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전주님의 서재 (전주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7323149</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04 Sep 2026 18:58:42 +0900</lastBuildDate><image><title>전주</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7323149</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전주</description></image><item><author>전주</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사람 없는 곳에서 사는 사람의 ‘고달픔’에 대하여 - [노 피플 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435590</link><pubDate>Thu, 06 Aug 2026 14: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43559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032607&TPaperId=1743559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48/73/coveroff/k51203260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032607&TPaperId=1743559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노 피플 존</a><br/>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br/></td></tr></table><br/>&nbsp;“각자 맡은 일에 집중하시게요. 의사인 저는 치료를, 간호사는 체크를, 보호자님은 식사를요.” 혈액암 말기로 입원 중인 장인어른 주간 간병을 10여 일째 맡고 있었던 날 오전, 나는 회진하던 의사에게, 아버님이 식사를 안 하시려고 하니 선생님께서 아버님께 식사를 잘하셔야 한다는 말씀 한마디 해주시라고 부탁했더니, 의사가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했던 말이다.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밀려드는 서운함과 무안당한 데 따른 수치심과 분노를 나는 온종일 삭혀야 했다. 정이현의 소설집 &lt;&lt;노 피플 존&gt;&gt;에 실린 &lt;선의 감정&gt;을 읽으면서 떠오른 기억이었다. 종합병원 내과 전문의인 ‘나’가 오진과 환자 보호자의 의료 사고 항의 가능성에 불안해하는 마음 전개를 따라 가면서 나는 병원과 다른 공간에서 일하는 내가 겪고 있는 불안을 되짚었다. 예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고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일이 불거져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곤혹스럽게 했던 기억들이었다.&nbsp; 정이현의 소설을 읽으면서 다양하고 다채로운 현실과 현재의 삶을 문자로 그려낸 상상의 세계를 보았다. 그의 소설은 막연하지 않다. 내가 어디에선가 겪었을 법한 일이거나 앞으로 단 한 번도 겪지 못할 법한 상황과 일을 겪을 수도 있는 일인 것처럼 보여준다. &lt;빛의 한가운데&gt;에서 ‘나’는 아들이 성범죄에 연루된 상황에 있다. 그 대상은 현재 자신과 가깝게 지내는 아는 동생 미령으로, 젊은 시절에 광고모델로 활동하던 때 얼굴을 아들이 딥페이크 소재로 삼은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는 부모, 그것도 아들을 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위선적이며 심란할지 짐작이 간다. 그 마음이 소설을 통해 증폭된다. &lt;이모에 관하여&gt;는 직장인 여성의 출산과 육아, 경력 단절, 그리고 재택 돌보미의 삶 등을 담은 이야기다. 나는 직접 겪지 않았지만, 결혼한 조카들의 실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 &lt;사는 사람&gt;을 읽으면서 임장 투어라는 생소한 삶을 알게 되었다. 고급 아파트를 구매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빈곤층 청년이 아파트를 구하러 다니는 척 하면서 호기심과 만족감, 허세를 충족하려는 모습성과 학원 수강생에게 문제를 유출하면서 적당히 그 행동을 정당화하는 ‘나’의 삶은 내 주변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lt;단 하나의 아이&gt;에서 화자인 ‘한나’는 일대일 개인 돌봄을 하는 놀이 가정교사, 즉 개인 플레이 튜터다. 포괄적인 돌봄이 아닌, 함께 있기, 숙제 봐주기, 학원 버스 타는 데까지 데려다주기와 같은 구체적인 일감만 부여하고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수요자들은 보이지 않는 장막을 치고 필요한 돌봄 서비스만 돈으로 구매한다. 돌봄 대상자인 하유의 습관적인 거짓말과 가상의 친구와 주고받는 메시지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nbsp; &lt;실패담 크루&gt;에서 모임의 주축이자 ‘나’를 초대한 성지연은 말로만 꼰대를 거부하는 거대한 꼰대 그 자체다. 자기만의 견고한 철갑성 안에서 이러쿵저러쿵 삶을 즐기고, 다른 이를 지배한다. 시답잖은 실패담을 나누면서 자기 과시와 인맥을 관리하는 가진 자들의 모임 참여자들은 가진 자에 의해 실패를 맛본 진짜 실패담은 차단한다. 돈, 권력, 명예, 능력 등이 많은 이들은 그것들을 자랑하지 않는 듯 말하고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강렬하게 드러낸다. 선을 긋지 않는다지만 일상에서 자기와 다른 수준인 사람과 보이지 않는 굵은 선을 긋는다. 그들에게 사람은 모두 사람이 아니다. &lt;우리가 떠난 해변에&gt;는 방송 작가인 설과 그의 동성 친구 주영, 그리고 남녀가 3일 동안 고립된 공간에서 이름만 알고 지내는 TV 프로그램에서 만나 결혼한 정훈과 혜정의 삶이 나온다. 사람끼리 만났는데, 이별의 끝은 서로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 보인다. 내 삶에서 열렬히 만났다가 헤어진 사람 중에 끝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자문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lt;가속 궤도&gt;는 교제 폭력이 더욱 흉포해지는 요즘의 세태에서 사랑이 아닌 집착(스토킹, 성희롱)이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보여준다. 