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
브라이언 애터버리 지음, 신솔잎 옮김 / 푸른숲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독자가 원한다면 유토피아는 SF, 판타지 심지어 디스토피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명시적으로는 유토피아가 아니지만 기존의 사회와는 다르고 교훈이 되는 모델이자 상호 작용의 도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를 이루는 진정한 조건은 독서라는 행위와 그에 따른 독자의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찾고 있는 유토피아는 바로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283"


 판타지 작품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 더불어 장르에 대한 조예를 겸하고 있는 독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 될 책이다. 물론 그렇기에는 조금 부족한 바탕을 가지고 있는 독자에게는 아예 낯선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판타지 작품보다 어렵게 다가올 것이다. '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는 판타지라는 장르를 다각도로 분석하는 책이다. 서문을 제외한 총 아홉가지 주제로 판타지 안에서 기능하는 메타포와 구조, 또 외부로 작용하는 영향력을 분석한다.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면 그 분석이 자세하고 다채로울수록 아쉬워질 때가 있는데, 책에서 예를 들며 설명하는 작품들의 태반을 모르고 있을 때이다. 책에 나오는 짧은 설명으로는 감을 잡기 어렵기도 하고, 어떤 내용인지 재밌을 것 같아 궁금해져 읽다가 아쉬워지는 지점들이 많았다. 이 책이 출판사에서 출간한 판타지 문고 기획물의 특별판이나 끝맺음으로 등장했어야 더 좋았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판타지 기획으로 쭉 낯선 작품들을 따라 읽어왔는데 사실 이 책의 이해와 재미를 위한 발판이었다,는 것이었다면 더욱 흥미로웠겠다. 

 초반보다 후반으로 갈 수록 더 익숙한 작품들을 마주칠 수 있는데 '환상 동화'가 판타지 작품의 계보 앞에 서면서 '잭과 콩나무', '백조 왕자', '푸른 수염', '용감한 꼬마 재봉사' 나 많은 공주들이 등장한다. 내용은 살짝 아동문학에 담긴 시대적 배경 같은 흐름으로 이어지지만 확실히 이해가 쉽다. 읽으면서 한국형 판타지로는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홍길동전'이나 '심청전'같은 작품도 판타지가 아닐까 싶다. 주인공의 고난과 모험이나 현실과 닿은 다른 "더 나은 세계가 있다는 생각(241 유토피아 문학)"도 그 안에 존재하고 있고. 이들보다 좀 더 세련된 작품으로는 '연이와 버들 도령'이 떠오르는데, 이 작품 기억하는 사람 있으려나 모르겠다. 

 인상적인 정의 중 하나였던 '두려움은 스토리의 원동력이다(376)' 부분은 여러 작품들 안에 존재하는 갈등과 충돌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야기에는 항상 갈등이 존재한다.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의 충돌이 있고 주인공이 현실에서 성장해나가며 겪는 충돌이 있다. 주인공은 마치 알을 깨고 나오려는 것처럼 세상 밖으로 나가려 한다. 이 투쟁(데미안), 성벽 너머 세상에서 자신만의 황금별을 찾기 위한 여정을 꿈꾸는 자들(뮤지컬 모차르트), 위험한 섬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사람들과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려는 첫 도전(영화 모아나)에서 모든 모험이 시작됨을 떠올리게한다. 

 더불어 이 모험을 통해 " 우리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그에 대한 공포에 압도되거나 지배당하지 않는 법을, 다만 두려움에 이름과 얼굴을 부여하고 우리 삶의 한 공간을 내어주는 법을 배운다. 411"고 판타지가 우리 삶에 어떻게 그 영향을 미치는지 말해주며 끝을 맺는다. 처음엔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온 책이지만 읽다보면 나름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재미를 추구하던 '문학의 미토콘드리아(230)'가 정치, 성, 사회, 역사를 두루 거쳐 판타지를 바라보도록 해준다. 흥미로운 책이었다.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공을 걸고 도전해봐도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아이 이야기 암실문고
김안나 지음, 최윤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나는 뿌리가 있어요. 나한텐 분명한 뿌리가 있다고요. 이렇게 말한 뒤 나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자마자 사람들은 나만보면 뿌리가 없냐는 노래를 해대기 시작했어요. 인생이 좀 꼬였다고 해서 딱히 다른 뭔가를 시도해 볼 수도 없는 애한테 뿌리를 잊고 사는 거냐는 말을 해댔다고요. 그사람들이 말하는 '뿌리 없음'이란 시장의 야채상이 나에게 건네는 곤니치와라는 말하고 같은 거예요. 나에 대한 인종 검사를 수행하려는 행동이라고요. 137"
 
