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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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볼트, 너트, 전선과 드라이버가 얽힌 세계에서 그의 시간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그러다가 윤정화를 만나게 되었다. 윤정화는 지금까지 김병권이 알고 있던 세계의 생명체 중 가장 복잡한 존재였다. 그를 가장 매혹시키는 점이 그 점이었고,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점 역시 그 점이었다. 김병권으로서는 윤정화를 구성하고 있는 볼트와 너트, 전선과 동력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부품들이 망가지지 않도록 김병권은 윤정화를 가장 섬세한 전자기기를 다루듯 조심해서 다루어왔다. (109) "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을 가장 처음 연 것은 " 나 유부인 거, 정말 몰랐어? 대충 눈치 챈 거 아니었어? 자기가 워낙 쿨하길래, 나는 아는 줄만 알았는데.(85) " 이 뚝배기를 깨버릴 문구였다. 사실 저 문구와 제목을 함께 봤을 때는 어떤 팜파탈같은 여자가 할 법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읽으니 저말을 묵묵히 듣고 있는 건 여자쪽이었다. 정말 몰랐을까 하며 읽었는데 마침 또 온 인터넷에 여자친구 몰래 다른 여자와 결혼식을 한 남자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작정하고 속이는 놈과 옆에서 '의리'지키며 침묵하는 놈들 사이에서는 피해자가 당해낼 수가 없겠다. 각종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두고 '소설'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더하다.

 

 무엇보다 에필로그와 작가의 말이 가장 강렬했다. 그 앞으로 죽 늘어선 단편들은 이 마지막을 위한 빌드 업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가끔 시청자에게 사연 받아서 연애문제를 재연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면 아, 저기에 글 써서 보낼 시간에 그냥 헤어지면 될 것을. 하고 생각하곤 하는데,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에 담긴 얘기들은 그보다는 좀 덜 답답하고 좀 더 궁상맞다. 요즘 나오는 사연들은 앉아있던 패널들도 벌떡 일어서게 할만큼 기발하고 다양하게 분통터지던데, 책은 적어도 10년 정도 전의 감각이라 된장녀, 김치녀(혐오표현주의)같은 가난한 사랑노래 형식들만 조심하면 된다. 거기에 요즘 다양성을 이유로 필수로 끼워넣는 넷플감성이 없어서 더욱 아날로그적 전개로 느껴진다.

 

 클리셰들을 잔뜩 쏟아부어 놓았는데, 그때마다 웃겨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바바리맨을 만났을때 오히려 패기있게 나가면 변태쪽에서 기겁하고 도망친다는 썰(184)이나, 실수로 옆집 문을 열어 들어갔는데 침대 위에 옆집 사람이 헐벗은 채로 잠들어 있다(162)는 골자로 골방 문학계의 대표적 도입부가 나올 때면 입 밖으로 터져나오는 실수를 막을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단편'부장님 죄송해요'는 친구랑 나누는 대화 부분도 일명 싼티가 작렬하는 내용이라 항마력 끌어모아 버티며 읽는다. 저 두 단편이 특히나 길티플레져로 꼽힐만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착한 남자 김병권이 보인 태세전환도 재밌게 봤다.

 

 " 김은정은 빽 소리쳤다. "야, 나 아줌마 아니거든? 어디다 대고 아줌마래?" 남자는 움찔했다. "그러면...... 아가씨는 집에 가세요." (133)"

 

 솔직하자면 조금 조악한 듯도 했다. '82년생 김지영'이 파격적이었던 것은, 대문자로 아로새겨져 이리저리 조리돌림 당하고 돌팔매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 등장했기 때문이리라. 그 뒤로 나오게 된다면 같은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 이상의 방식과 그 이후의 현실-그게 넷플감성이라면 더 별로겠지만-을 갖춰서 나와야 한다.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은 재밌긴 했지만, 되풀이되는 했던 말과 언제쯤을 말하고 있는거지 싶은 지나감이 느껴졌다. 우리가 '이거 정말 진짜'같은 현실반영을 원하긴 하지만, 통속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근근히 등장하는 '된장녀'같은 말들은 이미 죽은 말이다. 커피 한 잔 마음대로 사마실 수 없도록 여성을 압박하던 그 낙인같은 말이 한물 간 유행어로 치부되는 것이 한심스럽긴 하지만, 이제 사어가 됐을만큼 세상이 변하긴 했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 쯤은 마셔도 거품물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것이란 사실이 남성 세계에도 충분히 전파된 지금, 신간 700원 구간 300원하는 만화 대여점이나(28), 데이트 통장(152), W호텔의 운우지정(173), 캐러멜모카 프라푸치노(27)나 칵테일 몇 잔에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여자에 대한 서술은 낯설다. 방정리하다 구석에서 찾아낸 예전 물건들보는 느낌처럼 낯설다. 만화 대여점들이 대부분 사라져 찾아보기 힘든 것처럼, 책속의 배경들도 그렇다. 

