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나는 나를 묻는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30
이영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석하게도 큰 감흥이 없었다. 시보다는 책 날개에서 먼저 보았던 그의 부음이 더 오래도록 남는 시집이었다. 이상도하지. 이영유 시인은 이제서야 시집 '나는 나를 묻는다'를 찾아읽게 되면서 알게 된 이름 석자인데, 존재를 깨닫는 동시에 시인의 부재에 대한 확인을 하고 또 그것이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내게 전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어디선가 본듯하다. 까만 활자의 구절로 오래 전 부음이 지금에서야 내게 닿았다는 것을. 언제고 전해지기 위해 하염없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메아리치며 떠들던 부음에 조의를 표한다. 아주 늦었지만 그래도 서둘러.

 

 다만 생각이 닿은 부분은 아래의 시이다.

 

[ 品格에 대하여 - 품격, 그리고 한문을 쓴다

 

나, 스스로가 품격의 기준이므로

품격은 나이다

혀에 모터를 달고 끝없이 굴려보라

무슨 소리가 나는지,

 

하여간 품격은

나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하고

내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한다

漢文이 또 하나, 나의 국어임을 알게 된다

 

격이 없으므로 격이 있고

격이 있으므로 격이 없다

아직도 혀에 모터가 붙어 있는지?

그렇다면, 모터를 떼든가

혀를 뗄 일이다 ]

 

때때로 나 자신은 무엇으로 보여지는가, 나타내는가, 증명하는가,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생각하곤 한다. 사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은 잘 안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존감이나 자존심의 차이를 구분하려 하고 나를 나에게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 생각하게 되면서 나에 대해 정의하고픈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잘 지켜지진 않지만 내가 받고 싶지 않은 대접을 남에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일들도 그 일환이다. 그러다보니 좀 더 관계에 있어서 냉담해지는 부분도 있지만 말이다. 쨌든 이 '품격에 대하여'란 시를 읽다보니 그 모든 시도가 결국은 나라는 사람의 품격을 높이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은 적을 수록 좋다는 부분에 있어선 정말 가슴깊이 동감하지만, - 지금 이렇게 쉼없이 타자를 쳐내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속에 든 것을 쏟아내지 못해 안달인 성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 한문을 쓰는 일이 곧 품격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나의 국어임을 인지한다는 부분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다. 시간이 지나면 혹은, 한문을 더 배우고 익힌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으나 - 사실대로 말하자면 한문이 섞인 부분을 읽기 어려워서 그렇다는 것도 있고,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가급적 우리말을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면서도 한 문장에 얼마나 많은 한문이 들어있는지. 비록 나는 달리 쓸 길을 찾지 못해서 이렇게 한자표현을 잔뜩 끌어다 쓰지만 할 수 있다면 쉽고 정확한 우리말로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연작들인 '나는 암이다' 는 제목 만으로도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강렬함이 있었다. '지병의 악화로 영면하였다'는 시인의 지병이 무엇이었는지- 이름 만으로도 끔찍한 병명을 곳곳에서 발견하면서 몸서리쳤다. 마치 일상인양 시집 안에 툭툭 끼워져있는 병의 그림자가 기울 때마다 피해가며 읽었다. 이상하게도 질긴 암세포가 그 안에 엉겨있는 양 제목만 봐도 지긋한 느낌이었다. 대신 눈에 들어온 다른 시 한편은,

 

 [ 光化門에서

 

 모처럼 광화문 네거리를 다녀왔다

참, 오랜만이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철 지난 과거,

거기 광화문이 있다

이제는 누구도 보살피지 않는 오래된 상처,

열을 맞춰 달리는 차들의 행렬,

순간 모든 게 정지되고,

피 흘리던 역사의 흔적들은

아우성으로만 멀리서 달려온다

갑자기 파란 불이 켜지고,

그만!

