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출신 한국사 연구자이신 마르티나 도이힐러 (Martina Deuchler) 런던대 명예교수의 연구서입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한국학자께서 경북 안동과 전북 남원의 출계집단의 변천을 추적해 어떻게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들어왔는지를 추적한 사회사입니다.

출계집단이란 부계와 모계를 통해 공통의 조상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초기에는 가계도에 부계와 모계를 모두 기록하다가 조선에 신유학이 도입된 이후 부계중심으로 바뀝니다.

조선의 부계중심 종족제도의 출현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16-17세기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고, 조선에서는 유교식 부계종족과 토착적 기반의 문중을 동일한 제도로 담아내는 절충으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p715).

따라서 조선은 특히 지방의 경우 통치는 정부의 ‘공적’조직에 기반하지 않고 중앙정부는 지방을 종족제도를 통해 ‘사적 통치 (private governance)’를 하는 사족(士族)집단과 갈등관계에 있었고 지방의 사대부, 즉 사족들은 종족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신분과 이익을 지켜냈다는 말입니다.

한국의 경우, 출생과 출계가 엘리트 신분을 상속 가능하게 했지만 , 중국은 이론상 엘리트 신분은 사회적 출신과 무관하게 오직 과거급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p721).

한국의 이런 출계 기준의 국가와 사회는 엘리트 신분과 비엘리트 신분의 구분을 확실하게 만들었고, 비엘리트 층의 상향이동이 극히 제한된 사회였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확대된 상태로 서울에 근거를 둔 소수의 경화사족(京華士族)만이 권력에 접근이 가능하고 지방의 사족들도 점점 과거급제가 어려워지게 되면서 이들은 자신의 출계집단과 서원 그리고 유향소 등을 통해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과 경쟁하고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족들 중에서도 서얼(庶孼)들은 적서차별의 벽에 막혀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고 향리(鄕吏)들고 출세길이 막혀 결국 지방정치 부패의 온상이 되고 맙니다.

이미 노비들이 실질적인 경제활동의 당사자인데도 사족들의 견고한 기득권에 막혀 착취당해온 내력은 다른 책에서도 다룬 적이 있습니다.

노비는 조선 조정이 필요에 따라 세금을 더 걷기 위해 양인 여성과 노비의 결혼을 용인하기도 하고 농업과 가내 노동력의 필요에 따라 노비는 재산으로서 경제적 가치를 지니기도 했습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조선은 노비들의 노동력 착취를 기반으로 한 경직적인 엘리트 양반위주의 견고한 신분사회였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경직적 신분사회를 만든 엘리트 제도를 존속시킨 건 신유학이 아니라 ‘토착적 친족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합니다(p727).

그리고 조선의 신분제가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갑작스럽게 폐지되었으나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는 신분의식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현재의 한국사회에도 아직도 스멀스멀 살아있다고 느낍니다.

아직도 학벌에 목매고 고시출신들 실력에 관계없이 실력이 있다고 믿는 세태가 신분제의 긴 그림자가 아직 한국사회를 배회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네요.

끝으로 이 책의 외형적인 구성을 보려합니다.
본문만 총 729쪽의 벽돌책으로 총 14장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신라부터 조선말인 19세기까지 다루지만 주로 조선 중기가 중심으로 생각됩니다.

저자가 2015년 Harvard에서 출판한 영문본을 너머북스에서 2018년 번역한 책입니다.

책을 보면 저자가 안동과 남원 등지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들이 가득합니다. 저자가 오랜시간 한국을 탐구한 자료들이 집대성한 책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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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청국(大淸國)은 한국인들의 뇌리에 조선 인조 재위시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을 일으킨 ‘오랑캐’의 나라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청국과 관련된 역사서는 대부분 전쟁사이거나 대외관계사 등 정치 군사적인 면에 집중하는 면이 강합니다. 또는 만주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에 살던 여진족( 女眞族)이 어떻게 중원을 정복하고 중국의 영토를 확장했나 하는 점을 강조해서 서술합니다.

