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나온 포퓰리즘(populism)입문서입니다.
영국 Penguin 출판사의 자회사인 Pelican에서 일반인대상으로 문고판으로 2018년 출간된 책입니다. 제가 알기론 Pelican 문고판이 이전에 발간되다 중단되었는데 이후 다시 재발간을 결정하고 나온 문고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책은 본문 292쪽이고 결론포함 총 7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자들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 포퓰리즘이 파시즘(Fascism)과 유사하고 인종주의적(Racism)이며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의 일시적 일탈현상이라는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21세기의 상당부분 이 포퓰리즘이 계속될 것으로 봤습니다.
이책의 분석대상이 미국과 유럽 특히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유럽이지만 한국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 30여년을 지배해온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와 세계화(globalization)의 여파, 그리고 이로인한 빈부의 양극화(polarization)와 2008년을 강타한 금융위기 (Financial crisis)와 1929년 대공황을 방불케 한 공황 (The Great Recession)이 미국과 서구를 강타했고, 이런 상황이 포퓰리즘 발흥의 환경적, 역사적 조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책은 크게 4가지 요인을 포퓰리즘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압도하게 된 이유로 꼽습니다.
첫째, 불신 (Distrust). 이 요인은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제가 사실 일반국민들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데 기인합니다. 대체로 공부를 많이 한 엘리트들이 의회에 진출하는데 이들은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일반 노동자들이나 평범한 농민들을 대변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페미니즘, 동성애 옹호(LGBT)등을 옹호하는 한편, 자신들의 전통적 기반인 노동자들의 지지보다는 대학을 졸업한 중산층 전문직들의 지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대표적으로 영국의 노동당(Labour)과 미국 민주당(Democrat)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전통적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던 정당이 자신들을 더이상 대변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수 없게되자 대안으로 떠오른 포퓰리즘 정당으로 지지를 옮긴겁니다.
즉 파워엘리트 카르텔과 기층의 노동자를 비롯한 일반국민들 사이의 괴리감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겁니다.
두번째는 파괴(Destruction)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즉 자신과 조상들이 살아왔던 사회의 관습과 문화가 밀려드는 이민자들로 파괴될까 두려운겁니다.
미국과 서유럽으로 한정한 이 책에서 이런 자신들이 살아온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파괴될 염려는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로부터의 대량이민과 난민의 유입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슬람 인구가 늘어나는 건 서구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있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로 인해 이들을 더욱 경계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대규모 이민과 난민유입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라 촉진된 경우인데, 유럽에서는 이들의 대량유입이 국가정체성을 위협할 뿐 아니라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저숙련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세계화로 인해 미국의 공장들이 노동력이 값싼 멕시코나 아시아, 중국으로 빠져나가자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이던 공업지대(Rust Belt)의 노동자들이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공화당과 트럼프 지지로 돌아선 것입니다. 최근에 트럼프2기 정부에서 미국에 공장유치에 열을 올리는 상황과 맥락이 닿아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보기에 따라서 백인 노동자들의 시각을 따른 것으로 상당히 인종주의(Racism)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자들은 인종주의라고 낙인찍을 일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세번째는 박탈감(deprivation)입니다. 이는 경제적인 입장에서의 상대적 박탈감( relative deprivation)으로 불평등(inequality)의 심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규제완화의 여파로 부자들은 계속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들은 계속 가난해지는 상황이 지속되것 있습니다.
규제완화와 최소한의 정부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보다 유럽각국의 포퓰리즘 정당들은 정부의 역할 강화와 경제발전의 이익을 직접 보지 못한 소수자들에 영향력을 확대하며 기존의 전통적 좌파정당이 하던 역할까지 포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지지자들의 지지조정 (dealignment)입니다. 즉 한 지역구(electorate)에서의 전통적으로 지지하던 정당의 지지를 철회하였지만 그 대체세력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경우를 말합니다.
이건 사전적 의미이지만, 예를 들어 미국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세력인 공장노동자들이 미시간주같은 지역에서 민주당의 지지를 철회하고 공화당 대선후보인 트럼프를 지지한 경우입니다. 이들은 2016년 미 대선에서 여성과 흑인 등 소수자권리에 집중한 힐러리를 지지하지 않았고, 이유는 엘리트인 힐러리가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통적인 지지세력이 떨어져 나가자, 선거는 예측이 불가한 정치행위가 되었습니다. 유권자들이 이번에 특정 정당을 지지했다고, 다음에도 지지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유럽의 사민주의( social democrat)정당들이 전통적인 지지기반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포퓰리즘 정당에게 빼앗긴 체 추락하고 있는 상황이 이런 정치적 지지철회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치의 효용성( effectiveness) 측면에서 볼 때 투표권을 행사해 국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라는 국회의원이 하라는 대의정치는 안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거나, 권력만을 탐하거나 일반 국민들의 생각과 다르게 먹고사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곳 뜬구름 잡는 소리앗 하고, 많이 배웠다고 국민을 가르치려 들면 국민이 이 국회의원을 탄핵하거나 표로 응장하는게 당연합니다. 대의정치의 테두리에선 그방법이 정당합니다.
하지만 요새처럼 정보도 많고 모든게 이어진 세상에 과거의 유물인 대의정치를 계속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반문해봅니다.
대의정치는 교육을 못받은 대중이 많을 때 엘리트가 대신 합리적으로 공공의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이지, 지금처럼 국민들이 국회의원들보다 더 현안파악과 정세파악이 빠른 상황에서는 오히려 국회의원이 할 역할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방식이 어떻든 국민의 의사를 정치에 반영하면 그뿐이지 효용감없는 국회의원을 왜 선거에서 뽑아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됩니다.
포퓰리즘이 부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의원들에게 대안이 있다는 점을 간파한 건 분명히 민주주의의 본질에 부합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