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장 본문 450쪽, 참고문헌 약 50쪽으로 구성된 역사사회학( historical sociology) 연구서입니다.
서구의 실증적 연구방법론에 따라 한국 중국 일본 미국의 관련 연구가 상당한 정도로 인용되어 있습니다.
다른 한국 연구자의 연구서와 확연히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논픽션인 각종 연구서는 형식적으로 각주와 참조연구도서 목록은 기본으로 구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에 대한 논의는 이정도에서 그치고 내용적인 면을 보겠습니다.

저자는 1960년대 태동한 한국의 개발주의적 군사주의적 동원체제 ( a system of mobilization)의 기원이 구체적으로 일제의 괴뢰국으로 알려진 만주국(滿洲國, 1932-1945)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1960년대 5.16군사정변 이후 만주군 출신 쿠데타 세력들이 행한 정책과 만주국에서 행했던 정책간의 비교를 시도하고 그 유사성을 찿아냅니다.

이책이 주장하는 흥미로운 지점 몇가지를 지적하는 것으로 글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첫째, 이 책의 전체적 논조를 보면, 일단 식민주의 (colonialism)이 현대 한국에 미친 영향에 대해 어느정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일제의 식민주의가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미친 영향에 대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고 인정하면서 단순히 ‘항일투쟁의 무대’로만 단편적으로 알려졌던 만주라는 공간이 당시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에게는 기회의 공간이기도 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다면적 해석을 시도합니다.

다면적 해석이란 긍정과 부정을 포함하고 항일의 공간을 뿐만 아니라 생활의 공간으로서 그리고 중국이라는 나라가 형성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지만 일단 저자의 논조가 식민주의에 대한 긍정적 부분을 포함해 극우 뉴라이트 세력에 의해 이런 해석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빌미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습니다.
전체적으로 저자의 논조는 상당히 보수적입니다.

만주국은 일본이조선을 병합한 이후 중국대륙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세운 괴뢰국이고, 일본은 실제로 만주국을 발판삼아 실제로 중국 본토 침략했고, 이곳에서 일본 본토에서 행하지 못했던 극단적인 군국주의 체제 실험을 행했습니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행하지 못하던 극단적 체제실험은 물론 731부대로 대표되는 생체실험도 만주국 영토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청나라 당시인 19세기 말 이미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던 일제는 1930년대 청조 멸망이후 새로 성립되었으나 군벌들이 난립하고 공산당과 국민당 두 정부로 갈려 내전 상황이었던 중국을 먹기 위해 중일전쟁(中日戰爭,1937-1945)을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1930년대 당시 만주국에서 행해졌던 각종 군국주의 동원정책을 1960년대 한국 군부가 그대로 시행했다면 일제가 행한 가장 극단적 형태를 한국에서 ‘근대화’의 명목으로 시행했다는 의미 입니다.

둘째, 박정희 정권의 개발 동원 체제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실마리는 결국 독일의 프로이센과 나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를 추동한 군부세력도 그리고 일본의 제국 헌법을 기초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세기 말 프러시아에서 정치체제와 법률을 연구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의 경제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추앙받는 박정희 대통령이 마치 ‘자유민주주의’의 화신 인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이 주장은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주장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일 뿐입니다.

박정희 정부에서 추진한 경제개발계획의 원형은 이미 5.16 쿠데타 전 민간정부인 장면정부에서 입안한 것입니다. 다수의 입안자들은 박정희 정부의 최대 비판자였던 장준하 선생이 이끌던 ‘사상계’ 그룹이었고 대부분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 지식인들이 그 계획을 입안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단순히 실행만 했습니다.

김건우 교수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느티나무 책방,2017)에 그 내용이 상새하게 나와 있습니다.

경제개발계획은 그 제목이 명시하듯 계획경제를 의미합니다. 소비에트적 의미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정부가 생산및 수요를 통제하는 것을 의미하고 자원의 분배과정에 정부가 관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시장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결정된다는 시장자유주의 경제와는 대척점( opposite)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책의 만주국 경제개발을 위해 일제가 밀어부쳤던 계획경제체제가 바로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다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 국토개발계획 등의 원형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타당하고 공감합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0-1970년대에 시행했던 경제개발계획은 그 자체로 이미 사회주의적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계획경제였고, 국가가 자원의 강제배분과 집중을 통해 거대 재벌 기업을 키웠습니다.

