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투자은행 2
구로키 료 지음, 최고은 옮김 / 펄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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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을 읽어내는 호흡은 1권때보다 빨랐다. 우선 생소한 경제와 관련된 용어들을 수월히 넘기는데 더 익숙해졌기도 하고, 주 인물로 나오는 가쓰라기에 대해 더욱 관심이 깊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함께 묘사되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가쓰라기는 성장이 더디게만 느껴졌는데 2권에 들어서는 가쓰라기의 역정이 좀 더 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사건이 생기면서 흐름이 재미있어진다.

 

재미있는 점은 시대의 흐름을 넓고 긴 폭으로 그려내듯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현실성이 느껴지는 내용에 빠져들어 마치 진짜 있었던 일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특히 2권에서는 쌍둥이 빌딩이 테러를 당한 때의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그 현장에 주인공인 가쓰라기가 있었고, 극적으로 건물에서 탈출해 살아남았다는 내용이 있어서 더욱 흥미로웠다.

 

주인공인 가쓰라기는 마치 작가가 그려낸 이상적인 인물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으로 보는 내내 그에 대한 호감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무조건 수익을 내기 위해 직장을 옮기고 고객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합의점을 찾아 일을 하고 돈만이 아니라 비전이나 의미까지 생각하며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중점적으로 그려져 좋은 인물로 여겨졌다.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도 그가 약진하기를 바라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가쓰라기가 갈수록 성장하게 되고, 함께 그려지는 인물들 역시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이야기가 끝나게 되는데 많은 분량의 소설에 비해 결말을 다소 미미한 느낌으로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미진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전형적인 평범함과 성실한 인물상을 잘 구상한 것 같으면서도 가쓰라기에게 아이가 없었다는 점도 읽으면서 의아하게 여겨졌던 부분 중 하나이다. 1권 정도 더 나올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만들기도 했고.

 

아쉬웠던 점 중 하나는, 히로시마 원폭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안고 살아가는 피해국가의 모습으로 일본의 위치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과거를 잊으면 안된다는 말이 나오거나, 역사 의식이 희박해지는 일본의 젊은 세대를 경계하는 듯한 표현이 있는 부분을 보며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그 외에는, 일본이 경제대국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므로 일본인의 비약적인 활약을 강조한 것들은 그냥 받아드릴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였다.

 

일주일 가량을 이 책과 함께 심심치않게 보냈다. 펄프의 다른 시리즈들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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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고 있습니까 - 영화감독 김종관의 60가지 순간들
김종관 지음 / 우듬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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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와 제목에서부터 감성적인 느낌이 묻어난다. 사라지고 있는가를 묻는 제목. 무엇이 사라지고 있다는 뜻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삶의 한순간들이 하루가 저물어가듯 시간이 흘러 오늘이 어제가 되듯 사라짐을 말하는 것인지, 기록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결국 잊혀지고 옅어져 사라짐을 말하는 것인지, 결국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사라짐은 그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책 안에 담겨있는 수많은 순간들은 사라지고 다시 쓰여지고, 흐려지고 기억되고, 옅어지고 읽히는 일들을 반복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와 같은 아름다움을 봤다고, 그때 나는 생각했다.'

 

사진과 아름다운 문구가 들어간 책에 대한 불신을, 당신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을까? 감성의 과잉, 넘쳐나는 미사여구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이것은 마치 애증과도 같다. 좋아하나 싫은, 싫지 않으나 피하고 싶은. 눈물이 점점 없어지게 된 이후로 나는 말랑거리고 달콤하고 부드럽게 달라붙는 이야기들이 싫어졌다. 좀 더 단도직입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는 것들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그런 것들을 가까이하고 있으면 간지러움을 느끼거나, 싸구려 감성에 취하거나, 애써 아무 동요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태연자약한 모습을 위장할 필요가 없었다. 냉소적인 느낌의 블랙유머에 가끔 웃을지언정, 유치한 설정에 사사로이 마음 쓰는 일이 불필요하다 여겨졌던 것이다.

