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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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 한 번도 진짜로 버림받아본 기억이 없는지라
그렇게 나 자신을 방기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 개들이 개집에 매여 있듯이
일에 매여 있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 세상에서 단 한가지 소름 끼치는 일은
굳고 경직되어 빈사상태에 놓이는 것인 반면,
개인을 비롯한 인간 사회가
투쟁을 통해 젊어지고 삶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단 한 가지 기뻐할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 그렇게 시궁창을 철벅이며 걷다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제껏 한 번도 보거나 깨닫지 못했던 것이 불쑥 시야에 들어 온다.

- 나와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이 프라하의 밑바닥, 지하실과 지하 공간에서 활기 넘치는 생생한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걸 알고 나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운이 난다. 일도 한결 덜 부담스럽고 저절로 되는 것 같아 나는 시간을 되돌려 내 젊은 시절까지 거슬러올라가본다. 그 시절만 해도 나는 토요일마다 바지를 다리고 신발을 닦아 밑창까지 광을 냈다. 젊을 때엔 깨끗한 걸 좋아하고 자신의 이미지에 도취해 그 이미지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기까지 하니까.....

- 무얼 용서해달라는 건지 나도 알 수 없었지만 뭐, 놀랄 일도 아니었다. 늘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게 내 운명이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것에 대해, 이런 성질을 가진 것에 대해, 심지어 나 자신에게까지 용서를 빌곤 했으니까......
나는 죄책감으로 무겁고 비참한 심정이 되어 내 지하실을 바라보면서 터키옥색 집시 여자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움푹한 자리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거리의 소음에, 현실의 저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귀기울였다.

-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근원으로의 전진, 미래로의 후퇴

- 자비로운 자연이 공포를 열어 보이는 순간,
그때까지 안전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인간을 덮친다.
이 모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 술과 노동으로 멍해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내 지하실을 청소하며 생쥐들을 희생시킨 참이었다.
그저 책이나 갉아먹고 폐지 더미에 뚫린 구멍 속에 살며
그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인데. ...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 그들의 그리스 휴가 계획은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헤르더와 헤겔의 책들은 나를 고대 그리스에 던져놓았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건만 내가 막상 휴가를 떠나본 적은 없었다. 일을 따라잡느라 휴가는 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하루라도 결근을 하면 소장은 가차없이 추가로 이틀을 더 근무하게 했다. 어쩌다 하루 쉬는 날이 찾아와도 나는 수당을 받고 일하러 갔다. 일이 항시 밀려 있는데다,

내 역량을 넘어서는 종이 더미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으니까.

사르트르 양반과 카뮈 양반이,
특히 후자가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십오 년 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그러나 부브니의 사회주의 노동단원들은 일이 밀리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불안에 곤두선 책장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 안에 숨겨진 가치 따위는 전혀 아랑곳없이 냉정하게 작업을 이어갔다.

- 나는 쓰레깃더미를 치우듯 그것들을, 슬그머니 눈길이 가닿은 도덕 형이상학 마저 내 압축기 속에 처넣었는데, 그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 나는 익명의 꾸러미들을 미친듯이 압축하고 또 압축했다.
고대나 현대 화가의 복제화 따위도 염두에 없었다.
나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예술과 창조, 미의 창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 속도로 일하면 혼자서도 사회주의 노동단원이 되어 연 50퍼센트의 생산성 향상을 약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업이 소유한 별장도 이용할 수 있겠고, 여름휴가를 그리스에서 보내며 속바지를 입고 올림피아 경기장을 돌거나 스타기라에 가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나는 우유를 병째 들이마시며 일했다. 부브니 사람들처럼 무심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저녁엔 일을 모두 마치고 쓰레기도 말끔히 치워, 나도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날 저녁 소장은 사무실 뒤쪽에서 샤워를 하며 내게 경고해왔다.

- 내 놀라운 기계가 나를 배신한 것이다.

- 나는 이러고 있는 게 좋다.

-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야 최상의 자신을 찾을 수 있다.

-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적(敵)을 두기 마련이다.

- 그러고는 꿈을 꾸는 듯한 불행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 그때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르지차니의 아름다운 전원을 기리는 시를 읊었을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내게 사과를 했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읽힐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던 거다......

-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갈 것이다......

- 부브니의 거대한 기계는 내 압축기 열 대에 맞먹는 일을 해치운다. ... 나는 녹색 버튼의 작동을 중단하고 폐지가 가득한 압축통 속에 나를 위한 작은 은신처를 마련한다. 아무렴, 나는 여전히 쾌활한 사내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 이제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책을, 책장을, 쥐고 있다...... 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 라고 쓰여 있다......

-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압축통 벽에 눌려 내 다리와 턱이 들러붙고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이어진다 해도 결단코 두 손 놓고 천국에서 추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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