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전주님의 서재 (전주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7323149</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Mon, 10 Aug 2026 10:42:54 +0900</lastBuildDate><image><title>전주</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7323149</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전주</description></image><item><author>전주</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사람 없는 곳에서 사는 사람의 ‘고달픔’에 대하여 - [노 피플 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435590</link><pubDate>Thu, 06 Aug 2026 14: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43559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032607&TPaperId=1743559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48/73/coveroff/k51203260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032607&TPaperId=1743559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노 피플 존</a><br/>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br/></td></tr></table><br/>&nbsp;“각자 맡은 일에 집중하시게요. 의사인 저는 치료를, 간호사는 체크를, 보호자님은 식사를요.” 혈액암 말기로 입원 중인 장인어른 주간 간병을 10여 일째 맡고 있었던 날 오전, 나는 회진하던 의사에게, 아버님이 식사를 안 하시려고 하니 선생님께서 아버님께 식사를 잘하셔야 한다는 말씀 한마디 해주시라고 부탁했더니, 의사가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했던 말이다.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밀려드는 서운함과 무안당한 데 따른 수치심과 분노를 나는 온종일 삭혀야 했다. 정이현의 소설집 &lt;&lt;노 피플 존&gt;&gt;에 실린 &lt;선의 감정&gt;을 읽으면서 떠오른 기억이었다. 종합병원 내과 전문의인 ‘나’가 오진과 환자 보호자의 의료 사고 항의 가능성에 불안해하는 마음 전개를 따라 가면서 나는 병원과 다른 공간에서 일하는 내가 겪고 있는 불안을 되짚었다. 예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고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일이 불거져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곤혹스럽게 했던 기억들이었다.&nbsp; 정이현의 소설을 읽으면서 다양하고 다채로운 현실과 현재의 삶을 문자로 그려낸 상상의 세계를 보았다. 그의 소설은 막연하지 않다. 내가 어디에선가 겪었을 법한 일이거나 앞으로 단 한 번도 겪지 못할 법한 상황과 일을 겪을 수도 있는 일인 것처럼 보여준다. &lt;빛의 한가운데&gt;에서 ‘나’는 아들이 성범죄에 연루된 상황에 있다. 그 대상은 현재 자신과 가깝게 지내는 아는 동생 미령으로, 젊은 시절에 광고모델로 활동하던 때 얼굴을 아들이 딥페이크 소재로 삼은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는 부모, 그것도 아들을 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위선적이며 심란할지 짐작이 간다. 그 마음이 소설을 통해 증폭된다. &lt;이모에 관하여&gt;는 직장인 여성의 출산과 육아, 경력 단절, 그리고 재택 돌보미의 삶 등을 담은 이야기다. 나는 직접 겪지 않았지만, 결혼한 조카들의 실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 &lt;사는 사람&gt;을 읽으면서 임장 투어라는 생소한 삶을 알게 되었다. 고급 아파트를 구매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빈곤층 청년이 아파트를 구하러 다니는 척 하면서 호기심과 만족감, 허세를 충족하려는 모습성과 학원 수강생에게 문제를 유출하면서 적당히 그 행동을 정당화하는 ‘나’의 삶은 내 주변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lt;단 하나의 아이&gt;에서 화자인 ‘한나’는 일대일 개인 돌봄을 하는 놀이 가정교사, 즉 개인 플레이 튜터다. 포괄적인 돌봄이 아닌, 함께 있기, 숙제 봐주기, 학원 버스 타는 데까지 데려다주기와 같은 구체적인 일감만 부여하고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수요자들은 보이지 않는 장막을 치고 필요한 돌봄 서비스만 돈으로 구매한다. 돌봄 대상자인 하유의 습관적인 거짓말과 가상의 친구와 주고받는 메시지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nbsp; &lt;실패담 크루&gt;에서 모임의 주축이자 ‘나’를 초대한 성지연은 말로만 꼰대를 거부하는 거대한 꼰대 그 자체다. 자기만의 견고한 철갑성 안에서 이러쿵저러쿵 삶을 즐기고, 다른 이를 지배한다. 시답잖은 실패담을 나누면서 자기 과시와 인맥을 관리하는 가진 자들의 모임 참여자들은 가진 자에 의해 실패를 맛본 진짜 실패담은 차단한다. 돈, 권력, 명예, 능력 등이 많은 이들은 그것들을 자랑하지 않는 듯 말하고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강렬하게 드러낸다. 선을 긋지 않는다지만 일상에서 자기와 다른 수준인 사람과 보이지 않는 굵은 선을 긋는다. 