 [ 1950년대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미혼모인 어머니는 아이가 입양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런데 곧 병원에서 문제를 발견한다. 어머니는 백인인데 아이가 흑인 혼혈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작은 도시는 아이에 관한 소문으로 들썩인다. 아버지는 누구이며, 왜 이 어머니는 입을 열지 않는가? 출판사 소개글] '어느 아이 이야기'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이 사건을 지금의 시각으로 바라본 탓에 한동안 의아했다. 어차피 생모는 아이에 대한 권한을 포기했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나? 싶었던 것이다. 출산 후 친권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입양을 희망하면 기본적인 정보를 기록하고 생모와 분리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사는 계속해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혀야만 할까, 캐럴은 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제대로 밝히지 않은 것일까. 흑인과 어울렸다는 불명예 때문에? 백인과 어울린 흑인이 감수해야할 위험에서 상대방을 방어하기 위해서? 
 
 소문만으로도 도시가 들썩일 정도의 일인데 실제 캐럴이 부주의하게 누군가와 가졌을 만남이 조용히 이루어졌다는 점은 의외다. 보고서를 읽다보면 코의 모양 머리결, 피부와 눈의 색, 심지어 IQ 측정값을 통틀어 대니얼이 누가봐도-가시성으로 물라토*이고, 실제로도-생물학적으로 물라토라면, 대니얼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인이 왜 필요한지 역시 의문이 된다. 대니얼의 아버지가 어떤 인종이던 대니얼의 가시적 입양 조건은 달라지지 않는다. 혹 대니얼의 아버지가 흑인이 아니고 대니얼도 물라토가 아니게 된다면 부여받게 되는 새로운 정체성은 가시적 조건을 상쇄할 수 있는 권리증이 되는가. 마치 이 아이는 물라토의 외형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물라토가 아닙니다, 하는 주의문구가 적힌 꼬리표와 함께. 하지만 그 꼬리표를 위해 혹은 친부모의 확실한 신원 기록을 위해, 대니얼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한 과정은 꼬리표보다는 확실히 대니얼과 캐럴에게 악조건이 되었다.  

 솔직한 감각으로는 그 당시의 인종차별에 대해서 이게 얼마만큼이나 큰 사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에멧 틸 사건**'이 1955년, [미시시피 버닝***]의 배경이 1960년대였었다고 하니 대니얼의 출생은 그 이상의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보고서는 집요하게 아이의 출생을 파고든다. 그 의도는 아이에게 '적합한 가정'을 찾아주기 위함에 초점이 맞춰진 선량함을 두르고 있다.
" 우리는 아이에게 맞는 입양 부모를 찾기 전에 생부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하다는 점을 할 수 있는 한 강하게 설명했다. 우리의 목표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서로에게 적합한 아이와 부모를 맺어 주는 것입니다. 최선의 경우는 입양 부모와 아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거죠.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자연스러워 보이는 가정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만 이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으니까요. 36"
 그러나 그 선량한 의도는 인종차별로 재단되어 있다. 아이의 성장에 대한 세심한 관찰, 입양처를 찾아주기 위한 물색 마저도 눈금자 아래(257) 놓여진 수치를 피할 수 없었다. 보고서를 읽으며 기대었던 선량함은 차별과 시혜의 그늘에서 종내 불유쾌함을 남겼다.  

