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내가 원한 것
서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다가 잠깐 멈추고 책 날개를 들추었다. 작가에 대해 적힌 소개는 몇 줄 뿐이라 1부를 읽으며 이 사람, 뭐지? 왜 귀엽지? 생각한다. 작가에게 여름은 사랑과 동의어인 것일까. 어떻게 이토록 사랑에 진심일까. 멀거니 타인의 입에 들어갔다 천천히 녹아내리는 사탕을 지켜보는 기분이 든다. 사람이, 연애가, 사랑도 너무 좋아서 어디에든지 걔가 어제, 우리 오늘, 나 내일 하고 적어 올리고 싶어하는 친구 같기도 하다. 달겠지, 싶으면서 누군가의 내밀한 것을 어쩔 수 없이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민망함도 있다. 

 오차즈케(69)에 대한 얘기는 제목도 눈에 들어왔지만, 그 내용이 생리적인 거부감을 들게 한다. 찌개 냄비에 숟가락을 담구기를 어색해하지 않던 시절을 보내왔으면서, 아직도 팥빙수는 앞접시 없이 공용으로 퍼먹으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와 한 음식을 공유하는 일이 불편해졌다. 먹다 남긴 오차즈케를 맛보면서 상대의 '엄마나 자식(70)'이라도 된 것 같아 좋았다는 말에, 이 대책없는 사랑 중독자에게 머리를 내저으며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감을 헤아린다. 이제 더이상 그렇게 할 수 없고,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얼마 전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를 읽을 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재능이 필요하다는 문구를 봤다. 이 산문집의 내용이 대부분 작가의 삶 안에서 자라나온 것이 맞다면 그 재능이 얼마나 넘치게 가득한 사람인 것일까. 애정이 가는 상대의 싸이월드 " 아이디를 뭘로 해놓았는지, 미니홈피 색깔은 어떻게 설정해놓았는지, 배경음악은 어떤 건지 그런 것을 아는 게 내 인생에는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91" 말하는 절박함이 신기하고 재밌어 보였다. 1부에서 이렇게 큰 자극을 느끼고 나니 2부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쉽다. 과일이나 음악, 여름에 떠오르는 것들에 대한 단상은 연인들에 비해서는 덜 뜨겁다. 

 " 친구들은 내 집에서 신기하게 움직인다. 내가 이 공간을 쓰지 않는 방식으로 쓴다. 233"는 문장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2부에서 다소 식은 긴장감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타인이 내 공간 안에 있을 때 느끼던 불편함에는 바로 이런 낯섦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섬세함이 예리함으로도 바뀌는구나, 감탄했다. " 나보다 몇 살 많은 사람을 두고, "걔 잘 지낸대? 정헌이 착했는데" 하고 말하는 것은 어린 시절에 만나봤던 사람들끼리만 가능한 특별 대우다. 241" 같은 말버릇도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게 될만큼 놀랐다가,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게 여기도 적용이 되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멋대로 거리를 재가는 동안 금새 마지막 장이 되고만다. 여름 저녁 차가운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잡은 책은 순식간에 다 읽게 된다. 

 비슷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언급되고 있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헤어질 결심],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하이퍼나이프], [행인] 같은 것들이 하나씩 겹쳐질 때마다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다른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작가가 꽤나 공들여 소개한 [워터 릴리스]를 보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모르고 지나친 영화 안에 이렇게 얄궂은 관계(52)가 있다고. 그런데 왜 나는 몰랐었지, 아쉬웠는데 다행이다, 웨이브에 있었다. 같은 것을 공유한 목록이 한 줄 더 채워지고, 그럼 책을 읽을 때보다 83분 정도 더 겹쳐지는 부분이 하나 생겨날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과정, 나를 대신해 여름을 하루 더 좋아해 줄 사람을 알아가는 감각을 주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나의 눈
토마 슐레세 지음, 위효정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나의 눈'은 실명의 위협이라는 불안을 품은 동시에 삶과 예술이라는 아름다운 색으로 채워진 깊은 애정과 신뢰가 담겨 있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아무 전조도 없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나의 눈은 63분간 기능을 멈춘다. "엄마, 온통 까매요! (11)" 10월의 일요일, '그냥 그렇게' 열 살 소녀의 눈이 잠시간 멀었다. 원인도 해결 방안도 알 수 없이 언제 또 같은 문제가 얼마나 길게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모나의 부모님은 모나가 가장 믿고 따르는 할아버지 앙리에게-모나는 하비라고 부르는- 매주 수요일마다 아동정신의학과를 함께 통원해주길 부탁한다. 사랑하는 손녀를 위해 앙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앙리와 모나 둘만의 비밀스럽고 특별한 상담치료가 시작된다.  

