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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력
이츠키 히로유키 지음, 채숙향 옮김 / 지식여행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마주하기에 앞서 과연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책일지부터 궁금해졌다. 자력을 강조하는 시대에 타력을 앞세우는 제목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어떤 내용을 말하고 싶어하는건가 생각했다. 일본에서 온 이 모르는 아저씨는 인생 선배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전하고 싶은 말을 책에 담아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타력밑에 숨겨진 의미를 읽으면 알 수 있겠지 싶은 마음으로 읽었다. 그를 통해서 알게 된 것도 있고, 생각하게 된 것도 있고, 불만을 느끼게 된 것도, 또 그로인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도 있다.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좀 더 꼼꼼히 읽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책에도 그런 검열의 눈을 갖고 일일이 꼬리를 붙여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눈을 끝내 버리지 못한 자신도 발견했다. 읽으면서 비슷한 맥락의 생각이 들었던 책이다.
이 책에서 작가가 일본 사회에서 충격적으로 다가온 몇 가지 사건을 반복적으로 들고 있는데, 한신 이와지 지진이나 옴진리교 사건, 일본의 패전, 고베지진, 사카키바라 소년 사건 등이 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건도 있고, 일본 사회에 커다란 흔적을 남은 상처가 된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사카키바라 소년 사건 역시 다른 사건들에 비해 생소하지만 들어본 적 있는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나머지 사건들은 대부분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큰 사건들이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과 변해가는 문화 풍조를 두고 일본 사회에 대한 무한한 작가의 애정과 염려를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 다분히 일본적인 정서가 짙게 깔려나온다. 자신들의 문화, 풍류를 최상의 것으로 두고 약간 도취된 듯한 자부심을 즐기는 일본 사람들이 과연 좋아할만한 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만 하는 시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스스로를 책망하지 말고 "흠, 아무래도 타력의 바람이 불지 않는 것 같군'하고 가만히 목을 움츠리고 있으면 됩니다. 반대로 생각 이상으로 만사가 잘 풀리는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고 자신감도 점점 더해갑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잠시 멈춰 서서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내 소관이 아니다." 그렇게 중얼거려보는 것입니다."
이 책은 마치 이 대목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공감하는 내용과 거부감이 드는 내용이 교차되어 공존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꽤 공감하는 편이다. 일이 잘 되지 않을때 자신을 탓하거나 자괴감에 빠지지 말고, 그 일 자체가 시기적으로나 상황적으로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좀 더 자신을 편하게 두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탓해봤자 스트레스만 더 늘고 잘 안되는 일이 잘 풀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일이 잘 풀릴 때 그 기쁨과 자신감까지 굳이 물려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게 자신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한 일이지만, 자신의 노력이 덧대어져 잘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까지 막을 필요는 없다.
"타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나 이외의 뭔가 커다란 힘이 내 삶의 방식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나 이외의 타자가 나라는 존재를 떠받치고 있다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꿔 말하면 타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커다란 힘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커다란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흐르고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직업 관련 책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사람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밥 한 끼 먹는 일도 사실 누군가의 도움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아마 이 타력이라는 것도 그런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고 느껴진다. 아니면 마치 연금술사에 나오는 것처럼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는 우주의 힘이나, 시크릿 같은 책에 나오는 긍정의 힘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이처럼 타력을 강조하지만 지극히 일본적인 종교의 관점에서도 삶을 바라보는 자세를 많이 이야기한다. 특히 15세기 중기에 있었던 종교인 '렌뇨'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생소한 인물이라 작가의 책에서 처음 접했다. 책의 말미쯤가면, 렌뇨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 "병이 있는 사람, 고민이 있는 사람의 심적 고통이나 괴로움은 '타인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이 고통은 자기만 느끼고 있다'라고 생각했을 때 두 배, 세 배 더 커지는 것이다." 작가 엔도 슈사쿠는 어딘가에서 그렇게 썼습니다. 갇힌 슬픔, 갇힌 고통이란 것은 그 강도가 보통의 것보다 두 배, 세 배 커지는 것입니다."