 대니얼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혹은 어떤 인종인가에 대한 선량한 추적은 구분지어짐으로 비롯되었고, 구분하기를 위함이다. 읽는 내내 계속되었던 조앤의 시선(20/136), 대니의 거울(148), 질비아의 스케치(263)처럼 '바라보기'가 강조된 장면들이 떠오른다. 눈을 통해 얻게 되는 정보 혹은 선입견을 생각해보자. 단지 인종의 문제를 떠나, 오히려 인종에 대한 정보는 훨씬 직접적이다. 성별, 나이, 언어, 옷차림, 표정, 시선, 귀금속 같은 소지품, 손톱이나 피부, 머리결같은 것들, 심지어 생김새마저 타인을 판단하는 항목이 된다. 인종적으로 소수자 위치의 삶을 경험해보지도, 불일치하는 '뿌리'에 대한 질문과 심판도 받아보지 못한 탓에 공감할 수 없는 영역이 있어서일까, 넘어가보지 못한 한 걸음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때문에 도리어 가시적 조건들을 확장해 인간이 어떠한 분류없이 오직 한 명의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혹은 어떤 분류는 괜찮고 또 괜찮지 않은가. 선입견과 구분짓기의 '모든' 틀에서 벗어난다면 그 끝은 획일성 외에 무엇이 남는가. 자신을 인종과 국적과 같은 틀에서 벗어나 오직 한 명의 개인으로 봐달라는 말은 오히려 자신이 '규정짓는 대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말로 들린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 외모와 내면의 분리/불일치 - 이 부분에 이르러 성정체성 문제가 떠올랐다. 
" 가끔은 내 자신이 주장하는 나와 실제 내가 다른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착시 같은 존재, 늑대 가죽 속의 양, 나는 그런 변장 속에서 태어났다. ...중략... 어쨌든, 만약 내가 만들어진 환상이라면 문제가 생긴다. 내 외모가 착각이고 내 내면이 진실인가 아니면 정반대로 내 외모가 진실이고 내 영혼은 그 반대인가라는 문제 말이다. 주변 세계가 나에게 보이는 반응에서 출발하면, 즉 사람들이 내 내면과는 맞지 않는 내 외형에 먼저 반응을 보인다는 것에서 출발하면, 나의 외모가 옳고 나는 옳지 않은 것이다. 감히 생물학이 틀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140"
이들의 주장과 갈등도 같은 부분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규정짓는 대로 인정받기'. 하지만 주변 세계가 그 모든 불일치를 수용할 수 있는가? 수용해야만 하는가? 이 불일치로 인해 가시성이 멍에(135)가 된다면 그 멍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눈 위에 멍에를 씌운 채 후각과 촉각에 의지해(101)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남겼다.  

 대니얼이 스스로를 백인으로 여긴다해도 그의 신체에 흑인의 특성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대니얼만이 아니다, 서양인에 비해 췌장 크기가 작은 동양인은 당뇨에 취약하다. 눈동자 색에 따라 빛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다. 흑인은 피부암 발병율이 낮다, 같은 차이는 그저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마저도 '수치에 의존해 인간을 분류하려 드는 선입견'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아쉽다. 그가 자신을 백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규정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지금도 일정 부분 그렇겠지만, 미국인이 곧 백인이었던 배경이었다면 왜 그가 스스로를 백인처럼 증명(명예백인 148)하려 했을지에 대한 이해가 된다. 책을 읽고 생각을 남기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에 비해 머리속을 떠돌던 생각을 어느 하나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것 같아 여러모로 아쉬웠다. 처음 책을 읽으며 꽤 먼 시선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느끼던 거리감에 비해 책의 무게가 깊었던 듯 하다. 암실문고의 선정은 남다르다. 
  

