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모서리
이상민 지음 / 서랍의날씨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제공
파도의 모서리 - 이상민

p.22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다. 울든 말든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포기 하고 울다가 죽느니 살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하다 죽는 쪽이 나았다. 죽더라도 희망은 잃지 않은 셈이니까!

p.29 저 갑작스러운 해일에 무수한 동식물이 수몰되었다. 물론 인류도 포함이었다. 대자연의 힘 앞에 인류는 단지 무력한 하나의 종에 불과했다.

p.105 유봄은 오리배를 선택했다. 밤이었고, 이 시대에 조명은 없었다. 한동이 조금만 시간을 벌어준다면 별빛 속에 숨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해일 이후 지금까지 유봄에게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고 그 모든 선택이 유봄을 여기까지 밀고 왔다. 그리고 결국에는 살아남게 했다. 비록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가볼 수는 없었지만, 많은 경우 생사의 갈림길이었으리라.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유봄은 올바른 선택의 총체라고 할 수 있었다. 유봄은 이번에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기를 마음속 깊이 바라며 힘껏 페달을 밟았다.

p.116 물에 잠긴 지구에서도 가장 무서운 건 여전히 사람이었다.

p.121 세상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길래 어디서 이런 사이코패스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사이코패스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린 걸까?

p.212 지금 유봄에게 필요한 건 확신을 가지고 밝은 미래를 상상 하는 것. 아니, 꼭 밝지 않아도 좋다. 언젠가 도달해 있을 최 선의 결말을 상상하는 것. 그것만이 유봄이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희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한다. 인간을 죽이는 건 언제나 절망이다.

이 소설은 재난을 다루고 있지만, 읽고 나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재난의 스케일이 아니라 그 안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바다가 도시를 삼켜버린 세계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즉 살아남은 인물들은 거창한 영웅이 되지도, 극적인 선택을 연속해서 하지도 않는다. 재난 상황에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하루를 넘기고, 또 하루를 버티는 일뿐이다.

서울이 물에 잠긴 뒤 오리배를 타고 표류하게 된 유봄의 여정은 생존기이면서 동시에 존재에 대한 기록이다.
한순간에 문명이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것은 돈도, 규칙도, 미래 계획도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질문뿐이다.

[파도의 모서리]는 SF적 상황도 포함되어있지만, 다가온 재난과, 그 재난이 발생하면서 드러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행동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사람을 믿고 싶으면서도 믿을 수 없고,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혼자가 되는 순간 더 불안해지는 마음.
그 모순적인 감정들은 끊임없이 파도처럼 반복해서 밀려오는 구조가 이 소설의 제목과도 닮아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이 책에서는 희망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희망을 약속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절망을 결론으로 내리지도 않는다.
다만, 그 애매한 경계선 위에서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갈 뿐이고, 그 모습이 오히려 더 현실성 있게 다가왔다.

[파도의 모서리]는 “세상이 무너진 뒤에도 우리는 왜 계속 살아가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붙잡고 가는 이야기다.
재난 상황 속에서는 늘 인간의 양상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 선택지가 무한할 때보다, 오히려 선택이 극도로 한정되어 있을 때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더 또렷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살릴 것인가 버릴 것인가, 함께 갈 것인가 혼자 남을 것인가,
오늘을 넘길 것인가 여기서 멈출 것인가.
재난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는 대신, 끝까지 남아 있는 태도만을 드러내 보인다.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파도의모서리 #이상민 #서랍의날씨 #서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