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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 한의 화가 천경자 - 희곡으로 만나는 슬픈 전설의 91페이지
정중헌 지음 / 스타북스 / 2021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희곡의 형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하나의 필름이 초연히 흘러가며 화가 천경자의 삶을 들여다 보게 된다.
먼저 여자로서의 그녀의 삶은 참으로 치열했다. 사랑을 구걸하다시피 했던 그녀의 모습에서 애틋한 연민까지 느껴졌다. 가부장적인 시대적 상황과 남자는 그래도 된다는 사회적인 통념이 그녀를 힘들게 했고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도 유년시절 의관으로 불리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천자문을 익히고 그림을 즐겨 그리며 학업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림에 대한 끝없는 집념으로 유학을 결심했을 때도 그 시절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일이나 부모의 허락과 지원으로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현실이란 슬퍼도, 제아무리 한 맺힌 일이 있어도 그것을 삼켜 넘기고 웃고 살아야 하는것이지요. 그럴 때 한이라는 것이 생겨요. 이게 인생으로서의 매력이지요....그것을 저는 그림속에 담으려고 했어요.(page 024)
아버지의 도박빚으로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가 패물을 팔아 몰래 보태 준 학비로 어렵사리 학교를 다녔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전쟁통에 만난 남자와 정을 맺고는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 사랑이 전하는 아름다움보다 내가 생각하기에 천경자는 너무나 생각이 없는 인생으로 보였다.
천경자 화백은 화가로서 고독한 삶을 살았다. 그녀 스스로 너무 사랑을 구걸하고 산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충분히 사랑받고 당당히 살 수 있었던 그녀가 늘 저울질 당하는 사랑에 목매고 갈구함이 보여져 안타까움이 든다. 물론 그 한과 고독 안에서 그녀의 작품이 만들어졌겠지만 같은 여자로서 애잔한 마음은 가득하다.
인간사 희로애락을의 온갖 감정과 자연의 섭리와 변화를 거르고 걸러 작품으로 승화 시키는 것이 천경자 화백이 지향하는 예술이다. 이는 작가의 창작의 샘이자 예술의 원동력으로서 천경자 화백의 한은 화려하고 아름답다. 그녀의 글도 마찬가지이다. 오래 전에 읽은 언덕 위의 양옥집(1974)이라는 천경자 화백의 수필은 자유로운 사고와 거침없는 감정을 드러내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한 모습을 볼수 있다. 그녀의 글을 읽을 때면 시대를 너무 앞 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스스로 인생의 화양연화였던 시절에 쓴 글이라 행복이 글에 넘쳐 보였나 보다.

오직 더 살고자 하는 집념으로 떠난 아프리카! 새로운 문화를 보고 그녀안에서 새로운 예술적 감성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음의 용광로에 한 가득 아프리카가 불을 붙힌 것이다.
사하라사막과 낙타행렬,오아시스, 신기루, 흑인들의 카니발 어느 하나 감격스럽지 않은것이 없나보다
그녀의 그림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키오피아, 우간다,모로코, 이집트 등 3개월 간 각 나라를 다니면서 미친듯이 살아 있는 스케치를 하기 시작한다.
애당초 여자 혼자 아프리카 방랑여행을 기대했었다고 한다. 아프리카라는 나라는 다른 곳과 달리 그 시대에는 목숨을 내던지기 전에 그런 여행이 불가능했고...실상 지금도 아프리카는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모든 위험을 감내하고 화가 천경자는 막무가내로 다녔다.
사막의 여왕이 되자. 오직 모래와 태양과 바람, 죽음의 세계 뿐인 곳에서
아무도 탐내지 않을 사막의 여왕이 되자. (page90)
아프리카 콩고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검은 향연, 그 빛깔의 군상에 빠져 미친듯이 그림을 그렸다. 아프리카는 사진을 찍히거나 그리는 일에 대해 무척 안 좋은 풍습이 있는지 말하지 않고 몰래 그리다가 들켜서 욕을 얻어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문명의 때를 타지 않은 아프리카 콩고.화가 천경자의 마음을 한 없이 설레게 해 그 매력에 빠져 집념과 열정에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
예술적 유전자 를 가진 사람들은 유난히 감정이 발달한 듯 하다. 파란하늘, 예쁜 꽃색깔,야자수등이 어울려진 사하라에서 검은리텀을 두른 큰눈의 여인들의 신비로움에 빠져 이집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집트 벽화를 바라보며 그녀는 예술성은 또 솟구치기 시작한다.
아프리카 여행 후 치른 전시회와 아프리카 기행 화문집이 아주 인기를 끌게 되었다. 영화에서나 보았던 케냐와 우간다 대초원 맹수를 보고 피가 끓어올랐지만 그때도 화가 본연의 모습으로 스케치에 열을 올렸었다.
아프리카 여행은 그녀에게 초현실적이었으며 순교자처럼 기도하는 자세로 경험되었다.
그 후 5년 뒤 다시 중남미로 스케치여행을 떠난다. 인도 뉴델리, 갠지스강, 카주라호 등이 또다시 그녀에게 강한 자극과 에너지를 심어 준다.

50대 중반에 여자 혼자 여행이란 순탄치만은 않았다. 하나를 챙기면 다른 하나를 잃어버리는게 일이다.
성지 갠지스강에서는 생을 다한 이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죽기 위해 다시 찾아오기도 하고 슬픔인지 한인지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드리워 있기도 하다. 인도는 요즘같은 시대도 여자 혼자 여행이 위험한 나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경자 화백은 20일을 그곳에 젖어 보냈다. 신비한 대륙이라는 느낌에 그녀의 스케치북은 여전히 바쁘게 채워져 갔다.
화가 천경자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남미 아르헨티나의 아름다운 풍물과 낭만은 인생살이에 지친 중년의 여성이 가진 상처를 아물게 해주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였나 보다. 여행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가 아니라 그림에 미쳐 스스로의 사명감을 채우려고 떠난 곳에서 탱고를 들으며 아직 여자이기에 남아있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싶은 마음도 생겨났다고 한다. 사랑에 빠지고 싶은 마음에 나이가 있겠는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서는 그 고독함이 가장 지독했나 보다.
화가 천경자가 스케치 기행에 3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열정을 쏟은 이유는 무엇일까?
도화살 같은 팔자소관인지 외국이라는 호기심 때문은 아니라고 한다. 인생 후반기 작품에 대한 열정을 세계의 구석구석 현장에서 찾아내고 철저하게 승부해 보겠다는 천경자 화백만의 집념. 원시의 땅, 미지의 땅을 여자 혼자의 몸으로 그것도 중년의 나이와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 보면 놀랄일이고 그 용기가 무척 부럽다. 내 인생 버킷리스트인 산티아고 걷기도 겁이 나서 못하는 판에 사실 이 책을 읽고 용기를 조금 얻기는 했다.
그녀! 천경자 화백
개인전을 열때마다 장사진을 치게 하고 장안의 화제를 몰고 다녔던 화가.
사랑 받고 싶어했고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여자.
자신이 겪은 슬픈 전설의 단면인 삶을 그림으로 나타낼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았던 화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위작 의혹이 일자 붓을 꺾어버린 자존심 강한 화가.
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자신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았던 그녀 .
천경자 화백은 한의 화가이기보다 사랑과 미움으로 얼룩진 자신의 삶을 딛고 당당히 일어난 열정의 화가
천경자로 기억되기를 독자로서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