 

 재밌게 읽긴 했지만 다소 아쉬운 면면들이 눈에 밟혔다. 오랜 침묵 끝에 나온 글들이 그만큼의 세월을 담은 것인지, 지금에 국한 된 것이 아닌 시대적 여성의 삶을 폭 넓게 담으려 했던 것인지 생각해본다. 덧붙여 그동안 광장을 가득 채워왔던 시위들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이 보였다. 민주투사가 된 기분을 맛봤다거나, 소개팅 자리에서 오갈 법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냉소를 넘어선 듯도 했다. 세상엔 여러 사람, 여러 생각이 있으니까. 읽으면서는 여자들이 좀 더 똑똑하게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다 읽고 난 뒤에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적당히 똑똑하고 또 적당히 착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65쪽 상 8 그 애도 했을 걸?" -> " 생략

138 상 6 / 143 상 1 흐름이? 맞지 않음 

189쪽 하 7 이 아저씨가 누구보고 미친 여자래! -> 미친 여자란 말이 전에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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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마음
이두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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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 앞이 보이지 않는 자들의 도시에서 눈을 가리고 있는 가림막을 제 스스로 걷어내버린 사람의 ‘타오르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더해가는 여름의 온도만큼이나 몰입도가 확 올라가는 탄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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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마음
이두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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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인사건으로 돈을 버는 마을이 있다?' 얼핏 서프라이즈나 생생정보통의 성우 톤으로 읽게 되는 단 한줄의 문구가 '타오르는 마음'의 거의 유일한 단서였다. 살인사건으로 돈을 버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하나, 청부를 받아서 진짜 사람을 죽인다. 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꾸며내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셋, 살인사건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대신 처리해서 돈을 번다. 이 세 가지 정도가 한줄의 단서를 가지고 내가 예상해 본 빈약한 마을의 비밀들이었다. 예상은 어느 정도는 맞았고 대부분은 틀렸다. 생각 이상으로 복잡한 인물과 사건들 탓에 저 세가지 추측 정도로는 이 이야기의 어떤 축도 세우지 못했다. 책을 읽기 전 당신은 어떤 예상을 할 수 있을까?

 

"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오기와 내 조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누구 하나 상황을 진정시키거나 멈춰 세우는 법이 없었다. 우리는 달릴 줄만 아는 수레바퀴였고, 그 질주는 꼭 바퀴가 망가지거나 수레가 똥더미에 처박혀야 끝이 났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태져 똥더미를 향해가는 그런 사이. 하지만 마음만은 기가 막히게 잘 맞았던 걸로 기억한다. (98) (413)" 

 

 밴나는 8년 전 있었던 살인 사건의 목격자다. 작고 쇠락한 마을인 비말의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살인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그들은 목격자이기도 하고, 용의자이기도 하고, 유가족이기도 하고, 추격자이기도 하고, 또 범인이기도 하다. 밴나는 과거의 이상행동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그녀가 하는 말은 대부분 무시당하고, 행동에는 제약이 따른다. 그런 그녀를 유일하게 받아주었던 나조가 살해당하자 밴나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를 둘러싼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밴나 본인도 어리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그녀의 추적은 브레이크가 없이 질주하는 수레처럼 위태롭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숨기는 것 없이 다 보여주는데 왜 이렇게 길이 복잡하지 어리둥절했다. 하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 큰 판을 솜씨좋게 오려내 전혀 다른 순서로 끼워맞춰놓은 것을 정리하며 보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뒤집힌 수많은 카드들을 딱 두번씩만 뒤집어가며 같은 패를 찾아내는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먼저 뒤집힌 그림들이 짝이 맞지 않는다면 다시 돌려놓되, 그게 뭐였는지 기억해야 게임에 유리하다. 기회를 놓치면 내가 뒤집어 확인해놨던 패를 저자가 먼저 맞춰 들이미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봐야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먼저 맞추는 경쟁은 아니지만, 무심결에 지나쳤던 대목이 나중에 결정적으로 다가오면 눈치채지 못했던 게 아쉽다.

