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 원태연 필사시집
원태연 지음, 히조 삽화, 배정애 캘리그래피 / 북로그컴퍼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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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살에 낸 첫 시집이 150만 부 이상 판매되며 인기 시인이 됐다. 원태연은 제목과 시가 이어지는 센스있는 시가 종종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생각을 해>
<손끝으로 원을 그려 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제목 자체가 시가 되어 버리는 사랑과 이별의 시로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다.


안그래도 보고싶어 죽겠는데
전화벨만 울려도
눈물이 날 것만 같은데
-비까지 오다니-​

시의 내용과 제목의 찰떡궁합에다가 비가 들어가는 시라서 좋아하고 외우는 시.

​기존의 시 70편과 신작 시 30편을 수록한 필사시집이다. 오랜만에 연애세포를 톡톡 건드려 주는 아기자기한 시들이 노래 가사처럼 입에 달라붙는다. 원태연의 매력이 가득한 시와 오밀조밀한 그림이 함께 하는 시집.
게다가 읽으면서 옆에 필사하는 재미까지 더해준다.


시를 읽다가 필사하는 문장들이 가슴에 오래 남는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 비가 들어가는 시들을 필사해 본다.


솔직한 표현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태연 시인의 매력은 책과 노래, 무지컬로도 만날 수 있다. 18년 만에 출간한 시집<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시작으로 다시 시를 쓴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심쿵하고 달달한 시들은 사랑과 이별을 해 본 사람이 갖는 특별한 감정들을 여과없이 그대로 적어내려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것이 아닐까.


너를 보고 있을 때도 좋았지만
니가 보고싶어질 때도 참 좋았으니까
<괜찮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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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양장) 새움 세계문학
조지 오웰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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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조지오웰#새움출판

움베르코 에코는 이렇게 말했다.
"도서관의 책들은 자신들끼리도 말을 한다.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양피지들끼리 자신의 언어로 나누는 나즈막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인간이 비로소 책을 펼쳐야만 책들이 깨어난다는 시선에서 벗어나 에코는 책들끼리도 말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많은 책들이 소곤거리는 도서관에서 나의 시선으로 읽었던 <1984>소설을 새움출판사의 새로운 번역으로 만났다.

소설의 내용뿐 아니라 번역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된다. 줄곧 의역을 해오면서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오려는 노력을 해왔던 민음사 번역이 일반적인 세계문학이었다. 그 이전의 번역들은 다른 번역어를 보고 다시 번역하는 단계를 거치면서 내용이 훼손되어 이해가 되지 않는 세계문학이 어렵던 시절도 떠오른다. 그만쿰 번역의 중요성이 느껴진다.

작가의 원문을 될수 있으면 그대로 복구해서 번역하려는 이정서 번역가의 노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의역과 직역 사이에서 처음에는 전혀 맥락을 잡지 못하고 문장의 흐름이 끊어져서 읽기 힘들기도 했지만 읽다보니 또 적응이 되어간다.

의역이든 직역이든 오역만 아니라면 번역가의 재량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접해 읽었던 1984 책과 비교해 가면서 읽는 재미가 좋았던 시간이었다.

1984는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지배 시스템 앞에 놓인 한 개인의 저항과 파멸의 과정을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이중사고란 사람의 마음속에 두 가지 상반되는 생각을 동시에 품는 것을 그리고 그 둘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1948년에 쓰여져서 36년의 미래를 겨냥했던 1984.
지금으로부터 36년전의 과거에서 만날수 있을까

“윈스턴은 그늘과 햇빛으로 얼룩진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나뭇가지가 벌어진 곳에 이를 때마다 내리쬐는 황금빛 햇살로 길이 갑자기 환해지곤 했다. 나무 밑에는 블루벨 꽃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 있었다.
입 맟추듯 피부에 닿는 공기는 부드럽고 향기로웠다...”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자라온 사회통념과 의식으로 인해 말하고 행동하기를 망설이고 의도적으로 변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내 감정표출에 관여된다면 이것 역시 보이지않는 텔레스크린이 아닐까..
과연 나는 나로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의 주제로 요약되는 "이중사고"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한 사람이 두가지 상반된 신념을 동시에 가지며 그 두가지 신념을 모두 받아들일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과거를 끊임없이 날조하는 당은 정당하다고 여기며 현실을 통제한다.