공감하는 부분 중 하나다. 이 부분에서 대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옛 이야기가 떠오른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병을 얻는데, 자신의 고통을 남과 나눌 수 없어 혼자 끌어안고 있을 때 가슴속에서 느낄 고통은 얼마나 더 큰 것일까. 그것은 고통에 외로움이 더해진 무게일수도 있다. 괜히 기쁨을 나누면 두 배,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라는 말이 나오는 건 아닌가보다. 세월을 통해 전해지는 말들은 다 그만의 깊은 이유가 있는거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흔한 것에서 찾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깨달음이 떠오른다.
"일본인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자아가 작은 것 같습니다. 일본인은 스포츠에서도 골프나 테니스처럼 개인기를 겨루는 게임에서 좀처럼 이기지 못합니다. 일본인은 셋이 모이면 금세 파벌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몇 명이 모여야 겨우 한 사람 몫을 한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는 사방이 국경으로 둘러싸여 있다든가 반복적으로 침략을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강렬한 자아를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인은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감성의 소유자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자국에 대한 애정어린 분석이 보인다. 일본인이 가진 기질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하면서도 일견 그 기질은 부드러운 감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안아주고 있다. 글쎄, 그들이 예의바른 사람일 수는 있어도 부드러운 감성을 가졌다고는 생각이 쉽게 미치지않는다. 그들은 침략을 받은 경험이 없는 대신, 침략을 하는 경험을 택하는 민족이 아닌가. 공격받지 않아 강렬한 자아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는 해석은 좀, 지나치게 애정이 섞였다. 대신 공격하는 더욱더 강렬한 자아랄까, 욕망을 가지지 않았나.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섬나라 근성이라고 하는 그런 성질을 갖고 있는데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또 슬퍼하는 사람에게 "계속 끙끙 앓아봤자 소용없어. 마음을 고쳐먹고 열심히 해봐. 자, 힘을 내자"라는 식으로 격려함으로써 슬픔에서 회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대치적인 방식입니다. 이에 반해 잠자코 함께 눈물을 흘림으로써 그 사람의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려고 하는 태도를 동치라고 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 자신에 대해 좀 생각해봤다. 나는 어떤 입장을 취하는 편인가, 하고. 생각해보니 대치적인 방법을 쓴 경험들만 떠오른다. 위로해주는 것에 익숙치 않아서 그렇다는 변명을 해보지만, 그런데 누군가 나에게 동치적인 방법의 위로를 해주었을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위로가 될 것 같아서 그런 말들을 주워읊었던 것인데, 공감이 격려보다 큰 위로가 되는 순간을 직접 체험해본 기억이 떠오르고 보니 나도 앞으로는 공감을 해주어야 겠구나 싶었다. 뭐, 사실적으로는 슬픔에 빠져있을때 곁에서 위로를 주려고 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동치이든, 대치이든 어떤 방법이든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고마운 위로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놓여진 불편함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를 구 식민지라고 표현한 점도 그렇고 과거 아버지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외지인 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가 패전 이후에 가르치던 학생들이 무장하고 와서 한국을 떠나라는 말을 했다는 조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을 보면 왠지모를 거부감이 든다. 구 식민지라는 표현이 사실일수도 있는데, 일본인인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들이 그런 과거를 안고 우리나라를 부를때는 좀 더 죄의식이랄지, 부채의식이나 조심스러움을 담아서 불러야하지 않을까 싶은데. 게다가 외지니 내지니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도 껄끄러웠다. 과거의 말을 하면서 외지, 내지 표현이 나오는 것일수도 있지만 그건 강점기 시기에 일본이 자국와 우리나라를 부르던 표현이다. 우리를 속국으로 보면서. 일본을 싫어한다고 의식하고 지내는 것은 아닌데 이런 순간에 나오는 거부감이나 일종의 분노는 어쩔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쓸 수 밖에 없는 표현인걸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짜증난다. 이 근본도 모르겠는 애국심-
과연 다른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