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의 청년이 스무 살 청년에게 - 당신의 꿈을 일깨우는 가슴 뛰는 이야기
김희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제목 참 인상적이다. 여든이라는 나이와 함께 따라오는 청년이라는 말이, 약간은 어색하면서도 어쩐지 순응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조화를 이룬다. 스스로를 여든의 청년이라고 칭하는 건양대의 총장이자, 김안과병원 이사장인 김희수. 그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스스로를 아직 청년이라 부르고, 또 스무 살의 청년들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었을지 생각해본다. 보통의 흔한 자기계발서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자서전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서전같은데 그러기에는 누군가를 향해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만 같고, 그냥 자기계발서라고 보기에는 작가의 삶에 대해 궁금해지는 것이 많다. 사실 저자에 대해서는 잘 아는 편이 아니다. 전혀 모르고 있다가, 책 제목을 보고 누굴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표지를 보고 조금 궁금해지고, 저자에 대한 약간의 소개가 담긴 글을 보고 조금 더 궁금해지고,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더욱 궁금해졌다. 커진 궁금증은 책을 덮어서야 해결이 됐다.

 

 "나는 먼저 권위의 상징인 양복과 구두를 벗었다. 대신 점퍼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장갑을 꼈다. 챙 넓은 모자도 썼다. 그리고 집게를 들고 캠퍼스를 돌았다. 당시만 해도 학교에는 담배꽁초와 각종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이것들을 줍기 시작했다. 소문은 금세 퍼졌다. 웬 노인이 새벽부터 학교에 나와 쓰레기를 줍고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람이 바로 학교 총장이라는 소문은 지역 언론에까지 확산됐다."

 

 저자를 가장 강렬하게 표현하는 부분이었다. 청결함을 강조하려는 생각도 담겨있었겠지만, 저자가 뒤이어 강조하는 청결함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부분에서 다른 것을 더 많이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그가 권위를 내려놓고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실천하는 지성'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자신이 쌓아올린 것이 많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손에 든 것을 내려놓기 어려워진다. 저자도 비켜갈 수 없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의식하지 못하는 마음이 밑바닥은,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권위를 내려놓기로 한다. 남에게 시키거나 모르는 척 외면하지 않고 자신부터 실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혹자는 보여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돈이나 물질적인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함으로써 보여준다는 점이 특별한 것이다.

 

 "물이 가득 차 있는 컵을 떠올려보라. 여기에 물을 부으면 어떻게 되는가. 물이 쏟아져 바닥으로 흘러내릴 것이다. 더 이상 물을 담을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컵을 기울여 물을 쏟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버린 만큼 새 물을 담을 수 있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뭔가를 더 담을 수 없다.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받아들이게 된다. 버리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한다. 꼿꼿이 서 있는 컵은 가득 담긴 물을 버릴 수 없다. 비스듬히 기울여 낮아져야만 물을 쏟아내고 거기에 신선한 물을 담을 수 있다."

 