조지오웰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깊어가는 페병의 고통속에서 작품을 썼다. 이 시대적 배경에는 온 세계가 권력과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서로 파괴하던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였다.

여러 시대를 겪어내며 살아온 우리가 지금은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태어나면서부터 보고듣고 자라온 사회 통념과 학습되어진 것들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며, 색다른 것을 하고 싶을 때는 망설이고 의도적으로 변명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내 감정 표출조차 조정당하고 감시되는 텔레스크린이 존재한다면 행위가 자연스럽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곳곳에 설치된 CCTV앞에서 그다지 부자연스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텔레스크린의 존재에 노출되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철저한 통제와 조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고 자유의지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어떤 경우에서도 권력은 정당화 될수 없으며 자유는 소중한 것임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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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곁에 두는 마음 - 오늘 하루 빈틈을 채우는 시인의 세심한 기록
박성우 지음, 임진아 그림 / 미디어창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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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감성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기록들이 잔잔하게 밀려오는 글이다.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하며 미숫가루를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박성우<삼학년> -가뜬한 잠-


엉뚱한 삼학년 아이가 미숫가루를 혼자 먹으려고 우물에 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하러 나간 엄마 아빠,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과 모두 나눠먹으려는 생각으로 통크게 미숫가루를 전부 풀었을 상상을 하니 웃음이 났다.
우물물로 미숫가루만 타는 것이 아니라 밥도 하고 빨래도 해야한다는 생각에 미치지 못한 천진한 아이의 마음을 시로 적어내는 순수한 감성을 지난 사람이 박성우 시인이었다.


시인이 적는 산문의 문장은 이미 시의 문장이다.
*쑥부쟁이 줄기에 매달려 있던 가을볕이 연보랏빛 쑥부쟁이로 피어나는 시월이다..

시월을 나타내는 시인의 문장에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난 시월을 떠볼려본다. 시골에서 자라난 시인은 글의 여기 저기에 나른한 고양이의 모습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글로 풀어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산행을 마치고 다른 길로 돌아오는데 파란 잉크 방울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 같은 작은 나무가 눈에 띈다. 노린재나무다. 딸아이와 그 친구들 덕에 시 한 편 너끈히 쓰고도 남을 마음의 잉크를 얻어 집으로 간다.」

나는 노린재나무를 본 적이 없다. 딸아이와 친구들과 산행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시 한편 쓸만한 마음의 잉크를 얻어오는 넉넉한 마음, 시인의 시선은 열매를 보아도 잉크방울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시인은 책을 읽고 시를 쓰던 젊은 날, 달은 외로운 가슴에 빛이었고 길이었다고 했다. 불을 끄고 방에 누우면 달빛이 창호지 문으로 새어 들어왔는데 시인은 이 달빛을 직어 그 위에 시를 썼다고도 했다.」

시인의 유년시절의 아주 작은 기억부터 시작해서 안도현 시인이나 김용택 시인, 천양희 시인과의 만남, 아내와 딸과 소소하게 사는 이야기, 시를 짓는 사람으로서의 여러 감상들을 편안하게 쓴 글이다.

읽고 싶을 때 어디든 펴서 읽으면 마음이 움츠러드는 요맘때 즈음, 차가워지는 가을바람에 마음이 누그러질 것 같은 온화한 글들이다.

<마음 곁에 두는 마음>
제목에서 풍기는 시인의 내적인 따스함이 충분히 담겨있다. '곁'이라는 말에서 주는 잔잔하고 포근한 마음,
누군가에게 곁은 내어주는 평안함과 안온함,
어릴 적에 바라보던 뜰과 마당, 나무와 햇볕, 그리고 나른한 오후를 즐기는 고양이나 새들이 마구 찾아와 주는 글들이라 읽는 내내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시를 필사하며 시인의 마음으로 살고 싶은 내 마음과 비슷해서 아끼며 읽었다. 특별한 사람이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듯, 또 누구라도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간절함이 빚은 시인의 길들이 빛나는 삶의 언어들이 가을낙엽처럼, 겨울 눈처럼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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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소중한 사람
정한경 지음 / 북로망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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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날개에 써진 작가 소개글부터 가을감성에 제대로 꽂혀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작가처럼 멋진 말로 내 소개를 하고 싶어진다. 시인감성을 입은 에세이.