 

 읽는 동안에는 흥미진진하게 몰입할 수 있었지만 다 읽고 난 뒤에 차분히 생각해보니 언제나 이유는 참 별 것 아닌데 사건은 크게 벌어진다 싶었다. 소설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사람의 마음이 타오르기 때문에, 분노나 고통이나, 정확히는 욕망에, 그것들이 굴절되어 나타나는 모습이 이럴수도 있구나 싶어진다. 읽을 때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서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건지 파악하기도 어렵고, 다수의 억압이 소수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가장 무서워보였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를테면 마피아 게임을 하는데 아무도 내가 시민임을 믿어주지 않고 몇 판 내리 시작만하면 무조건 죽인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좀 이상한 비유같지만 비말의 분위기도, '범인'을 잡는 축제의 게임도 그 이상으로 가혹했다. 가짜 광기와 진짜 광기의 차이점도 실감했다. 결국 살아남는 자는 진짜뿐이었다.

 

 무대는 별 것 없는 쇠락한 마을인데 축제 시기와 겹치면서 너무 복잡하게 많은 일들이 생겨난 것도 난감했지만, 읽으면서 가장 몰입이 어려웠던 부분은 '깡'이란 의성어들이었다. 이쯤되니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집중하고 있다 갑자기 몰입이 확 깨져버렸다. 비운의 망곡이었던 비의 '깡'이 갑자기 밈화되어 이렇게 되살아나지만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도배된 깡들을 바라보며 이게 다 몇깡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모르 파티'라는 말의 뜻이 마음에 들어 문신으로 새겼는데, 갑자기 김연자 선생이 노래로 불러 문신을 볼 때마다 난감해졌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세상은 그렇게 공교로운 일이 생기기도 한다.   

 

 " 산 사람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그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굴절된 자아의 투영이나, 집요한 소유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없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만일 이 사실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 우둔함에 축하를 보내고 싶다. 그렇듯 우둔하게 살다가 우둔하게 뒈지는 건 어떤 면에 있어서는 축복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인간은 인간의 쓰레기통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감정의 배설을 쏟거나, 진짜 배설물을 쏟는다. 그들은 그렇듯 서로에게 똥칠을 해대다 죽는다. (76) "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설에서 사랑에 대해 말하는, 사랑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사랑과 가장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누구보다도 사랑을 집요하게 해체하려 들었다니. 그런데도 책을 읽으면서 이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고 공감됐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정신없이 끝을 향해서 내달리듯 책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오로지 끝이 궁금하다는 마음에 서둘러 읽어내느라 지나쳐버렸던 것들이 눈에 밟혔다. 자꾸만 그 사람의 행동을 의심해볼걸, 이 사람이 한 말이 뭘 가리키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을텐데! 하며 아쉬웠다.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될까 궁금하더라도 꼼꼼히 살피며 천천히 한번에 읽어내거나, 성격이 급해 달리지 않고는 궁금해 못 견딜 것 같은 사람은 필히 한 번 더 읽어야 만족스러울 것이다. 끝을 알아도 서두르느라 놓쳤던 것들을 다시 찾아내 이걸 왜 놓쳤지?! 하며 곱씹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현실과 환상, 앞이 보이지 않는 자들의 도시에서 눈을 가리고 있는 가림막을 제 스스로 걷어내버린 사람의 '타오르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더해가는 여름의 온도만큼이나 몰입도가 확 올라가는 탄탄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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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시작은 아르테 미스터리 9
오리가미 교야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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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었다. 처음에 책을 읽기 전에 '종족을 초월한 사랑이야기'라는 소개가 있어서 문득 우리집 강아지를 떠올렸었다. 남들이 보기엔 개겠지만 내 눈에는 언제나 강아지인 그애를 떠올린 것도 반쯤은 장난스러운 연결이지만 나름 의미는 있었다. 종족을 초월한 사랑이라고 하니 문득 집에 들어설 때마다 그애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가움으로 나를 맞아주는 것, 사랑스러운 보드라운 털이나 따뜻한 온기, 약간 흙이 묻은 냄새 같은 것들을 생각했다. 곁에 앉아 놀아주면서 정성껏 손이나 팔을 핥아주는 신뢰 가득한 보살핌을 받고 있자면, 그만큼의 애정으로 얠 보살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쨌든 종족을 초월한 가족을 두었으니, '세계의 끝과 시작은'에 공감하며 읽게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확실히 묘한 접점이 되기는 했다.   

