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관계사 전문가인 김영수 교수의 책으로는 두번째로 읽은 책입니다. 후기 포함 310쪽 가량되는 책이고 뒤에 약 60쪽에 걸친 각주 목록이 있습니다. 참고도서 서지를 마지막에 정리하지 않은 것은 유감입니다.
이책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인 1896년 명성황후 민씨의 외척이자 고종의 심복인 민영환을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의 모스크바 대관식에 러시아 특명전권공사로 파견됩니다. 민영환을 보좌하기 위해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윤치호, 러시아 국적의 김도일, 조선사절단의 사행기록을 위해 유학자 김도련, 그리고 주한러시아공사관 소속 외교관 쉬떼인, 그리고 손희영을 파견합니다.
여기까지는 공식사절단이고 명목상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조선사절로 참석하는 것입니다.
고종은 이외 한러비밀교섭을 위해 비공식 비밀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이 사절단은 성기운, 주석면, 민경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러시아로 가기 위해 인천, 상하이, 요코하마, 도쿄,밴쿠버, 몬트리올, 뉴욕,리버풀, 런던,베를린, 바르샤바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합니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배와 기차로 하는 고된 여행이었죠.
민영환이 모스크바에 온 이유는 고종의 ‘신변보장’을 위해 러시아의 병력 파견을 위한 것과 러시아의 무관을 파견하여 조선군대를 근대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컸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시점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해서 러시아와 더 밀착한 이후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어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민영환의 러시아 파견은 그 이전에 일어났던 을미사변(乙未事變,1895) 그리고 같은해 일어난 아관파천(1896)과 연속성 상에 있습니다.
을미사변에 관해서는 저자의 ‘미젤의 시기(경인문화사,2012)’를 보시면 됩니다. 일본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되던 시기에 이전 연구가 일본 측 사료에 근거했던 것과 다르게 러시아 측 사료를 많이 인용했습니다. 러시아의 건축가 사바찐은 건천궁에서 황후가 시행될 당시 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이었습니다.
고종이 외세에 의탁해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던 사실은 조선 말 19세기 100여년간의 세도정치 (勢道政治) 시기부터 생겨난 지배층의 수탈과 부패 그리고 빈약했던 병력이 원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19세기는 14세기 정도전이 생각했던 이상적 유교정치가 얼마나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고 국력을 피폐하게 할 수 있는지 유교적 관료정치의 최악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1860년대 유신 이후 부지런히 프로이센의 현대적 군사제도를 배우는 동안 조선은 대의명분론에 사로잡혀 사실상 군사재도에 손을 넣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고 조선을 침략하려 하고 동시에 류큐(琉球)와 애조치(蝦夷地)를 복속시키는 와중이어서 고종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이전에 읽었던 신용하교수님의 ‘한국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지성사(지식산업사,2010)’에서 척족인 민씨 세력 모두 단순히 수구파라고 주당하는지 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대한제국은 엄연히 군주국이고, 주권이 군주에게 있기 때문에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주의 ‘신변보장’을 위한 조치를 취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더구나 바로 전해 일본인들에게 경복궁에서 황후가 살해되는 참변이 있었기 때문에 군주의 신변보장은 국가의 안보상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 때 대한제국 신하들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불가피한 사안으로 생각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데 협조 내지 방조한 이들과 민영환처럼 고종의 신변보호를 위해 러시아 사행길에 오르고 을사늑약이후 스스로 자결한 신하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현대의 시각, 즉 민주주의 체제인 2021년 기준으로 민영환과 민씨 척족들의 일들을 단순히 수구파로 매도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권력구조에서 북촌을 장악했던 세도가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 같은데 아직까지 정치사적 측면에서 정밀한 해부를 시도한 책은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정조 사후 63년(창비,2011)이 유일합니다. 이 책은 정조시대와 그 이후 언관(言官)제도의 변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어떻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규장각 각신이던 김조순(金祖淳)초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일단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민영환의 러시아행 조선사절단의 사행록에 대해 언급할 차례입니다.
위에서 설명했듯 이들의 사행일지는 김득련이 꼼곰히 작성했습니다. ‘환구일록 (環璆日錄,1896)’이라는 글이 말하자면 이 책의 저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득련은 한학자답게 사행을 하며 느낀 감상을 한시로 남겼는데, 이 시집은 ‘환구음초 (環璆唫艸,1896)’라고 합니다.
그리고 같이 사행을 했던 윤치호도 ‘윤치호 일기’라는 방대한 일기를 남겼습니다. 그의 일기는 현재도 국역이 되어 출판된 것으로 압니다.
초기 기독교인으로 미국유학과 파리유학을 경험한 윤치호는 이후 친일로 돌아서는 데, 이미 이 러시아 사행에서도 그 징조가 보입니다. 이 문제적 인물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영환이 김득련의 ‘환구일록’을 기반으로 고쳐 쓴 ‘해천주범(海天秋帆,1896)’ 이 있습니다. 김교수에 따르면 이 두책은 내용이 거의 똑같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메이지 초기 있었던 구미사절단의 행적을 기록한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特命全權大使 米歐回覽實記,1878)’과 비교될만한 이런 기록이 왜 번역되고 연구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난후 19세기 말 조선이 처한 난처한 상황과 한편으로 전근대적인 고종의 시각과 바깥세상의 변화에 관심이 없었던 당시의 정황을 더 객관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17-18세기 중국 사행을 통해 일부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 조선은 정조 이후 세도정치기에 서학을 탄압하고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한 반면, 일본은 16세기 이후 포르투갈과 이후 네덜란드와 나가사키를 통해 교류를 지속한 것이 일단 눈에 띄게 다른 두 나라의 외세에 대한 입장으로 보입니다.
조선이 16세기 병자호란 이후에도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을 유지하고 내부 정치투쟁에 매몰되었던 사실은 매우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결과적으로 군사제도의 근본인 농민들을 수탈하기만 할 뿐 그 어떤 제대로된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외세를 맞아 결국 20세기 들어 나라를 일본이 빼앗기게 됩니다.
따라서 척족세력이었던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가문들이 아직도 명문이라고 칭송받는 행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조선의 멸망에 일정한 부분 지분이 있습니다. 소위 이들 명문가문들은 말이죠. 자신의 이익만 챙겼는데 왜 존경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