 " 할아버지는 계획을 세웠다. ...... 일주일에 한 번, 한결같이, 그는 모나의 손을 잡고 미술관으로 가 작품 하나를, 단 하나의 작품만을 바라보게 할 것이다. 처음에는 색과 선이 펼쳐내는 무한한 진미가 손녀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도록 말없이 오래 바라보리라. 그런 뒤에는 시각적 희열의 단계를 지나 예술가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삶에 대해 말해주는지, 예술가들이 얼마나 삶을 빛나게 해주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말로 풀어내리라. 31" 

 이들이 일주일에 하루, 딱 한 점씩 살펴보기로 한 예술 작품들을 독자는 책의 뒷편에서 사진으로 함께 만나볼 수 있다. 각 단락에서 작품의 이름을 확인하고 나면 그들처럼 똑같이 책의 뒷부분으로 넘어가 가능한 오래도록 면밀하고 주의깊게 작품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고 머리속으로 여유가 된다면 종이에 떠오르는 감상, 의문, 사소한 어떤 것들이라도 간단히 적어본 뒤에 다시 그 둘의 대화로 돌아와 조용히 들어보자. 내 감상과 같거나 다른 점, 더 확대된 서사나 비어있는 의문들을 따로 채워가며 읽어나간다면 사진으로 대신하는 작품 감상의 아쉬움같은 것은 털어내고 책의 두께만큼이나 충실한 감상이 될 것이다.  

 예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독자가 이 두툼한 두께의 책을 앞에 두고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큼, 앙리는 모나-와 독자-를 위해 충분히 쉽게 시대와 문화를 통한 작품의 배경과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다. 어린아이 대하듯 생략하거나 꾸미지 않았는데 책에서는 이를 앙리가 '모나를 존중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이는 더 폭넓은 층의 독자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장치로 다가온다. 열 살 아이를 대상으로 한 내용이라고 무시할 수 없이, 때로 모나가 이해하고 감상한 것보다 더 얕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절감하며 읽게 되는데 " 흔한 생각과는 달리 예술의 깊이를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건 냉큼 찾아드는 열락이 아니라 지루한 연습이라는 것을. 39" 독자도 함께 깨우친다. 

 모나와 앙리가 일주일에 한 번 하나의 그림을 살펴보는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모나는 열 한 살이 되고, 친구 릴리와의 이별을 경험하기도 하고, 신경 쓰이지만 마음도 쓰이게 하는 남학생을 의식하기도 하고, 오르셰의 학예사 엘렌과 새로운 만남을 갖기도 하고, 경영난에 빠져 알콜에 의존하는 아빠를 살피기도 하고, 최면 치료를 통해 내면에 도사린 줄 하나(401)를 파헤치기도 하며 천천히 성장해나간다. "계속 나아가야 한다. 모든 것이 덧없다는 생각에 덴 가슴을 진정시키고 모나는 수긍했다. 그래, 계속 나아가야 하는 거였다. 247" 어린 아이의 유년 시절이 하나둘 천진함을 벗어가는 과정이 조금은 슬픈 색채를 띄며 성숙해질 때마다 쌉쌀하고 아린 느낌을 받았다. 

 마침내 52번의 감상이 끝나고 난 뒤, 책을 덮으며 묘한 감상에 사로잡힌다. "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모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자기가 들은 것에서 스스로 메시지를 끌어낸 뒤 할아버지에게 그걸 따르라고 권했다. 앙리는 지금 눈앞에서 놀라운 변혁이 이뤄지고 있음을 인지했다. 그는 현기증에 사로잡혔다. 470" 앙리가 느꼈을 그 현기증에 가까운 감각, 모나의 성장 뿐 아니라 책을 읽는 잠깐의 시간동안 마치 52주의 시간을 순식간에 겪어낸 듯한 어지러움을 공유한다. 처음엔 시련을 이겨내며 예술의 아름다움과 함께 성숙해가는 소녀의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한 번 더 비틀어 새로운 세상으로 발돋움하는 고통스럽지만 빛나는 성장과정을 세심하게 담아낸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모나의 눈'이 어른들에게는 물론, 예민한 감수성으로 이제 막 세상에 눈을 뜨는 시기의 아동청소년들에게도 인상깊은 책이 되어주리라 믿으며 추천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5
박지영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죄다 쓰레기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결국엔 쓰레기로 판명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나도.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런 것은 다 맥거핀에 불과하다고, 그때의 복미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40" 