1950년대 일제가 남기고 간 귀속재산(歸屬財産)이 일부 자산가들에게 불하된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자산과 정부의 지원이 현재의 대기업집단의 모태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거론하겠습니다.

아무튼 정기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추구한 개발주의적 동원체제는 그 기원이 프러시아의 군국주의적 채제이고 이 체제를 일제가 모방해 본토와 만주국에 이식했으며 만주국 장교 출신이던 5.16 쿠데타 세력들은 자신들이 청년시절이던 1930년대 만주국에서 극단적 형태로 행해지던 군사적 동원체제를 ‘조국 근대화’의 명목으로 그대로 들여온 것으로 이해됩니다.

사람은 딱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이해하고 인식한다는 말이 적용되는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주장을 다시 곱씹어 보면 결국 한국은 1945년 8월 일제가 연합국에 항복하여 ‘광복’을 이루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한 소련의 공산주의 대륙세력과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해양새력의 충돌과 그로인한 인명과 재산손실은 논외로 치더라도 만주국 하급장교 출신이던 군인출신 위정자의 통치로 인해 일제가 세운 만주국을 따라한 유사 군국주의 ( quasi- militarism) 체제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1979년 10월 26일 이후 다시 정부를 접수한 사람은 전두환씨입니다.

지금도 보수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운운하지만 역사를 둘러보면 실질적 민주화는 1987년 이후입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영향은 그 여파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고 그 영향력도 상당합니다.

솔직히 사회원로 계층에 아직도 일제시대 교육을 받아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이들이 있는 한 그 영향력이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5년의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는 일본의 영향력을 가장 최근에 목격한 일이었습니다. 한국의 대법원이 ‘사법농단 ‘을 일으키며 한일간 외교에 간섭한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협상의 막후 교섭을 위해 일봉 정계의 실력자가 청와대로 바로 찿아가 일어를 할 줄 아는 정계원로와 대통령, 총리와 더불어 직접 협상조건을 협상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일어로 편하게 협상했다는 대목도 그렇고 일본이 당시 박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따님이라는 사실을 몰랐을리가 없기에 사실 여부를 떠나 내용 자체가 무척 충격이었습니다.

일본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따라서 과거의 일이라고 지나갈 일이 아니고 현재까지 한국인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예의 주시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서울의 도시공간에 대한 책을 읽다가 1960-70년대 상황을 궁금해하고 결국 다시 구한말부터 일제시대 관련 책을 읽게 된 건 결국 현재의 우리를 만든 뿌리가 어디서부터인가를 알기 위해서 입니다.

서울만 봐도 현재의 서울은 조선의 한양에서 출발한 도시지만 남아 있는 흔적과 도시체계는 일제 강점기의 경성입니다.

경성에 대한 정보를 모르면 서울에 대해 현재의 모습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에게 증오를 유발하고 짜증나게 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다시 치욕을 당하지 않고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거와 현재의 일본과 한국에 미친 영향력을 면밀히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프로이센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상호영향에 대한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문화사회학자 전진성 교수의 책입니다

상상의 아테네(천년의 상상,2015)

건축적 입장에서 독일의 ‘고전주의 건축’이 일본과 조선의 도시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고찰한 책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축양식을 기준으로 독일건축의 양식적 영향을 살핀 책으로 독일이 19세기 말 식민지로 점유했던 중국 칭다오의 건축도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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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4년의 비원 - 새로 읽는 고종시대사
장영숙 지음 / 너머북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이책은 총 12장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약 380쪽의 분량과 미주가 같이 책 뒷쪽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고종의 재위기간 44년을 망라해 그의 개화 근대화 정책에 대한 전개와 인재등용, 당시 일어났던 정치적 격변, 즉 운요호 사건, 강화도조약,임오군란,갑신정변, 갑오경장, 청일전쟁, 러일전쟁, 을미사변,아관파천,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그리고 고종 독살설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다룹니다.
각각 책 한권이상이 될 주제를 다루다보니 너무 겉핥기 식으로 지나가 실망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조선을 ‘망국(亡國)으로 이끈 군주로 알려져 있고 따라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조선의 임금입니다.
그가 이루려고 했던 조선의 부국 강병책이 대부분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의 재위기간동안 일제에 의한 조선병햡이 이루어져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영조, 숙종과 더불어 가장 오랜기간 재위에 있었던 군주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고종재위기간 중 일제에 의해 한일의정서가 맺어지고 을사늑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 조차 ‘망국’에 가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고종 당시 중요한 정치가로 흥선대원군과 민비가 있지만 이 책애서는 그저 조연으로만 다루어집니다.