* 물라토 백인과 흑인 혼혈 1세대
** 1955년 백인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었다는 이유만으로 린치를 당해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10대 흑인 소년 에멧 틸 이름을 딴 사건. 2020년 인종적 증오범죄에 근거한 사적 린치를 처벌하는 '에멧 틸 법'이 입법 되었다
*** 영화 [미시시피 버닝(1988)] 1964년에 일어난 흑인 인권 운동가 살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 - 철학의 숲에서 만난 사유들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철학을 다루고 있는 책이 눈에 띄면 읽어봐야겠단 욕심이 생긴다.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강렬한 표지가 멋있어서 읽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거대한 책장 안으로 들어서는 인간의 모습이 보는 이를 끌어들이는 표지는 어쩐지 압도된 분위기가 남일 같지 않게 보이며 두꺼운 철학책 앞에 겁먹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등산일줄 알고 마음의 부담을 안고 시작했는데 걷다보니 둘레길 산책로였다. 낯설고 어려운 이름과 용어들을 살피고 이 산은 악산이로구나 했는데 정상으로 향하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었달까.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네가지 큰 주제를 통해 동서양 철학의 고전들과 21세기 사상가들의 저서 76권을 소개한다.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으면서 핵심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담아냈다. 일단 책장을 넘겨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능숙한 인도자인 저자가 지혜와 사유의 길을 따라 독자를 철학의 숲으로 인도한다. 

책을 읽으며 몇몇 인상 깊었던 내용을 꼽아보면 2장 우주는 생각하는 거대한 뇌일까에서 만난 데이비드 무어의 후성유전학(161)은 얼마 전 읽은 리처드 도킨슨의 [불멸의 유전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불멸의 유전자]에서 뻐꾸기의 탁란을 통해 생물이 경험하는 환경이 대를 이어 반영되면서 알의 색과 무늬가 각기 다른 변화를 갖게된 사례를 전한다.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에서도 "부모의 경험이 '유전적인 방식'으로(164)" 대물림되는, 경험과 환경에 따른 영향을 주장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3장 영혼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에는 '연금술(282)'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만화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내용이 나오는 부분을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뉴먼의 저서보다 파라켈수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언급하는 인공 인간 바실리스크와 호문쿨루스의 배경(283~)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만화도 배워야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다니. 어쨌든 이런 점들 때문에 만화도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대학시절 모더니즘과 미학을 주제로 레포트를 작성한 적 있는데, 당시 문인, 예술가들의 활동이 아름다움의 추구라는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시대를 관통하기엔 빈약하고 핵심이 없는 시각이라는 평을 받았었는데 1장 동일성에도 차이에도 머무르지 마라에서 자크 랑시에르의 미학 분야를 다룬 철학서 '아이스테시스(83)'를 다루면서 다시 떠올랐다. 모더니티, 근대성이 함께 언급되면서 개화기에 느꼈을 새로움에 대한 충격과 평등과 자주를 내세운 식민지 시대의 감각이 "미학에 깃든 정치성(87)"을 드러냈음을 그때 말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싶었다. 이 노력에 A+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로나 마이너스 정도는 받았을텐데. 

" "통치자보다 상위에 있는 법은 인민의 안전이다"라고 언명함으로써 국민의 생명과 선익을 보호하는 데 통치자가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런 노력을 다하지 못한 통치자는 인민에게 버림받을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셈이다. 327" 
4장 영성과 개벽의 정치를 찾아서 부분은 우리나라의 지난 정국과 혼란스러운 세계 정세를 생각하며 읽게 되는 내용이었다. 앞서 인용한 홉스의 <법의 기초> 내용을 읽다보면 결국 탄핵으로 임기를 마감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보인다. 민주주의의 기본을 두번이나 실천해낸 사람들과 두번이나 탄핵되는 후보를 뽑은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이라니. 

