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 없는 마음 - 양장
김지우 지음 / 푸른숲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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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애가 있는 나도 성공하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런 마음은 없었다. 한 푼만 줍쇼. 준다면 떠나겠습니다. 이 마음에 더 가까웠다. 7" 

 그녀가 극복 서사를 풀어나가거나 여행 바이블의 더미에 책 한 권-그러나 조금은 새로울-을 더하려는 것은 아닐까 예상했던 마음이 나에게 있었다. 첫 시작에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런 시선들을 향해 '아니'라고 분명한 선을 긋고 나섰다. 선이 그어지고 나서야 그 선이 나에게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로는 조심스럽게 선 안으로 발을 들여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어가는 일만이 남아있었다. "아주 커다란 돌이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15)"던 그 순간, 이 사소한 이야기들에 정말로 빠져들었음을 느꼈다. 마음에서부터 올라온 신호가 목과 코끝을 타고 찡하며 울렸다. 

 '현장에 가서 잘 안 풀리면 박박 우(23)'기겠단 전략으로 날아간 타지에서 유쾌한 면모를 보여주는 소소한 사건들을 보며 즐거웠다. 특히 니야와의 트램 여행 무임승차 사건의 '겁나 많은 벌금...' '젠장...'(127)같은 소소한 대화나 독일 욕탕에서 노인들의 체조(101)를 보며 느낀 익숙함 같은 것들이 재밌었다. 바덴바덴이란 지명도 덕분에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가장 웃겼던 것은 여의도 불꽃 축제에서 인파에 갇혀 화장실도 못하고 널브러졌을 때 옆자리 아주머니가 강아지 소변 패드를 건네 주는 친절(144)을 보여줬던 사건(쓰진 않았다고 주장한다)이었다. 역시 한국인의 정이 제일이다. " '엄마 나 횡단보도에서 어떤 아저씨가'까지만 보낸 메시지에 현미가 '망할 놈이'라고 답장한 일은 두고두고 나의 웃음 포인트다. 96"라고 한 부분에서도 많이 웃었다. 

 "우리로 묶일 수 없는(51)" 자유롭고 개개인이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분위기의, 하지만 그 자유로움이 불규칙함으로 이어지는 제멋대로의 도시인 파리. "아니, 이런 일은 생겨선 안 돼(107)" 하고 작은 어긋남 조차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독일. -괜찮다고 말하는 저자에게 건네진 역무원의 단호한 말에 이 문장을 듣기 위해 여태 여행한 것 같았다는 저자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어?(132)" 할 수 없을 것이라 자신조차 접었던 도전을 할 수 있다로 바꾸어 주고 의심하지 않는 마음을 알려준 호주.
나라마다 저마다의 특징과 매력을 잘 살려 보여준 내용들에 함께 빠져들어 읽었다. 

 읽으며 가장 좋았던 부분은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54)'의 내용이었다. 잔잔한 일상이 그려지면서 낯섦과 다름도 없이 평범하고 평온한 풍경이 이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잘 전달되어 읽는 동안 편안했다. 어떤 난감하고 말도 안되는 일이 생기거나, 어려운 순간 예상치 못한 선의에 감동을 받는 내용들보다 더 인상적인 것이, 그녀가 온전히 자신으로서 존재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장소처럼 느껴졌다. 파리에서 시작된 책은 미국에서 마무리된다. 글로벌하다. 그리고 '굴러라구르'라는 이름처럼 그녀가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는 신호가 되어준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이다. 앞으로 만날 시간에서 어떤 나는 작아지고 어떤 나는 커질까. 지금은 내 몸 전체를 차지하는 어떤 내가 어느 순간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겠지. 내가 사랑하는 나의 부분이 희미해지기도, 외면하고픈 어떤 부분이 거대해지기도 하면서. 그 새로운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또 어떤 관계를 맺을까. 새롭게 더 자랄 내가 기대되었다. 동시에,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이 순간의 내가 그리웠다. 196" 