 

이 책에 대해 기대를 걸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신을 지울수가 없었다. 결국은 그렇고 그런 책처럼 여겨지게 될까봐 혹은 내가 너무 쉽게 부드러운 감성에 푹 빠져 동화되어 버릴까봐. 책을 읽으면서 몇번이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저 이 글을 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불현듯 궁금해져서였다. 처음에 이름만 보고 남자라고 생각했다가, 중간에 날개에 실린 사진을 언뜻 보고 여자라고 생각했다가, 좋아했던 여자아이 이야기가 나와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남자였다. 그라면, 그녀라면 하고 몇번이나 이 글을 쓴 사람에 대해 떠올리면서 글을 읽었는데 그의 문체에 빠져들게 되어 좋았다. 감성적인 노름에 휩쓸려버렸다고 해도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문체의 글을 쓰는 점이 좋았다.

 

어떤 부분은 비약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있었지만, 작은 단어에서부터 풀려나오는 이야기를 보고 있자면, 같은 빛깔의 유년과 닮아있는 도시의 한 켠을 걸어본 적 있는 것 같아 낯설지 않아 좋았다. 솔직한 부분도 있고 마치 프리즘이라도 거친 양 아름답게 재탄생한 것 같은 부분도 있었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사실 그대로의 모습일 수가 있을까 결국은 내 필터로 묘사되는 것인데. 하고 이해되는 정도였다. 애정을 바탕으로 한 유년에 대한 아름다움이 녹아들어가서 더 좋았을 거란 생각도 한다. 지금, 한 계절이 사라지고 길었던 낮이 밤으로 사라지는 이 때에 읽으면 좋을 책이다. 추운 거리에서 벗어나 어디고 노란 불빛을 밝힌 커피숍이 눈에 띈다면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 안에 들어앉아 밖의 성마름과 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특히 공감했던 구절은,

"어쩌면 그 후로도 내게 사랑의 방식은 같다.

아름다움을 보고, 부러진 날개를 보았을 때 사랑이 시작된다."

결국 이 에세이의 모든 시작은 사랑할 만한 대상의 가장 연약한 부분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의 시작 중 절반은, 바로 그 지점일지도 모른다. 혹은 내 부러진 날개를 보았을 때 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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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은 바에 있다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1
아즈마 나오미 지음, 현정수 옮김 / 포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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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은 적지 않은 편인데, 내용은 많지 않은 편이라 아쉬움이 컸던 책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추리 소설인데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실망감을 느끼며 읽은 책이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읽는 동안은 끝까지 희망을 간직하느라 실망감을 느끼진 않았고, 끝내 희망을 찾을 수 없이 마지막 장을 넘기는 바람에 실망감이 몰려왔던 책이다. 곧 재미있어질거야, 한방이 있을거야 하는 기대를 안고 마지막장까지 가기는 가게 됐다. 전혀 재미없는 책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좀 실망스러웠던, 다음권은 읽지 않을거야. 하고 생각하게 됐던 책이다.

 

실망스러운 점 첫번째는 주인공이다. 매력있는 인물로 그리려고 했던 것 같으나 그저 부산스러운 인물로 여겨질 뿐 매력있는 인물은 되지 못했다. 뒷골목 바를 전전하여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는 한량같은 인물. 얼핏 인상은 야쿠자같은데 야쿠자는 아니고, 독설가에 싸움도 어느정도 하는, 여기저기 아는 사람도 많고 세상 이치에도 밝고 똑똑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 뿐, 매력이 없다. 추리소설의 매력은 엄청난 수수께끼를 품은 듯한 미스터리어스한 사건이나, 기괴하고 숨가쁜 살인사건들이나, 매력적인 주인공에 얽힌 사건들을 함께 따라는 맛인데. 이정도 인물이면 매력이 충분할거야, 하고 제시한 인물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좀 심각한 문제다. 문체 탓이 좀 있는 것 같다.