흔히 극렬한 수구 정치인으로 알려진 두 인물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책에서 흥선대원군이 정권에 집착하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과연 그런 인물인지는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고종은 강고한 유교사회인 조선을 그래도 나름대로 근대화시키고 강한 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한 군주이기도 합니다.

다만 충효를 기반으로 덕치를 강조하는 유교정치와 근대적 입헌정치 사이에서 방향을 잡지 못한체 자신이 생각했던 근대화와 부국강병책울 이루어보지 못한 체 생을 마친 비운의 군주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다른 글에서도 여러번 언급했듯,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조선이 대처를 못한 것은 정조 사후 만연한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의 악영향이 컸습니다. 안동김씨, 풍양조씨, 반남박씨 등 소수의 세도가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농단(壟斷)하며 부정축재를 일삼고 군사력을 기르는데 소홀히 한 영향이 큽니다.

사실 조선 유림 중 척화세력들은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전쟁의 패배와 국치를 당하도록 내버려 둔 댓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이미 멸망한 명을 사대(事大)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이후 발생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본인들의 무지로 전란을 초래해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했으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고 기존의 철학을 무시하고 새로운 철학을 찿는 것이 일반적인데 조선의 사대부들은 일반적이라고 할텐데, 조선의 사대부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명이 멸망하고 만주족과 몽골족의 연합 왕조인 대청제국이 들어섰지만, 조선의 사대부 특히 보수 척화론자들은 화이론(華夷論)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체 유교적 의리만 강조하며 망해 없어진 명에 대한 사대만을 강조하고 조선에 굴욕을 안긴 청나라를 무시하는 국제정세상 일어날 수 없는 인식을 계속 고수했습니다.

군신의 도리가 의리를 저버리면 안된다고 하면서 백성들은 철저하게 저버렸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대청제국은 17세기 강희제 재위기간 동안 몽골의 서쪽 준가르제국을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하였고 러시아 제국과 국경선을 확정짓는 등 동아시아 맹주로서의 영향력을 강화했으나 조선은 이들이 오랑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당시 북경에 들어왔던 서양의 문물에 대해 백안시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무시의 결과가 위기로써 고종재위시에 나타난 것입니다.

따로 군사를 키우지 않고 농민들을 차출해 병력으로 차출하던 조선이 재대로 된 군사력을 가지고 있을 수 없었고, 19세기 서구 제국 열강들과 일본은 근대화된 육상병력과 대양해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종은 유교적 전제군주로서 주권이 강화되기 위해 군주권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 믿음이 근대적 정치행정제도를 도입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유교적 전제군주인 고종에게 독립협회에서 요구한 의회의 설립요구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요구였고, 이미 지식인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를 알고 이를 실현해 보려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어 정치적 불안정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 이유도 전제군주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지키려하는 고종 앞에서 ‘입헌군주제’를 요구했고 고종은 이런 요구를 왕권에 대한 쿠데타로 규정하고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등을 참살하게 됩니다.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화와 서구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자신의 전제군주권이 약화되는 건 볼 수가 없었던 고종은 따라서 개혁 자체가 흐지부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서구적 근대화와 봉건적 전제군주제는 서로 맞지 않는 짝이니 말이죠.

두번째는 군사력 양성을 위해 끊임없이 외세에 의존한 점입니다.

고종은 대원군 섭정기를 지나 친정을 시작한 이후 유선 일본에 도움을 요청해 신식 군대를 만듭니다. 그리고 구식군대를 차별하고 냉대하는 바람에 군사반란이 일어납니다( 임오군란).

국가의 재정이 빈약한 가운데 아무 대책없이 신식군대 양성부터 하다보니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게 되고 이 두나라가 조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고종은 임오군란을 통해 통치권의 위기를 경험한 이후 신식군대 양성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이후 명성황후의 외척인 여흥 민씨 세력과 오로지 왕권 강화에만 몰두 합니다.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난 이후에도 변변한 군대가 없던 조선은 청나라애게 군대를 요청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청의 노골적 내정 간섭이 시작되고 청과 일본간의 탠진조약에 따라 청순과 일본군이 조선땅에 주둔하게 됩니다.

