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인식의 분리에 앞서 일자를 향한 철학적 인식 추구의출발은 후기 니이체가 철학의 목적으로 삼았던 "모든 철학함의본래적 목적은 신비적 직관이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다른 경향으로 전개되는 다양한 철학적 노력들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철학적 사유의 본래적 목적은 도달되지 못하거나 아직 도달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본래적 목적이 어떤 것인지를 무엇으로부터 알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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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삶 자체와 더불어 출현하는 인간 공통의 취약성을 거론하는 중이지만, 나는 우리가 이런 취약성의 출처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역시 주장하는 중이다. 그것은 "나"의 형성에 선행한다. 그것은 조건우리가 붙잡고 논쟁할 수 없는 처음부터 우리는 벌거벗은 상태였다는조건이다. 물론 그 조건을 붙들고 논쟁할 수는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한다면 설사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어리석은 일일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신생아에게 꼭 필요한 원조가 항상 거기 있다는 이야길 하려는 게 아니다. 분명 그렇지 않다. 누군가에게 이 일차적인 장면은 포기나 폭력 혹은 굶주림의 장면, 즉 그들의 신체가 어떤 것에도 양도되지 못하거나 잔인성에 양도되거나 또는 어떤 지속에도 양도되지 못하는 그런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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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특별한 감정이다. 상호작용이 가장 건설적으로 펼쳐질수 있는 문맥을 창조하는 데 자신이 적극적인 역할을 행할 때, 그관계는 거룩한 관계가 된다. 그런 관계일 때 우리는 관심이 가는지 안 가는지 알아보기 위해 어슬렁거리며 수동적으로 기다리지않고 관심의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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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선택을 한다.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 아닌가톨16세기에는 선택이 없었다. 사람들은 사실상의 기독교도였다.
생각 속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유랑하는 것은 가능했었다.
현실의 생생한 지원을 받지 못한 상상력의 게임. 그러나 실천을 빠뜨릴 수는 없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간에, 분명히 의식하건 하지 못하건간에,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으로도빠져나올 수 없는 기독교의 욕조에 몸을 담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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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메노키오는 글자를 변형시키지 않고도 그 의미를 역전시켜놓았다. 본문에 따르면, 천사들의 출현으로 동료들로부터 분리된 마리아에게는 초자연적인 영의 기운이 주어졌다. 반면에 메노키오에게는 다른 처녀들‘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마리아를그들과 연결시킴으로써, 그녀에게 주어진 칭호를 가장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평범한 줄거리는 그의미 전체가 뒤바뀌면서 이야기의 핵심으로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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