 

뒤를 돌아보니 모르는 것들 투성이다

그랬다, 예전부터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없었다

그냥,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던 것뿐이다

아득한 곳에서 달려오고,

또 아득하게 사라지는 것들,

한 세기의 흔적이,

한 인생의 아우성이,

흩뿌리는 눈 속으로 사라진다

사라지고, 사라지는 눈 먼 사이사이로

신기루처럼 광화문이 다가선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 ]

 

 시의 전문이다. 나와 세계가 정말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믿고 살아가는데 - 사실 내 세계야 어떻든 세상은 태평하리만큼 틀을 잃지 않고 계속된다. 금방 내 세계가 끝난대도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은 채 무심하게 모든 것들이 그대로일 것이라 생각하면 그 자체로도 어떠한 절망이 엄습한다. 존재의 무상함을 느끼는 가장 일반적인 때가 아닐까 싶다. 이 '광화문에서'가 그런 순간 또한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내가 그 곳에 존재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았던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공간과 시간. 사실 내가 없이는 그 공간과 시간의 존재조차 인지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 '있게 함'을 만드는 인지의 주체조차 사실은 공간과 시간에 의해 인지되지 않으면 무상하기만 한 것이라는 틈새가 현실감있게 다가왔다. 얼마 전에 볼일이 있어 그 앞을 다녀와서 더 그럴지도.

 

 감흥이 없었다고 하면서도 할 말은 조금 있었던 것 같다. 확 들어와 꽂히진 않았어도 이래저래 되새겨 떠올릴 시들이 있었던 시집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생의 중력 문학과지성 시인선 400
홍정선.강계숙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럴 줄 알았으면 읽지 않는 것인데.

 

 표지의 '엮음'이란 말의 뜻을 깨닫고는 먼저 든 생각이다. 30여년간 매해 10여권의 시집을 내온 '문학과 지성사'의 400호 기념 시집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이 400호 시집은 301호부터 399호의 시집 들 중 시인 83명의 시를 골라 수록하였다. 사실 100호, 200호, 300호 때도 이랬었다고 하나 - 시집 읽는 일이 영 둔하디 둔한 내가 어찌 알아, 그걸. 때문에 교과서 한번 처음부터 제대로 읽어본 준비없이 요약본을 먼저 본 것 같아 영 찝찝했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것처럼 시 못 읽어 본 나도 핑계를 댄다. 내가 아직 시선집 모아읽을 레벨이 안되는데 벌써부터 읽어서 아쉽다고. 감상만 잘한다면야 이리 읽든 저리 읽든 뭐 어쩌겠냐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웠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고, 모르면 이렇게 손해다.

 

 그래도 몇 몇 시인들 이름이 눈에 들어와서 그래도 한달에 한 권 정도는 시집'도' 읽자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덕분에 내가,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낯설지 않게. 다만 시인들의 시집에서 꼽힌 시들이 영 생소했다는 것은 아쉬웠다. 내게 무언가를 남긴 시가 꼭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중 하나로 여기에 꼽혀 올라올 정도면 나도 좀 주의깊게 읽었어야 했는데 대부분 무심결에 지나쳐버린 시들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새삼 눈에 들어오는 시들도 있었고 또 아직 읽어보지 않는 시집에 들어 있는 시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꼽아볼 수도 있었다.

 

 [ 타마리스크 나무 아래  - 신대철 "바이칼 키스"

 

모래폭풍이 땅을 뒤집는 순간 황야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두운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푸른 하늘, 붉은 흙먼지, 야생의 숨결을 받은 것들을 숨 돌릴 새 없이 몸부림쳤다. 무엇에 쫓겨 가는지 짐승들이 미친듯이 달렸다. 밤새 살아남은 발자국들은 거대한 먼지 굴 속에서 굴러 나와 먼지를 끌고 달렸다. 황야에 들어갈수록 긴 꼬리가 생기고 몸이 팽창했다. 달궈진 시간만 소멸하면서 생성되었다. 나는 내가 인간도 짐승도 아니라는 것 말고는,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무수히 태어난다는 것 말고는, 무엇이 소멸 속에서 생성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평선은 둥글고 향긋해도

 그 중심은 깊고 황막한 곳

 

다시 황야로 들어간다면 모래폭풍 넘어 타마리스크 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

 

 신대철 시인의 "바이칼 키스"라는 시집은 제목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읽었는가 헷갈릴 정도로 또렷하게 제목이 기억난다. 언젠가 읽어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미리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서 본문을 사진으로 찍어두기까지 했다.  '달궈진 시간만 소멸하면서 생성되었다. 나는 내가 인간도 짐승도 아니라는 것 말고는,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무수히 태어난다는 것 말고는, 무엇이 소멸 속에서 생성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는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이를테면 영화 "인터스텔라"가 떠오르도록. 같은 시공간 안에 무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그 의식은 끊임없는 신호로 보내질 수도, 존재가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을 수도, 어느 지점에서 존재하고 부재하는지도 모를 그런 모든 차원을 포함하고 또 넘어선 면을 그려낸 듯 했다. 황야와 사막을 말하는데도 우주를 떠올리게 만드는 점도 좋았다. 꼭 읽어야지.