그들에게 사람은 모두 사람이 아니다. &lt;우리가 떠난 해변에&gt;는 방송 작가인 설과 그의 동성 친구 주영, 그리고 남녀가 3일 동안 고립된 공간에서 이름만 알고 지내는 TV 프로그램에서 만나 결혼한 정훈과 혜정의 삶이 나온다. 사람끼리 만났는데, 이별의 끝은 서로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 보인다. 내 삶에서 열렬히 만났다가 헤어진 사람 중에 끝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자문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lt;가속 궤도&gt;는 교제 폭력이 더욱 흉포해지는 요즘의 세태에서 사랑이 아닌 집착(스토킹, 성희롱)이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보여준다. 나에 대해 내내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lt;언니&gt;는 조교인 인회 언니에게 중국어 회화 학습 교재 번역을 시키고 결과물은 자신과 부인이 독차지하는 민교수의 횡포를 고발한다. ‘기어코 하는 사람’인 성실한 인회 언니가 복학 거부, 논문 학기 중에 지도교수 교체 등의 대우를 받으면서 ‘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오래된 현재의 일이다.  소설집 제목 &lt;&lt;노 피플 존&gt;&gt;은 이 책에 실린 9편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문구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사람이 없는 구역’일까. 아이의 출입을 불허하는 구역이란 뜻의 ‘노 키즈 존’의 키즈 대신에 피플을 넣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lt;실패담 크루&gt;의 모임, &lt;우리가 떠난 해변에&gt;의 러브 애드벌룬 프로그램, &lt;가속 궤도&gt; 안에 있는 소진의 내면, &lt;이모에 관하여&gt;에서 재연과 재택 돌보미 간의 관계, &lt;사는 사람&gt;에서 임장 투어하는 삶, &lt;언니&gt;에서 민교수의 행태, &lt;선의 감정&gt;의 병원, &lt;빛의 한가운데&gt;에서 아들의 성범죄를 겪는 부모의 삶, &lt;단 하나의 아이&gt;의 유아동 보육 플랫폼 케이 파라디소 등과 같은 것들에서는 사람은 있어도 사람이 없는 역설의 장이다. 보통의 사람이 아닌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용되거나 거부되는 장은 보편적 권리와 가치를 지니는 사람이 없는 구역이다. 그래서 &lt;&lt;노 피플 존&gt;&gt;에 등장하는 여럿의‘나’와 은서 엄마인 재연이 건네는 정서는 ‘고달픔’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애초에 삶은 고통이라 했다. 그렇다 해도 ‘피플 존’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간간이 있다. 그곳에는 보통의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 고달픔을 조금씩 덜어내면서 이 세상에 노 피플 존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어 본다.&nbsp; 소설 읽기의 효능감을 생각한다. 소설은 낯선 세계, 익숙하지 않은 세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와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일로 이끈다. 소설 읽기의 매력은 호기심을 불러오고 충족하고 해결하는 과정의 연속이란 데 있겠다. 이에 더하면 소설은 내가 이미 겪었거나 진행 중인 일의 일부나 전부가 있는 이야기에 대해 공감을 더 크게 하고 밀접하게 만든다. &lt;선의 감정&gt;, &lt;빛의 한가운데&gt;가 그렇다. &lt;&lt;노 피플 존&gt;&gt;에 실린 소설 9편 중에서 &lt;이모에 관하여&gt;를 빼고 나머지 8편 모두 ‘나’가 화자로 등장하니 그 기능은 더욱 컸다. 현재의 내 삶이 어떤 분위기인지에 따라 소설이 다가오는 정도가 다를 것 같다. &lt;실패담 크루&gt;의 모임 주최자인 성지연은 &lt;&lt;노 피플 존&gt;&gt;에 실린 소설 속 여러 실패담을 하찮게 여길 것 같다. 고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지연이 주변호사의 대형 로펌 정식 채용 실패담을 가로막은 이유는 실패가 아닌 단지 결핍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핍을 경험한 적 없는 성지연에게 결핍은 혐오의 대상이지 공감의 영역은 아니다. 나는 다행히 성지연이 아니다. 고달픈 삶에 충분히 공감할 만큼 내 삶은 고달프다. 그래도 나는 &lt;&lt;노 피플 존&gt;&gt; 안에 있는 고달픈 이들처럼 살아가는 현실의 여러 사람과 토닥토닥 위로와 격려를 나누면서 살아가고 싶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48/73/cover150/k5120326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4487307</link></image></item><item><author>전주</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국판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 [압록강은 흐른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371173</link><pubDate>Fri, 03 Jul 2026 08: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37117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5000&TPaperId=173711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75/12/coveroff/89374650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5000&TPaperId=1737117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압록강은 