 이 부분은 다소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런 비슷한 취지의 말을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려놓었던 아이가 떠올랐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그 아이가 떠올랐고, 그 아이가 어떤 의도로 그 말을 적어놓았을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아이가 써놓은 말을 읽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 책에서 그 문구를 다시 만나게 되니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렇게 나의 일상을 재발견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한 것 같다. 그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또 그 일들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책을 통해 환기하고, 떠올리고, 정리하게 된다. 아마 저자와 그 아이는 같은 생각을 하며 이 문구를 적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컵을 비우듯이 자신을 비우자고. 그래야 또 다른 무언가를 담을 공간이 생기게 된다고. 나는 늘 채워진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만큼은 비워진 사람이 되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나는 새로운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젊음과의 융합이다. 80년을 넘게 살아온 나의 노련함과 10대와 20대의 무모한 도전과 추진력을 서로 섞어 넣으려는 것이다. 내가 학생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오늘 비슷한 얘기를 들었는데, 나이 들수록 젊음과의 소통이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되는 것 같다. 아마 어렸을 때는 오래됨과의 소통이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을 것이리라. 그땐 그게 왜 중요한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고 지나가는 때였겠지만. 젊고 나이듦 사이의 소통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세대간의 소통이라고 얘기를 하는 게 더 간단하겠다. 그게 필요하다는 것.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니까. 서로 다름을 극복하자는 취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세대 간의 소통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고보니 누군가 스무 살의 청년이 여든의 청년을 향한 답가를 보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봤다. 스무살에게 수신된 여든의 노련함을 젊음의 무모함과 추진력으로 답하는 재미있는 융합이 있었으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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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테이츠 - 1%를 극복한 사랑
체탄 바갓 지음, 강주헌 옮김 / 북스퀘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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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 '세 얼간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본다. 아마 그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 작가에 대해 들었을때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 책이 믿을만한 보증을 앞세운 기대되는 책이라 생각할 것이고,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을까말까 고민할 것이다. 아마 발리우드 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 것이지만, 인도 영화 특유의 군무와 긴 러닝타임을 조금만 관용한다면 영화 '세 얼간이'와 그리고 그 영화의 작가이자 이 책의 저자인 체탄 바갓의 신작 '투 스테이츠'도 더불어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읽기 전에 인도의 문화와 사회에 대해서 알아둔다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식없이 이 책을 읽었지만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도 알아둔다면 좋겠다. 이 책의 주인공인 크리슈와 아나냐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인도 북부와 남부 출신으로 거대한 장애물인 지역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지역 감정이야 인도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나라인, 우리나라에도 있는 일이라 별다를 것 없지만, 인도의 지역 간 차이는 사고방식이나 사람들의 성품, 음식 취향 등이 조금 다른것이 아니라 피부색과 언어도 다르다는 점이 추가된다. 외국인과의 만남이나 다를 것 없어 보였다. 어쨌든 이 책의 두 주인공은 그런 차이를 이겨내고 개인과 가정 그리고 인도 사회의 화합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한다.

 

 "나는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했다.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니타가 나에게 티슈 하나를 뽑아 건네주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나는 이렇게 물으며 조심스레 소파에 앉았다. "사랑 이야기는 다 똑같잖아요. 당신이 그 여자를 처음 만난 때부터 시작해보세요." 니타가 커튼을 치고 에어컨을 켰다. 나는 얘기를 시작하며 상담료의 본전을 뽑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크리슈가 절망에 빠진 채 정신과로 상담을 하러 간다. 그리고 그는 사랑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를 정신과를 보내게끔 만든 그와, 아나냐와의 사랑이야기를 시작한다.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은 그 다음장부터 계속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이야기를 시작함과 동시에 '사랑 이야기는 다 똑같잖아요.'라고 작가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에게, 은연중에. 맞다. 결국 사랑 이야기는 다 똑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스스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런 말을 건네는데도!- 이 책을 끝까지 단숨에 읽게 만드는 흡인력이 결국 있고야 말았다.

 