복잡한 국내 상황 뿐만 아니라 트럼프의 자국 내 시위대 주방위군 투입 진압이나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전쟁 상황, 미중 무역 갈등 등의 소식을 통해 "전쟁은 합리적 인간의 계산적 정치 행위가 아니라 모방적 인간의 가속적 경쟁 행위다. 짝패 관계의 경쟁과 모방의 동역학은 둘의 대결이 끝장을 볼 때까지 계속된다. (363)"는 전쟁론을 인상깊게 보았다. 더불어 지라르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이 부정 당하고 합리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오늘 날, 오히려 그 이름으로 인해 치러진 타인의 희생이 얼마나 길고 무거운지 또한 오직 소수와 일부의 이익을 위해 지금까지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저자를 어디서 봤나 했더니 '생각의 요새'였다. 23년 '생각의 요새' 출간 때도 읽어보겠다고 신나게 달려들었던 무모한 추억이 있었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교양인과 저자 고명섭이 이끄는 이 철학의 숲 앞에서 홀려 책을 손에 들기를 반복한다. 이것이 다만 영원회귀적 행동에서 머무르지 않고 반복 사이에서 아주 조금의 차이가 쌓이는 유의미한 경험으로 남길바라며 읽었다. 조금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대학교 인문 철학 교양 수업에 정말 넓고, 사람에 따라서는 깊게도 쓸 수 있을 유용한 내용을 담고 있다. 더불어 요즘의 사회현상이나 국제정세와도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으니 이 책 한 권을 여름방학 동안 읽어둔다면 교양 마스터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번쯤-가능하면 여러번- 읽어본다면 분명 책의 가치를 실감할 것이다. 철학에 관심이 있는데 뭘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면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를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터널의 밤 - 네덜란드 은손가락상 수상작
안나 볼츠 지음, 오승민 그림, 나현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넷이었지만 셋이 되었고, 우리가 넷이었다는 사실이 도움이 되었다는 도입부는 '터널의 밤'이 정해진 슬픔으로 갈 수 밖에 없음을 알려주었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독일의 공습을 받고 있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기 때문에 죽음과 폐허가 된 일상이 담겨 있으리란 예감은 했지만 엘라와 로비, 제이, 크윈을 차례로 만나며 그 애들이 넷에서 셋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어리단 생각을 했다. 이 소년소녀들의 만나 함께 폭격을 버텨내는 상황은 만화 '세븐시즈'*를 떠올리게 했다. 

시대적 배경이 되고 있는 2차 세계대전 - 우리는 이 슬픔과 고통을 우리의 것에 비추어 함께 이해해주는데, 반대로 우리의 슬픔과 고통이 저들에게 얼마나 이해받고 있는가를 떠올리면 씁쓸하다. 하켄크로이츠가 왜 티셔츠의 무늬로 사용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배경으로도 소모되어서는 안되는지, 욱일기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인지하는 서양인들이 얼마나 될까. 얼마 전 읽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우리 것을 훔쳐가 이렇게 잘 보존하고 전시해놓은 나라에서 자신들의 것은 얼마나 더 귀히 다루겠는가**했던 문장이 떠올랐다. 자신들이 겪은 고통과 상실의 역사를 끊임없이 재생산해 이를 마땅히 함께 존중하고 분담하도록 하면서 같은 시기의 일본이 행한 침략과 착취, 비인도적 행위를 연결해내지는 못하는 점이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가 과거를 두고 어떤 반성과 교훈을 얻었던간에 전세계적으로 극우정당이 다시금 힘을 얻고 있고, '지나간 역사'로 일컬어지던 파시즘이 불길한 역사의 반복을 향해 그림자를 뻗어나가는 흐름을 보인다. 이미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들이 있고, 그 안에 우리와 같은 언어와 뿌리를 가진 사람들도 군인으로 생명을 빼앗으며 동시에 잃어가고 있다. 전쟁을 하고 있지 않은 나라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 이권을 놓고 다투며 갈등과 긴장의 양상이 흐르고 있다. 심지어 한 국가 안에서도 국민을 향해 총부리가 겨눠지고, 한 사람의 시민이 온몸으로 장갑차를 막아서는 밤이 지났다. 평화를 말하는 모든 의미있는 것들 문학, 음악, 미디어, 선행, 생명까지도 차갑고 무력하게 느껴질 때 그래도 평범한 우리들은 이렇게 책을 읽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터널의 밤'은 그런 의미를 전해준다. 