 

 이 시와 같이 [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 함성호 "키르티무카" ] 시도 같이 적어뒀다. 내 느낌 상으로는 마치 연작처럼 보이기도 하고 신대철 시인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함성호 시인이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용 중에 [ 어머니 전 혼자에요 / 오늘도 혼자이고 어제도 혼자였어요 / 공중을 혼자 떠도는 비눗방울처럼 / 무섭고 고독해요 / 나는 곧 터져버려 우주 곳곳에 흩어지겠지요 / 아무도 제 소멸을 슬퍼하지 않아요 ... 후략... ] 하는 부분이 있는데 왜 내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지 소멸되면서도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는 존재로 남을 수 있는지 설명하긴 어렵지만 더불어서 느껴지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꼽은 시들은 공통점이 있는데 다음으로 적어둔 [ 책상 -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에서도 비슷한 감각이 나온다. [ 책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어요 / 나는 책상에 강물을 올려놓고 그저 펼쳐 볼 뿐이에요 / 내 거처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일 뿐 ... 후략... ] 여기서도 내가 존재하는 것이 어떤 확고한 지점에 확실한 존재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 어쩌면 순간 혹은 중복되어 산재할 수 있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그 모호함과 불확실함이 다른 두 편의 시와 비슷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책상'이란 시가 좋았던 점은 그 외에도 [ 나는 어스름한 빛에 얼룩진 짧은 저녁을 좋아하고 / 책 모서리에 닿는 작은 바스락거림을 사랑하지요 ] 하는 부분의 정경이 애틋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해서지만.

 

 읽지 않는 것인데 하고 생각한 것치곤 꽤 흥미롭게 읽었다. 문지의 시집을 고집스럽게 읽고 있는데, 고집스러운 것 치곤 더디게 읽지만. 시집 중에서 뭔가 기본을 제시하는 것 같단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기초영어 같기도 하고. 아직 안 읽은 100호, 200호, 300호도 곧 읽게 되기를. 이런 준비되지 않은 자세가 아니라 준비된 배경을 가지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귀한 매혹 문학과지성 시인선 344
양진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 첫 시집이 아닌가 생각된다. 언제 마지막으로 시집을 읽었더라 기억도 안나고 사실 이 책이 올해의 첫 시집이었는지도 정확하지 않은 기억이다. 각인된 첫 시집이라고 해두자, 새로이 시에 매혹되는 첫 시작인 것 처럼.

 

 시집을 들 때마다 하는 푸념이지만 '시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도통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책장을 넘기며 깨닫는 일이 시를 읽는 일 아니고 또 무엇일까 싶을 정도로. 양진건 시인의 시는 처음 읽는데, 역시나 누군들 구면이겠냐마는, 어떤 시들은 너무나 사소하여 못미덥다가도 어떤 시들은 또 낯설어서 막막하고 그런 기분 사이를 오가는 반복이었다. 익숙한 주제를 잡아 시를 쓰면 가슴 한 구석을 확 잡아끄는 힘이 없는 것 같아 아쉽고 도저히 알 수 없는 함축이 담겨 있는 시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은 커녕 머리로도 읽지 못할 것 같아 답답하니... 쉽사리 곁을 내어주지 않는 시.

 

 몇 권 읽어보진 않았지만 꽤 자주 시인들이 야생화같은 작은 풀꽃이나 자연물을 두고 시를 쓰는 것 같다. 양진건 시의 시집에서도 같은 주제로 쓰여진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공통된 시적 정서, 시스러운, 시다운 정서를 공감하게 된다면 뭔가 또 달라질까 싶다. 재미있는 건 표제작인 '귀한 매혹'은 "여러 종류의 버섯으로 요리되는 태국식 볶음국수"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버섯국수라 해도 될 법한데 굳이 볶음국수라 명명한 데서 오는 태국식 볶음국수의 맛나는 구조에서 의미를 찾다니. 재밌다. 게다가 태국식 볶음국수가 주는 매혹은 충분히 공감할만 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겠다.

