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이야기 5 - 오월쟁패, 춘추 질서의 해체 춘추전국이야기 5
공원국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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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남부, 즉 중국의 강남(江南)지역을 둘러싸고 패자(霸者)인 초(楚)나라와 그 패권에 도전하는 오( 吳)나라와 월( 越)나라의 쟁투를 그린 이야기가 이 책의 주요 내용입니다.

특히 춘추시대의 패권국인 초(楚)와 진( 晉)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남방의 오랑캐 국가인 오(吳)와 월(越)나라가 서로 싸우는 이야기로 특히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능력에 걸맞지 않게 초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의 패권귝이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강국 초나라는 수도가 함락되는 수모를 겪고도 다시 부활하고 오나라는 월나라 왕 구천 (句踐)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춘추의 질서는 말기가 되자 무너지기 시작해 전쟁의 규칙, 즉 초상을 당한 나라를 공격하지 않는다거나, 칼받이로 포로를 전쟁터로 보내지 않는 것과. 같은 최소한의 교전 규칙이 사라지게 됩니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만 있을 뿐이고 이기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오로지 힘이 있는 국가만이 살아남는 살벌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원칙이 서서히 자리잡습니다.

특히 남방의 오랑캐를 자처한 월( 越)나라의 재상 범려(范蠡)는 월나라는 중원(中原)의 의리가 지킬 이유가 없는 금수(禽獸)와 같은 이들이라고 자평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언급한 월나라의 왕, 구천과 오나라의 왕 부차이외에도 오나라가 패권국 초나라에 도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든 책사 오자서(伍子胥)가 이 책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초평왕( 楚平王)에게 아버지와 형을 잃은 초나라 사람 오자서(伍子胥)가 원한을 품고 오나라에서 복수를 준비하고 끝내 복수하는 복수극이야기이며,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의 아들 부차(夫差)에게 굴욕을 당했던 월나라 왕 구천(句踐)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며 복수를 하는 또 한편의 복수극을 품고 있습니다.

처절한 복수를 위해 인간이 얼마나 굴욕적인 상황을 감내할 수 있는지 그리고 마침내 한 인간에 대한 원한을 어떻게 복수로 보여주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춘추시대의 질서가 무너져가는 살벌한 전쟁을 배경으로 복수극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책은 마치 무협지를 보듯 술술 잘 읽힙니다.

중국 고대의 전쟁사를 좌전, 국어, 사기 등 사서들에서 나온 이야기를 근거로 다시 재구성한 작가의 능력에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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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공부하신 방통대 일본학과 강상규 교수의 조선정치사 연구서입니다.

종장을 포함해 총 7장 598쪽의 벽돌책입니다.

조선건국부터 고종 재위당시 갑신정변 (甲申政變,1884)까지의 시기를 다루는 이 책은 전에 읽었던 ‘고종의 미관파천 시도와 한미관계( 경인문화사,2021)’의 참고도서 중 한권이었습니다.

특정한 시기, 즉 19세기 고종 재위시기를 좁게 다루지 않고 조선 건국기와 조선 중. 후기를 다룬 이유는 조선정치의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때문에 덧붙여진 것입니다.

유교적 예(禮)를 중시하고 다분히 윤리적 기반위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조선의 전통적 성리학 기반의 정치는 왕권이 신권에 의해 제약당하는 정치였으며 당시 식자인 유생(儒生)들이 공론정치(公論政治)라는 제도하에서 국왕의 결정사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 국왕의 통치가 쉽지 않았습니다.

윤리적 유가철학(儒家哲學)만을 공부한 선비와 학자관료들은 유연하기보다 완고하며 세상사에 무관심하였고, 국방과 기술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매우 독선적인데다가 편협하기까지 해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격변의 19세기에 잘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유가를 배운 자신들만이 문명인이고 통상을 요구하러 조선과 접촉온 서양인들은 양이(攘夷)라고 배척하고 세상에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서양인들은 조선인을 야민인으로 생각하고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고, 조선의 양반과 지배층들은 유교를 배우지 못한 서양인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해 금수(禽獸 )와 같다고 했습니다.