 생소한데도, 그 생소함을 모두 뛰어넘을 정도로 주인공들은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인도 유수의 대학을 다니고 있는 지성인이자 자신감있는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크리슈는 크리슈만의 농담과 자신감이 있고, 아나냐는 매우 매력적이고 당찬 여성의 면모를 보인다. 가정폭력을 경험했다던가, 술과 고기가 금지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떠나서 주인공들은 각자 자신에게 자신감이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들이 보여주는 자신감과 가족의 반대라는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는 독자에게 충분히 그들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게끔 만드는 요소가 된다. 독자를 감시자나 판단하는 자의 눈이 아닌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나냐가 내게 타밀어로 말했다. "나안 온나이 칼달리카렌."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두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나는 주변의 젊은이들을 지켜보았다. 부모부터 주정부까지 모두가 그들에게 금지한 것을 좋아하며 과감하게 시도하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랬다, 타밀 나두에서 오후의 디스코 파티가 가능하다면 펀자브 사람이 타밀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규칙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종일관, 이 책은 서로를 굳게 사랑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랑의 힘이 이해와 관용이 어떤 차이와 반목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그 아름다운 동화같은 믿음을, 믿고 싶게끔 만드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보여주는 사랑의 힘이라는 것은 단순히 연인간의 것만이 아니라, 크리슈와 그의 아버지가 잃어버린 신뢰와 사랑을 다시금 쌓아올리게 되는 과정, 그 서투르고 아름다운 회복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감동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두 주인공은 가족의 반대로 서로 헤어지게 될 위기에까지 처하지만 결코 가족을 버리고 둘만을 생각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모두와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다. 아마 그런 면면에는 인도라는 나라의 갈등이 해소되고 진정한 통합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크리슈와 아나냐에게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펀자브 사람과 타밀 사람에게로 확대되고, 인간이 만든 규칙과 편견, 억압에 대한 극복을 이야기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독자는 변치않는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들이 자신 앞에 놓인 차이를 극복했듯이, 독자 역시 한국과 인도의 문화차이라는 차이를 극복하고 이 책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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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북극여행자
최명애 / 작가정신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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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로 더 관심이 있어서인지 혹은 더위가 시작되어서인지, 북쪽 공간에 대한 책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다고 느낀다. 최근들어서도 두세권은 읽은 것 같고, 펭귄에 관한 영화도 곧 3D로 개봉을 앞두고 있다. 펭귄은 남극의 신사였나. 어쨌든. 이 추운 극지방에 대한 관심이 전에 없이 더욱 높아진 것인지 어쩐지 또 하나의 극지방 여행기가 찾아왔다. 책은 한 권 분량이지만, 십 년간의 여행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북극여행자"라는 책도 나의 관심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게 옳겠다. 당연하게도 저자가 여행한 바로 그 추운 지방이 너무나 매력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있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고 장점이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책 구석구석에 그리고 너무나도 빈번히 등장하는 저자의 유머러스함은 이 책에 대한 만족도를 훨씬 높여주었다. 그녀가 여행한 곳들이 지나치게 춥고 딱딱한, -지역적 특색 뿐 아니라 사람들까지도- 느낌을 주는데, 오로지 그녀의 유머러스함이 이 책에 온기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부분에 갈피를 꼽는데, 온통 그녀만의 농담이 드러난 부분에 꼽으려다가 몇 번이나 손을 거두었다. 이 책을 여행서가 아닌 다른 책으로 보게 될 것만 같아서. 그녀는 북극곰이라 불리는 동반자와 여행을 함께 했는데, 그녀는 아마 아주 좋은 여행 파트너였을거라 생각된다. 재미있는 사람은 어디서나 그 가치가 빛나는 법이니까.

 

 "식당 '아 네스투 그뢰섬'에서 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맥주 대신 콜라를 시켰다. 이곳은 칠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채식 식당이었다. 감동한 나는 나중에 꼭 이 집을 벤치마킹해 '채식 북카페'를 만들겠다고 씩씩하게 사업 구상을 설명했다. 북극곰은 걱정 어린 눈으로, 꼭 나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홍대 앞에 채식 식당 겸 카페 겸 헌책방을 냈다가 쫄딱 망했다고 알려주었다."

 

 카페나 그 비슷한 무엇을 판매하는 개인 사업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 중 하나라고 고인이 된 로맨틱코미디의 여왕 노라 애프런이 말했다. 여기에서도 그녀가 등장한다. 카페를 연다는 것, 식당을 연다는 것은 진짜, 이제는 들으면 웃음부터 날 어른의 전형적인 판타지 중 하나로 믿게 될 것 같다. 수많은 책들에서 이런 꿈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런 꿈이 나오지 않는 유일한 책은 아마, 자기계발서 뿐인 것 같다. 농담이다. 어쨌든 여기서도 이런 말을 발견하게 되어 우습고 또 반가운 마음에 꼽은 문장이다.

 

 더불어 조금 아까 전에도 채식"에 관한 문제로 지인과 농담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여러가지 이유로 -아마 체중?- 이제 곧 채식을 해야겠다"고 얘기하기에 인생이 길어봤자 얼마나 길다고 즐거움을 포기하고 살 건가요?"하고 물었더니 그녀는 앞으로 50년쯤은 살지 않겠냐"고 답했다. 그래서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인데 오늘 하루하루를 마지막인것처럼 소중히 살라는 명언을 받들면 그래도 그 하루동안 자신에게 고기를 주지 않고 살건가요?"하고 얘기해주었었다. 물론 채식에 대한 어떤 편견도 없고 그저 내가 고기를 좋아할 뿐이지만, 방금 있었던 일과 약간의 상관이 있는 부분이라 같이 떠올랐다.