흐른다</a><br/>이미륵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2026년 06월<br/></td></tr></table><br/>&nbsp; 죽음의 공포를 안고 압록강을 건넌 후, 어느 언덕에 올라 중국 쪽의 진지함과 너머 조선의 쾌활함을 마음에 담은 이미륵의 심사가 어떠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br>&nbsp;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를 내가 접한 기억에는 몇 가지가 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겹치거나 혼동하는 수도 있다. 80년대 말 대학교 초년생일 무렵 '생의 한가운데'와 함께 선배들 사이에서 오고간 소설일 수 있다. 그 당시 일제강점기, 해방전후 독립운동 관련 소설이 북한 소설과 함께 많이 출간되었다. 최근에 어떤 소설, 아마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에서 보았을까. 1960년대 독일로 간호사와 광부로 일하러 간 한국인 이야기를 담은 그 소설에서 이미륵이 나왔을 것 같은데. 그저 지나는 바람이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호로 '압록강은 흐른다'가 출간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접하고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힘겨운 나날의 기록으로 여겼다.&nbsp;지난 주에 동료가 이 책을 구매했다고, 도서실 사서 선생님에게 추천 도서로 알렸다고 하면서 읽고 빌려주겠다고 했다. 읽어야 할 책, 읽을 책이 여러 권인데, 여기에 한 권을 더 추가해야 해서 마뜩찮았다.&nbsp;&nbsp; 3일 전 '우와, 엄청나요.'라는 감탄과 함께 이 책을 동료가 내밀었다. 그리고 2일 전 오후, 다른 책을 일별하고 스윽 한번 볼 요량으로 펼쳤다. 1쇄, 소제목, 수암, 첫 문장 '수암은 나와 같이 자란 내 사촌 형의 이름이다.'를 읽자마자 그냥 빠져들고 말았다. 독일어로 쓴 글인데, 한국어로 옮긴 글인데, 울퉁불퉁한 이야기가 매끄러운 글 위에서 산들바람과 함께 흘러간다. 어디쯤에서 덮고 잠을 청했는지 모르겠다. 반절 이상을 홀린 듯 읽으면서 '나' 미륵의 삶을 내 것인 양 관조하였다. 그 사이에 저녁 설거지를 하였다. 어제는 저절로 손이 책에 닿았고, 저녁 약속으로 2시간 외출, 설거지, 큰아이 운전 연습 사이사이에 압록강이 흐르듯 이미륵을 좇다가 자정을 넘겼다. 책과 내가 하나가 된 것인지, 평안하고 부드러웠다. 후회, 두려움, 설렘, 불안, 기쁨, 즐거운, 슬픔 등의 온갖 감정을 거칠게 드러내지 않고 드러내는 글의 힘의 원천은 온전히 이미륵에 있겠다. 여기에 여든 살을 넘긴 안삼환 님의 글은 원저자와 옮긴이의 일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물일 것 같다.&nbsp; 옮긴이가 '옮긴이의 말'에서 인상적인 대목으로 짚은 마지막 세 개 문단에서 나는 맨 마지막 문단을 적는다. '바로 그날 아침에 나는 먼 고향으로부터 첫 소식을 받았다. 첫째 누님이 내게 쓴 편지였는데, 우리 어머니께서 지난가을에 단지 며칠만 신고하신 끝에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는 사연이었다.' 이 문단에 앞서 이미륵은 어느 낯선 집의 정원에 있는 '꽈리 관목 한 그루'에서 '장과'의 새빨간 씨주머니를 발견한다. 주인집 아낙이 가지 하나를 잘라 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홍차에 적신 마들렌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시작점이라면, 이미륵에게는 꽈리 관목에 핀 장과(漿果)이었을까.&nbsp;13권 중에서 2권을 읽고 접어둔 마르셀 프루스트의 &lt;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gt;를 어서 읽고 싶은 마음이 인다.&nbsp; 모두에게 있는 과거의 시간을 죽기 전에 한 번은 봐야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75/12/cover150/89374650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751250</link></image></item><item><author>전주</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길게만 여긴 짧은 소련사 - [아주 짧은 소련사 - 러시아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현장]</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369342</link><pubDate>Thu, 02 Jul 2026 08: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36934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935294&TPaperId=1736934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446/38/coveroff/k042935294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935294&TPaperId=1736934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주 짧은 소련사 - 러시아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현장</a><br/>실라 피츠패트릭 지음, 안종희 옮김, 허승철 감수 / 롤러코스터 / 2023년 09월<br/></td></tr></table><br/>소련은, 아니 러시아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란 이름으로 내 삶에 크고 굵은 획을 그은 국가이다. &lt;아주 짧은 소련사&gt;라는 책 제목을 보자마자 내가 그동안 소련을 러시아와 거의 동일시하고 무척 긴 시간을 인류와 함께했던 국가로 느껴왔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이 책을 내가 어디에서 보았냐면, 중학교 2학년 교실이다. 