 

두번째는 이야기 자체가 영 싱겁다는 것. 사건이 점점 복잡해지고 갈수록 모든 일이 수상해지는 끼가 느껴지거나 급박한 속도가 붙어야 하는데, 자질한 사건들만 올망졸망 이어지다 결국은 부산하게 잡다한 인물들만 나온다. 그리고 연결되는 두 사건의 개연성이나 드라마틱한 느낌도 별로 없다. 그러다가 어영부영 사건의 진실이, 그것도 아주 사사로운 결과를 보여주며 드러나게 된다. 결국 끝까지 뭔가 재미있는 결말이, 생각외의 반전이 있을거야 하고 붙잡아 오던 희망까지 사라지고 실망감이 따라온다. 모든 이야기에 엄청난 반전이 있을거라고 기대하는 것도 요즘 영화나 장르 소설의 정형화 된 트렌드를 좇는 것 같아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외에 다른 재미가 없다면 반전이라도 있어야 했었다. 이 소설은.

 

또 하나는 문체 문제다. 일본식의 문체가 불편하게 느껴졌던 최근의 기억은,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 였다. 실례지만, 아가씨는 멍청이이십니까? 뭐 이런 식의 말을 집사가 아가씨에게 천연스럽게 던진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최근에 2권도 나온 것 같다. 어쨌든, 가벼운 내용의 추리 소설이었는데, 짧은 사건들이 몇개씩 묶어 들어있는 식으로 되어 있어서 이 책보다는 읽기 편했지만, 저런 식의 글투로 되어 있어서 약간 시쳇말로 오그라드는 경험을 하도록 만드는 책이었다. 저런 식의 글이 보기 불편하다면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와 '탐정은 바에 있다'를 읽는 것은 피하기를 권장할 정도이다. 완전히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이 책의 주인공 역시 밤거리의 자부심에 가득찬 사고와 행동, 말투가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잔뜩 멋이 들어간 느낌이지만, 유행이 지나간 멋을 부리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불편하고 웃긴 느낌이다. 여대생의 실종 사건으로 시작해서 두 구의 시체가 생기게 되는 살인사건으로 이어지기 까지의 과정도 읽는 이의 마음을 확 사로잡을만한 임팩트도 부족했고. 어떤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아할지 모르겠다. 장르 소설 좋아하고 시간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 분량이 많지만 책 무게가 가벼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 그냥 활자가 좋은 사람? 생각 이상으로 차가운 평을 쓰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는 것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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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금지 리스트
레이철 콘 외 지음, 황소연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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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어? 라는 질문에 책 제목을 말할 생각을 하면서 어쩐지 민망스런 느낌이 드는 제목의 책이다. 달달함이 저절로 느껴질 법한 제목과 표지의 색감,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간 낯선 외국인들의 사진. '키스 금지 리스트'라니, 굳이 그런 걸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 책이 가진 요망함- 혹은 잔망스러움은 인물과, 관계 설정에서 드러내놓고 나타난다.

 

나오미는 굉장히 매력적인 외모에 개성적인 성격을 가진 거칠면서도 여린, 종잡을 수 없는 그래서 더 주위의 시선을 끄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여자아이인데, 여성이라고 할 수도 소녀라고도 할 수도 없는 묘한 위치에 있다. 성숙의 과정에 들어서려 하는 미성숙한 여자아이. 그러나 매혹적인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 사실을 그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아무 물정도 모르는 여자아이처럼 보여진다.

 

일리 역시 매력이 넘치는, 넘치다 못해 위험하기까지 한, 게이 남자아이로 그려진다. 마치 나오미가 남자로 그려진다면 일리와 같아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둘은 비슷하게 보여진다. 정신적인 쌍둥이라고 표현해도 좋을만큼. 그리고 소설 속에서 두 사람은 쌍둥이 이상으로 깊은 유대를 갖고 붙어 다닌다. 남자를 좋아하는 나오미와, 남자를 좋아하는 일리가 서로 남자를 두고 다투지 않기 위해 키스를 하면 안되는 사람들 목록을 만들 정도로.