 

 가장 인상적인 시들은 병원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것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문을 옮기려는 것은 '그들처럼 나도' 라는 시.

 

내 입원실 창 아래로

유년의 긴 골목,

양편에 흐릿한 옛집들이 서 있고

그늘에 치어처럼 아이들 서너 명,

어느 때인가 그들처럼 나도

지느러미에 빛 오를 적이 있었다.

삶은 그런 힘이려니 했지만

나뒹구는 신문지처럼 구겨진 내 생이여.

세월의 강은 유속이 빠르고

이젠 아무것도 아쉬울 것이 없는데

참으로 그리움이란 비루한 것.

입원실 창문을 닫으려니

모든 풍경이

이상하게 가볍다.

 

골목의 풍경을 너무나 공감할 수 있는 시여서 몇번이나 읽었다. 그러고보니 나도 완연히 어른인 것만 같단 생각도 든다. 해마다 나이는 먹어도 속알맹이는 변한 것 없이 그대로려니 했는데도 설명할 길 없는 이 적막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럽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의 전문을 옮긴다.

 

'환술'

 

TV나

인터넷만한 환술이

또 있을까?

환술의 호랑이가 오히려

마술사를 삼켰듯

그것들은

내 땀 냄새,

심지어는 내 혼절의 시간,

오늘은 내 그리움까지도 삼킨다.

어떤 쓸쓸함도 없다.

아, 씨발.

 

나름 오랜기간 동안 스마트한 삶을 거부해 왔었는데, 확실히 내 모든 것을 순식하게 스마트하게 만들어 버리는 기기의 사용은 보이기에 스마트할 지 모르나 매우 피폐한 것임을 통감하는 요즘이다. 정말이지, 내 모든 것을 삼켜 스마트하게 만드는 그 환술들! 그리고 그것에 속절없이 매혹되는 나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

아, 씨발.

 

 물론 다른 달콤한 시들도 많다. 예를 들면 '베추니아'"내 마음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아침이 오고/ 이제 횡포한 바람도 불 테지만/ 베추니아가 만개하는 동안/ 그리움은 더 견고해질 테고/ 당신을 잃어도/ 나는 당신 속에 있습니다." 하는 내용처럼. 읽고자 하는 사람을 두고 혼자만 멀리 가버리는 시들은 아니다. 오히려 함께 음미하자 권유하는 시에 더 가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289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집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를 고르면서 어딘지 모르게, 사실은 확실하게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양이 비디오를 보고 있는 고양이에 대한 사실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누구라도 그려지지 않을까, 고양이 비디오를 보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하지만, 이 시집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확실하게 그려낸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는, 시집은 그런 성질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그리고 저 고양이로 시작해서 고양이로 끝나는 시집의 제목이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지 먼저 떠올렸더라면 책장을 펼쳤을때 이런 당혹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 같다. 말랑말랑한 환상에 사로잡혔던 사람에게 주체와 타자와 언어를 넘어선 전위적인 시들이 밀려왔다고. 그것은 말랑하진 않아도 환상적이긴 했다.

 

시집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떠한지, 표제작인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의 전문을 옮겨온다. 이 제목에 매료되어 시집을 고르기도 했기 때문에 가장 기대를 했던 시기도 하고, 표제작은 다른 시보다 각별하게 느껴지는 그런 마음이 있는터라, 단 하나, 이 시만 골라서 옮긴다.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고양이 비디오를 틀어놓고

고양이가 하나 둘 셋

의자에 하나 둘 셋

바닥에 하나 둘 셋

창틀에 하나 둘 셋

 

고양이를 관람하는 고양이들

 

고양이를

관람하는 고양이를

관람하는 고양이들

 

거대한

고양이 인형들

 

모두들 고양이를 추모한다.

고양이 비디오를 틀어놓고

 

모두들 고양이 흉내를 낸다.