수백년간 소중화를 자처하며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하던 사대부 양반들의 사대부의는 19세기 말 청의 노골적 내정간섭을 초래했습니다.

북양대신 이홍장과 원세개는 조선이 오랜기간 중국을 숭앙해오던 속국이라면서 완전한 속국으로 정치에 간섭하겠다고 하자 손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실제 개화파 양반인 김윤식, 어윤중 같은 이들은 청의 이런 요구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500년 사대의 결과가 어처구니없이 나타난 겁니다.

저는 이 상황을 되짚어 보고, 조선 내내 중국에 사대를 했어도 ‘사실상(de facto)’ 조선이 독립국이었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말장난인지 실감합니다.

고고한 유교 도덕정치 한다고 조선 내내 사대부와 조선 지배층은 군사력을 키우는데 소홀했습니다.

더구나 16세기 임진왜란, 17세기 병자호란을 당해 국토가 절단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사대부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선후기로 갈수록 군대도 안가고 백성들애게 과도하게 세금을 물리고 재물을 빼돌려 부정축재를 일삼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앉아 ‘덕치’를 해야 한다면서 자신들이 저지르는 일과 정반대의 주장을 했습니다.

위선적입니다.


결국 국력의 근간인 군사력이 없는 조선은 청과 일본이 동학농민항쟁을 빌미로 조선에서 전쟁(청일전쟁)을 할때도 속수무책이었고, 러시아와 일본이 동해에서 해전을 벌이고 일본이 경의선과 경부선 철도부설권을 요구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 100만명에 달하는 반면 고종이 겨우겨우 양성한 조선의 군대는 겨우 3만 뿐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은 사대부가 의사결정하던 전제군주제 국가이므로 19세기 말 조선의 이런 참혹한 국력의 상황은 전적으로 사대부와 국왕의 잘못입니다.

너무 명백해서 논란조차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대로 된 군대가 있었으면 청일전쟁도 일어날 필요가 없었고 고종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러시아 영사관으로 파천할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19세기 조선사를 읽으면 유학이라는 학문체계가 서양의 물리적 힘을 당해낼 수 없는 허황된 체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조선이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주자의 유학은 사람의 내면은 보는지 몰라도 삶의 조건 따위는 너무나 무관심했습니다.

지금 이런 저의 평가는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니 이런 단점이 보이는 것이지만 유교가 전부였고 어설프게 서양을 알던 19세기 말의 조선에서는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가 무너지는 절망감과 황당함을 느꼈을 것으로 보입니다.

소수의 양반들이 책임을 방기한 체 의무만 짊어진 다수의 백성들의 생산력에 빌붙어 살던 시대가 조선시대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물질적인 것을 만들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우대하지 않고 착취하면서 고담준론만 이야기 하던 일하지 않던 양반들이 상층을 이룬 사회가 조선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19세기 조선이 왜 ‘민란의 시대’라고 불리는 지 그 원인을 고종시대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피며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고종시대사 관련 저서 몇가지 소개합니다.

고종시대의 한러관계사 관계해서 감영수 교수의 책 2권을 주목합니다.

미쩰의 시기(경인문화사,2012)- 을미사변을 일본 자료 뿐만 아니라 러시아 자료에 근거해 재구성한 책입니다. 명성황후가 기존의 해석대로 과연 수구파만을 대변한 봉건세력이었는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100년전의 세계일주(EBS Books,2020)- 친러파이자 근왕세력이었던 민영환이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참석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을 요청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 사료가 인용되었고 당시의 기록인 ‘해천주범(海天秋帆)’을 기반으로 재해석 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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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의 후예들 - 티무르제국부터 러시아까지, 몽골제국 이후의 중앙유라시아사
이주엽 지음 / 책과함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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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년 몽골의 수도, 대도(현재 북경)이 명에 함락된 이후 쇠퇴의 길을 걸은 몽골제국이 이후 근세와 근대 유라시아( 동유럽, 러시아에서부터 청나라까지)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한 전문서입니다.