 솔직하자면,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를 보자마자 읽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보고 웃고 싶었다. 덕질하던 최애의 병크에 현타를 맞고 방황하던 그녀가 결국 스스로 덕질의 대상이 되고자한다는 내용이, 직접 자신의 팬클럽을 만들고 팬이 복미영에게 입덕하는게 아니라 복미영이 팬을 선택해 가입시키는 전례없는 헤드헌팅 방식으로 운영하는 내용이 척 봐도 웃겼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복미영을 '그래도 되는 사람(165)'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며 공감도 하고, 알량한 훈수도 좀 두고, 못내 응원해보고 싶었다. 덕질만 하기엔 너무나 두툼한 두께를 보고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 안에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 1이 아닌 2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을. 

 " 김지은에게는 아무 관계없는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거나 일방적인 애정을 쏟는 재능이 부족했다. 그런 건 확실히 재능이었다. 52" 

 복미영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처음, 나는 가볍게 낄낄 댔고 무방비하게 허를 찔렸다. 사실 나는 한번도 누군가의 팬이었던 적이 없다. 적당히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척 했지만 한번도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응원해본 적이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적당히 가장 인기많은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사실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열정이 부족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것도 맞고. 음원이 잘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컴백하면 좋고 해체하면 안됐고 흐지부지했다. 늘 모든걸 적당히만 좋아하게 되는데, 열정과 애정을 위장하려 해봐도 남들처럼은 잘 안됐다. 그런 나와 비슷한 지은의 등장에 놀랐다. 이것도 재능이라고 볼 수 있는 영역이구나.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감정이 부족한 것보다는 재능이 없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이 마음 편해짐의 다른 방식으로 미영씨는 침을 뱉었던 것일까. 미영씨의 침뱉기가 볼 때마다 당황스러웠는데,-아마 미영씨와 연인도 친구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은조의 손을 놓은 뒤로 미영씨의 관계맺기가 일그러진 형태, 상처의 모양이라 생각하니, 아니 그래도 이건 안된다. '재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미영씨의 침뱉기는 넘어설 수 없는 극복이 되질 않는 입덕할 수 없는 사유였다. 차라리 미영씨가 그냥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더라면 이 요상한 팬클럽 흥망사를 더 가볍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 미영씨를 아낄 수는 없었어도 지은을 바라보며 점점 가까워졌다. 은수이모를 버리려는 지은의 결심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그럴 수 있다'고 마음 속에서 은연 중 동조하는 자신을 깨닫고, 사실 난 재능이 없는게 아니라 감정이 부족한 것이 맞나보다고 생각했다. 

 " 그렇게 불온하고 위험한 마음은 우리를 미친년으로 만들고야 말 거였다. 복미영은 미치고 싶지 않았다. 195" 

 베로니카와 은수이모가 만나고 가까워지는 동안 베로니카가 있는 순례 씨의 국수집까지 운전을 해서 은수이모를 데려다주었던 미영씨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침을 뱉어도 피할 수 없던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누군가를 떠넘기려는/버리려는 것이었을까. 책임지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버리기 위해, '돌봄'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아냈던 이모를 돌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지은의 두려움과 같았을까. 미영씨와 지은, 은수이모와 베로니카의 관계를 통해 지난 '2013년 40년 동거한 여고동창의 비극적 죽음[SBS 2013.10.31]'을 다룬 기사의 내용을 책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미영씨의 삶에 지은이 끼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누구의 이야기도 누가 주인공인 것도 아니라 누구나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저 각자의 삶에서 순간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얽혀있었다.  