정한경​
자주 머무른다.
자세히 들여다본다.
천천히 걷는다.
자꾸만 돌아본다.
내내 그리워한다.
어떤 종류의 흔적이라도 남았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렇게 믿는다.


글을 읽다가 생각해보니, 진정한 위로를 한답시고 힘든 사람에게 자꾸만 힘을 내라며 일어서는 방법을 알려주려 했던 젊은 날이 있었다. 살아가면서 내가 힘들 때 제대로 된 공감과 위로를 받아보고, 사람들의 입바른 소리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섣부른 위로를 하지않으려 노력한다. 아프고 힘든 사람이 제대로 바른 길과 방법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저 잠시 쉬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입바른말이 반드시 좋은 말이거나 옳은 것이 아닌데 가르치는 직업병인지 종종 가르쳐 주려 애쓴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지를 생각한다면 따스한 온기를 전해준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기로 한다.

일어설 힘조차 없는 사람에게 일어서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주저앉아 울고 싶은 사람에게 울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보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손을 잡아주고 곁에 있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 곁에 있어주는 그 한사람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책임져야 할 것은 많아지고 고민은 늘어간다. 진정한 위로와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울음을 삼키는 법이 아니라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주저앉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것이기에..

지금의 상태만을 판단하고 조언하는 사람들의 말이 힘들었다. 지금 잠시 아파하고 나면 나아질텐데 그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진단하고 처방까지 내리는 사람들은 공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해결책은 아픈 사람을 잠시 안아주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자신의 아픔을 그 모습 그대로 바라봐 주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섣부른 충고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충고는 공감의 뒷자리에 어울린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잃고 나서야 배우는 것들이 생겨난다. 그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잃고 나서야 배우는 것들의 소중함에 대해서, 그리고 나와 우리, 살아가면서 맺는 사람들간의 사랑과 이별의 감정과 상처에 대해 위로하는 잔잔한 에세이다.

보통의 하루가 지나면서 그런 일들이 따분했을 때 올 한해 코로나19로 인해 잃어버린 시간의 그 무료함마저 소중해지고 그리웠다. 모든 순간들이 당연한 것은 없었고, 그런 순간들이 기적이었음을 잊고 살아간다.
풍경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꽃은 가까이에서 보아야하지만 멋진 풍경은 그 안에 속해 있을 때에 제대로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한걸음 멀리 내 인생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며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에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급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힘을 내라고 한걸음 갈 수 있는 용기를 전한다. 아팠던 마음을 알아주고 진심어린 위로와 공감으로 소중한 나와 우리를 지켜나가는 마음가짐에 대한 사랑스런 속삭임이다.

"살아간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있다.
무엇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새벽이 있다.
삶의 무게가 감당할수 없을만큼 가슴을 짓눌러
전부 놓아버리고 싶은 그런 날.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한 숨겨 둔 마음을 끌어안고,
토해내는 한숨으로 긴 새벽을 간신히 버텨내는 당신에게
특별하진 않더라도 한결같은 사람으로
작은 온기라도 전할 수 있는,
당신에게 나는 그런 의미이고 싶다
그러니까
도망 와, 나에게."

어떤 고백*가을 이맘때가 되면 약해지는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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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부르는 이름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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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설레게 만드는 책이 있다. 내용까지 더 좋게 만들어주는 마법처럼 제목이 다하는 그런 책.
모처럼 가을 감성에 어울리는 소설을 만났다. 아직 출판 전인 가제본이라서 표지는 단순했지만 시의 제목처럼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이 떠오르는 소설 제목에 덥석 읽게 되었다.

「흡사 어린 아기라도 맡게 된 기분이 들었다. 나무와 식물을 좋아하는 것과 그것을 잘 키우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일인데.
수진은 과습으로 떠나보낸 숱한 식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진은 이파리 가장자리의 가는 톱니들과 잔털을 손바닥으로 스치며 세세히 그 간질이는 감각을 느꼈다.
p34」

식물을 과습으로 숱하게 떠나보낸 공통점에 피식 웃음이 나온 대목이기도 하고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암시하는 듯한 낮은 한숨과 간질이는 감각을 느끼는 부분이 애틋하고 아련하게 다가왔다.