몽골제국의 제도와 군사력 그리고 몽골제국 칭기스칸 칸의 후예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식해 온 나라들이 카자흐 칸국이나 무굴제국, 그리고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의 유목민족들이 거의 600여년 이상 내려왔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된 것입니다.
한때 유라시아를 호령했던 몽골제국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테지만 우리는 홀연히 그들이 사라진 걸로 생각해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인상적인 것은 몽골인 후예라는 정체성은 몽골어와 직접 연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서아시아의 몽골인 후예들이 투르크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몽골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역사서에 자신들이 몽골인 혹은 징기스 칸의 후예라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한국어를 모르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4세가 아직도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인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서장을 제외하면 4부 총 11장으로 구성된 이책은 본문이 288쪽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책입니다.

읽어보니 사실. 총 11권의 책이 되어야 하는 내용을 압축해 넣은 책입니다.

작은 책이지만 두가지 점에서 가독성은 좋지 않습니다:
첫째, 세계사를 서유럽사와 중국사 위주로 배운 일반 독자들에게 이 책에서 설명하는 각 국가들의 왕 이름이나 정치체제 등이 너무 낯섧니다. 내용을 읽기 어려울 정도로 말입니다.

한편으로 유목사회이자 이슬람 문화권에 대해 우리가 너무 아는게 없어서 이렇게 읽기 힘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슬람 권에서 왕을 뜻하는 칸(Khan) 이나 군사령관을 뜻하는 아미르(Amir),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을 가리키는 사이드(sayyid), 이슬람 성인을 말하는 호자 (khoja) 등 생소하지만 중요한 용어들을 몰라서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웠습니다.

서유럽에서 중동을 보는 시각인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우리의 무의식에도 여과없이 들어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유목민족들이 그리고 대부분 이슬람을 믿는 이들을 막연히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고 사실 중앙아시아 역사나 몽골제국사와 같은 분야에 대해 공부하는 분도 많지 않아 이해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번째로 이 책이 엄청나게 압축적으로 저술된데다가 전쟁사 위주로 세력권 다툼과 정복 복속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역시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입문서로 생각하고 집필하신 듯한데 각 장이 한권의 책으로 나왔으면 내용이 알차게 들어가게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미 오스만제국과 대청제국에 대한 몇권의 책을 읽은 저로서는 이 제국을 약 10여 쪽 내외로 서술하는 것이 맞는 방법인지 의심스러웠습니다.

특히 20세기 초 제1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발칸반도는 수백년간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고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과 민족갈등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제국과 연합하여 러시아와 대항하며 유럽의 동부전선을 이루게 됩니다.

또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19세기 이후 계속 남하하다가 크림반도에서 오스만제국과 영국 프랑스와 부딪치게 되는 전쟁이 크림 전쟁이죠. 이후에도 러시아와 영국은 러시아의 동진으로 중앙아시아에서의 패권 쟁탈을 벌입니다.

그 와중에 러시아는 크림칸국 카자흐 칸국등을 합병하면서 시베리아로 동진합니다.

만주족은 몽골인과 공동으로 대청제국을 세우고 몽골 문자를 가져와 만주문자를 만들었으며 준가르 고원의 오이라트족을 토벌해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힙니다. 또한 국경을 맞닿은 러시아와도 17세기 이후 국경을 확정짓습니다.

잠시 생각나는 것만 적어보아도 내용이 복잡합니다.

저자가 강의록을 바탕으로 책을 저술했다고 했는데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고 그래서 책이 두꺼워진다면 감수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추정한 것인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사를 공부하려면 최소 러시아어, 몽골어, 아랍어, 이란어, 만주어, 중국어,투르크어, 우즈벡어, 터키어 등을 알아야 하지 않나 추정합니다. 거기에 예전 유럽인들이 기록한 글을 읽으려면 영어와 프랑스어 라틴어도 알아야 되니까 만만한 작업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튼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먼나라 같은 이야기도 외부세계를 알기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지나치게 극우 기독교에 경도되어 있는 일부의 생각과 시각 확장을 위해서라도 다른 사회, 특히 이슬람 사회에 대한 책은 지속적으로 나와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른 한편 화이론적 사고에 아직도 빠져서 잘 알지 못하는 유목사회애 대한 편견을 걷어내기 위해서라도 유목민족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이 지속적으로 나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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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국가로 여진족(女眞族)출신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17세기 초 만주지역에서 세운 국가입니다.