 

그런데 문제는 나오미의 남자친구인 두번째 브루스가, 일리와 키스를 했다는 것. 또 하나의 문제는 나오미의 남자친구인 두번째 브루스는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그들의 키스 금지 리스트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 이 일로 인해 나오미와 일리의 단짝 사이는 금이 가 순식간에 벌어지고 만다. 두 사람이 하나였다가, 둘로 나뉘어지는 과정을 여러 인물들의 시선으로 옮겨가며 풀어낸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이다.

 

"나오미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을 보면 사태가 점점 꼬여 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만약 나오미가 죽는다면 나는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며 깊은 슬픔에 젖을 테고, 모두의 이해 속에서 결국은 시련을 극복하고 그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내가 뭘 어쩌고 할 것도 없을 테고 말이다.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오미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나오미가 살아 있어서 기쁘다. 죽어 버린 것은 아름다웠던 우리의 추억들이다."

 

너무나도 예쁜 소녀와, 너무나도 멋진 게이 소년이 주인공이 되어 그들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과 마주하고 각자의 자리를 찾아 가게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단순히 로맨틱한 러브코미디나 그래서 결국 그녀는 완벽한 남자를 만나 행복해졌다는 로맨스 소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느껴지는 와중에 인물들이 어떤 단계를 넘어 성장을 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처음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때, 중간 중간 그림으로 간단한 단어나 표현들이 대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미국식 귀여니체의 등장인가 싶기도 하고, 언어의 파괴가 결국 이렇게 암호같은 그림 기호로까지 이어지는구나 하고 씁쓸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우려했던 문제점들로 인해 그림 기호가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책의 거의 말미에 알고는 안도하기도 하고, 처음에 실망하고 어색하고 느꼈던 부분들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저 유명한 미국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오래된 영향으로 게이인 단짝 친구를 갖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소망이 붐처럼 일어났던 때가 있었다. 아직도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소망을 상상 이상의 모습으로 그려낸 부분이 있기도 하고, 미국 대도시 소녀의 쿨하고 근사한 생활 방식과 사고를 엿볼 수도 있는 책이라 10대 소녀들이 읽으면 훨씬 더 '멋지다'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저런 리스트에 대해 읽기에 성인은 나이가 너무 많다.

 

어찌됐든, 막힘 없이 잘 읽히고 뒤끝없이 깔끔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기분 전환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가볍고 쿨한 로맨스 소설이자, 귀엽고 발랄한 성장 소설, '키스 금지 리스트'였다.

 

"나는 아이에게 분명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인생은 단순히 작은 생명들의 집합체라는 것을. 각자 동시에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을. 각각의 날들은 꽃과 시에서, 그리고 동물과의 대화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꿈과 석양과 산뜻한 산들바람과 더불어 하루를 보낸다면 더할 나위 없다는 것을. 하지만 무엇보다 손을 그녀 무릎 위에 얹고, 고대의 강이 흐르는 곳 옆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가끔은 사랑에 빠지는 좋은 시절도 있다는 것을.

니컬러스 스파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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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권은 밤에게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3
이신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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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작가정신'에서 소설樂 시리즈 기획으로 꽤 흥미로운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어쩌다 기회가 닿아서 먼저 나온 '광신자들'과 '아흔아홉'을 모두 읽게 되었고, 또 이렇게 세번째 소설인, '우선권은 밤에게'까지 읽게 되었다. 원래 광신자들-아흔아홉-우선권은 밤에게 순으로 번호가 매겨져있지만, 읽기로는 아흔아홉-광신자들-우선권은 밤에게 순으로 읽게 되었는데 갈수록 더 매력있는 내용의 소설을 만나게 되는 것 같아서 새롭게 '작가정신'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무엇이든지, 나와 취향이 맞아서 믿고 보게 된다는 것은 참 위험하면서도 좋은 일이다. 기대할 것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이고, 타성에 젖을 일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흔아홉의 경우, 내용이 다소 무거우면서도 화자의 연령이 좀 높게 느껴져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의 외도, 아내의 행방불명 그리고 세 남녀의 소풍길. 그만의 독특했던 설정과 분위기를 읽으면서 마치 살얼음판 같은 느낌이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하게 펼쳐지는 내용에 의외성을 느꼈었다. 광신자들은 그 극단적이면서 어딘지 모르게 일본풍 만화처럼 느껴지는 인물과 사건의 조합이 인상적이었다. 서툰 인물들이 마치 다 불붙지 못하고 떨어져내리는 불꽃처럼 시들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이 '우선권은 밤에게'는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분위기의 책이었다.