 

 처음 책을 봤을 때 요즘은 이런 표지 스타일을 잘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제목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눈에 확 들어왔다. 밤하늘과 달, 소녀의 뒷모습이 감성적 코드를 점철해놓은 것처럼 보여도 도입부의 모든 주요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장치'라 다 읽고 나서 보는 표지는 또 새롭다. 처음엔 표지와 제목만으로도 감성이 울렁울렁해지는 느낌이라 소년과 소녀가 만나서 이어지는 청춘물의 미묘한 느낌이 더 많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내용적으로도 그렇고, 어린 소년이었던 도노가 9년이라는 기다림의 시간동안 성인으로 성장하여 대학생이 되버리는 바람에 풋풋말랑한 감성이 아니라 좀 음침능글한 기운이 많아졌다. 풋풋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잔혹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도 수상해진다. 흡혈종이라는 이종족을 설정해두고 조금씩 건네지는 정보를 모아 인물들에 대해 파악해보는 재미도 크다. 증거로 생각했던 장면이 단서가 되기도 하고,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한 부분에 통로가 있기도 했다. 적당히 추측도 하고 헷갈렸다가 확신하기도 하면서 읽었다. 연쇄적인 살인 사건들이 일어나기는 해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무겁지 않아 적당히 즐기면서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감성 미스터리'라는 말에 신파로 가려나 싶은 느낌도 있었는데, 어찌됐든 보편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 전개도 좋았다. 식스센스급 반전이라고 할만큼의 놀람은 아니어도 낯선 동네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다 마주칠 수 있는 귀여운 고양이나 괜찮은 카페, 뜻밖의 풍경을 만나는 의외성이 있다.

 

 생각해보니 여기서 가장 놀랍고 무서운 부분은 도노가 11살 때 딱 한 번 만난 여자에게 첫눈에 반해 9년동안 한 사람만을 맹목적으로 좋아해왔다는 것이다. 11살에 첫사랑이라니 조숙하기도 하고, 한번 본 상대의 예쁜 외모를 그림으로 복기해올만큼 집착적인데다가, 다시 만난 첫사랑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면 미성년의 외모일텐데도 거리낌없이 접근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흡혈종이나 헌터나 다른 내용은 다 깔끔하게 받아들였는데도 아카리의 외모가, 외모만일 뿐이지만 미성년 상태일거라는 점이 내 마음 속 유일한 브레이크가 되었다. 도노는 한국이라면 군대갔을법한 시기의 성인인데, 그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계획적으로 접근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음... 뱀파이어와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전개상 인물들의 외모가 다 준수하게 묘사되는 편이라 대학에 가도 이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수상쩍은 동아리 활동 같은 건 없어, 다 거짓말이야, 같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언젠가 영화같은 영상매체로 나온다면 기대되겠구나 싶었다. 늘 물감을 묻히고 있는 이젤 앞의 미녀, 훤칠하고 서글서글한 미남, 인기많고 엉뚱한 매력의 미녀와 함께 적당한 평범남이 아름다운 모습의 기억 속 첫사랑 소녀와 처참한 현장의 미스터리한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내용이라니. 주인공이 적당한 평범남으로 표현되는데다가 유일한 걸림돌이되는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끝까지 신경쓴듯한 마무리와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전개가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읽기 시작하니 끝까지 쭉 책장을 넘기게 된다. 언제고 도노, 아야메, 사쿠, 지나쓰가 얽힌 이야기를 한 편 더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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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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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 그렇게 되었다. 소문 속 그 여자애가 되었다. (132) "

 " 모두 연기 같았다. 2008년 7월 14일의 자기만 진짜 같았다.(184) "

 

 전부터 목록에 올려놓았던 책인데, 천천히 읽고 쓰는 것은 그보다 더 오래 걸렸다. 학교 다닐 적에 누군가 물건을 잃어버리면 선생님은 그 물건을 가져간 사람과 잃어버린 사람을 둘다 혼냈다. 가져간/훔쳐간 사람도 잘못이 있지만, 자기 물건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사람도 잘못이 있는거야.라는 말, 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 맞는 줄 알았다.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도 내 물건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잘못이 있고 그래서 이렇게 교실의 분위기를 흐리게 만든 잘못이 있다고. 물건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누가 친구의 물건에 손을 댄 것인지 친구를 의심하게 만든 잘못이 있다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정말 잘못이었을까 싶어진다. 선생님에게 학급문제라는 골치거리를 안겨준 잘못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아니었나.