한국사람들에게는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조선을 침략했던 1637년의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에서의 공성전( 攻城戰)그리고 삼전도에서의 항복이 우선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근래 청나라에 대한 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매체는 영화입니다. 횡동혁 감독의 2017년 작 ‘남한산성’은 추위에 한강을 넘어 남한산성에 도착한 조선조정이 어떻게 청에 대항하고 싸우다가 항복하게 되었는지 산성 속 주화파 최명길과 척화파 감상헌의 대립을 통해 보여줍니다.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임금이 만주출신 오랑캐인 홍타이지에게 항복의 예를 올리는 장면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서는 사대부의 나라 조선이 오랑캐에게 패한 치욕 (恥辱) 만 강조할 뿐 선조이래 발생한 조선의 붕당정치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보기는어렵습니다.

아마 전문적 영역이라 일반대중이 꺼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지만 정조이후 19세기 조선사를 돌이켜보면 양반들의 안이하고 무신경한 국토방비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명나라가 망했는데도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무시하고 명나라에 사대하는 노론사대부들의 정신세계는 이해불가입니다. 책이나 읽으면서 마음따위나 논쟁하면서 삶의 기반인 경제와 군사를 무시하다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도 양반들이 정신을 못차린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몰상식하고 구태의연한 생각이 결국 조선의 멸망에 이르는 한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이들의 주장 자체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구한말 조선이 어려움에 처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제대로된 신식군대가 없었다는 것이고 실학파와 후의 개화세력 모두 이를 보완하려고 했고 남은 수단은 결국결국 러시아와 일본에 군대를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사대부들이 고고한지 몰라도 조선 멸망의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튼 21세기가 시작된지 한참 지난 지금도 별로 유익하지 않은 소중화사상에서 아직 별로 벗어난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역사적 관계를 되짚어 볼 때 중국이 한국을 속방(屬邦) 으로 생각하여왔고,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의 동이(東夷)라는 명칭으로 불러왔다는 사실은 사실 언급하기 새삼스럽습니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여러민족 중 명나라를 세웠던 한족(漢族)들의 생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만큼은 이제 좀 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안 사실로 철저히 만주족( 여진족)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대청제국의 정치구조가 한족의 영향으로 중국화되기 시작된 것은 19세기 들어서 청나라 내부의 여러 민족들의 반란과 태평천국의 난, 그리고 의화단 전쟁같은 우환을 겪고 19세기 중반 영국과 아편전쟁을 하고 불평등조약을 맺기 시작하고 러시아와의 국경분쟁으로 연해주 땅을 잃는 등 외부로부터 위험이 가중되며 기존의 정치체제가 변화하고 한인들을 중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종시기 조선에 주재하며 한국을 중국의 종속국으로 생각하고 실효적 지배를 밀어부쳤던 북양대신 이홍장 (李鴻章)은 19세기 혼란기가 아니었으면 중용되지 못할 한족(漢族 ) 출신 고위관료였습이다. 그는 철저한 화이사상 (華夷思想)을 가지고 조선을 하대하였습니다.

18세기까지 청나라는 만주족과 몽골족 중심의 나라로 한족은 철저히 권력중심애서 배제된 나라였습니다.
또한 청나라는 다민족 다언어 국가로 모든 공문서에 만주어와 몽골어와 한문이 병기되었고 한족출신 관료들은 철저히 과거 명나라의 통치지역에서의 권한행사만이 허용되었습니다.

심지어 조선과의 외교를 위한 칙사파견도 철저히 만주족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 규칙이 깨져 한족출신 칙사가 조선에 온것도 19세기 이후입니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기마유목민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나라였고 또한 몽골제국의 후예로 그들의 뒤를 잇는다는 자긍심이 대단한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사실은 청나라가 사실상 옛 몽골제국 황실의 공인을 받아 나라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기마민족의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무예와 말타기는 따라서 학문보다 더 큰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었습니다.

당나라와 함께 중국대륙을 200년 이상 통치한 청나라는 제국으로서 만주뿐만 아니라 내몽골과 외몽골, 위구르 이슬람, 티벳지역까지 그 영토가 확장된 대제국이었습니다.