중국 중원이 만주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으로 통치권력이 넘어간 이후 조선만이 중화문화(中華 文化 )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 조선중화(朝鮮中華)주의가 뿌리깊게 박혀 있어 성리학적 유교 이외의 사상에 대해 포용력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중기이후 정권을 잡아온 노론 벽파(老論僻派) 선비들이 특히 완고했습니다. 고종이 즉위한 이후 수렴첨정을 하던 조대비(趙大妃)가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과 손을 잡고 당시 서학교도들을 학살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유교국가의 완고함을 보여준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인박해로 프랑스인 신부가 순교하고 천주교도들이 죽자 앙스는 이에 대한 복수를 위해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키고 대원군은 프랑스군을 격퇴합니다. 이일을 계기로 조선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고해집니다.

격변기인 19세기 중엽 조선의 통치자였던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통치를 전부 다룬다는 건 물리적으로불가능하고 다만 병인박해의 사례처럼 조선의 근본주의성리학이 너무 유연하지 못하고 뜬구름잡는 주장을 반복해 격변의 시기 변화의 바을 타지 못하게 한 것이 원인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같은 시기 일본이 재빨리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인 건 일본이라는 무사위주의 분권적 사회에 상대적으로 성리학의 영향력이 조선보다 덜한 면도 있었고, 막말부터 일본의 살길은 서양열강보다 먼저 아시아 대륙을 침략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의 영향때문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근대사에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두번의 양요(洋擾), 즉 프랑스와 싸운 병인양요(丙寅洋擾,1866)와 미국과 싸운 신미양요(辛未洋擾,1871) 그리고 청국의 개입을 불러와 최초로 외세개입을 촉발하는 임오군란(壬午軍亂,1882)이 생각보다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도 전문적으로 이를 다룬 글이나 책을 본적이 없습니다. 물론 논문을 읽어보지 않아 제가 모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대원군의 사실상 (de facto)의 섭정(攝政)이 끝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고 개화를 하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1860-1880년대의 이 시기는 일본이 조선과 중국 대륙을 탐하고 있었으나 아직 구체적으로 정책을 세워 실행하기 전이었고, 서양의 문호개방에 대해 대처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조선의 운명이 갈릴 수 있었던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조선후기인 18세기 경부터 청나라를 왕래하며 서양의 여러 문물을 접해왔을텐데 19세기 후반까지 양반과 학자관료들이 고집스럽게 근본주의 성리학에만 매달리고 경제활성화를 위한 정책이나 국방력 강화정책을 쓰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폐쇄적이어도 외교관들이 청국으로 사행을 다녀오면 지식층에라도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쳤을탠데 갑신정변이후까지도 유생들이 경전만을 인용하며 왕의 부국강병책에 반대 상소를 올리는 광경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이렇게 현실을 모른 체 허황된 주장만을 내세워 유교가 아닌 모든 것들을 야만으로 간주하는 무모함이 현실적인 부국강병책 실행을 불가능하게 하고 결국 외세를 끌어들이게 되는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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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이야기 4 - 약소국의 생존 전략 춘추전국이야기 4
공원국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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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1권이나 되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역사서를 읽는다는게 쉽지는 않습니다. 저의 경우 2021년 ‘춘추전국이야기 ‘ 1권에서 3권까지 읽은 후 2022년에는 결국 읽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가 궁금했지만 시간이 없어 도리가 없었죠.

본론으로 넘어와서 이 책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춘추시대 말기 약소국인 정나라의 재상이었던 자산(子産)의 정치적 평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춘추시대 말 두 강국, 즉 북쪽의 진(晉)나라와 남쪽의 강자 초(楚)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벌여야 했던 약소국 정나라의 상황은 2023년 현재 미국과 일본이라는 해양세력과 중국과 러시아라는 대륙세력 사이에 끼어서 섣불리 행동하기 어려운 한국의 현재 상황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한국이 세계6위의 경제대국이라고 해도 위에서 언급한 지정학적인 상황은 변하지 않습니다. 비록 19세기 말보다 상황이 나아졌다고 해도 국제조약체제상으로나 국제정치적으로 한국은 국력에 비해 아직 목소리가 너무 작습니다.

자신이 가진 패도 재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죠.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은 단순히 고대 중국의 정치사/ 전쟁사로 치부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책에서 자산이라는 고대 중국 정치가를 통해 본 약소국 정치가가 갖추어야 할 자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신만의 원칙을 고수해야 합니다. 일관되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강대국의 어느 한쪽 편을 들면 안된다는 말이지요.

