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책의 결어 (conclusion)을 읽으면서 하나의 문장이 문에 들어왔습니다.
‘5.16화된 4.19’
가부장적이며 봉건적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체 미국을 배경삼아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영구독재 정치체제를 추구하려 했던 이승만 정권이 고등학생과 대학생으로 이루어진 젊은 세대들의 시위로 물러난 후 고작 1년의 혼란기를 거쳐 다시 박정희를 위시한 육군 장교들의 쿠데타로 다시 독재로 회귀하는 반동을 경험합니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루어보려던 희망은 혼란 속에 겨우 1년여를 보낸 것 뿐이고 한국 정치는 다시 독재로 퇴보합니다.
이러한 반동이 가능했던 이유로 당시 청년들이 세계최빈국으로서의 경제적 어려움때문에 ‘민주주의는 유보해도 괜찮다’라는 암묵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글을 보며 광화문 광장의 ‘태극기 부대’가 자꾸 떠오릅니다.
이후 짧게는 박정희의 암살이 일어난 1979년까지, 길게는 1987년 6월 항쟁에 의한 1987년 체제의 수립시까지 한국은 철저한 군사독재국가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소장 국문학자인 두 저자는 결론에서 ‘현재의 한국’을 있게한 ‘현재의 뿌리’로서의 4.19혁명과 이를 이루어낸 4.19혁명 세대들의 정신과 이들의 지적 토양을 이들이 쓴 글과 평론 소설등의 언설을 통해 분석을 시도합니다.
저자 본인들이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했던 386세대( 지금의 586세대)의 일원임을 밝혀 386세대가 새롭게 바라본 4.19혁명 세대에 관한 글로 읽힐 여지도 충분합니다.
이 책에서 언급된 4.19세대(1940년대 출생이후 한국전쟁을 10대에 경험했던 일제교육을 받지 않았던 첫세대)의 생각과 심리상태는 그 자식세대인 저의 입장에서는 분열적인 면이 많이 보여 안타까운 면이 많았습니다 : 즉 미국과 프랑스의 서구사조를 거의 맹목적으로 따르고 선진적인 것으로 보면서 한국을 ‘열등’하다고 느끼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이런 열등감(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 정치적이든)을 극복하기 위해 절차적 절차와 행위의 정당성을 무시한 체 속도를 선택한 점에서 그렇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어 한국의 현재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열등감에 시달리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점은 오리엔탈리즘과 주체성의 결여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의 후진성에 대한 1960년대의 시각은 지금입장에서 이해하기 더 어렵습니다. 후진적 경제를 ‘빠른 시간내에 ‘ 성장시키기 위해 ‘압축성장정책’을 채택하고 특정 기업에게 사회의 모든 자원을 몰아주는 ‘불균등 발전정책’을 채택합니다.
서구,즉 미국과 유럽이 17세기부터 자그마치 300여년에 걸쳐 이루어온 경제발전을 ‘단기간’에 끝내겠다는 ‘무모한 계획’입니다.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빠른 경제성장으로 인한 과실이 특정 파워엘리트와 재벌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세계10위의 경제사이즈를 자랑하는 나라가 되었으나 OECD국가 중 자살률이 제일 높고 자영업자 비율이 가장 높으며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미비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조직의 군사주의적 문화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압축성장
전략외 다른 대안 전략이 부재한 상태가 2019년의 한국 상황입니다. 경제 관료를 비롯한 파워엘리트들은 그들이 헤게모니를 쥐어온 재벌위주의 경제성장 정책을 바꿀 의지가 없어보이지만 이미 이 정책이 시효가 다 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부당한 처사에 대한 항의로 가임기의 여성들이 출산파업을 진행해 인수감소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도 건설사들은 그 수요를 알수 없는 도로와 공항건설에 매진하고 있고 국가대신 민간이 떠맡은 보육체계는 지속적인 문제와 불협화음을 만들고 있지만 이유를 알수없게도 ‘큰 정부’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소위 보수(?)층이 존재합니다.