 

이 책 속에 약간은 인위적으로 덧대어 놓은 듯한 환상적인 요소들이 어색하게 느껴진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현실을 살고 있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나 동화같은 설정을 해놓은 부분이 아주 좋았다.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느껴졌다.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 계속되던 때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녀가 '자매양장' 여사님들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나이트룸'에서 온전한 밤을, 편안한 잠을 경험했듯이... 때가 되면 마치 신기루처럼 제 멋대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예고도 없이 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나이트룸을 찾아들어가 잠들게 되면 좋겠다고 꿈꾸게 되는- 그런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지극히 남루하고 초라하지만 현실적인 공간과 환상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비현실적인 공간을 한데 이어놓아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을, 책을 읽으며 맞닥뜨리게 된다. 그럼 곧, 독자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도 함께 느슨해진다. 소설 안의 허구를 현실의 증명되지 않은, 비어있는 공간으로 옮겨와 제멋대로 채워넣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이 제 색을 덧입어 한 장 한 장 넘어가게 되면- 비로소 이 책 한권이 내 마음에 드는 책으로 의미를 갖게 된다. 바로 그런 책이었다. 이처럼 이 책에 대해 호평을 하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 어딘가를 건드리는 부분이 있어서이다. 특히 이런 동화적 요소가 가미된 것을 좋아하는데 여기서도 그런 취향이 적용되었다. 호평의 이유에 대해 분명히 밝혀두자면.

 

처음엔, 너무나 흔한 인물 설정이 아닌가 생각했다. 딱히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도 못했고, 별다른 미래도 계획도 없는 인물이, 구질하다 싶은 일상을 산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미도 보이지 않고, 무슨 일이 생기길 바라지도 않는 그런 평범하고 흔한 인물에 결국 이 책도 루저로 전락한 시대의 청춘들 속풀이나 해주는 책이 되는건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책이 단순 속풀이 책으로 끝나지 않고 힘내라는 말대신 환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했다는 것이 좋았다. 세상 어딘가에는 지친 당신의 몸을 누일 수 있는, 그런 착한 공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읽으면서 하나의 검은 덩어리인 자신을, 때에 따라 무대 위의 연기자처럼 연기하도록 만드는 주인공이 마치 나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두들 자신을 살아내기 보다는, 자신을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순간이 종종 있다. 상대와 사람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바꾸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의식하는 순간 지독히 불편해진다. 진짜 나와 가짜 나도 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능란히 연기해내고 나면 또 다시 검은 덩어리일 뿐인 자신으로 돌아오는 허탈과 안도의 순간을 느껴본 적 있는 사람들은 주인공의 행동에 많은 공감을 할 것 같다. 그녀만큼의 자조적인 태도가 아니더라도, 삶의 어느 순간들은 그런 법이다.

 

나이트룸은 어디로 갔을까? 집의 옛 주인이었던 할아버지와 함께 '자매양장'의 낙희, 난희 여사들과 함께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린 공간의 빈자리를 함께 느끼게 된다. 나이트룸이 없이도, 낙희, 난희 여사들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믿음만 남았어도, 자신의 성이 권씨에서 양씨로, 다시 또 권씨로 바뀌었어도, 낮동안 나는 하나의 검은 덩어리이 뿐이어도, 밤의 세상이 나를 받아주지 않더래도, 삶은 흘러가고, 세상도 나도 서서히 천천히 변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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