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자은의 낡고 장식 없는 상자들 안에는 
경전과 다른 책들이 들어 있었다. 
짐을싸는 동안 고작 이 종이 묶음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나 싶을 때도 있었고,
 한 권 한 권이 소중해서 품에 품고 
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상자 틈을 풀로 메우긴 했지만 그래도 
바닷물이 닿지 않도록 적당한 곳에 두었다.
"무겁네요. 뭐가 들었습니까?"
나르는 걸 도와준 선원이 허리를 펴며 물었다.
"다 책이오."
젊고 쾌활해 보이는 짐꾼에게 다른 의도는 없어 보였지만,
자은은 한 손으로 아직 잠그지 않은 상자를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귀중한 사람에게만 귀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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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모에게도 마땅히,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만큼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변명을 들을 아버지는 이미 갔고
 나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사라졌다. 
그 사실이 뼈아파 나는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
 아버지를 위한 울음이 아니라 
나를 위한 울음이었다. 
아버지 가는 길에까지 나는 고작
 그 정도의 딸인 것이다. 
그런 나를, 생판남인 주제에 친자식보다 더 자식 같았던 학수가 아버지처럼 무심한 눈으로,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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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들을 걸 그랬다.
아버지. 아버지 딸, 참 오래도 잘못 살았습니다. 
그래도뭐, 환갑 전에 알기는 했으니
 쭉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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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로 뻗어 있는 신작로를 보았다. 
그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며 
성장기의 나는 먼 데서 기적이 울릴 때마다 
그 기차가 가닿을 서울을 꿈꾸었다. 
지금보다 더 멀리 더 높이.
그렇게 동동거리며 조바심치며 
살다가 알게 되었다. 빨치산의 딸이므로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의 비극은 내 부모가 빨치산이라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내비극의 출발이었다.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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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언니는 말을 참 예쁘게도 한다.
내가 저런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지금쯤 정교수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내 말에는 칼이 숨어 있다.
 그런 말을 나는어디서 배웠을까? 
아버지가 감옥에 갇힌 사이 
나는 말 속의 칼을 갈며 견뎌냈는지도 모르겠다.
"나가 자네 속을 모리겄능가. 고맙네이. 참말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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