마구간 소년이 많이 등장하고 강조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크윈의 귀족적인 면모를 상쇄해줄 인물이 아니라 새장161를 한번 더 드러나게 해주는 인물로 작용하는 부분이 좋았다. 

얼마 전에 영화를 한 편 봤는데, 굉장히 아름답고 깊은 여운을 남기는 영화였다. '화이트 버드'***라는 제목의 영화인데 '터널의 밤'과 배경, 인물이 비슷했다. 전쟁 상황에서 유대인인 여자주인공 사라가 독일군에게 끌려갈 위험에 처했을 때 남자주인공 줄리안과 그의 가족이 그녀를 돕는다. 줄리안 역시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하다. 줄리안은 예쁜 소녀인 사라를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절름발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고 사라에게 자신의 이름조차 알리지 못했다. 이 짧은 소개만으로도 소아마비로 특수신발을 신고 다니는 엘라와 지나치게 잘생겨 땀냄새까지도 달콤한 소년 제이가 떠오를 것이다. '터널의 밤'을 감명깊게 읽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매료되었다면, 전쟁과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스크린으로 옮겨 환상적인 동화처럼 -그러나 그 슬픔을 찬연하게 담아낸 이 영화를 함께 감상하길 추천한다. 

*'세븐시즈, 타무라 유미'가 뭐냐면, 이 설명이 필요한 분은 그냥 보세요. 물론 저는 요즘 행복한 사이다 형식이 아니면 못보는 병에 걸려 감상을 중단하긴 했지만 괜찮은 만화입니다. '터널의 밤'은 특히 '겨울 팀'을 떠오르게 한다.
** 뺏어 온 것도 잘 보관하고 또 그 역사를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니 자기들 것에 대한 애착은 말할 나위도 없겠구나. 이미 많이 빼앗긴 우리들은 그나마 남은 것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지 돌이켜보아야 하겠군'하고 말이에요. 17. 서장 빠리에 오세요 중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창비
***화이트버드, 2025개봉 
동명 원작소설 '화이트 버드'와 같은 작가의 데뷔작 '아름다운 아이'가 각각 영화 '화이트 버드', '원더'로 만들어져 이어지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멸의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야나 렌조바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연에서 신체 부상은 고통스럽다고 지각된다. 어떤 행동에 고통이 뒤따르면, 그 행동을 되풀이할 확률은 줄어든다. 그것은 우리가 처벌을 정의하는 방식일 뿐 아니라, 다윈주의적 의미에서 고통이 무엇을 위해 있는지도 설명한다. 부상은 종종 죽음, 따라서 번식 실패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신경계는 신체 부상을 고통스럽다고 정의한다. 207"

 해가 높이 떠올랐다. 그림자마저 짧아진 길에 서서 들어갈 곳을 찾는다. 어제 날이 흐려서였을까 좁은 화단과 붙은 도보 위로 말라버린 작은 지렁이들이 보인다. 어떤 것들은 언뜻 나뭇가지처럼 보인다. 횡단보도를 앞둔 삼거리 코너에서 아직은 죽지 않은, 그러나 고통스럽게 햇볕 아래에 꿈틀거리고 있는 지렁이를 발견한다. 15센치는 되어보인다. 근처에 떨어진 진짜 나뭇가지를 하나 찾는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나뭇가지가 닿을때마다 더 몸부림치는 지렁이를 들어올려 화단 풀숲에 던져 옮긴다. 지렁이와 나 사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은 알지 못한다. 저 지렁이는 살 수 있을까. 

 뜨겁게 달궈지고 있는 길 위에 느닷없이 놓여진 지렁이를 발견하고 문득 읽고 있던 '불멸의 유전자'를 떠올렸다. 지렁이에게 새겨진 "유전적 예측*"에 분명 햇빛은 피하고 습기와 양질의 토양을 좇으라는 본능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어떤 변수가 생겼던 것이기에 수많은 지렁이들이 본능에 반한 움직임을 보였을까. 길 위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이 환형동물의 오늘, 펠림프세스트+에 죽음 직전 다가온 나뭇가지와 초고속 이동에 대해서도 기록될 것인가.