「어느새 수진은 혁범을 존경하게 되었다. 존경심은 수진에게 드물게 찾아오는 감정이었다. 주변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함과 일관성을 가진 그는 '혼자 어디에 갖다 놔도 법없이도 잘 살 사람'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 누구도 진심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p.39」

사랑하는 사람의 빈틈없는 구석에 홀로 외로워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서로에게 기대고 해줄 수 있는 사랑의 증표나, 사랑으로 전해지는 위로조차 기대할 수 없는 단단한 사람이라면 나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실감으로 오열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내심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무뚝뚝한 그가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할 때 사랑은 철저하게 외롭다.

「집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드는 게 아니라 직접 들어가서 살려고 짓는 거잖아.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편해야 해. 과시하기에만 좋고 실제로 사는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집은 의미가 없어. 그래서 자기 집을 짓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밖에 없고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열려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좋아
p.73」

건축가로서의 깊은 관심과 상냥한 경청을 기울이는 세심함이 돋보이는 대목이자 혁범의 성향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집에 대한 명백한 가치관과 따스함에 비해 사랑 앞에서 불투명하고 진실한 표현이 부족해서 안타까웠다.

<집>이라는 것이 내포하고 있는 것의 다양한 감정과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이 있고 따스한 온기와 온전한 쉼이 있어야 하는 곳이 집이다. 건물로서 덩그라니 잠만 자고 나오는 존재로서의 집에서는 이야기를 지어낼 마음의 공간이 없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폐가로 전락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충분히 쌓여가면서 의미를 부여해 간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는 노력을 하는 중이지 않을까.
마음의 집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표현하고자 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수진
정확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혁범
그리고 솔직하고 직선적으로 사랑을 마구 표현하는 한솔
수진의 선택은 사랑하는 사람곁을 지키는 것일까
세심한 사랑을 받아 누리는 것일까
나와 다른 그녀의 선택에 잠시 갸우뚱거리기도 했다.

「엄마도 한때는 이별이 구원할 길 없는 결말이라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알게 된 많은 것들은 항상 '이별'이 알려주었다고 생각해. 자신의 의지로 버릴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버리고 가야 할 때도 있고,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잃어버린 것들도 있지. 어쨌든 이제 그것들이 내 곁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그 무게나 선명함, 그리고 소중함을 보다 강렬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어. 살다보면 알게 돼.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바로 그 잃어버린 것들 덕분에 얻은 것이란 걸.
p.136」

특별함이 평범함으로 바뀌는 순간 사랑은 곧 일상이 된다. 아직은 나이듦이 낯설지만 아슬아슬한 사랑의 밀도있는 행위까지 아찔하게 표현되어 연애세포가 부끄러운 듯이 꿈틀거렸다.
최선을 다해 진심을 보여줬던 사랑, 완벽한 모양을 한 그 사랑이라서 두려웠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런 사랑을 이어갈 만큼 용기가 없었던 수진의 모습이 내모습인 양 낯설지 않은 듯 다가온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을 이야기할 때 겁을 내고 도망가거나, 계산기를 두드리듯 머리를 굴리는 것이 아니라 겁없이 다가서고, 상처까지 온몸으로 떠안아 이해하고 주저함 없는 투명한 사랑이라고 말해주는 소설이다.

어른들이라고 해서 사랑에 익숙해지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많아진다고 해서 경험치가 늘어가는 것도 아니다.
지금 마주하는 인연과의 사랑은 언제나 처음이기에 첫사랑처럼 다가오면 좋겠다. ​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내기 힘들었지만 사랑만큼은 아무런 장치없이 투명해지길 바란다. 연민하는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에 보답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끌어안아주는 마음 안에서 평온함을 느껴가는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삶을 만든다.

"가만히 부르는 이름" 하나
조용히 불러 보는 이름 하나 있다는 것이 행복한 가을.
어린아이처럼 사랑하고 상처받는 사람이
더 많이 사랑했던 사람은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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