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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평점 :
이 책은 독서모임 토론 선정도서이다.
토론에 참여할려면 평소에 책을 읽던 자세와는 달리 집중력을 요구한다.
전체적인 줄거리의 파악은 기본, 행간에 숨어 있는 저자의 의도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게다가 느낀 점을 타인들과 나누기 위해선 일관성을 유지하되 나만의 독창성 있는 해석을
피력해야 한다.(꼭 그래야만 된다는 강박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발언의 빈도나 타임을 내 스스로 조절하여 서로간에 암묵적으로 정해놓은 형평성의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균형감을 유지하는 토론예절이다.
토론예절은 나혼자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팀웍이다.
예전에 봤던 일드 <결혼못하는 남자>의 결말에서 노총각 아베히로시를 좋아하는 여의사는
이렇게 고백한다.
˝생각해보니 우리들 대화는 언제나 피구 같았네요. 말로 상대를 맞추면 끝나버리고..˝ ˝나는 캐치볼이 해보고 싶어요.당신하고 ˝
독서토론도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 공감해주고 다시 내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러이러한 약간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가 자유로운 의견을 개진하는 데 방해가 되어선 안된다. 각자의 오독을 나누는 자리인만큼 설익은 의견이 마구마구 브레인스토밍되는 아마추어리즘의 장이 되었음 하는 바람이다. 그 곳엔 평소에 책을 누가 많이 읽었고 학식이 누가 뛰어나고 말재간이 누가 더 뛰어나는가를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날의 날씨는 책의 제목만큼이나 우중충했다.
점심때가 다 되서야 북프리멤버들이 다 모였다. 오랫만에 완전체였다.
새로 생긴 핸즈커피에 별도의 칸막이가 있는 널찍한 자리를 선점하여 각자의 취향에 맞는
커피도 한잔씩 시켰다. 주문한 커피도 나오고 책들을 펴고 있었지만 간단하게나마 진행을
맡을 사람도 없었고, 서로가 이런 경험도 처음이라 선뜻 말문을 열기가 어색했다.
하지만 조심스레 말문이 트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멤버들의 속깊은 감상은 자연스럽게 짙은 커피향과 어우러졌다.
이 책은 3부작을 합본한 개정판이다.
애초에 1부를 펴냈을 때 작가는 3부작까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1부는 그냥 한권의 책으로 끝났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책이 두껍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분들은 1부만 읽어도 괜찮으리라 권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이 책은 제목처럼 딱 1부, 2부, 3부에 걸쳐 존재에 대한 3번의 거짓말을 한다.
(순전히 나의 생각이다)
이 3번의 거짓말을 다 읽어야지만 ‘인간의 존재‘라는 것이 얼마나 모호하고 피상적인가.
한낱 유기체에 불과한 우리의 몸뚱아리에서 ˝존엄성(존재)˝이라는 가치를 벗겨내면 보잘 것 없는 껍데기(실체)는 마치 정육점에 진열된 고깃덩어리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3부작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많은 질문들을 남겨둔다. 그러기에 이 소설에 대해서 궁구하려면 꼭 3부작을 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1부에서는 2차세계대전중 어린 쌍둥이형제가 오스트리아 국경에 접한 헝가리 소도시에 있는 할머니집에 맡겨지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개한다.
전쟁의 참화에 대해 감정이입을 극도로 배제하는 문장으로 쌍둥이형제의 본성에 충실한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엮어낸다.
한가지 예를 들면 ‘정신을 단련하다‘란 에피소드는 쌍둥이 형제가 서로에게 쌍욕을 하면서 점차 그 모욕의 고통에 익숙해져가는 연습이다. ‘잔혹연습‘에서는 생선의 대가리를 내려쳐 배를 따고, 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이는 등의 연습이다.
‘언청이‘라는 에피소드에서는 어린 쌍둥이의 짓으론 상상하기도 힘든 성행위를 저지른다.
유아기때는 본능이 우선한다.
아이들은 그 본능을 표현하고 성취함으로써 존재를 부각한다.
달리 말하면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존재의 실체를 알리는 행위다.
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부모없이 버려진 쌍둥이의 존재 자체는 실체는 있지만 만져지지 않는 안개와 같다. 서로에게 끊임없이 존재를 확인시켜주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1부에서는 어느 한문장에서도 쌍둥이 형제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아이덴티티를 부여받지 못한 실체다.
....어렵다. 하이데거나 야스퍼스 의 존재론적 관점이나 니체나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 철학에 무지몽매하면서 이런 리뷰를 쓴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어쩌랴~리뷰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고, 그 감상의 틀이 비록 아는 것만큼 짜여진다고는 하나 리뷰의 생명은 앎의 깊이에서 나오는 해석보다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사고에서 빛을 발하는 게 아닐까 애써 자위해본다.
드디어 2부에서 쌍둥이 형제의 이름이 나오면서 3인칭 시점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3부에서 다시 1인칭 시점의 ‘나’가 나오는데 솔직히 헷갈린다. 그냥 뒤죽박죽이다.
누군가 해석을 도표로 그렸다지만, 글쎄다. 줄거리를 완전히 파악해야만 뭔가 느낌을 글로 풀어쓸 수 있을 것 같긴 한데...과연 그러한 과정이 필요한가도 의문이고, 어쩌면 그냥 애매모호한 이 느낌으로 마무리 짓는 것도 나로선 괜찮을 듯 싶기도 하다.
우리 인간의 존재를 규명하고 가치를 부여함에 수많은 시대와 철학자들을 거치며 현재도 진행형이듯이 이 책 또한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 해설을 읽기보다는 몇 번의 정독과 사색을 통해서 깨닫는게 값질 것이라는 나름의 핑계로 책장 한켠에 모셔두기로 한다.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옆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