장한식,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산수야,2015)
유근표, 인조 1636 (북루덴스,2023)

과문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중국 청대의 경제와 사회를 다루는 한글로 된 단행본은 거의 본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번역본이 아니라 국내학자가 저술한 경우는 극히 드문경우라고 봅니다.

책은 서구의 경제성장이론 혹은 산업화 이론과 청국의 실제 사료를 검토해 청국의 경제가 유럽 특히 영국과 아시아의 일본의 경우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청국의 경제가 전 왕조인 명과 어떻게 다른지 화폐경제적 측면 (monetary economic perspective) 과 상품경제적 측면 (commercial economic perspective)로 구분해서 살핍니다. 중국 청대가 중요한 또하나의 이유는 이 시기가 영국의 산업혁명 시기와 겹친다는 데 있습니다. 같은 시기 중국과 영국을 포함한 서구가 어떤 경제발전의 경로를 따라왔는지 살피는 건 의미있는 비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비교는 왜 서구에서 산업혁명( Industrial Revolution)이 먼저 일어나게 된 경위에 대한 설명이 될수 있습니다.

또한 서구의 경제발전모델 이외 중국이 어떤 발전경로를 따라왔는지 살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쿠즈네츠 ( Simon Kuznets)의 경제성장론과 케네스 포메란츠(Kenneth Pomerantz)의 대분기론도 언급됩니다.

청대의 경제발전 수준을 시기별로 보자면 18세기까지 서구와 별반 차이없는 수준을 보이다가 19세기에 서구에 뒤쳐지게 되는데, 포메란츠가 말한 대분기란 서구와 중국의 경제적 생활수준의 ’격차‘가 급격히 벌어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 경제사가는 18세기 중국과 서구의 격차가 별로 없다는 걸 대분기라는 그의 대표 저서에서 논증합니다. 이책은 별도에 글에서 다시 다룰 예정입니다.

Kuznets,S., Toward aTheory of Economic Growth (W W Norton,1968)

Pomeranz,K.,The Great Diverge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2000)

이론적인 배경에 대한 논의는 여기에서 마치고 청나라의 경제가 도대체 어떠했는지 간략하게 살핍니다.

청나라는 예상과는 달리 화폐경제를 기반으로 한 경제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명나라때부터 유입하기 시작한 멕시코와 일본의 은이 중국대륙에 들어와 있었고, 거기에 청조정과 지방정부에서 동전을 만들어 유동성(liquidity)을 공급했습니다. 명대에 조정이 동전공급에 소극적이었던 사실과 달리 청 조정은 동전을 시장에 공급해 부의 이전이 하층 계급에게도 용이하게 했습니다.

다만 명청시대는 현재와 같이 그리고 서구에서 생각하는 화폐의 본위제(standard system)을 채용해 일정 양의 은과 법화의 가치를 연계시키지 않았습니다. 표준적인 화폐론 교과서에 나오는 금본위제 혹은 은본위제는 그 역사적 연원도 개념도 모두 서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청대 중국은 서구와는 다르게 본위제를 선택하지 않고 다양한 동전을 중앙과 지방정부 그리고 민간업자들이 만들어썼고, 따라서 가치나 규격도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은도 은화를 만든게 아니라 은괴를 무게를 달아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상업거래에 있어 고액결제는 은으로 소규모 결제는 동전으로 하는 복합적 화폐경제체제였습니다.

저자는 청 조정이 18세기 건륭제 제위기에 특히 동전을 대규모로 유통시킨 사실을 현대적 의미에서 중앙은행의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과 비슷한 정책으로 보고 이런 유동성 공급을 통해 인플레이션이 유발되고 부의 집중이 일어났지만 한편으로 경제적 활력을 불어넣어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향성되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중앙집권적 근대 국민국가체제에 익숙한 현재 우리가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체제이지만 청대 중국은 예상과 달리 황제의 권력이 지방에 이르지 못했고, 각 지방의 실력자들이 그 지역을 나름의 방식으로 통치하는 분권적 체제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각 지방마다 말도 다르듯 도령형도 다르고 화폐도 다양하게 운영된 겁니다.