 

 "다시 육천만 년이 흐른 뒤에도 이 인류의 모자이크는 그대로 여기, 살아남아 있을까. 나 같은 누군가가 쪼그리고 앉아 빙퇴석 더미를 뒤지며 까마득한 시절의 흔적을 뒤적이게 될까. 그때의 후손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두 팔과 두 눈을 가졌을까. 아니면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눈과 머리만 커다랗게 진화했을까. 시간을 거꾸로 돌려 육천만 년 전의 인류는, 이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지금처럼 눈과 얼음의 땅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한 시대를 머릿속으로 여행하는데 이탈리아 꼬마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은행잎이 선명하게 새겨진 화석이었다."

 

 이 부분, 저자가 육천만을 단위로 인류라고 해얄지, 이 행성이라고 해얄지 모를 것의 과거와 미래를 가늠하고 있는 부분을 읽으면서 - 이미 과거의 축에 선 그녀의 손에 미래의 편에 있는 꼬마가 그들을 관통하고 있는 은행잎 화석을 쥐어주는 장면을 떠올리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극치점을 발견하였다면 과장이고, 묘한 느낌을 받았다. 육천만 년 전의 인류와 지금 인류 사이의 차이만큼이 육천만 년 후에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그 후라는 것이 희망차게도 존재한다면 말이다. 설마 인류가 그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바꾸지는 않겠지 하는 희망을 갖고서, 생각해본다.

 

 "낮도 밤도 아닌 시간대에서, 눈앞에선 빙하와 구름이, 귓전에선 바람 소리 같은 음악이 영원처럼 들렸다. 머리를 기대는데, 북극곰이 어깨를 툭툭 치더니 창밖을 가리켰다. 저 멀리, 까마득한 끝에, 세 개의 점이 보였다. 그것들은 우리의 배와 같은 속도로 천천히 바다를 유영해오고 있었다. 바다사자나 바다 새가 아니다. 저 정도 크기면 고래다. 창에 눈을 갖다 댔더니 검은 지느러미가 우뚝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이 범고래였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세계의 끝에서 내가, 고래를 본 이야기다."

 

 책의 말미에 나오는 부분이고, 저자의 어깨를 툭툭 친 것은 진짜 북극곰이 아니라 그녀의 동반자를 칭하는 말임을 다시 한 번 밝힌다. 이 부분만 읽었을 때 마치 판타지 소설의 한 부분을 옮겨온 것처럼 느낄까봐, 그리고 진짜 북극곰이 어깨를 쳤다면, 아마 이 책은 존재할 수 없었을테니까, 이 책을 읽고 북극에 가면 북극곰이 내 어깨를 쳐주지 않을까, 누군가 기대하지 않도록 밝혀둔다. 북극곰이 어깨를 치는 일이 생긴다면,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또 어느 신의 가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행운이 따른다면 어깨만 없어지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의 표현이 꽤 멋있게 느껴졌다. 저자의 여행에서, 세계의 끝에서 무언가를 남기게 된다면 유영하고 있는 세 마리의 범고래를 본 일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밤하늘에 드리워진 초록빛의 아름다운 오로라를 본 일은 빼놓을 수는 없겠지만. 분명 쉽지 않은 여행이었을텐데, 무겁지 않은 어조로 시종일관 여행담을 풀어놓는 통에, 가볼만한 곳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려, 저긴 여행 초보가 함부로 발을 들이밀 곳이 아니야 하고 다시 자신을 다독이게 만든다. 극지방의 세이렌이 읊어내는 노래같은 책이다. 세이렌에겐 춥겠지만 그만큼 유혹적이다. 즐거운 대리만족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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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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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게 된 것은 얼마되지 않았으나, 이토록 즐겁고 기쁘게 여기게 된 것은 바로 시인 이병률의 시집, '찬란'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인의 이름도, 이 시집의 제목도 들어본 적이 없으나 서가에 꽂혀있는 시집 중 눈에 띄어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의 담겨있던 시들과의 만남은, 오래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찬란'했다. 시 읽기의 즐거움, 마음에 드는 문구를 마주하고 나오는 깊은 들숨과 날숨을 이병률 시인의 시집 '찬란'을 통해서 새삼스럽게도 다시 느끼게 되었다.