 

 피해자에게 책임묻기, 피해자의 무결함을 따지는 일은 그런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건 아니었나 생각했다. 범죄의 피해자에게 '왜 조심하지 못하고'라는 말이 따라붙고, '어쩌다가'라는 말에는 늦은 시간이나 외진 길이나 어떤 옷차림었던가 같은 부연들이 뒤를 잇는다. '마치 네 물건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그걸 훔쳐가고 싶게 만든 너의 잘못도 있는거야' 라는 비논리처럼. 그 모든 꼬리표는 사실 무용한 것이고, 단지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르기로 마음먹고 실행한 행위가 잘못일 뿐이다. 오히려 평소 그런 사람이 아닌데 우발적으로, 혹은 술김에 실수로 라는 덧붙임이 가해자의 면책을 돕는다.

 

 제야가 술을 마신 것은 그 행위 자체로 피해자를 흠집내고, 당숙이 술을 마신 것은 취해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던 상황으로 참작된다. 하지만 피해자가 그날 입고 있었던 옷은, 머물렀던 장소는, 취할 수 밖에 없었던 행동은 범죄피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가해자가 평소에 열심히 일한 것은, 이웃 사람과 인사를 잘 나눈 것은 저지른 죄의 면책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상황들은 시비를 가리는 상황에서 너무나 쉽게 자주 불공정하게 고려된다. 피해자의 순수성, 피해자다움을 두고 제야는 " 어째서 내가 의심받는가. 어째서 내가 증거를 대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설명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사라져야 하나. (133) " 괴로워한다.

 

 책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오늘 200만명이 넘게 청원에 동의한 N번방 유료회원들의 신상공개 청원이 불발되었다. 신상을 공개하지 않기로 한 경위가 마뜩찮았다. 경찰이 내놓은 '범죄예방 효과 등 공개에 따른 실익이 높지 않다고 판단해 회부하지 않기로 했다' 는 말에 이 필수적인 절차에서 따져야 할 '실익'이 무엇이며, 이 파렴치한 범죄 행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왜 전달되지 않는지, 가해자/가담자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상황이 뭔지 경찰이 정말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현실인가 의문스러웠다. "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진짜 알게 되는 것의 간극은 크고 깊었다. (48)" 는 말이 나오는데,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마땅히 옳게 가야한다고 믿는 길과 현실이 보여주는 굴절의 격차가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 제야는 사람이 저마다 다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사람이 선해지고 나빠지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섭리가 있다면, 삶의 지도가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었다. 다른 길이 있는지, 다른 삶이 가능했던 건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더라도 알고 싶었다. 그럼 조금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60) "

 

 " 제야는 울고 싶지 않았다. 울면 멈출 수 없고, 밤새 울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약해지는 것 같았다. 제야는 벌떡 일어나 앉고 싶었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기지개를 켜고 크게 소리를 내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굳은 채로, 무거운 채로 할 수 있는 건 우는 일 뿐이었다. 제야는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155) "

 

 책에서 제야의 괴로움이 드러나는 부분들이 사실적이라 어렵고 버거웠다. 그리고 실제로는 이보다 더 고통스럽고 아플 것이라 짐작하니 막막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요즘은 사람이 제일 무섭고 험해서 어떻게 살아내야할지 염려스럽다. 우리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악의를 품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 만만해보이는 사람을 골라 일부러 밀치고 시비를 걸다 느닷없이 이유없는 폭행을 가하는 사람을 마주하게 될 것인지 아닌지 모른다. 일단 피해를 입고 난 뒤에는 피해자의 생존과 안전은 어디에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는 씻을 수 없는 충격과 상처를 남기는데, 가해자의 인권이 집중적으로 보호를 받는 현실이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법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피해자의 권리가 일방적으로 침해당했음에도 왜 충분히 해결되지 않는 피해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 나는 그가 스스로를 혐오하고 증오하길 원한다. 내가 나를 혐오하게 된 만큼, 증오하고 자책하고 망가뜨린 만큼, 아니 나보다 훨씬 더 크고 깊게, 변명 없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수치스러워하길.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렇다면 ...후략...(200)"

 

 우리 사회의 끔찍한 범죄자들이 마땅히 죄값을 받기를 바란다. 피해자가 고통스러운만큼, 피해를 입은 그 이상의 처벌을 받아야 옳은 게 아닐까. 그래야 누군가는 엄중한 규율의 무게를 의식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규칙이 언제고 필요할 때 구성원들을 지키고 보상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최소한 잘못에 맞는 댓가를 치를 수 있도록 단죄할 시스템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믿음을 갖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혐오스럽고 역겨운 범죄들에 지쳤고, 가담자들에게 그만큼의 죄값이 지워지기를 바란다. 이 간단한 사회의 정의가 구현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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