 책을 통해 저자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세바시 강연이나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하는 열정적인 활동가였다. 인터넷 검색 창에 저자를 검색해보면 열심히 바퀴를 굴려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한 활동들을 만나볼 수 있다. 앞으로의 자신을 기대하는 모습이 풋풋하고 예쁜만큼 기대되기도 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면 '굴러라 구르'가 보여주는 선명하고도 확실한 세계, '의심없는 마음'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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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 - 나를 활자에 옮기는 가장 사적인 글방
양다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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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방에서의 시간은 작가가 되기 위한 연습, 책을 쓰는 과정이라기보다 한주간 맹렬히 삶과 싸운 누군가가 보고 들은 것들을 목격하는 일에 가까웠다. 글자들이 살아 있다 못해 그 자리에서 내가 그 사람의 삶을 겪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얼굴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5" 

 글쓰는 삶을 살아가고 꿈꾸는 사람들은 많다. 챗GPT가 사진만 쥐여주면 무슨무슨애니메이션 풍 그림을 재현해내는 것이 유행했을때 멀거니 세상 참 좋아졌구나, 했는데 문체를 몇 개 학습시키고 이러저러한 내용을 넣은 글을 써달라고 하니 금새 제법 읽을만한 글을 뽑아냈다는 말은 어라, 싶었다. 그렇다면 쓰는 사람들은 무엇에 마음을 두고 계속해서 써나가야 할까. 쓴다기 보다는 읽기에 더 가까운 편이지만 문득 덜컥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쓰기'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고 싶어 책을 펼쳤다. 
 이 정중하고도 가혹한 관리자는 챗GPT에게 글 하나 써와보라고 명령하는 사람보다 더하다. 힘드신가요? 쓰세요. 떨리나요? 쓰세요. 어렵나요? 쓰세요. 뭐하세요? 쓰세요. 응원합니다, 쓰세요. 기다립니다, 쓰세요. 그냥, 쓰세요. 모든 말이 '쓰세요'로 귀결된다. 게다가 얼마나 냉혹한지 "내 글을 읽는데 차마 너무 흉측해서 도저히 읽을 수 없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글이 늘었다는 증거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보이는 것마다 다 뜯어 고치세요.(181)한다. T인가 싶다. 

 "같은 시공간 안에 있어도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지는 않습니다. 57"는 문구는 무려 올해 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일과 일치했다. 친구와 전처럼 자주 만나게 되지 않으니 만나게 된 날에 있었던 일과 생각을 친구가 기록하는 것처럼, 나는 나대로 적어보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연초에 그 말을 친구에게도 직접 해놨는데 아직 지켜지지 않았다. 생각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고, 벌써 반환점을 돌아 7월. 2025년 이대로 괜찮은가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을 때, 다쳤다는 슬픔과 고통보다 무릎에 대한 자각을 앞세우는(114) 사람이어서 새로웠다. 압구정 로데오 한복판에서 넘어져 무릎을 다쳤을 때, 나는 창피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넘어져 기어이 바지에 구멍을 낸 채로 피를 흘리고 있으면서 고통과 함께 쪽팔림이 밀려오던 그날을 떠올렸다.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생각을 하는구나, 하면서. 

 '타인이라는 바다로 입수하기(152)'에 이르러서야 글감을 발견한 듯 했다. 몇해 전 친구와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우리는 서로 자신의 미술적 재능이 좀 더 낫다고 주장했는데, 시간이 지나고보니 역시 내가 좀 더 나았던 걸로 확신하게 되었다,고 다시 주장해본다. 어찌되었든 그때 유심히 바라보고, 뚫어지게 관찰되던 시간이 익숙했던 누군가를 새롭게 바라보는 경험이 되어 기억에 남아있다. 인터뷰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 번 글감을 발견하고 나니, 어떤 주제들 앞에서는 오랫동안 멈춰있게 되었다. 거짓말과 어린시절에 대한 주제가 연달아 나왔을 때(234,240)나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 자기 방식으로 불행하다.'는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문장을 떠올리게 한 불행에 대한 주제(270)들이 그랬다. 신화와 꿈이라는 주제, '당신이라는 신화(287)'에서는 태몽이 글감이 되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책을 읽기만 해볼거야, 난 뭔가를 쓰는 성향은 아니야'하고 생각하다가도 이렇게 갑자기 쓸만한 주제를 만난 것처럼 책을 읽다 문득 눈길이 가고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뭔가가 생긴다면 놓치지 않고 쓰기에 도전해보면 좋겠다.  