어떤 학생이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책이었다. 눈을 의심하고 내 느낌을 의심했다. 다 읽었다면서 선뜻 빌려주었다. 러시아, 러시아 역사에 끌렸다나. 자기가 읽던 책을 빌려준 중학생은 처음이다. 눈에 띄는 책을 읽고 있으면, “내게 빌려주면 안 될까?”라고 물으면 어물거리거나 ‘예’라고 답한 후에는 더 이상 학교에 가져오지 않은 학생이 몇 있었다. 다른 사람 손타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나이 탓이겠는데, 러시아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직접 구매해서 읽었다는 그 학생은 사회주의 소련의 공유 관념 유전자가 있었을까, 선뜻 빌려주었고, 나는 오래 읽었다. 돌려주면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도서상품권 2장을 내밀었다.&nbsp;&nbsp;159쪽, 미국인들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을 기억하듯이 소련 시민들은 자신이 어디에서 스탈린 사망 소식을 들었는지 항상 기억할 것이다.&nbsp;위 문장은 5장 ‘집단지도체제’에서 흐루쇼프까지, 첫 문장이다.&nbsp;위 문장을 읽고 나는 김일성 주석의 사망 소식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내가 항상 기억하고 있음을 떠올렸다. 1994년 7월 8일, 나는 열대야를 겨우 보내는 중, 점심 설거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후덥지근한 열기, 환한 여름 낮, 그리고 최악의 여름 밤을 보내면서 기진맥진하다가 8월 15일 지나면서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nbsp;&nbsp;282쪽. 결론의 마지막 두 개 문단&nbsp;&nbsp;&nbsp;세계 시민들은 많은 악행을 저지른 소련의 붕괴를 기뻐했다. 일부 사람들은 적어도 소련이사회주의를 위한 역사적 시도였다고 평가하며 애석해했다. 하지만 소련에서 태어난 많은 러시아인에게 역사적 서사는 달랐다. 러시아는 후진국에서 벗어나 20세기에 기적적인 위상을 차지했다. 러시아는 처음으로 세계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도록 이끌었고, 나중에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그 뒤 세계의 존경과 차르 체제로부터 물려받은 제국과 함께 모든 것이 불명확한 이유로 갑자기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서방은 199년대의 짧은 휴지기 이후 냉전 시기의 적대적 초강대국일 때와 똑같은 정도의 적개감으로 러시아를 대했다. 이것은 러시아의 눈으로 보기에 외국인 혐오증이나 다름 없었다. (예전에는 그들은 우리가 공산주의라자라서 미워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공산주의를 포기한 뒤에도 여전히 미워한다.)&nbsp;&nbsp;&nbsp;소련의 향후 복원과 관련하여 푸틴은 다음과 같은 경구로 일축했다. “소련의 붕괴를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심장이 없고, 그것을 복원하려 하는 사람은 머리가 없다.” 하지만 미래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머리가 있는 지도자(푸틴 같은 사람?)는 비록 ‘완전한 회복’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잃어버린 것의 일부를 회복하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푸틴은 2020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왜 러시아와 분리되어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탈산업화’ 피해를 입어야 하는가? ‘우리는 같은 민족으로서’ 언제 글로벌 주자로 함께 다시 뛸 수 있을까?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가까운 미래에는 그런 일이 실현될 가능성이 극히 낮아졌지만 이것이 헛된 말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소련의 유령은 소련 자체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레닌에서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소비에트 지도자에게 영감을 주었던 역사적 사명 의식은 회복 불가능해졌다. 학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운 훌륭한 소련 시민으로서 푸틴은 한때 역사적 합법칙성을 확고하게 믿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믿지 않는다. 1989~91년에 발생한 비상사태는 억누를 수 없는 결정적인 힘을 본 이후로 그는 달라졌다. 그는 2000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nbsp;알다시피, 불가능하고 믿기 힘든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쾅! 소련에서 일어난 일을 보세요. 소련이 그렇게 간단히 붕괴할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nbsp;&nbsp;&lt;결론&gt; 장을 두 번 읽었다. 실라 피츠패트릭의 책을 곧 읽을 예정이다. 