 

 시인의 시들을 읽다보면,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표현들이 곳곳에 있어 마치 꺾인 길목을 돌아 나서다 마주오는 어떤 커다란 것과 생각지 못하게 맞대어 선 듯한 느낌이 든다. 시인은 같은 것을 먹고도 다른 존재가 되도록 소화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인지, 삶의 소소한 순간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내는 그만의 힘이 참으로 감탄스럽다. 시인의 표현처럼 "어떻게 신은 한 사람 안에다/한 사람을 들여놓게 만들었는지" (슬픔의 바퀴' 일부) 신이 따로이 영혼을 빚어낸 평범한 사람의 틀 안의 특별한 사람이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생활에게

 

일하러 나가면서 절반의 나를 집에 놔두고 간다

집에 있으면 해악이 없으며

민첩하지 않아도 되니

그것은 다행한 일

 

나는 집에 있으면서 절반의 나를 내보낸다

밭에 내보내기도 하고 비행기를 태우기도 하고

먼 데로 장가를 보내기도 한다

 

반죽만큼 절반을 뚝 떼어내 살다 보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도 없으며

 

그리하여 더군다나 아무것도 아니라면 좀 살 만하지 않을까

 

그중에서도 살아갈 힘을 구하는 것은

당신도 아니고 누구도 아니며

바람도 아니고 불안도 아닌

그저 애를 쓰는 것뿐이어서

단지 그뿐이어서 무릎 삭는 줄도 모르는 건 아닌가

 

이러니 정작 내가 사는 일은 쥐나 쫓는 일이 아닌가 한다

절반으로 나눠 살기 어려울 때는

내가 하나가 아니라 차라리 둘이어서

 

하나를 구석지로 몰고 몰아

잔인하게 붙잡을 수도 있을 터이니 "

 

 자신을 반으로 나눠 안전한 집에 두고 반을 챙겨 밖으로 나서는 시인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일하기가 힘들 때면 나와 같은 사람이 하나쯤 더 있어서 그 애에게는 일을 시키고, 나는 좀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그와 조금은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시인은 그런 나태함보다는 좀 더 다른, 자기 위안과 휴식의 느낌으로 자신을 하나 더 두기 보다는 나를 반으로 떼어내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나눠 살기 어려울 때 차라리 둘이었으면 했지만, 나는 이 시를 읽고서야 둘을 떠올리지 않고 나를 나누는 법을 배웠다.

 

 " 모독

 

내가 당신을 먹는 풍습에 관하여

할 말이 있다면 당신은 해보라

 

내가 끔벅끔벅하는 것은

감정을 연장하자는 것도 아니고

소리를 치지 못해서도 아니다

 

암굴로 데려와 맨발로 당신을 먹는 것은

극지에 모아둔 당신을 일으켜 살기를 채우는 것

 

깜깜한 당신의 시간을 갈아엎는 것은

환멸의 뼈를 발라 거는 것

 

먹으면 죽어서 달의 빛이 되고

당신의 비명으로 출처가 남겠지만

 

당신을 낡아가야 하리라

너무 많은 절박조차도 마르게 했으므로

 

그러나 끝도 없이 고단했던 당신의 몸

 

당신을 피할 수는 없었으리라

존재하느라 몸을 떨어 감정을 파먹었던 당신을

 

당신이 숱하게 피를 먹던 기록을 지우는 것이니

내가 이리도 한사코 먹겠다는 것은 나란히 소멸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찢기면서도 그리 알라 "

 

 이 시를 읽으면서 말 그대로의 의미로 시를 생각했다. 얼마 전에 읽었던 법의학자의 책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먹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인 남자에 대한 내용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 분야의 전문가?인 사가와 잇세이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나왔기 때문에 먹고 싶다'는 욕구가 어쩌면 그렇게 소수의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대상에 대한 소유의 욕구를 발현하는 또 하나의 통로로 먹고 싶다는 느낌을 꼽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도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가해한 일이겠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가볍게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깨물어주고 싶다'는 표현 역시 그런 욕구를 어느 정도 포함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에서, 당신을 먹는 풍습'이라 하는 것이 문자 그대로의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그대로의 의미로 생각해도 공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생각외의 부분은 대상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소유욕으로 인한 것이리라 생각했는데, 이 시에서는 나란한 소멸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 왼쪽으로 가면 화평합니다