북경의 황제가 엄연히 통치하는 황제국이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국 청대의 경제체제는 자유방임( laissez-faire)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경제체제의 제도의 중요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보수진영에서 주장하는 ‘자유경제체제’는 말만 들으면 정부는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경제가 잘돌아갈 것처럼 들립니다. 경제에 대해 잘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를 합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면 화폐의 경우를 보더라도 위의 청나라처럼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결제방식을 가지게 됩니다.

반면 현재처럼 국가가 법정통화를 발행하고 그 법정화폐의 가치를 정한다는 건 국가가 경제행위에 제도적으로 개입한다는 말이고 실제 한국을 비롯해 자유주의 경제를 지향하는 모든 서구국가들이 이런 제도를 채택합니다. 이 화폐경제 시스템이 전제되어야 자유로운 물품의 거래가 순조롭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현대경제에서 국가는 개입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기본적인 ‘국가의 책무’입니다.

끝으로 이책의 마지막에 나온 ‘선대제 수공업’에 대해 언급합니다.

서구의 산업화이론에 따르면 자금과 장비를 선대업자에게 제공받아 임노동을 제공해 완제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초기 생산방식이 공장제 메뉴팩쳐링(manufacturing)으로 가는 전단계라고 해서 선대제 수공업의 존재여부가 산업혁명으로 가느냐 못가느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고 합니다.

청대 중국의 경우 선대제 수공업이 일반적이지 않아 중국이 산업혁명에서 뒤쳐진 걸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은 중국의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 해석오류였습니다.

서구와 일본의 경우 중앙집권적 권력이 자리하고 자본이 집적되어 자본가층과 노동자 층이 형성되어 시장에서 고립되고 가진돈이 없는 농민들이 선대제 수공업에 참여하여 부수입을 올릴 수 밖에 없었지만, 중국의 농민들은 시장접근이 자유롭고 국가의 통제가 거의 없는데다 독립적으로 수공업을 영위해도 판로가 있기 때문에 굳이 선대제 수공업으로 갈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중국의 상황을 구태여 서구의 산업화이론에 꿔어 맞춰 설명할 필요가 있는지도 솔직히 의문입니다. 이 케이스는 선대학자들이 역사적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섣부른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근세와 현대 중국에 대한 책을 보면 우리가 현재 표준으로 알고 있는 자유주의 경제체제, 민주주의 경제체제가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18세기 이후에 확산된 새로운 생각이고 그 이전 수천년 동안 서구건 아시아건 모두 전제주의 정치체제에 속해있었습니다.

더구다 청대 중국은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으로 황제가 절대권력을 경제행위에 행사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화폐제도도 정비하지 않고 신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농사짓고 상품거래하는 걸 방임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중국경제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새로운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최소 1842년 아편전쟁 이전까지 중국은 경제자원이 분권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특별하 산업혁명이 필요한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밖에서 서구의 눈으로 볼 때 이 상황을 자신의 상황과 비교해 중국이 ‘후진적’이라고 해석할 소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책의 부제에 있는 ‘협치’가 과연 책에서 설명이 되어 있는지 좀 의구심이 있습니다.

청대 중국이 중앙집권적으로 통치된 것이 아닌 것도 맞고 지방의 토호세력들과 사대부들이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건 사실인 듯하지만 이 사실이 바로 북경의 조정과 ‘협치’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결론에서 갑자기 이 용어가 튀어나와 좀 놀랐습니다. 개인적으로 협치는 좀 과도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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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에서 한문학(漢文學)을 연구하시는 정민교수님이 2014년 펴내신 책입니다.

하버드 옌칭도서관(Harvard -Yenching Library)에 수장되어 있는 일본의 동양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가 소장했던 조선과 청국 문인들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고서에 대한 소개를 한 책자입니다.

정민교수는 2012년 8월부터 1년간 이 연구소에 초청학자로 머물며 이 일본인 동양학자가 수장했었던 조선과 중국의 고문서들을 살피고 후지쓰카 지카시 컬렉션으로 하버드에서 모르고 있던 고서들의 가치를 확인하는 서지(書誌) 작업을 하신 셈입니다.