 읽으면서 아쉬웠던 것이 수신자들의 답장이 어땠을까,하는 궁금증이 점점 커지는데 채워지지 않은 채 끝맺었다는 점이다. '사랑을 사랑 없이 말해볼게요'라는 주제(124)를 마주했을때, 인터넷에서 본 '양말에 구멍이 났다.를 구멍이란 단어없이 다시 써보기 도전'을 떠올렸다. '어쩜 가난이란 것은 발끝까지 옮는지'라고 적은 문장이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사랑을 사랑없이 말해보는 주제는 어떤 답들이 나왔을까 궁금했다. 
 서간문으로 되어 있는 책은 오랜만에 만나본 것 같은데, 이 다정한 권유이자 능글맞은 압박을 받은 '쓰기로 마음먹은 당신'들이 어떤 글을 썼을까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어떤 답장을 보냈는지, 혹은 참여자들이 작성했던 글이 아니더라도 인터뷰 형식으로 편지를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함께 볼 수 있었다면 더 재밌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 여러분은 이제 '쓰는 것의 필연성' 앞에 섰습니다. 쓸 것이냐 말 것이냐는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의 질문입니다. 여러분 앞에는 이제 그저 '무엇을 쓸 것인가'만 남아 있습니다. 질문이 한 걸음 앞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쓸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던 힘이 무엇을 쓸까로 옮겨왔을 때 어떤 힘을 발휘할지, 저는 기대됩니다. 91" 

 '쓰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책이 전해주는 다양한 글감과 약간의 압박감이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는 읽어보라 추천하지 않고 이 책을 써보라(이용해보라)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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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는 과학자들 - 위대한 과학책의 역사
브라이언 클레그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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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스토리카는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것, 또는 설명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과학의 필수 요건이며 글이 있기에 과학은 이 요건을 충족할 수 있다. 글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지금, 여기에만 묶여 있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다. 8" 

 책은 총 5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1장 고대 세상의 기록은 1200년경까지의 기록물들에 대한 내용, 2장 출판의 르네상스는 책 제작 방식에 인쇄술이 도입된 후 나타난 변화들에 관한 내용, 3장 근대의 고전은 과학책이 대중으로 독자층을 넓혀나간 후의 변화, 4장 고전을 벗어난 과학책은 과학이 전문 분야로 자리잡으며 나타난 변화, 5장 다음 세대는 1980년 경 부터 대중 교육에서 흥미와 정보 전달로 달라지기 시작한 과학책의 경향을 담고 있다. 궁금한 장부터 찾아 읽어봐도 좋겠다. 
 최근 읽은 책에서는 우리가 글을 씀으로 기억을 하려는 능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주장을 봤다. 적어두었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정보를 머리속에 저장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다소 엉뚱한 주장이었는데, 지금 과학의 발전과 글에 대한 내용을 보니 글의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소통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는 특성에 크게 공감했다. 
뒤로 이어지는 인쇄술 이야기에서 목판 인쇄술로 제작된 가장 오래된 책으로 [금강반야바라밀경 868년]을 꼽고 중국 중심으로 흘러가는 내용은 아쉽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현존 최고의 인쇄물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704~751년 추정]인데 우리나라에 대한 언급이 없다니 아쉽다. 