 단순한 팬질 분투기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w의 병크와 미영씨의 탈덕은 하나의 사건일 뿐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 안에는 더 큰 흐름이 있었다. 뜬구름 같은 미영씨의 말에 귀 기울이다보니 어느새 입안에 쓴 침이 고여 자꾸만 침을 뱉고 싶어진다.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와 함께 도착한 굿즈들의 의미를 그제서야 다시 본다. 쏠쏠히 마련된 팬클럽을 위한 역조공은 관념적 버리기 아티스트였던 복미영씨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녀가 버렸던 것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처지에, 깜냥에, 네, 안, 못. 미영씨는 병크 터뜨린 최애가 아니라 이렇게 삶에서 하나씩 모나게 튀어나와 마음을 찌르던 것들을 하나씩 버리고 고치며 '그래도 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 다른 사람에게 우습게 보인다는 건 뭔가 다정하고 귀여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스워지고 싶다. 더 우스워지고 싶다. 뜬금없이 그런 마음도 들었다. 97" 미영씨의 팬이 될 수는 없었지만, 잠시나마 그 우스움에 기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4
도리 힐레스타드 버틀러 지음, 이도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익명] 사람들이 평소엔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온라인에서는 거리낌없이 한다고 느낀 적 있지? 맞다, 사실이다. 예를 들어, 나라면 절대로 릴리한테 가서 "와, 너 정말 뚱뚱했더라."하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인터넷은 참 별난 세상이다. 어느 누구도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껄끄러운 상대가 있다고 한들 직접 만날 필요도 없다. 98" 

 학교는 작은 계급 사회다. 교실마다 '무리'가 있고 그 무리들은 각각의 특징에 따라 계급이 나뉜다. '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두 명의 존재감 없는 학생에게서 시작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두 명의 학생 제이비와 아무르가 만든 사이트에서 시작됐다. 그들이 만든 <트루먼의 진실>은 트루먼 스쿨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익명으로 접속해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사이트다. 그 안에서는 인기가 있건 없건 누구라도 자유롭게 학교에 대한 비판을 하거나 자신의 창작물을 올리고 서로 고민과 의견을 나눌 것이라 생각했지만, <트루먼의 진실>을 달군 것은 '익명'의 누군가가 올린 폭로였다. 

 '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은 잘 읽힌다. 책에 붙은 놀라운 기록들이 이해가 가는 재미다. 일단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느껴지고 읽기 쉽게 다가간다는 것이 청소년 도서가 가져야 할 기본 소양이니까. 꽤 오래 전에 나왔음에도 지금 읽어도 어색하거나 시기가 지났다고 여겨지지 않는 점도 좋다. <트루먼의 진실>이라는 사이트는 에타나 조금 더 넓게는 블라인드 같지 않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제이비와 아무르가 생각해 낸 이 익명의 사이트는 누구나 빼들어 아무데나 혹은 아무나 찌를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내기로 한 것이나 다름없이 여겨졌다. 서로 가진 정보를 나누고, 소소한 교류를 위해서 만들어진 사이트들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면 <트루먼의 진실>이 없이도 '익명성' 뒤에 숨은 사람들이, 심지어 성인들마저도 얼마나 추해지는지 안다. 

 책을 읽으면서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에 대해서 경각심을 갖게 되는 한 편,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인물들이 나올 때마다 어딘가 더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트레버가 고작 인터넷에서 악플이 조금 달렸다고 난리가 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35)고 할 때, 정말 최악의 사건(75)에 대해 말할 때 순간 릴리를 향해 가해지는 폭로나 악플의 고통을 자신도 모르게 '무엇이 더 고통스럽나' 비교하게 됐다. 뭐가 더 낫고 나쁘고를 따져서 누구의 괴로움은 이 정도고, 누구는 참아도 되고, 누구는 괜찮고 평가하려고 했던 것일까. 릴리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릴리가 저질렀던 잘못들을 비교해보면서 지금 이렇게 고통스러운 건 네가 잘못했었기 때문이라고 탓하고 책임 지우려는 마음이 생겼다. 눈에는 눈으로 반드시 갚아야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닌데. 

