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때 활약했던 청남(淸南)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인 윤휴에 대한 평전입니다.
2021년 개정 증보된 책으로 그 이전에는 ‘윤휴와 침묵의 제국(2011)’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윤휴가 60세가 다 되도록 출사를 안하다가 왜 늦은 나이에 출사를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중요시한 북벌 (北伐; 즉 청나라에 대한 정벌) 이유와 배경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같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장했던 조선의 신분제 문제와 같은 사회개혁적 주장이 소개됩니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17세기 조선의 왕이었던 숙종은 당시 사대부의 당인(黨人)들을 바꿔가며 정치를 했던 군주로 대중에게는 장희빈(張禧嬪)을 후궁으로 들인 임금으로 수많은 사극의 소재를 제공한 임금입니다.
하지만 지금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하고 군주에게 고언(苦言)을 했던 윤휴가 단지 서인들의 공작정치의 희생양이 된 사실은 몹시 안타깝습니다.
여러인물들과 정치세력이 숙종대에 존재했지만, 윤휴의 대척점에서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송시열(宋時烈)을 평하지않고 이 책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저자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2000/2016)’라는 책을 따로 집필해서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보시면 됩니다.
다만 송시열은 제가 아는 한 조선을 ‘ 주희 성리학’의 도그마만을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내세워 정치적으로 매우 경직적인 대명사대주의(大明事大主義)만을 추종하는 나라로 만든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문인 사대부들의 원리주의적 성리학 우선주의와 사대부의 기득권 옹호를 위한 신분제 유지의 입장이 19세기 이후 조선의 민중반란의 원인이 되었고 외세를 끌어들이게 된 원인 중에 하나였습니다.
병역을 천시하고 평안도 함경도 등 특정지역에만 군사방비를 맡긴체 기호지방과 영남 지방 사대부들은 본인들의 치부외에 그 어떤 경제적 기여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서인 노론을 대표하는 송시열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외척(外戚)인 안동 김씨(安東金氏)세력의 대를 이은 국정농단 (國政壟斷)도 조선의 몰락을 부추긴 큰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책에 서인 척신(戚臣)으로 등장하는 김석주가 바로 안동 김씨로 이미 17세기 중반 당시에 숙종의 외척으로 그가 남인에게서 정권을 빼앗기 위해 정치공작의 얼마나 전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송시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가 얼마나 지독한사대주의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중국의 명나라만 군주국으로 보고 조선의 왕은 중국의 제후로 보는 근본주의적 사대주의자로 숙종이전 효종당시 예송논쟁 ( 禮訟論爭)이 일어나자 조선의 왕가를 일반 사대부의 예와 같은 급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입니다.
사대부의 나라인 조선에서 조선 왕가의 정통성을 부인한 사건으로 정상적 전제군주국가라면 역모(逆謀)로 처벌받을 수 있던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조 때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임진왜란 (壬辰倭亂) 당시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 나라를 멸망에서 구했으니 그 은혜를 잊으면 안된다는 재조지은 (再造之恩)만을 주장하며 명청 교체기인 당시의 정세를 무시하고 떠오르는 강국 청은 오랑캐라고 무시하고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는 몰상식한 주장을 지속합니다.
문인 사대부국가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거의 멸망직전까지 갈 정도로 절단이 났으나 당시 이순신의 수군을 제외하고 육군은 거의 괴멸상태를 면치 못했습니다. 명군의 참전은 군사력 부족으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정상적 지배층이면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집권 서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명과의 재조지은만 강조하다가 만주에서 일어난 청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오랑캐라고 무시하고, 국방력 강화를 소홀히하다가 다시 청의 침략을 받은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하지만 청은 현재의 중국보다 더 큰 영토를 가진 강국이었고, 당시는 개국 초기라 중원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중원 진출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습니다.
영화 남한산성(2017)에서 보았듯이 남한산성으로 몽진한 조선 조정에서 김상헌(金尙憲)으로 대표되는 서인( 그리고 안동 김씨)은 없는 군사력에도 오랑캐인 청과 대항해야 한다는 헛소리로 일관하며 항복할 수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합니다.
현실을 몰각하는 서인 선비의 모습을 보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즉 사대부들은 , 특히 서인 사대부들은 임진왜란으로 나라를 망쳤으면서도 기득권 수호를 위해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았고 재조지은에 집착해 청과의 현실적 외교관계를 망각해 병자호란을 자초했습니다.