둘째, 비판적인 언론을 용인합니다. 독재자들은 예외없이 여론을 배제하고 탄압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소국의 정치를 이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셋째, 전문가들의 조언을 수없이 경청하고 결코 즉흥적으로 외교무대에서 발언해서는 안됩니다. 죽 모든 행위는 계획에 의한 일종의 연기로 강대국에게 빈틈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이책의 제10장에 위의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2,500년도 전에 일어난 중국 역사의 한토막이지만 2023년의 한국정치와 비교해 한국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의 정치외교를 위의 세 잣대로 평가하면, 한국은 현재 어떤 외교원칙이 있는지 불분명해 보입니다. 임기응변으로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됩니다. 한국은 현재 철저히 일본과 미국편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이대로 방치해도 되는건가요?
현재 한국의 언론은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죠.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것은 독재국가애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정부의 나팔수로서의 언론만 용인하는 것도 독재 정치체제에서나 가능한 일이죠.

샛째, 현재 한국정치애서 전문가의 발언이 실종되었습니다. 전문가의 소견을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범죄화하고 있습니다.
종편의 심사에 참여했던 언론학 교수들이 고발되고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대낮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약소국의 정치가가 가져야 할 그 어느것도 현재 한국 정치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현상황에 대한 우려는 단순히 마음에 안들어서가 아닙니다. 이건 국가의 전략(Strategy) 부재로 보이기 때문에 우려스러운겁니다.

잊지 말아야 할 또 한가지는 정나라의 자산은 지극히 현실주의적 정치가이고 필요하면 편법도 쓰고 술수도 쓸 줄아는 정치가였다는 사실입니다. 출신도 왕족인데다가 보수적인 완고한 원칙주의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위의 세가지 잣대로 정치를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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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감상부터 써야할 것 같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광기(狂氣)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연구서였습니다. 이 책에 나온 특히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라는 황도주의 언론인이자 정치가는 솔직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노골적인 일본 황실우선주의자이자 전제정치주의자로 일본의 군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선동했던 호전적인 인물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현재 일본에서 매이지, 다이쇼, 쇼와시대를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일제의 식민사학을 비판하기 위해 출간된 이책은 시리즈의 첫번째로 이미 두번째 권은 소개한적이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과 식민주의 ( 사회평론 아카데미,2022)

두번째 책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를 찿기 위한 일제 관변사학자들의 유물발굴과 박물관에서의 유물전시, 의도적으로 궁궐의 전각을 박물관으로 사용하면서 궁궐을 훼손한 사례들을 설명했다면, 첫번째 권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라는 막말 사상가의 ‘주변국 선점론’이 어떻게 ‘동양사’라는 개념으로 발전되었고, 도쿠토미 소호의 ‘황도 파시즘’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줍니다.

요시다 쇼인이라는 일본 막말의 인물을 처음 인지한 건 얼마전 유세도중 피격되어 사망한 전 일본총리 아베신조(安倍晋三)관련 외신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일본의 극우상향 정치가는 공공연히 요시다 쇼인을 존경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고, 그 이후 여러 정보를 접하면서 그가 한국에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스승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어베신조의 선조들의 고향은 야마구치현(山口県)으로 막말의 조슈번(長州藩)입니다. 이곳은 메이지 시대 국가주의적 일제의 통치체제를 완성한 호전적인 군국주의자들의 고향인 곳입니다.

아베 전총리가 일본 재무장에 열을 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요시다 쇼인이 주장한 ‘주변국 선점론’이란 간단히 말해 서구 제국주의 열강보다 먼저 일본의 주변국 즉, 중국과 일본 그리고 여러 아시아 지역을 선점해 일본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냥 봐도 침략주의 (侵略主義) 주장입니다.

그를 존경하던 메이지 시대 군국주의자들이나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자는 인물 상당수가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는 건 그래서 매우 일관적입니다.

다음은 동양(東洋)이라는 지명의 유래입니다. 지금은 너무나 일반적으로 사용해 별다른 함의(含意)가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매우 충격을 받은 말이 바로 이 ‘동양’이라는 용어입니다.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라는 일본의 학자는 1890년 메이지일본이 ‘교육칙어 (教育勅語)’를 발표해 천황제에 기초한 교육방침을 공고히 한 후 천황을 신격화하고 군국주의를 강화하기 시작한 가운데 당시 본방사(本邦史), 지나사 (支那史), 외국사 (外國史)로 편제되어있던 역사교과를 지금처럼 일본사, 동양사, 서양사로 편제를 한 것으로 그의 제안이 문부성에 받아들여서 생긴 변화입니다.