 내 생각이 복잡해지니 책을 읽고 난 뒤에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감상을 정리하게 될지 궁금해져서 미래인 출판사 도서 소개에서 본 <독후활동지>가 떠올랐다. 온라인 서점에 등록해두었다고 해서 찾아보았는데 다양하게 책 내용을 되짚어 보고 핵심 주제를 토론하며 정리해 볼 수 있는 질문들이 기대보다 알차게 들어있어 좋았다. '릴리가 혼자 있는 동안 어떤 마음이었을 것' 같냐는 질문을 보니, 책을 읽으면서 문득 영화 [올드보이]를 떠올렸던 것이 생각났다. 주인공 오대수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으로 원한을 사 15년 동안 감금되어 군만두만 먹으며 지낸다. 그는 그 안에서 대체 누가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을 가두었을까 자신의 지난 악행을 되짚어가며 적기 시작한다. 릴리도 혼자 있는 동안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되짚어보지 않았을까. 이 밖에도 좋은 질문이 많으니 <독후활동지>도 함께 활용한다면 도움이 되겠다.   

 " [제이비] 내 말은, 릴리처럼 남자라면 어쩔 줄 모르는 애가 어떻게 레즈비언이냐는 거다. 106
 [브리아나] 릴리가 남자 친구 도둑이란 걸 다들 모르지는 않겠지? 40"
앞서서 '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의 장점 중 하나로 재미를 꼽았는데, 이런 막말을 거리낌없이 하는 인물들이 나오고, 관계에서 배제되지 않으려는 치열한 다툼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자극적인 면이 흥미를 더한다. 
 " "너는 이 글이 남들에게 알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정말 깊게 생각해 봤니?"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어요."
 "그렇다면 그걸 지워야지. 네가 그 일을 계속할 거라면, 엄마는 모든 글과 그림, 사진, 투표, 그리고 댓글까지 뭐 하나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모두 지우라고 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게 거의 없을걸요."
 "그러면 사이트 전체를 폐쇄해야지." 166"
분명 읽고 난 뒤에는 이렇게 교훈을 남기는 책이긴 하지만, 재미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이미 고전이 된 하이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실패하지 않을 탄탄한 이야기와 클래식한 소재들이 잘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이 왜 아직 영화로 안 만들어졌을까 궁금할 정도다. 

 재미와 의미를 모두 잡은 책이니 여름방학을 맞아 책을 한 권 읽어야 한다면 '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으로 시작해도 좋겠다. 이 책을 재밌게 다 읽었다면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니, 힘내서 책과 함께 여름을 보내는 청소년들이 더 많아지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해 왔다 교양 100그램 8
권정민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8월 1일 책에서도 언급된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 사건 가담자 중 한명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오열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법원 기물을 파손시키며 건물 안에서 난동을 부릴 때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맹목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들었을까. 계엄을 옹호하는 극우와 그들을 따르는 이들, 심지어 공개된 판사의 이름을 부르며 위협을 가하려 협박하고 건물에 방화를 시도하려는 행동력을 가진 이 젊은 세대에게는 어떤 시작이 있었을까. 창비에서 나오는 교양 100그램 시리즈를 늘 반기지만, 특히 이번 책은 더더욱 반가웠다. '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해 왔다'는 제목을 보았을 때 책이 이 질문과 현상에 대한 답이 되어줄 것 같았다. 

 아이를 대상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아주 넓은 범위로 확대된 대상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내용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저자의 경우 어린시절부터 교육과 대화에 많은 노력을 들인 덕분인지 아이가 어떤 의견이 생기면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고 열린 자세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덕분에 저자는 아이가 지금 어떤 주장에 영향을 받아 어떤 상황에 있는지 바로 확인하고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아마 자신들이 하는 말, 물든 혐오가 사실은 떳떳하지 않다는 것을 은연 중 감지하고 보호자의 앞에선 티를 내지 않을 경우가 더 많다. 자신들이 보는 자극적인 말과 행동들이 나오는 쇼츠나 유튜브 채널을 보호자에게 공개하게 된다면, 거기서 얻게 된 혐오와 차별적인 자신의 말과 생각, 별 생각없이 그저 재미로 하는 정치인과 지역, 성별 등에 대한 비하와 욕설을 공공연한 장소에서 자신의 신상을 숨기지 않고 공표해야 한다면 이에 당당할 수 있을까? 사고가 굳어 신념이 되고 뿌리깊은 확고함이 생긴 어른의 경우라면 몰라도 아이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상에 노출되고 자신도 모르게 물들더라도 질문이나 직접적인 태도로 표내지 않고 은연중에 드러내거나 실수로 티내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보호자가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이런 변화를 알아봐야 할 것이다. 