 '불멸의 유전자'는 흥미롭지만 정말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책의 두께만큼이나 많은 분량도 분량이지만, 정보들을 읽어내는 일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생물에게서 발견되는 연결이 그 모든 인과가 진심으로 즐겁고 흥미로운 사람이 펴낸 책은 일반인에게 비슷한 흥미와 약간의 당황스러움도 전달한다. 고슴도치, 참돌고래, 가비알, 익티오사우루스, 작은개미핥기, 큰개미핥기, 천산갑, 아르마딜로, 가시두더지(106-110)에 이르기까지 머리뼈골격을 비교해보게 되리라 예상치 못했다. 물론 날다람쥐 친구들은(137) 귀여웠다. 

 읽는동안 사람에게서는 어떤 진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혁신**'이 각기 다른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나타났듯이(125) 근래 각기 다른 나라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반목의 세계정세가 인류의 유전자에 새겨진 또다른 반복의 흔적이 아닐까. 비록 우리가 지난 두번의 세계적인 전쟁 이후 얻어진 교훈과 그 사이 더 발전했다고 믿은 문명과 교양에도 불구하고 세번째 세계적인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예상치 못했더라도 말이다.  

 또 하나는 하렘을 가지고 있는 일부 동물들의 비대칭(329)을 살펴보면서 시작되었다. 많은 수의 수컷들이 짝을 이루지 못하고 일부 선택된 수컷만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있다는 내용에서 현대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음을 떠올렸다. 심지어 이 현상의 바탕은 앞에서 언급한 갈등 양상과 '계획 경제 유전***'의 일부 선택 방식을 여성에게 적용하는 것에서 그 영향을 미쳤다. 이 은밀한 반복이 어쩌면 재생산의 단절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미래와 인류에 대해 생각하면 회의적이지만, '불멸의 유전자'를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우리의 유전자들은 다음 세대에 무엇을 남기기 위한 선택을 하고 있을까,였다. 어쩌면 생존과 유전자의 전달에는 인간이 지닌 인지 관점에서의 납득 여부보다 뻐꾸기(317-325) 새끼의 벌어진 입에도 먹이를 떨구도록 프로그래밍 된 새의 경우가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저자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면 오늘날 이 '불멸성'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흥미로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충실한 시간이었다. 

 *"알에서 깨어날 때 이 도마뱀은 태양에 바짝 달궈진 모래와 돌의 세계에 있을 것이라는 유전적 예측을 하고 있었다. 그 유전적 예측에 어긋난다면 예를 들어 길을 잃어서 사막에서 골프장으로 들어간다면 지나가던 맹금류가 곧바로 낚아챌 것이다. 또는 세계 자체가 바뀌어서 그 유전적 예측이 틀렸음이 드러날 때에도 같은 운명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모든 유용한 예측은 적어도 통계적인 의미에서 미래가 과거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18"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점은 한 동물이 유연관계가 없는 다른 동물을 세세한 부분까지 닮는다는 것이다. 양쪽이 같은 생활 방식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매트 리들리는 [혁신에 대한 모든 것]에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혁신 중에는 각기 다른 나라의 창안자들이 서로가 한 일을 모른 채 독자적으로 중복해서 해낸 사례가 많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도 마찬가지다. 125 

***사려 깊은 계획 경제가 다윈주의적 수단을 통해서 출현하려면, 성비를 제어하는 유전자들의 자연 선택을 거쳐야 할 것이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어떤 유전자가 수컷이 생산하는 X 정자 대 Y 정자의 수를 편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어떤 수컷 태아를 선택적으로 유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갓 태어난 수컷 새끼들을 굶겨 죽이고 선호하는 소수만을 키우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개의치 말자. 그냥 이 가상의 유전자를 계획 경제 유전자라고 하자. 흔히 생각하는 하향식 체계다. 332

+펠림프세스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