 첫번째 장을 읽으며 "로마인들에 관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과학 발전에는 거의 기여한 게 없다는 것(14)"이나 알하킴이 나일강 물줄기를 바꾸겠단 약속을 했다 못 지키게 되자 죽을 때까지 미친 척했다는 일화(78), 피보나치수열의 피보나치가 이름이 아니라 별명이었다는(84), 그러나 영원히 피보나치로 불리며 고통받는 피보나치의 이야기처럼 소소하게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두번째 장으로 들어서면 "과학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는 늘 인기가 좋다(96)"는 시작처럼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등장 만으로도 내용 자체가 그냥 흥미롭고 재밌다. 
 마찬가지로 갈릴레오가 등장했을 때도 관심을 가지고 읽었는데 "피사의 사탑의 낙하 실험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146)"고 보고 있는 내용은 의외였고 어쩐지 실망스러웠다. 같은 장에서 소개되는 다윈의 [식물원]은 삽화도 아름답고 진화론을 떠올렸던 데에 비하면 신선한 접근이 되어주어 반가웠다. 

 세번째 장에서 근대로 들어오며 돌턴이 등장하는데, 얼마 전 탄소의 원소 기호를 물어오는 일이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수헬리베붕탄질산을 내뱉고는 어리둥절 했던 기억이 나 반가웠다. 과학 저술의 범위를 천문학, 물리, 화학에만 두지 않고 생물학, 해부학 저서들도 함께 소개하고 있어 다양한 삽화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해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전에는 다윈의 [식물원]을 소개했다면 3장에서는 [종의 기원]을 다루기 때문에 더욱 익숙한 내용을 만나볼 수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목해야 할 인물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연구에 대해 간략한 안내를 해주기 때문에 내용이 너무 깊거나 무겁지 않게 읽을 수 있다. "379쪽에 이르러서야 "지금까지 정의한 대로 덧셈하면, 이 명제에 따라 1 더하기 1은 2가 된다." 233 [수학의 원리]"는 내용이 나올 염려는 없는 것이다. 

 3장 끝부분에 들어서서야 과학에서의 여성에 대해 나오기 시작하는데, 4장은 아인슈타인과 함께 마리 퀴리로 내용을 시작한다. 더불어 레이첼 카슨의 명저 [침묵의 봄]을 만나볼 수 있다. DDT 사용 제한 조치 때문에 모기 박멸의 기회를 놓쳤다는 책의 내용이 사실일지 궁금해졌다.
 1976년 첫 출간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도 소개되는데, 얼마 전 [불멸의 유전자]를 읽었기 때문에 특히 더 반가운 장이었다. 불멸의 유전자가 자연철학자들에게 받는 비난에 반박하는 "과학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더이상 감탄하지 않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더 깊이 통찰해 더 큰 감탄을 일으킨다. 288" 메시지가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의 장들이 과학이 철학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자신의 영역으로 넓혀지고 확고해졌는지를 살펴봤다면, 4장은 다시 철학적 사고로 돌아가는 흐름을 보여준다.  
확실히 현대로 오면서 유명한 책들의 제목이 익숙해지고, 어떤 책들은 전체나 일부를 직접 읽어본 것들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가 떠먹여 주는 최신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330)"이는 독자밖에 될 수 없지만 그 조차도 접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 혹시 여러분은 제 설명을 듣고 나면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뇨,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저는 왜 여기서 여러분을 귀찮게 하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제가 설명할 내용을 어차피 이해하지도 못할 텐데 왜 거기에 앉아 계시죠? 왜냐하면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외면하면 안 된다고 여러분을 설득하는 게 제 일이기 때문입니다. 후략... 271" 