훌륭한 옮긴이, 안종희 님에게 감사 인사를 보낸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446/38/cover150/k042935294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4463814</link></image></item><item><author>전주</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인간종만 사라진다면 다른 모든 생물을 구할 수 있다. - [동물들의 위대한 법정 - 지구공동생활자를 위한 짧은 우화, 동물의 존재 이유를 묻는 우아한 공방]</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299621</link><pubDate>Wed, 27 May 2026 12: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29962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42839381&TPaperId=172996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147/55/coveroff/k84283938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42839381&TPaperId=1729962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동물들의 위대한 법정 - 지구공동생활자를 위한 짧은 우화, 동물의 존재 이유를 묻는 우아한 공방</a><br/>장 뤽 포르케 지음, 야체크 워즈니악 그림, 장한라 옮김 / 서해문집 / 2022년 09월<br/></td></tr></table><br/>도서관의 날 행사로 누군가 &lt;동물들의 위대한 법정&gt;을 추천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2023년 3월 도서실에 등록된 책이었습니다.&nbsp;'위대한 동물들'의 법정이라도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생명체를 함부로 다루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잘 와닿지 않은 사람에게생명체를 도대체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생명체에 대해 존중을 어떻게 하는지,&nbsp;이런 질문을 들게 하고 답을 찾게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다만, 모든 생명체는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일깨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br>비버가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말합니다.&nbsp;동물들이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판결은 '멸종', 인간종만 딱 사라진다면 다른 모든 생물을 구할 수 있다.묵직하게 다가옵니다.<br>추천도서로 많은 이들에게 안내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br><br>유럽칼새재판장, 노트바르는 유럽칼새가 1년 동안 거의 아홉 달을 날면서 지낸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하자, 유럽칼새는 인간이 날 수 없다는 사실, 땅바닥에 딱 붙어서 산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인간 중심적 사고의 면모를 보여 준다.수리부엉이대자연을 미화하지 마세요. 자연은 착하지도 않고 너그럽지도 않습니다.&nbsp;&nbsp;세상은 자비가 없어요. 우리는 자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차없죠. 바로 이 점만큼은 우리나 당신들이나 비슷합니다. 인간은 냉혹하니까요. 인간에겐 어떤 자비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전 인간이 딱해요.우리가 인간에게 판결을 내린다면 이렇게 되겠죠. 멸종이라는 고통을 겪으라고 말입니다.<br>비버인간종만 딱 사라진다면, 다른 모든 생물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우리가 살아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당신들에게 요청한 적 없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요청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당신들 허락이 필요하지 않아요.<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147/55/cover150/k84283938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1475569</link></image></item><item><author>전주</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축의금 700만 원 -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 - 무례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한 연결에 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291553</link><pubDate>Fri, 22 May 2026 16: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29155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035248&TPaperId=172915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458/46/coveroff/k76203524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035248&TPaperId=1729155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 - 무례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한 연결에 대하여</a><br/>김민섭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01월<br/></td></tr></table><br/>신문에 실린 글 모음 파일을 정리하다 2025년 2월 7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민섭의 “다정함이란 거래가 아닌 삶의 태도”라는 칼럼을 발견했다. 