨 451』의 작중 내내, 몬태그가 윤리관, 당국의 추적 따위에 쫓기는 심리 묘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레이 브레드버리가 『화씨 451』을 작성하던 당시, 동전을 넣고 쓸 수 있는 UCLA 도서관의 타자기를 빌려서 썼다고 한다. 30분의 시간 제한이 있어서 쫓기는 심정으로 썼는데, 이게 작품에도 은연중에 반영된 것 같았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9/cover150/898273908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20907</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