 책을 읽다가 문득 지치거나 좌절하게 될 때 경쾌한 어조로 힘을 북돋아주는 문장이었다. 리처드 파인먼의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의 서문에 있는 내용이다. 모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한 부분을 알고 흥미와 즐거움을 느꼈다면 괜찮은 독서였던 것이다. '책을 쓰는 과학자들'은 과학적인 세계관의 발달을 수를 셈하려는 시도부터 보고 있는 시작이 흥미로웠다. 더불어 '기록'이 과학 발전과 정리에 중요한 축을 담당하기 때문에 문자의 발달과정부터 첫 내용이 시작되는 점도 재밌다. 아주 넓은 범위로 시작하는 인류의 발전과정을 이야기로 들려주듯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 장점이자 매력이었다.
 첨부된 사진, 그림 자료들도 많아서 보는 동안 따로 찾아볼 필요없이 언급된 자료에 대해 더 이해하기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료들의 색감이 더해지고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선명해지고 가독성이 좋아지는 변화도 직접 느껴볼 수 있다. 에른스트 헤켈의 [자연의 예술적 형상] 삽화들(225-227)을 보다보면 한 가지만 잘해서는 세계사에 이름을 올릴 수 없겠구나 싶어진다. 다만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꽃등에 머리를 확대해서 그려놓은 섬세한 그림(154)도 함께 보게 될 것이다. 
핵심적인 이론, 인물, 저서 등을 키워드로 삼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라는 주제와 크고 두꺼운 책의 무게감에 비해서는 가볍게 읽어나갈 수 있다. 생각보다 익숙한 내용, 아는 내용이 많다고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이 책을 썼다면, 독자인 우리들은 그 부름에 마땅히 응하도록 도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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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번의 힌트
하승민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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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한 소설집 관련된 영상을 보다 들은 말이 떠올랐다. 아마 가장 마지막에 작품이 실린 사람이었을 것이다, 앞에서부터 읽다 자신의 글을 안 읽을수도 있으니 뒤에서부터 읽어달라는 부탁이었는데 그 말이 참 부주의하다 여기면서도 이렇게 기억에 남아 '서른 번의 힌트'를 앞두고 이번엔 뒤에서부터 읽어봐야지 싶었다 

 "난 안간힘으로 딸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딸은 어쩌다 전화를 거는 은전을 베푸신다. 그럼 나는 걱정부터 앞서 그렇게 물어왔던 것이다. 뭘 묻고, 뭘 묻지 말아야 할지도 어려워 내가 변사처럼 혼자서 떠들긴 했었다. 엄마 노릇을 흉내라도 내려면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 거구나. 381" 

 세상 모든 딸들은 엄마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까? 책을 읽다 문득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엄마를 사랑만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엄마보다 내가 더 많이 말하던 그 때, 내 모든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의 품에 안겨 쏟아내던 날들. 나는 어땠더라 되새겨보게 만드는 '길 위의 에트랑제'가 조금은 부담스럽고, 조금은 목이 메었다. 

 관심있게 보아둔 이름인 최진영 작가의 '무명'을 읽은 날 아침엔 70대 노인이 열 살짜리 초등학생을 유괴하려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초등학생의 엄마에게 저지되어 미수에 그쳤다는 뉴스를 보았다. 사람들이 역겹다며 저런 인간은 죽어야 된다는 댓글을 달아놓은 것을 수백개는 넘게 봤는데, 첫 시작이 살인사건을 보도하는 뉴스로 시작해서 아이러니했다. 가능성과 사실들. 

 '불펜의 시간'은 읽는 내내 기분이 나쁜 내용이었다. 기현이 어떤 야구를 하건 희롱과 무시를 당하는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기현의 내면이 어떻던 진호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쓰여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구의 신이 진호를 버리기 전에 인간의 범위에서도 버려진 것은 아니었나, 진호뿐만이 아니라 지긋지긋하리만큼 저속하게 그려진 야구부원들 전부. 

 이와 비슷하게 주원규의 '외계인' 역시 야구선수와 배가 부푼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의 환영을 말한다. 실제 야구 선수들이 치던 사고도 떠오르니 연달아 읽으면서 야구 성적도 중요하지만 사람 좀 되자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운동도 좋지만 최소한의 학습과 인성 교육도 필요하지 않은가에 대한 생각을 최근 더 자주하게 되어 읽으며 부러 더 심각했다. 