나카 미치요가 정립한 ‘동양’이라는 용어는 쉽게 말해 일본의 천황이 통치하는 지리적 영역을 모두 포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의 중원인 화북지방 뿐만 아니라 만주 몽골 그리고 동남아시아까지 포괄하는 모든 지리적 공간에 대한 역사를 모두 동양사에 집어 넣었습니다. 1890년대 나카 미치요가 제안한 동양사의 지리적 범위는 놀랍게도 제국일본이 1945년까지 침략을 진행했던 모든 지역과 일치합니다.

제국 일본은 치밀한 계획하에 조직적으로 아시아를 침탈한 것입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동양사와 관련해 또 하나 경악할만한 사안은 통념과 달리 조선의 역사가 동양사가 아닌 일본사애 편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제국 일본은 교육칙어를 반포한 이후 조선을 이미 사실상 일본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었고 교과서에 그 내용을 실었습니다. 당시는 청일전쟁을 하고 있었고 러일전쟁을 하기 이전입니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신라 정벌을 사실로 받아들여 조선은 이미 고대에 일본에 복속된 땅으로 조선은 일본의
복속에 이탈해 잘못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침탈해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일본의 ‘침략성’을 이 주장보다 더 명확히 드러낸 경유는 아나 없는 것 같습니다.

즉 제국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서양으로부터 최신 군사기술과 무기를 받아들이고 선진문물을 배운 이유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목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일본은 민주주의와 인권사상을 받아들였지만 천황제 파시즘 이러는 국가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 민주주의를 벌이고 군국주의로 나간 국가입니다.

일본은 제1차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가해 당시 제국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의 이익이 걸린 당시 독일의 조차지가 있던 산동반도의 칭타오를 공격하고 독일의 식민지였던 남양군도를 점령합니다.

중국 중원 진출을 추진하던 군부 세력은 랴오둥 반도로 출병해 끝내 만주사변 (満州事変,1931)을 일으키고 중일전쟁(中日戦争,1937)을 일으킵니다.

앞에서 언급한 언론인 도쿠토미 소호는 광신적으로 황도(皇道)파시즘 이데올로그로서 결국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은 모두 몸과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군국주의적이고 전제주의적 파시즘의 극단을 주장했습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일본이 아시아를 넘어 서양까지도 진출할 수 있다고 독려한 그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Pearl Harbor)를 공격하고, 말레이 반도의 싱가폴(Singapore)을 공격해 영국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광기가 메이지 시대부터 지속되어 결국 동아시아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과 이를 준동하고 사실상 독전(督戰)울 위한 글을 발표한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에 대해 한국인들이 잘 모른다는 건 사실 충격입니다. 그는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이후 초대 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을 도와 조선의 언론계 전체를 감독하며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를 확립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과거의 일제시대를 설명하고 있지만 2023년 현재 일본이 메이지 시대보다 한치라도 변한게 있는지 의문입니다.

서두에서 말했듯 아베신조 전 총리를 비롯한 제2차세계대전 전범(war criminal; 戰犯)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정치를 하는 나라가 일본이고, 이 책에서 보았듯이 애초 민주주의라는 대의 정치제도가 발붙일 역사적 토양이 없는 나라입니다.

호전성은 바뀌지 않았고, 미국과 중국의 대립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틈을 타 다시 재무장을 하려고 합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당시 패전국이었고 미국도 일본과의 전투에서 인명 피해를 많이 입어 일본을 무장해제 시키고 동아시아를 봉쇄하기 위해 주일미군의 주둔시켰지만 상황이 바뀌어 미국은 일본을 재무장시켜 위협이 되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일본은 과거에 아직도 얽매어 있는 오래된(archaic)전제 왕국일 뿐입니다.

끝으로 책의 저자이신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의 다른 저작을 소개합니다. 아마 대한제국기 고종의 통치에 대해 거의 최초로 긍정적 시각으로 집필된 연구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2000)

일본 편향적인 학자들이 무능한 군주라고 설명해온 고종의 통치를 긍정적인 시각에서 재조명한 것으로 오래전에 출간되었지만 이책과 정반대의 시각을 볼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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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강원대 장경호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입니다.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1896.2-1897.2)만큼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고종은 재위시 경운궁에 기거하면서 경운궁 주위의 외국 공관 특히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 공사관에 파천에 대한 문의를 많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힘없는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 때로는 정치적 이유때문에 때로는 본인의 신변 안전을 위해 외국 공사관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사실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미국과는 1871년 발발한 신미양요( 辛未洋擾)를 통해 적대적인 관계로 처음 접했고, 그 이전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가 1866년 대동강에서 평양군민에게 불탄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쇄국정책 시기 조선은 미국을 양이(攘夷)로 인식하고 결코 미국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청의 주일 참사관이었던 황준헌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을 통해 조선에 전한후 미국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가 영토확장 야심을 보인다고 본 청의 외교관은 먼 곳에 있는 미국은 아시아에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보았으며 중립적이고 평화적인 나라로 보았습니다.