본문만 712쪽 총 40장에 이르는 내용을 이자리에서 언급하는 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한학(漢學)에 문외한인 제 능력밖의 일입니다.

다만 조선후기 역사에서 북학파(北學派)로 불리던 소수의 유생(儒生)들인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청국의 문인들과 교류하던 열린 문인들이었습니다.

특히 박제가의 경우 그의 글씨와 시문이 베이징의 문인들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던 유명인이었고, 그가 써준 여러 글씨, 편액들이 중국쪽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까지 연행만 4차례 수행한 것도 매우 이례적입니다.

정권의 주류인 서인의 노론(老論)세력 유림들과는 다르게 청국의 근대적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워야한다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청국내의 한족(漢族)문인들뿐만 아니라 만주족(滿洲族) 그리고 몽골족 문인들과도 교류하고 배울건 배우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조선과 청나라간 18세기에 일어난 연행(燕行)이라는 외교행사의 이면에서 일어난 양국 지식인들의 인적교류사이고, 그들이 남긴 문집과 주고받은 시를 풀이하여 의미를 알아야하므로 문학사이기도 하고, 같이 건네받은 그림을 추적해야 하므로 한편으로 한중미술교류사이기도 합니다.

청나라는 18세기내내 건륭제(乾隆帝)치하의 성세를 이룬 시기였고, 조선은 학자군주 정조(正祖) 통치기였습니다.

이번에 읽은 책이 정민교수님 책으로는 두번째인데, 가장 최근작인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김영사,2022)‘에서 받은 인상이 매우 강렬했기 때문에 두번째 이 책도 읽게 된 것입니다.

해당주제에 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약간의 실마리라도 보이면 관련 기록을 모두 찿아 비교하고 대조하는 모습은 두 책을 관통하는 아카이브 이용방법론이기도 합니다.

분야가 어떻든 특히 역사와 인문학은 과거의 기록물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해석해야하는가 그리고 어떤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 정설적 설명이 바뀔 수 있는가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책에서 읽었던 가장 인상적인 말씀은 요즘 학자들이 담론(談論, discourse)위주의 연구를 많이 하지 사실관계 확인( fact finding)과 같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연구를 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론이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인데 현실을 등한시한다는 뼈아픈 말씀입니다.

지금도 그런현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식인의 역할이 서구의 담론수입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수입상( 知識輸入商)‘을 지식인으로 착각하는 지식사회에 대한 고언(苦言)이라고 봅니다.

또한가지 인상적인 건 북학(北學)과 북벌(北伐)의 대조입니다.

북벌이 단지 명분론으로서 사실상 군사력이 부실한 조선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의 패배이후 일종의 국책 프로파간다( propaganda)였다면, 북학은 오랑캐라고 하더라도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배우자는 자세이므로 훨씬 개방적인 마음가짐을 나타냅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북학파 학자들은 청국에 있는 문인 학자들을 민족과 상관없이 만났습니다. 상대가 몽골인이건 만주인이건 가리지 않았고 유럽에서 파견한 카톨릭 신부도 만났습니다.

이건 근본주의적 주자학자들인 서인 노론 출신들이 조선사회에서 반상(班常), 적서(嫡庶)차별을 당연시하고 노비를 재물취급하고,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 변경지방 양반들마저 차별하면서 또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등한시한 체 오로지 이미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의리(義理) 만을 강조하는 허물뿐인 명분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 조선은 이런 근본주의적 주자학자들의 허망한 명분집착과 국방 경제력 강화를 하지 않은 것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집권층인 노론측에서 명분론으로 내세운 북벌론이 조선의 ‘국가보안법’이었다는 설명은 적절해보입니다.