 여러 작품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한 편의 분량이 그리 많지 않아 단숨에 읽어내려가다보면 어느새 제법 두께가 있는 책이 다 끝나있다. 읽다보니 문득 어느 재밌는 장편의 도입부만 골라 읽은 느낌도 드는데, '서른 번의 힌트'안의 작품들이 작가들이 예전에 수상했던 한겨례문학상 당선작의 내용을 모티프로 써 내려간 단편들이기 때문인 듯 하다. 

 책의 뒷표지 날개에 언제 어떤 작가가가 무슨 작품으로 수상했는지 목록이 나와 있으니 좋아하는 작품을 찾아 먼저 만나보거나, 읽은 작품 중에 마음에 드는 작가의 수상작을 다시 찾아봐도 좋겠다. 모든 수상작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읽어보았던 작품의 또 다른 갈래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인상적인 재회였고 재미있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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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먼 이름에게 소설의 첫 만남 36
길상효 지음, 신은정 그림 / 창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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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인간을 사랑한다. 나에게 사납게 짖어 대지 않는, 나를 굶기지도 걷어차지도 않는 인간을. 
나를 씻기고 먹이는, 숨이 막히도록 나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벼 대는, 밤이면 곁을 내주고 함께 잠드는,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나를 울고 싶게 하는 인간을. 그러나 그를 사랑할수록 내 반쪽에 차오르는 것은 단 하나의 질문이었다. 나는, 우리는 어쩌다가 인간의 세상에 왔는가. 26"

 첫 시작은 안타까워서 눈물이 났다면, 마지막은 벅차올라서 눈물이 났다. 이 작은 개의 이야기는 번식장에서 학대를 당하다 구조되어 한 인간의 집으로 입양되면서 시작된다. 짧게 줄인 문장 안에도 왜 한 생명이 다른 생명에 의해 이렇게까지 이용당하고 고통받아야 하는가, 모두가 알고 있는 부조리가 왜 개선되지 않는가 성토하게 만든다. 

 고통스러웠던 번식장에서의 시간부터 자신을 보살피는 알 수 없는 존재인 인간과 함께하기까지 작은 개에게 세상은 낯선 곳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작은 개는 번식장의 학대에서 살아난 생존자이기도 하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색하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계속되는 질문이 지금껏 이어져 온 인간과 개, 두 세상의 첫 만남을 찾아 시간을 거스른다. 오래 전 야생에서 생활하던 늑대가 두 발로 걸으며 두 손으로 사냥하던 인간 무리에게 첫 발을 내딛던 그 순간으로. 작은 개는 그토록 궁금해하던 질문의 현장에서도 그를 부르는 인간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는데, 그런 점이 안타까우면서도 곁에 있는 강아지의 이름을 부르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게 만들기도 했다. 

 고대 늑대 무리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책을 읽다보면 어린 시절 읽었던 시튼의 동물기가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늑대왕의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는데, 그때의 즐거움이 떠올라 금새 읽어나갔다. 먼 옛날 인간이 생존을 위해 늑대들의 습성을 따라했고, 늑대들 역시 생존을 위해 인간과의 공존을 모색했다는 주고받음을 잘 녹여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세상'이 동물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추는지, 또 그 세상에 맞춰 살아가게 된 첫 시작은 어떠했는지를 '나의 먼 이름에게'는 그려내고 있다. 냄새를 맡아서 동족을 확인하거나, 두려울 때의 본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의 고통, 애견 카페 앞에서 견종으로 구분되는 차별 등 개의 시선에서 보는 세상은 어떨까 많은 생각을 하고 썼으리라 짐작된다.   

 짧은 분량과 익숙하면서도 섬세한 삽화, 여운을 남기는 내용이 한 번 읽었어도 자꾸만 책에 손이 가게 만든다. 자신 곁의 소중한 존재가 어떤 마음으로 나의 세상에 편입되어 왔을지, '나의 먼 이름에게'를 읽으며 가늠해보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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