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배낭에 며칠 동안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짐을 챙긴다. 배낭을 메고 걸어 나오는 동안 버스를 타고 싶은지, 기차를 타고 싶은지 정한다. 기차를 타고 싶다면 역으로 간다. 역에 도착하면 열차 시간표를 보면서 전국의 여러 역 중에서 가 보고 싶은 곳을 고른다. 표를 산다. 기차를 타고 간다. 도착하면 역에서 나와 주변을 돌아본다. 오는 동안 가 보고 싶은 곳이 생겼다면 갈 방법을 궁리한다. 목적지가 없다면 적당히 계속 걷는다. 이상한 건물이나 재미난 가게, 못보던 풍경이 보이면 자세히 살핀다. 비슷비슷한시멘트 건물에 네모난 아파트만 가득한 듯해도, 막상 들여다보면 전국 어느 도시건 간에 똑같이생긴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내가 이 장면을 보다가 불현듯 깜짝 놀란 이유는 아이보리가 연출한 영화의 러브신이 전개된 곳과 같은 곳, 즉 한 면이 온통 덮인 보리밭 언덕임에도 양귀비꽃이 단 한 송이도 피어 있지 않아서였다."황금빛 보리밭에 빨간 양귀비가 피어 있어요"라고 어딘가에서 본 풍경을 시어머니께 이야기한 적이 있다. "꿈을 꾸는 듯 아름다웠어요." 그러면 농가 출신의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망측해라, 양귀비가 피어 있는 보리밭이 아름답다니."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한테는 수치야. 그건 잡초에 지나지 않으니까."「로렌초의 밤」에 나오는 보리밭을 보면서 나는 이탈리아에 아직 완전히 동화되지 않았던 시절의 나 자신을, 그리고 시어머니와 나누었던 그 대화를 떠올렸다.농민의 노고가 어린 보람찬 결실의 상징인 보리밭에 빨간 양귀비꽃이 피어 있으면 체면이 서질 않는 법이다. 이 주변 땅에서 자란 타비아니 형제라면 당연히 그걸 충분히 알고도 남았을 터, 그래서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양귀비꽃 대신 자신들의 손으로 자유를 지켜내려던 사람들의 빨간 피로 보리밭을 물들인다. - P71
오오, 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파블로를 이해했고, 모차르트를 이해했다. 나는 어딘가 등뒤에서 그의 무서운 웃음소리를 들었다.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 보고,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더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오오, 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파블로를 이해했고, 모차르트를 이해했다. 나는 어딘가 등뒤에서 그의 무서운 웃음소리를 들었다.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 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 보고,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더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 P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