병자호란에서 굴욕을 당하고도 바뀌지 않은 체 군사력도 변변치 않은 체 청국의 팔기군과 대항하겠다는 주장은 정상적인 사고로는 나오기 어려운 황당 그 자체입니다. 북벌의 주장에 대한 연구서는 봐야 알겠지만 일단 제가 아는 한 이것이 정책은 아니었고, 단지 명분론이고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근래 읽은 한문학자들의 연구서들은 제 기대 이상으로 좋은 저서였다는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정민교수님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에 읽은 한문학자 강명관 교수님의 아래의 저서도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노비와 쇠고기 ( 푸른역사,2023)

명륜동의 성균관이 조선최고의 대학인 줄만 알았지, 조선의 왕과 사대부들이 얼마나 이 기관의 재정지원에 인색했는지를 새삼 알게 되었고, 경제 전공자 입장에선 사대부와 양반들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처신이 이해가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더해 쇠고기 도살과 판매를 독점하던 성균관 소속 노비들인 반인들을 성균관이 착취하게 되는 과정을 가감없이 보여줍니다.

조선시대를 현재의 시각으로만 보아서도 안되겠지만, 이 책을 보면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탱하는 구조가 이렇게 착취와 묵인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은 너무 강고하고 경직적인 신분사회가 아니었나, 그리고 지식인이라는 양반이 고담준론말고 도대체 사회의 후생에 무엇을 기여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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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7-30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책 소개 감사합니다.
 
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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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40여쪽 분량의 역사평설입니다.

책 제목에도 나타나 있듯 저자의 입장은 인조(仁祖) 가 혼군(昏君), 즉 어리석은 임금이라는 주장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일단 저자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인조가 조선의 왕 중에서 문제적 군주인 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휘둘린 조선의 붕당 중 서인세역의 반정 ( 反正) 이라는 이름의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임금으로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명에 대한 제조지은(再造之恩)에만 집착한 서인 척화파 (斥和派)가 자초한 전쟁이 병자호란이기 때문입니다.

군사력을 키우지 않고 무신들과 서죽지빙 양반들을 공공연히 무시하고 망해가는 명과의 의리만을 지키겠다는 주장은 절개(節槪)가 아니고 그냥 바보짓입니다.

인조 집권 후 반정에 공을 세운 무인들보다 문인들을 1등공신으로 세워 ‘이괄(李适)의 난‘을 자초하고, 이후로도 청의 국력을 매번 무시하고 심지어 명에 원군을 보내 정묘호란( 丁卯胡亂)을 자초했으며 끝내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까지 자초하게 됩니다.

청은 처음엔 조선을 치려하기 보다는 외교적으로 관계를
풀려했지만 화이론(華夷論)의 도그마에 빠져있던 집권 서인 양반들은 청을 무시했고 망해가는 명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리석은겁니다. 죽고 사느냐가 걸린 문제를 놔두고 알량한 명분만 찿으니 말입니다.

한 국왕의 통치시기에 두번의 대외전쟁과 한번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건 인조정권 자체가 내치와 외치에 모두 취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더 문제는 인조와 서임 척화파 양반들이 호란 이후에도 변한게 없이 계속 뜬구름 잡는 헛소리나 하고, 쓸데없는 명분론에 계속 집착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청의 수도 심양(瀋陽)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 昭顯世子)에게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가 농사를 지어 인질로 같이 잡혀온 소현세자 일행들이 먹고 살길을 도모하라고 했을 때 글만 읽은 양반 사대부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농민을 조선에서 데려와야 한다는 등 이해하기 힘든 주장을 해서 청태종 자신이 조선의 사대부들의 무능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청제국을 세운 홍타이지 입장에서도 도무지 실리라고는 모르고 책만 읽고 이상적인 헛소리나 해대는 조선의 양반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얼굴이 가장 화근거리는 대목이었습니다.

책의 내용 자체는 이전에 병자호란이나 인조반정 그리고 조선후기 당쟁에 대한 책을 읽으셨으면 일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정치사보다 병자호란의 개별 전투를 중심으로 서술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건 책의 인용 문제입니다. 책의 이야기 전개에 방해를 하지 않으려는 의도였겠지만 이 책은 뒤에 붙어있는 참고문헌들이 어디에서 인용된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출처에 대한 언급이 제대로 본문에 나와야 합니다. 주석이나 인용이 독서에 방해가 된다면 전체 인용에 대한 내용을 책 본문 이후로 뺄 수도 있습니다. 편집상의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영어권의 책들은 역사서나 논픽션의 경우 결코 인용과 주석정보를 빼놓지 않습니다. 바뀌어야 할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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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한 책이라 읽었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너무 소략해서 놀랐습니다.