이 칼럼을 읽고, 읽을 책 목록에 &lt;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gt;를 넣어 두었던 것 같다. 다정한 사람을 만만하게 세상에서 다정한 사람은 일복 많은 사람인데, 칼럼에서 김민섭도 “다정은 쉽게 소진되고 상처받는다.”라고 적었다. 책에 있는 글에는 없는 문장이다. 다정에 관한 동감보다 반감이 내 마음에 상대적으로 크게 자리잡고 있는 상태에서 책을 구해놓고도 바로 읽지 못하고 있었다. 올해 3월 &lt;다정함의 배신&gt;이란 제목을 단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아싸! 그렇지. 다정함은 문제 투성이 감정이야.’라는 내 나름의 신념에 부합할 것만 같은 책으로 지레 짐작하고 환영했다. &lt;다정함의 배신&gt;의 원제목은 &lt;Invisible Rivals&gt;(보이지 않는 경쟁자들)이다.&nbsp;&nbsp;인간은 신뢰를 얻고, 타인에게 칭찬을 받고, 기업을 세우는 등 협력적 모험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지만 결국에는 협력을 중단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전략을 세우고 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경쟁이다. 보이지 않는 경쟁이 주는 최악의 효과는 종종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경쟁을 가장 잘하는 사람에게 보상과 혜택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다정함의 배신, 113쪽)&nbsp;다정함은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점일 수 있다는 점을 번역자가 간파하고 한국어 제목을 &lt;다정함의 배신&gt;이란 단 것 같다. 김민섭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칼럼에서 그는 “다정함이란 돌려받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상의 태도다.”라고 말한다. 나의 다정함에 대해 상대가 반응할 그 무엇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태도라고 주장이다. 전적으로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인 행동도 있지만, 이타적으로 보여도 실상 자신을 위한 일인 경우도 많은 것 같다.&nbsp;&nbsp;다정함의 반대말을 AI에게 물었다. 쌀쌀맞음, 냉랭함, 무심함, 무정함, 퉁명스러움, 냉정함 등이란다. 그렇게 대해야 할 상황도 있겠지만, 조금 더 다정해야 할 것 같다. 김민섭처럼!!!&nbsp;93년생 김민섭 씨에게 축의금을 700만 원 보냈다고 해서 혹시 0을 두 개 더 쓴 건 아닌지 의심했다. 배우자가 동의하셨겠지만, 나라면 흔쾌히 동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음의 정도를 수량으로 재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다정함의 무게는 700만 원 정도, 그러니까 보통 나라면 10만 원 냈을 텐데, 나보다 70배나 더 많다. 흐흐, 이게 말이 되는지, 여기서 ‘이게‘란 축의금 700만 원 또는 무게를 재서 나보다 70배나? 하는 것 등을 가리킨다.&nbsp;&nbsp;글 모음집을 잘 읽지 않은 편이다. 단편적이고 휘발성이 꽤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그런 성격의 책을 낼 날이 있을지. 김민섭 작가가 내는 책처럼 되려면 부지런히 살아야겠다. 아, 감흥 없는 식상한 말이다.&nbsp;&nbsp;[두고두고 읽을 문장]&nbsp;타인에게 분노의 감정을 보내는 일은 쉽다. 화내고 목소리를 높이고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건 사실 가장 간편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잘 눌러 담고 타인을 끌어안는 데서부터 자신의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정함’, 이것은 단단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덕성이다. 이만큼 어려우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은 없다. 흔히 말하는 ‘유약함’과는 가장 반대에 있는 단어가 되어야 한다.&nbsp;‘다정함’은 ‘유약함’과는 가장 반대에 있는 단어가 되어야 한다.&nbsp;단단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덕성이기 때문이다.&nbsp;‘다정함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말은 공허하지도 않고 유약한 사람들의 전유물도 아니다.&nbsp;&nbsp;나는 다정함이야말로 사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며 이 사회를 지탱시켜온 힘이라고 믿는다.&nbsp;다정한 기술 사회의 도래는 가능할 것이다.&nbsp;당신에게 보낸 작은 다정함이 당신을 돌아 더 크게 퍼져 나갈 것이다. 그러한 기대와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타인에게 다정함을 보낸다.&nbsp;&nbsp;우리는 타인을 향한 우정과 애정을, 그러한 우애로서의 다정함을 유지하며 경쟁할 수 있는 존재다. 이른바 다정한 경쟁이라는 것은 가능하다. 승리나 패배가 한 개인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행하는 경쟁은 반드시 다를 것이다. 