 

고양이를 끄고 싶은데

고양이 비디오를 끄고 잠들고 싶은데

비디오는 계속 돌아가고

 

고양이도 계속 돌아가고

 

고양이를 따라

고양이를 소비할 뿐

 

고양이 흉내를 내지는 않고

 

고양이 비디오 앞에

고양이가 하나 둘 셋

 

 

이 시에서 보는 것처럼, 고양이에 대한 경계가 어느 순간 사라진다.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들이, 어느새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를 보는 비디오 속의 고양이처럼 되어졌다가 또 고양이 흉내를 내는 고양이가 아닌 것으로, 또 다시 고양이를 소비하는 비디오가 돌아가는 것으로, 다시 고양이 비디오 앞에 선 고양이로 허물어져서 해쳐졌던 것이 원래의 것으로 돌아오며 끝을 맺는다. 대상이 무한하게 뻗어나가고, 세밀하게 나눠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려지는' 느낌의 시를 좋아하기 때문에 확장되고 압축되어 그리는 이수명의 시들이 읽기에 편하지 않았다. 그의 실험적인 언어들은 유희의 공간을 확장하고 언어들이 스스로의 밖으로 저항하고 해방하도록 도모했으나, 그 범위가 나보다 넓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두 문학과지성 시인선 342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두 시집을 선택한 이유는, 사실 별거 없다. 내 시집 선택 기준은 지나치리만큼 간소하고, 또 어떤 의미로는 난해할 정도로 복잡하다. 우선, 제목을 기준으로 선택한다.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이 어리석은 독자가 얼마나 어리석은 방법으로 읽을 책을 선택하는지 잘 드러나는 방법이다. 그리고 잠깐, 작품들을 살펴본다. 자세히까지는 아니고 어떤 분위기로 쓰여졌는지 확인해서 마음에 들면 집으로 가져오고,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면 다시 서가로 돌려놓는다. 그 두번째 선별 과정은 특정한 기준이 없이 그때그때 달라지기 때문에 난해할 정도로 복잡하다 할 수 있겠다. 두두 시집은, 제목이 주는 특별하면서도 단순한 어감이 재미있어서, 그리고 시집 안의 시편들이 짧고 간결한 점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두두 시집의 제목을 보고 느낀 것들을 생각해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시집 두두의 제목인 두두는 두두시도 물물전진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뜻은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도이며,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심오한 뜻을 가졌다. 아마 이 말을 알았더라면 어감을 재미있게 생각했다니,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두두 시집을 읽으면서 실험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실험적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되기 어려운데, 어떠냐면, 전체적으로 시가 굉장히 짧다. 단순히 짧다기 보다는 짧은 글귀들 사이로 기나긴 내용의 의미를 정제해놓은 함축적인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 안에서 서사가 느껴지고, 넘치는 느낌이 전해진다.

 

 

나무와 햇볕

 

 

산뽕나무 잎 위에 알몸의 햇볕이

가득하게 눕네

그 몸 너무 환하고 부드러워

곁에 있던 새가 비껴 앉네

 

 

 

새와 날개

 

 

가지에 걸려 있는 자기 그림자

주섬주섬 걷어내 몸에 붙이고

새 한 마리 날아가네

날개 없는 그림자 땅에 끌리네

 

 

나무와 허공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무엇과 무엇이라는 두 대상을 두고 쓰여진 시가 많다. 일상적인 모습을 시로 표현했으면서도 그 교차점이 일상적이지 않은, 시인만의 눈을 거친 표현으로 다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떤 부분이 어떻다고 짚어말하기 어려운데, 새와 날개를 두고 보면, 날아가는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가 땅 위에 나타난 것을 땅에 끌리어간다는 표현으로 나타낸 점이 내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연이어 옮겨놓은 세편의 시들은 다 그러한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들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페이지의 뒷편을 시인이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겨울 a

 

 

콩새가 산수유나무 밑을 뒤지고

오목눈이들이 무리 지어 언덕에서 풀씨를 뒤질 때

 

 

식탁 위의 감자튀김(올리브유에 튀긴)

내가 뒤지는

 

 

이 시는 개인적인 경험이 떠오르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느껴져서 옮겨놓았다. 오목눈이들이, 콩새가 먹이를 찾는 모습을 시인에게로 또, 나에게까지 확대되어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시였다. 식탁 위의 감자튀김을 뒤지는 행위를 일상적이게 느끼도록 하면서 더 넓은 범위의 행동으로 확장시켜놓은 것도 같았다. 올리브유에 튀겼다는 디테일까지도 재미있었고. 시인의 유고 시집이었다고 한다. 뒤늦은 부음을 들은 셈이다.

 

 

** 두두시도 물물전진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도이며,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다는 의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