특히 티벳과 신장지역의 위구르 이슬람 지역은 직할통치보다 자신들의 지역에 맞는 통치를 하기 위해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이슬람 문화도 티벳 불교 문화도 모두 편견없이 받아들인 겁니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청나라의 준가르 초원 정복은 청나라의 중앙아시아 진출을 상징하는 것으로 너무 간략하게 서술된 것이 아쉽습니다.

미국의 중국학자 퍼듀라는 분이 이 청나라의 준가르 원정에 대한 연구서 (China Marches West,Harvard,2005) 를 썼습니다. 기회가 되면 읽어볼 생각인데 늘 느끼는 것이지만 서구의 지역연구의 폭과 깊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청나라의 전성기인 옹정제, 강희제 연간에 이루어진 정복으로 이를 위해 청나라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 카흐타 조약을 채결해 러시아와의 국경분쟁을 마무리 지어야 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청의 대 러시아 외교는 ‘몽골문제’의 일부로 파악해 한족 출신 관료들이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이 두 조약의 언어도 만주어 몽골어 러시아어 라틴어에 한정되었으며 이 조약의 중재를 위해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참여하였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청과 러시아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러시아의 동진이 자명한 가운데 여러 분쟁이 있었겠지만 이에 대한 내용은 한국독자들애게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언어의 장벽이 크게 다가옵니다.

저자께서 서두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청나라의 정치에 관련된 책이고 청나라의 이원적 통치구조에 대해 서술해 개론서를 기대한 독자에게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론서 수준의 책만 여러권 나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한 시간 낭비라고도 생각합니다.

300쪽 내외의 책에서 상당히 밀도있게 청나라의 정치 작동방식을 설명했고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청나라를 연구하면서 만주어로 된 사료를 인용한 책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느껴졌습니다.

최근 나온 중앙아시아나 유목민족 관련 서술들에 이들의 문자로 이루어진 사료를 직접 해독해서 연구한 책들이 나오고 있는 건 고무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 뿐 아니라 기타 언어라고 취급받았던 언어들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도 시급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일제시대 교육을 받아 일본어가 능통한 학자분들이 일본어 자료에만 의존하는 관행은 그 자체로 매우 나태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에 관한 예전에 읽었던 책을 소개합니다.

누르하치( 돌베게2015)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산수야,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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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관계사 전문가인 김영수 교수의 책으로는 두번째로 읽은 책입니다. 후기 포함 310쪽 가량되는 책이고 뒤에 약 60쪽에 걸친 각주 목록이 있습니다. 참고도서 서지를 마지막에 정리하지 않은 것은 유감입니다.

이책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인 1896년 명성황후 민씨의 외척이자 고종의 심복인 민영환을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의 모스크바 대관식에 러시아 특명전권공사로 파견됩니다. 민영환을 보좌하기 위해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윤치호, 러시아 국적의 김도일, 조선사절단의 사행기록을 위해 유학자 김도련, 그리고 주한러시아공사관 소속 외교관 쉬떼인, 그리고 손희영을 파견합니다.

여기까지는 공식사절단이고 명목상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조선사절로 참석하는 것입니다.

고종은 이외 한러비밀교섭을 위해 비공식 비밀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이 사절단은 성기운, 주석면, 민경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러시아로 가기 위해 인천, 상하이, 요코하마, 도쿄,밴쿠버, 몬트리올, 뉴욕,리버풀, 런던,베를린, 바르샤바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합니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배와 기차로 하는 고된 여행이었죠.

민영환이 모스크바에 온 이유는 고종의 ‘신변보장’을 위해 러시아의 병력 파견을 위한 것과 러시아의 무관을 파견하여 조선군대를 근대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컸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시점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해서 러시아와 더 밀착한 이후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어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민영환의 러시아 파견은 그 이전에 일어났던 을미사변(乙未事變,1895) 그리고 같은해 일어난 아관파천(1896)과 연속성 상에 있습니다.

을미사변에 관해서는 저자의 ‘미젤의 시기(경인문화사,2012)’를 보시면 됩니다. 일본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되던 시기에 이전 연구가 일본 측 사료에 근거했던 것과 다르게 러시아 측 사료를 많이 인용했습니다. 러시아의 건축가 사바찐은 건천궁에서 황후가 시행될 당시 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이었습니다.