서인 사대부들은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이지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 (仁穆大妃)를 유폐시킨 것이 천하의 의리를 저버린 것이라는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켜 결코 왕이 될 수 없었던인조를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적통을 가진 선조의 적통인 광해군을 폐위시켰습니다. 광해군은 국제정세에 밝고 임진왜란당시 전쟁경험을 가진 드문 군주였지만 서인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폐위시켰고, 그후 서인들은 청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삼전도(三田渡)애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굴욕을 당하는 사건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명분에 집착하기에 왕이 당한 치욕도 백성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 너무 컸던 것이죠.
숙종 당시는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효종과 현종대를 거친 이후인데도, 그리고 병자호란의 참화를 겪는지 얼마 안되었는데도 여전히 서인들은 양반 사대부인 자신들의 기득권 옹호만을 위하지 국방력 방비도,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을 위한 군사력 강화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황당한 건 세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던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서인 사대부들은 성리학 도그마에 갖혀 전혀 현실감각울 가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병자호란 이후애도 서인 사대부들은 청나라의 대욋사정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청은 만주땅과 몽골땅 말고 한족들이 장악하고 있던 중원(中原)을 아직 장악하지 못했고, 명이 멸망당시 투항했던 명나라 장수 출신 오삼계(吳三桂)등이 삼번(三藩)의 난을 일으키고 대만을 장악한 정성공(鄭成功)등이 반청 내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조선의 서인 사대부들은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재조지은을 갚을 기회가 왔는데도 청의 눈밖에 나는 걸 두려워하던 겁쟁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휴는 시대를 잘못 타고나 유학을 배운 지식인으로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하다가 겁쟁이이지만 권력욕은 큰 명분론자들인 서인 세력들이 행한 정치공작으로 숙청당했다고 봅니다.
17세기 유학을 배운 사대부가 명을 위한 재조지은을 위해 내란에 빠진 신생국가 청나라에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옮기려 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가눙한 행보입니다.
더구나 서인들은 청태종 홍타이지 (Hong Taiji[皇太極])에게 서인이 추대한 인조가 병자호란 패배이후 청에게 항복하고 무릎을 끓었는데도 치욕스러워만 할 뿐, 보복은 생각도 안하고 눈치만 봅니다. 겁쟁이라는 말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도 적합한 경우를 첫기 어렵습니다.
이와같이 서인 특히 서인 중 노론(老論)세력은 조선 중기 죽 병자호란 이후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기까지 약 300여년 동안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 무슨일아든 했고 정조 사후인 19세기 내내 조선의 왕은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립니다.
좋게 말해야 사대부가 왕권과 균형을 맞춘것이지, 사실상 왕권이 외척과 서인 사대부들 수하에 들어갔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입니다.
놀라운 점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심지어 19세기 말인 고종때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서강대 계승범 교수께서 2011년 쓰신 책 중 조선의 대명사대주의를 추적한 책이 있습니다. 보고서 눈을 의심했습니다.
정지된 시간(서강대 출판부,2011)
개인적으로 훌륭한 학자적 자질을 가졌던 정조이후 국정을 컨트롤하기 힘든 고만고만한 왕들이 후계를 잇자, 사실상 조선의 정권은 외척과 서인 사대부 세력에게 넘어갔습니다.
조선의 통치체계가 조직에 의한 통치라기 보다 한 국왕의 능력여하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갈리는 성격으로 유교적 철인통치의 폐해를 정조와 정조 사후를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왠만한 성리학자를 뛰어넘는 정조의 개인적 능력때문에 사대부들은 정조를 건드릴 수 없었으나 그사후 조선의 국왕들은 사대부들, 특히 서인 노론파 사대부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리고 이들 서인 사대부들의 영향력은 일제시대를 거쳐 현재 한국정치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의 고향이 충청도 회덕 (懷德)이고, 현재 대전 대덕구라고 합니다. 충청도의 보수성향은 선조들의 근본주의적 성리학 영향과 무관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은 절 아시다시피 현재 한국 보수의 원류와 같은 곳이기도 합니다.
추측이긴 합니다만 외척이자 서인 당파의 주요세력이던 안동김씨를 비롯한 영남의 세력들이 아직까지도 한국 현대정치의 주요세력으로 한국의 기득권을 대표하고 있는 사실을 우연으 로 치부하기엔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고교 국사교과서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세력들이 효종 당시 북벌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명백한 오기라고 생각됩니다.
실제 북벌을 행하지 않았던 서인들이 북벌을 주장했다고 하면 읽는 즉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안했는데 왜 했다고 하지? 라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단순한 사실을 복잡하게 이야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아무튼 어렸을 때도 유사한 내용을 배운 기억이 나는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해가 안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과서의 서술이 문제였던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