 

왼쪽으로 가면 마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바다입니다

마을을 가려면 삼 일이 걸리고 바다로 가려면 이틀이 걸립니다

삼 일은 내 자신이고 이틀은 당신입니다

 

혼자 밥을 먹다 행을 줄이기로 합니다

찬바람에 토하듯

나무가 잎을 떨구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스친 것으로 무슨 인연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날아오른다고 하여

이 과도한 행을 벗어나거나 피할 수 있을 것인지

 

물가에 내놓은 나는 날마다 물가에 가 닿지 못하고

풍만한 먼지 타래만 가구 옆에 쌓아갑니다

 

춤을 추겠다고 감히 인생을 밟은 것도 아닌데

왜 나는 날마다 치명적 오류 속에 있습니까

 

참으로 나는 왼쪽으로 멀리 가다가도

막을 수 없어서 바다로 갑니다 "

 

 나에게로 가면 화평할 것을 당신에게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어 날마다 치명적 오류 속에 바다로 향하고 있다는 시를 읽으며 삶과,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떠올렸다. 삶은 언제나 두갈래 길의 선택의 중간에 서는 것이며, 그 갈래길에서 나는 자신이 아니라 삶이 이끄는 힘에 의해 운명과 같은 길을 선택하여 걷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자신의 삶을 달라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리고, 나에게로 향하다 결국 타인에게로 발걸음을 돌리게 되는 것처럼, 삶은 타인에게 타인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다가서는 멀리 떨어진 섬이 가깝도록 소통하는 일의 반복이 된다. 하지만 타인의 곁에 다가가도 그와 완전히 닿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존재를 그 옆에 켜켜이 쌓고 또 쌓을 뿐이다. 시인은 왼쪽으로 가면 화평하다고 말하면서도 왼쪽으로 가지 않는다. 가지 못하는 것처럼. 삶 자체가 어떤 것인지 이 시를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시를 읽으며 느낀 것들, 생각한 것들을 온전히 담아낼 재주가 없다. 담아내놓을 만큼의 것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표현할 길이 없는 이 느낌을 그러안고 시인의 다른 시를 언젠가 다시 만나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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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1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1
은지성 지음 / 황소북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의 다른 책 '훔쳐라'라는 책을 읽었다. 최근의 일이다. 보고 배우라는 말 대신 자신의 것으로 훔치라는 표현이 강렬했던 책이다. 그런데 이번 책은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태도를 보인다. 메시지가 강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극적인 느낌은 덜하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제목은 훔쳐라"처럼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도록 떠올릴 수록 깊이있게 다가온다. 삶의 주체가 무엇이 되느냐를 묻는 질문 같기도 하다. 자신의 의지를 중심으로 둘 것인지, 내 앞에 놓여지는 순간에 얽매여 휩쓸리듯 살아갈 것인지 느슨해진 삶의 고삐를 조이기 위한 죽비같은 문구다.

 

 "선물을 받는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인생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다. 갓난아이를 안은 부모들이 "이 아기는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은 부모님과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있어 소중한 선물이라는 점을 잊지 마라."

 

 아이는 보물이다, 선물이다"라는 말을 인상깊게 본 적이 있다. 지금은 어떤 풍조인지 모르겠는데, 어른들이 태어난 아이를 칭찬할때나 덕담으로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도 같다. 그 말을 두고 아이 자체가 부모나 주위 어른들에게 귀중한 존재라는 의미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읽어보니, 그 선물이라는 의미는 어른 뿐 아니라 아이 자신에게도 인생이라는 선물을 받고 태어났다는 의미가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에는 이렇듯 자신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라는 메세지와 자신의 삶에 있어 행복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조언을 담고 있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이 책은 여러 인물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영화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소개된 인물 오드리 헵번은 원래 영화를 찍은 배우였으니 그녀의 영화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라 비앙 로즈'의 에디트 피아프, '코치 카터'의 켄 카터, 록키 아오키의 딸로 영화배우인 데본 아오키에 대한 언급도 있고, '행복을 찾아서'의 크리스 가드너,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 월트 디즈니 등이 소개되어 있다. 인물들과 관련된 영화를 함께 찾아서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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