 " "내가 힘들다고 해서 남을 미워하면 안 돼. 그건 어리석은 짓이야. 남을 미워한다고 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든." 내가 힘들면 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어렵고 고된 길이지요. 남을 미워함으로써 나의 문제를 가리려는 손쉬운 태도가 생겨나는 이유입니다. 이는 곧 혐오가 자라나는 토양이 됩니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는 문제가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론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아니라는 점을, 부모만이 알려줄 수 있는 공존의 가치관을 담백하게 들려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61"
 '여성가족부 폐지가 왜 남자인 너에게도 손해인지.(7)'를 설명하는 데에 손익으로 사회 구조를 헤아려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점도 안타까웠다. 누군가의 곤궁함이 그의 삶을 존중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함께 책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빈곤층을 줄이고 안전망을 두텁게 하는 것이 사회 비용에 도움이 된다는 셈으로 더 간단히 이해된다는 현실이 아쉽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지, 보다 너도 손해야, 라고 해야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성인들 중에서도 쉽게 혐오와 차별을 말하는 사람들은 '나도 힘든데' 같은 말이나 '내가 낸 세금으로'라는 말을 잘 사용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동급식카드로 비싼 음식을 사먹는 것을 보았다며 세금 낭비라는 민원을 넣은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타인을 끌어내려 나보다 낮은 자리에 두어야 만족하거나, 계급을 나눠 그 수준에 맞게 행동하고 소비해야만 한다는 틀에 묶어두려 하는 것이다. 제도와 복지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나의 손해를 야기하는 일도 아니고, 그 혜택으로 인해 누군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나를 위협하는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셈을 한다. 그런 세상에 아이들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건강한 대화법 7계명 중 다섯번 째 ''나도 모른다'고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였다. 자신들의 논리로 꽉 차있는 강력한 주장 앞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말을 하지 않았었다. 다툼을 피하고 싶기도 했고, 그들이 두른 주장이 단단하고 믿음이 두터워서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고 시간만 소모할 것 같았다. 혹여나 내 답이 빈약하면 그 꼬투리를 잡아 한겹 더 두터운 주장을 내세우겠지 싶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단톡방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넓은 범위에서도 과시와 함께 혐오는 쉽게 표현되면서 그에 반하는 발언은 무시되거나 공격당하는 현상을 공감할 수 있었다. 익명에 기댄 인터넷 공간 안에서 얼마나 쉽게 여성과 장애인, 성소수자 등을 빗댄 욕설을 하는지. 그 비하와 욕설의 쓰임이 얼마나 마땅하고, 재미있고, 인정받는 행위로 여겨지던가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면 반발과 비난에 맞설 용기와 주장이 필요할 정도다. 진지하고 신중한 태도가 오히려 답답하고 분위기 파악 못하는 벌레로 불리며 비아냥 받는 문화에서 '말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른도 그러한데 또래와 다름이 사회생활의 종료 선고나 다름없을 아이들에게는 더 어려우리라 여겨진다. 그러니 더더욱 성인들의 말과 행동도 달라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인스타에서 기다리던 '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해 왔다' 출간 소식을 듣고 반가워서 달려가 댓글을 남겼다. 저자의 글을 SNS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그때도 관심있게 봤었는데 창비에서 관심있게 보고 있던 교양 100그램 시리즈로 출간된다는 소식이 기뻤었다. 인스타 알고리즘 때문인지 그 뒤로 다시 그 게시물이 피드에 떴는데 다른 게시물들에 비해 댓글이 유난히 많길래 들어가보니 차마 두고보기 어려운 댓글들이 그새 여럿 달려있었다. 주로 책과 관련된 내용이 올라오다보니 외면하기 쉬웠는데, 세상에는 분명 저런 의견을 저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의 세계에서 굳이 자신의 어린 아들을 '구출'해왔다는 저자를 쫓아온 사람들은 다시 자신들의 옆으로 누구라도 끌어가려는 듯이 날선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실 삶을 살아보면 살아볼수록 안다. 선함이 얼마나 놀라운지, 옳은 행동을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 거칠고 나쁜 말과 행동을 하고, 나하나 쯤이야 하는 약고 비겁한 행동은 또 얼마나 쉽고 남들도 다 하던데 하고 핑계대기도 좋은지. 이 모든 것들을 감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낸 저자와 창비의 교양 100그램에 다시 한 번 반가움과 감사를 표하며 책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