승자도 패자도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무엇보다 승자는 겸손해야 하고 패자는 당당해야 한다.&nbsp;&nbsp;우리는 사람의 능력보다도 그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능력이 좋은 사람을 찾기는 쉬우나 태도가 다정한 사람을 찾기가 더욱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nbsp;&nbsp;동정은 같은 정을 가져야 한다는, 타인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다정함은 거기에서부터 생겨난다.&nbsp;&nbsp;삶이 경제적으로 조금만 나아져도, 사람은 변한다. 자신의 삶의 환경이나 처지가 달라져도 변함없이 사람을 존중하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삶의 태도와 가치를 지켜나가는 일, 나로서는 매일 나를 다잡아야만 간신히 할 수 있다.&nbsp;&nbsp;가장 익숙한 일상을 나는 조금은 더 소중히 대하고 싶다. 어느 소박한 의미를 담아내고 싶다.&nbsp;‘조금’이라는 적당한 말이 주는 폭력에 대해 상상했다.&nbsp;&nbsp;말조심은 갑의 자리에 있을 때 오히려 더욱 해야 하는 것임을 알았다.&nbsp;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발화할 수 있는 편안한 자리에서 우리는 가장 불편하게 존재해야 한다. 내가 선택한 단어가, 몸짓이, 아니면 그 무엇이 타인에게 불필요한 두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상화된 ‘갑질’이다. 내가 편안하다면 누군가는 불편하다.&nbsp;동정. 누군가의 마음이 되어보는 일은 중요하다.&nbsp;글을 쓸 때 그것을 읽을 타인에게 불편함이나 상처를 주지 않는 글을 써야 한다.&nbsp;우리는 누군가의 글을 읽어내는 힘을 탓하기 전에 쓰고 말하는 사람의 무감각을 더욱 문제 삼아야 한다.&nbsp;---&gt; 어느 날 누군가 언쟁을 하던 중, 나는 ‘저의’라는 단어의 한자 뜻 그대로 ‘바탕에 있는 말 뜻’이라는 의미에서 당신 말의 저의에 있는 것이 궁금하다라고 했다가 그가 ‘저의’라는 말에 무척 불쾌해졌다는 말을 들었다. 되풀이해서 한자 뜻 그대로의 의미라고, 아마도 나는 그 때 ‘전제‘ 또는 ‘숨은 의미‘로서 함축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했던 것 같다. 전제, 함축이란 단어 대신에 ‘저의‘를 썼으니 상대가 불쾌할 만했다. 내 잘못이다. 듣는 이를 탓하기 전에 부적절한 단어, 통상적인 의미에서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단어를 쓴 내 잘못이다. 김민섭은 이런 과오를 일깨워준다.&nbsp;모든 관계는 호칭에서부터 그 범위가 상상되고 확장 또는 축소된다. 아줌마, 아저씨, 아가씨, 그런 호칭에는 한 대상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힘이 있었다.&nbsp;---&gt; 그렇다. 어느날 병원에서 간호사가 나를 ‘아버님’이라 부를 때, 나는 40대 중반이었다. ‘환자’ 또는 ‘손님’이란 용어도 있는데, 굳이 ‘아버님’이라고 해서 내 노안을 떠올리게 해야 하나.&nbsp;&nbsp;다정한 사람은 타이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생각에 이르기까지를 사유로써 살핀다. 누군가의 처지가 되어본다는 건 그의 세계를 섬세하게 살피는 일이다.&nbsp;&nbsp;부모의 역할, 김민섭은 자기의 아이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기 위해 계속 노력한단다.&nbsp;힘내라는 말은 사실 공허하다. 대신 네가 만드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 그의 삶뿐만 아니라 서로의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해준다.&nbsp;언어를 정서하고 다루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며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언어는 전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nbsp;&nbsp;&nbsp;[김민섭에게 배운 것]&nbsp;하나. 꿈은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꿈을 갖는 것은 소중한 일이지만, 꿈을 가지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김민섭의 글을 읽고 배웠다. 꿈을 이룬 사람일수록 타인의 꿈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를 응원하며 지켜보는 일이 더 많다.&nbsp;&nbsp;둘, 권력의 위계를 구분하기 위해 스스로를 호칭하는 일이 흔하다. ‘오빠가 생각하기에는’, ‘형은 말이야’ 등, 굳이 ‘나’를 은폐한다. 조직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기 쉽다. 개인은 사라지고 호칭으로서 상상된 대리 인간이 남는다.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 버린다.&nbsp;김민섭의 글을 읽기 전부터 그랬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아빠’, ‘선생님’보다 ‘나’라고 나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의식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직함이나 호칭으로 칭한다는 점을 알았다.&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458/46/cover150/k76203524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4584696</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