이 책에서 언급한 4.19세대의 논리는 아직도 현재의 한국에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책이 출간된 2012년 이후 7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한국은 대통령이 탄핵되고 바뀐 이후 다른 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몇가지 부연설명을 붙입니다.
첫째, 1960년을 연 작가 고 최인훈 선생에 대한 글은 개인적으로 처음 읽음 그의 소설에 대한 평론입니다. 30여년 전 대학입학 후 처음 읽었던 선생의 대표작 ‘광장’을 다시 되새기게 됩니다.
둘째, 두 저자 중 천정환 교수의 책을 제가 읽은 것이 이번이 두번째입니다.
그의 책 ‘근대의 책읽기(푸른역사, 2003)은 식민지 시기 (1920-30년대) 조선에 독자가 어떻게 탄생되었고 글을 읽는다는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지식인들 사이의 일본책 독서에 대한 글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이책의 이런 일본에 대한 영향력은 본서에서도 1960년대 한일협정 정국의 혼란 가운데서도 붐을 이루었던 일본문학붐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일본의 영향력은 알게 모르게 1960년을 지나 2019년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면에서 소름이 돋습니다.
셋째, 1960년대 한국의 ‘압축성장계획’ 즉 ‘경제개발계획’을 이야기할때 언급해야 할 인사가 있습니다. 당시 MIT 경제학자였던 로스토우 (W.W Rostow)로 당시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을 자문하는 동시에 이론적 기초를 재공했던 인사입니다. 이분에 대한 인터뷰는 서울대 박태균 교수가 그의 책 ‘원형과 변용 (서울대 출판부, 2013)’ 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또한 한국에서 경제개발계획이 어떻게 수립되고 이행되었는지 미국의 전후 원조계획과 전후 대한 정책의 맥락에서 일별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이 책을 관통하는 ‘박정희 체제’에 대한 짧지만 인상적인 개론서를 소개합니다.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읽은 첫책이기도 합니다.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 2000)’. 여기서 반동적 (reactionary)이라는 말은 반응한다는 말로 서구에서 말하는 근대가 포함하는 합리성, 민주성, 진보성, 혁명성이 결여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직도 태극기 부대 한켠에선 왕처럼 떠받들어지지만 다름 한편에서는 한국 경제발전의 공을 그에게만 돌릴 수 없다는 한국현대사의 문제적 인물입니다.
보론
저자들은 정치적 변혁의 책임을 맡았던 대표적인 두 세대로 이책의 주인공인 4.19세대와 87년 체제를 가져온 386세대를 꼽았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나 386세대 바로 뒷세대로서 1970년대 생들의 영향력은 좀 과소평가되거나 무시된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2019년 현재 분명 4.19세대는 한국의 현재에 기반을 만든 세대로, 87년 체제를 확립한 386세대도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존재해 왔음을 부인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관계적 사회의 마지막 세대로서 386세대는 자신들의 노선을 스스로 변경하여 극우로 거듭나기도 하고 가부장적 관계의 자장을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마지막 꼰대세대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학생운동권의 권위주의적 행동양식과 인식을 거부하는 성인지 감수성이 또한 이 세대의 특징으로 생각됩니다.
1990년대 말 사회를 뒤흔들었던 x세대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이 책이 커버하는 시대보다 뒤에 있어 언급되지 않은 듯 합니다. 하지만 이 세대는 독재 정권의 언설을 유년시절 경험하면서도 거대 사회변혁논리의 숨막히는 권위주의에 반기를 들었으며 자신의 주체성을 최초로 확립하고 서구 백인문화에 주늑들지 않은 첫 세대로 기록될 듯 합니다. 하지만 정치쪽에서 386세대가 가진 거대한 지분에 비해 아직 영향력이 크지 않은 세대로 생각됩니다. 2016년 촛불을 들었던 부모세대들의 상당수가 이들 x세대로 개인적으로 앞으로의 정치적 폭발력을 기대하는 동년배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