조선후기의 무관이었던 노상추가 평생에 걸쳐 쓴 일기를 240여쪽에 축약해서 넣었기 때문에 많은 용어설명이 생략되어 있고, 전체적인 맥락(context)을 파악하기가 여려워 가독성이 좋은 책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서구의 한국학자들 책을 여럿 펴낸 너머북스에서 2009년 출판한 책인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총 12권을 국역본으로 펴냈다고 합니다.

아마 전체 국역본이 존재하기 때문에 처음 이 책을 접하는 이들을 위한 대중서로 기획되어 소략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책에서 스케치하는 18-19세기 조선사회는 강고한 신분제가 자리잡고 있는 사회로 지배계층인 양반들도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사이에서 문반우위의 차별이 당연한 사회였으며, 사는 근거지가 지방인가 서울인가에 따라서도 영향력과 권력접근의 차이가 명확한 사회였습니다.

노상추는 경상도 선산(善山)출신의 무반으로 성리학의 고장인 안동과 가까운 지역에서 살았지만 지방의 양반으로 늦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한 이로 주위의 인맥들 역시 경상도 남인(南人)이 대부분이라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西人)과 교류하기 어려웠던 비주류 출신입니다.

조선사회는 지배층 내에서 무반과 문반의 차별이 있을 뿐아니라 엄연히 서북(西北)지방, 즉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지역출신 양반도 역시 차별했습니다.

거기에 적서(嫡庶) 차별도 존재해 서자들은 아예 벼슬길이 불가능한 사회였습니다.

지배계급인 양반이 이정도이니 그 아래 평민들의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노비(奴婢)들은 아예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양반들은 자신들의 토지에서 농업경영를 하면서 노동력으로 자신들의 재산인 노비들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한국학자 중에 조선이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한 이도 있습니다( 미국의 제임스 팔레교수의 주장). 일반의 선입견과는 달리 조선의 농지는 소작농보다는 노비들의 노동력을 이용한 경작위주였다고 합니다. 경제적 물질적 기반을 사실상 노예인 노비신분의 천인들이 떠앉은 겁니다.

특화된 노비 중 오직 성균관에서만 일할 수 있는 노비인 반인(泮人)들이 조선의 최고 관학인 성균관에 대한 조선 조정의 재정지원 부족으로 서울의 반촌을 중심으로 쇠고기 판매를 해서 생활을 유지하고 성균관이 이들의 수익을 수탈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노비와 쇠고기,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2023)

이런 사례를 보면 조선의 양반들이 나랏일을 결정하는 지배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실상 하위 계급의 백성들을 수탈해서 삶을 살아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에 비해 과도한 특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도대체 먹고 사는 일을 등한시하면서 국왕에대한 충성은 무엇이고 부모와 자식간의 의리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가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투표권은 성인 남성에게만 있었고, 그 사회에서 노예 역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여성과 노비 그리고 서출(庶出)들은 극심하고 공공연한 차별을 감내해야 했고, 노비는 노예로서 사람이 아니었고, 양반들에게 토지와 함께 귀중한 재산이었습니다.

불편해도 조선사회의 경제적 토대에 노예인 노비들이 있었고 이들을 착취하는 것이 양반들의 부의 원천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서 인정하면 조선 후기에 왜 수많은 하위신분의 사람들이 돈으로 신분을 사 양반이 되려했는지, 왜 서북지역 양반들이 서울의 벌열(閥閱)들에 반기를 들고 민중반란을 일으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살수가 없어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왜 수많은 노비들이 도망가고 추노(推奴)꾼들이 노비를 찿으러 다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명분만 쫓고 실질적인 경제활동을 등한시한 체 노비들과 가난한 평민들을 직간접적으로 착취하는 구조의 조선 사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구조적 갈등에 놓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추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양반들이 성리학 논쟁을 통해 이룩한 철학적 논의들이 사실상 무력하다는 걸 새삼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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