이후 고종은 미국과 구미국가 최초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1882)을 체결합니다.

1880년대까지 러시아의 동진과 러시아의 연해주 식민지 추진은 청에게도 일본에게도 안보 상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해양세력인 신흥국 미국과 연대해서 러시아의 남진을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공사관이 설치된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 처음엔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으나 점차 친일로 기울게 됩니다.

청일전쟁으로 청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진주하게 되고 심지어 일본군은 경복궁에 군사를 둘러싸고 사실상 고종을 경복궁에 가두어 버린 일이 발생합니다 ( 경복궁 점령사건,1894).

청과의 텐진조약에 따라 동학혁명군을 진압하러 온 청군과 함께 조선땅에 온 일본군은 무단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무력시위를 하며 침략을 본격화합니다.

1894년 일본의 경복궁 점령에 대해서는 단독 저서가 있습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푸른역사,2002)

아무튼 일본의 무력시위에 위협을 느낀 고종의 신하들은 고동을 경복궁에서 피신시키기 위해 춘생문 사건(1895)을 일으켰지만 탈출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이 미국공사관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주장은 사실 직접적 정황이나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이후 일어난 아관파천의 전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도피 이후 친일내각을 구성했던 김홍집이 군중에 살해되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고 친러파와 친미파가 득세하게 됩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불행하게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한 아관파천 이후에도 특히 미국공사관에 파천에 대한 문의를 지속하고 조선의 중립화 방안에 대해 미국의 거중조정(居中調停)을 요구했다는 점입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위 제 1조인 미국의 거중조정 조항을 고종은 진심으로 대하고 낙관적으로 해석한 것이었으나 미국은 단지 의례적 조항으로 보았습니다.

1898년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은 고립주의( isolationism)에서 벗어나 점차 아시아의 이권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미 아관파천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력 아래 조선이 들어가게 된 것을 안 미국은 조선이 중립화를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자 이를 반대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오히려 일본과 더 밀착하게 됩니다.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은 1890년대 당시 모두 조선에서의 이익을 가져가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습니다.

미국은 러일전쟁이후 더욱더 일본과 밀착되었고 사실상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게 되고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미국의 이권이 개입된 중국을 전쟁터로 하지 않기로 일본과 외교적 합의를 하는 치밀한 전략을 추진합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권은 중국에서 더 크고 조선은 크지 않아 조선 땅이 전쟁터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인종주의자로 알려진 대통령으로 조선은 미개하고 일본은 선진적이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하등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제국주의적 대통령이었습니다. 미국은 러일전쟁의 종전을 위해 포츠머츠 회담을 주선하고 협정을 추진하여 철저한 친일로 일관했습니다.

고종이 미국을 너무 선의(善意)로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 결국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예상은 했었지만 고종 당시 조선에 와 있던 미국인들은 모두 이 미지의 나라에서 철저히 이권을 추구했습니다.

미국은 특히 러시아의 남진에 대비하고 청국에서의 이권을 담보하기 위해 평안도의 의주와 용암포의 개항을 요구하였고, 러일전쟁 와중에 고종은 이를 허가합니다. 평안도에는 미국이 운영하는 운산 광산을 비롯해 많은 미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미 19세기 말부터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고종이 미국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역이용해 이권을 추구했습니다. 미국인들의 이런 성향은 기본적으로 2023년 현재도 변함이 없다고 봅니다.

한국에서 특히 구한말의 중요한 친한인사로 구분되어 온 미국 선교사이자 외교관 알렌 ( Horace Allen)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애서 나온 인용으로 봐서 그는 철저하게 미국 국무부의 지침을 따르는 미국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하는 외교관일 뿐입니다. 결코 친한인사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 한국의 직업 외교관들이 국가이익에 철두철미하게 봉사하는 이 미국 외교관의 모습을 본받았으면 합니다. 현재 한국 외교관들이 정말 국익을 위하는 건지 의심이 됩니다. 대통령부터 국익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을 두둔하고 있어 이해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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