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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서윤빈 지음 / 래빗홀 / 2024년 4월
평점 :
사람들이 늙어가는 장기를 하나하나 교체할 수 있게 된 장기 임플란트가 가능한 한국을 배경으로 한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은 영생을 누릴 수 있지만, 개인의 나이와 건강 상태에 따라 장기 구독 비용이 달라지고 이 마저도 유지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아 충분히 부유하지 못한 노인들은 죽음을 맞이하게되는 누군가에게는 영생이 가능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한 세상을 그리고 있다.
- 우리의 죽음과 함께 세계에서도 잊힐, 오래된 필름 같은 기억들. 인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그 전까지의 인류가 만든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만들어냈다. 옛날 영화들이 몇몇 명작을 빼고는 대부분 잊혔 듯, 우리의 기억 역시 선명히 빛나는 새로운 것들만 남고 모두 사라져버릴 것이다. (p. 12)
- 그녀는 내 품에서 조용히 죽었다. 사인은 임플란트 구독 기간 만료로 인한 심정지였다. 이 시대에도 영생은 이론에 불과하다. (p. 29)
- 임플란트 장기가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 시대의 노인들은 세월만큼 침식된 몸을 이끌고 몇 킬로미터를 무작정 산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몸 안에 새겨진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시대의 노화란 세금과 기억만으로 존재하는 건지도 몰랐다. (p. 111)
주인공 유온은 장기 구독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죽음이 예정된 사람들을 유혹해 그들의 돈으로 살아가는 ‘가애’라는 방식으로 삶을 연장하는 인물로 봉사활동에서 만난 자신의 모습을 거리낌 없이 내비치는 성아에게 끌린다. 유온에게 유산을 남겨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유온은 낯선 감정이 혼란스럽기만하다.
- 버디를 이용하면 기억은 얼마든지 삭제할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을 삭제하면 기억을 삭제했다는 기억이 남고, 그것을 다시 삭제하면 그 삭제의 기록이 남는다. 결국, 무언가를 ‘완전히’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어떤 기억을 삭제했는지를 영원히 기억하는 이상, 그 기억은 삭제된 것이 아니다. (p. 148~149)
- 죽으면 뭐가 있는지 누가 알려주기만 했더라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돈만 있으면 거의 영생을 살 수도 있는 시대가 되어도 사후 세계에 관해서는 아직도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새삼 부당하게 느껴졌다. (p. 230)
- 수애들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나는 그들이 보이는 반응에는 기민하게 주의를 기울였지만, 그들이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한 번도 궁금해해본 적이 없었다. 내 목표는 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지 그들의 인생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사랑 받은 적이 있기나 한 걸까. 그 모든 순간, 나는 내가 아니었는데. 어쩌면 그들은 다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즐거움에 빠져 있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p. 248)
100년의 기억을 가진 트랜스휴먼들의 러브 스토리인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을 디스토피아와 상관없는 로맨스라 생각한다는 작가님의 말처럼 디스토피아에 로맨스가 첨가된 이야기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순식간에 읽혔다. 소설 속 임플란트 장기 이야기는 언젠가 현실에서 가능해질 것 같은 이야기로 만약 그런 시대가 되어 영생을 누릴 수 있다면 과연 인간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비극일까 고민해볼 수 있는 영생을 위해 사랑을 연기하고, 돈에 의해 좌우되는 삶과 죽음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것이 달라지는 세상을 생각하게 했다.
- 내가 그동안 삶의 마지막을 숱하게 연습해왔다고 생각했지만 그 일들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됐다. 수애들의 죽음을 나는 오직 내 삶을 향해 갈라진 물길로 받아들였다. 길 양 옆에 죽음이 넘실대는데, 나는 그쪽으로는 제대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직 길 끝에 희미하게 보이는 화려한 불빛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거기까지 걸을 수 없다는 걸 막연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p. 255~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