고종이 외세에 의탁해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던 사실은 조선 말 19세기 100여년간의 세도정치 (勢道政治) 시기부터 생겨난 지배층의 수탈과 부패 그리고 빈약했던 병력이 원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19세기는 14세기 정도전이 생각했던 이상적 유교정치가 얼마나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고 국력을 피폐하게 할 수 있는지 유교적 관료정치의 최악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1860년대 유신 이후 부지런히 프로이센의 현대적 군사제도를 배우는 동안 조선은 대의명분론에 사로잡혀 사실상 군사재도에 손을 넣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고 조선을 침략하려 하고 동시에 류큐(琉球)와 애조치(蝦夷地)를 복속시키는 와중이어서 고종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이전에 읽었던 신용하교수님의 ‘한국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지성사(지식산업사,2010)’에서 척족인 민씨 세력 모두 단순히 수구파라고 주당하는지 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대한제국은 엄연히 군주국이고, 주권이 군주에게 있기 때문에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주의 ‘신변보장’을 위한 조치를 취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더구나 바로 전해 일본인들에게 경복궁에서 황후가 살해되는 참변이 있었기 때문에 군주의 신변보장은 국가의 안보상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 때 대한제국 신하들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불가피한 사안으로 생각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데 협조 내지 방조한 이들과 민영환처럼 고종의 신변보호를 위해 러시아 사행길에 오르고 을사늑약이후 스스로 자결한 신하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현대의 시각, 즉 민주주의 체제인 2021년 기준으로 민영환과 민씨 척족들의 일들을 단순히 수구파로 매도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권력구조에서 북촌을 장악했던 세도가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 같은데 아직까지 정치사적 측면에서 정밀한 해부를 시도한 책은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정조 사후 63년(창비,2011)이 유일합니다. 이 책은 정조시대와 그 이후 언관(言官)제도의 변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어떻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규장각 각신이던 김조순(金祖淳)초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일단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민영환의 러시아행 조선사절단의 사행록에 대해 언급할 차례입니다.

위에서 설명했듯 이들의 사행일지는 김득련이 꼼곰히 작성했습니다. ‘환구일록 (環璆日錄,1896)’이라는 글이 말하자면 이 책의 저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득련은 한학자답게 사행을 하며 느낀 감상을 한시로 남겼는데, 이 시집은 ‘환구음초 (環璆唫艸,1896)’라고 합니다.

그리고 같이 사행을 했던 윤치호도 ‘윤치호 일기’라는 방대한 일기를 남겼습니다. 그의 일기는 현재도 국역이 되어 출판된 것으로 압니다.
초기 기독교인으로 미국유학과 파리유학을 경험한 윤치호는 이후 친일로 돌아서는 데, 이미 이 러시아 사행에서도 그 징조가 보입니다. 이 문제적 인물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영환이 김득련의 ‘환구일록’을 기반으로 고쳐 쓴 ‘해천주범(海天秋帆,1896)’ 이 있습니다. 김교수에 따르면 이 두책은 내용이 거의 똑같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메이지 초기 있었던 구미사절단의 행적을 기록한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特命全權大使 米歐回覽實記,1878)’과 비교될만한 이런 기록이 왜 번역되고 연구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난후 19세기 말 조선이 처한 난처한 상황과 한편으로 전근대적인 고종의 시각과 바깥세상의 변화에 관심이 없었던 당시의 정황을 더 객관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17-18세기 중국 사행을 통해 일부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 조선은 정조 이후 세도정치기에 서학을 탄압하고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한 반면, 일본은 16세기 이후 포르투갈과 이후 네덜란드와 나가사키를 통해 교류를 지속한 것이 일단 눈에 띄게 다른 두 나라의 외세에 대한 입장으로 보입니다.

조선이 16세기 병자호란 이후에도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을 유지하고 내부 정치투쟁에 매몰되었던 사실은 매우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결과적으로 군사제도의 근본인 농민들을 수탈하기만 할 뿐 그 어떤 제대로된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외세를 맞아 결국 20세기 들어 나라를 일본이 빼앗기게 됩니다.

따라서 척족세력이었던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가문들이 아직도 명문이라고 칭송받는 행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조선의 멸망에 일정한 부분 지분이 있습니다. 소위 이들 명문가문들은 말이죠. 자신의 이익만 챙겼는데 왜 존경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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