나에 대해 내내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lt;언니&gt;는 조교인 인회 언니에게 중국어 회화 학습 교재 번역을 시키고 결과물은 자신과 부인이 독차지하는 민교수의 횡포를 고발한다. ‘기어코 하는 사람’인 성실한 인회 언니가 복학 거부, 논문 학기 중에 지도교수 교체 등의 대우를 받으면서 ‘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오래된 현재의 일이다.  소설집 제목 &lt;&lt;노 피플 존&gt;&gt;은 이 책에 실린 9편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문구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사람이 없는 구역’일까. 아이의 출입을 불허하는 구역이란 뜻의 ‘노 키즈 존’의 키즈 대신에 피플을 넣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lt;실패담 크루&gt;의 모임, &lt;우리가 떠난 해변에&gt;의 러브 애드벌룬 프로그램, &lt;가속 궤도&gt; 안에 있는 소진의 내면, &lt;이모에 관하여&gt;에서 재연과 재택 돌보미 간의 관계, &lt;사는 사람&gt;에서 임장 투어하는 삶, &lt;언니&gt;에서 민교수의 행태, &lt;선의 감정&gt;의 병원, &lt;빛의 한가운데&gt;에서 아들의 성범죄를 겪는 부모의 삶, &lt;단 하나의 아이&gt;의 유아동 보육 플랫폼 케이 파라디소 등과 같은 것들에서는 사람은 있어도 사람이 없는 역설의 장이다. 보통의 사람이 아닌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용되거나 거부되는 장은 보편적 권리와 가치를 지니는 사람이 없는 구역이다. 그래서 &lt;&lt;노 피플 존&gt;&gt;에 등장하는 여럿의‘나’와 은서 엄마인 재연이 건네는 정서는 ‘고달픔’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애초에 삶은 고통이라 했다. 그렇다 해도 ‘피플 존’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간간이 있다. 그곳에는 보통의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 고달픔을 조금씩 덜어내면서 이 세상에 노 피플 존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어 본다.&nbsp; 소설 읽기의 효능감을 생각한다. 소설은 낯선 세계, 익숙하지 않은 세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와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일로 이끈다. 소설 읽기의 매력은 호기심을 불러오고 충족하고 해결하는 과정의 연속이란 데 있겠다. 이에 더하면 소설은 내가 이미 겪었거나 진행 중인 일의 일부나 전부가 있는 이야기에 대해 공감을 더 크게 하고 밀접하게 만든다. &lt;선의 감정&gt;, &lt;빛의 한가운데&gt;가 그렇다. &lt;&lt;노 피플 존&gt;&gt;에 실린 소설 9편 중에서 &lt;이모에 관하여&gt;를 빼고 나머지 8편 모두 ‘나’가 화자로 등장하니 그 기능은 더욱 컸다. 현재의 내 삶이 어떤 분위기인지에 따라 소설이 다가오는 정도가 다를 것 같다. &lt;실패담 크루&gt;의 모임 주최자인 성지연은 &lt;&lt;노 피플 존&gt;&gt;에 실린 소설 속 여러 실패담을 하찮게 여길 것 같다. 고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지연이 주변호사의 대형 로펌 정식 채용 실패담을 가로막은 이유는 실패가 아닌 단지 결핍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핍을 경험한 적 없는 성지연에게 결핍은 혐오의 대상이지 공감의 영역은 아니다. 나는 다행히 성지연이 아니다. 고달픈 삶에 충분히 공감할 만큼 내 삶은 고달프다. 그래도 나는 &lt;&lt;노 피플 존&gt;&gt; 안에 있는 고달픈 이들처럼 살아가는 현실의 여러 사람과 토닥토닥 위로와 격려를 나누면서 살아가고 싶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48/73/cover150/k5120326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4487307</link></image></item><item><author>전주</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국판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 [압록강은 흐른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371173</link><pubDate>Fri, 03 Jul 2026 08: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37117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5000&TPaperId=173711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75/12/coveroff/89374650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5000&TPaperId=1737117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압록강은 흐른다</a><br/>이미륵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2026년 06월<br/></td></tr></table><br/>&nbsp; 죽음의 공포를 안고 압록강을 건넌 후, 어느 언덕에 올라 중국 쪽의 진지함과 너머 조선의 쾌활함을 마음에 담은 이미륵의 심사가 어떠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br>&nbsp;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를 내가 접한 기억에는 몇 가지가 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겹치거나 혼동하는 수도 있다. 80년대 말 대학교 초년생일 무렵 '생의 한가운데'와 함께 선배들 사이에서 오고간 소설일 수 있다. 그 당시 일제강점기, 해방전후 독립운동 관련 소설이 북한 소설과 함께 많이 출간되었다. 최근에 어떤 소설, 아마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에서 보았을까. 1960년대 독일로 간호사와 광부로 일하러 간 한국인 이야기를 담은 그 소설에서 이미륵이 나왔을 것 같은데. 그저 지나는 바람이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호로 '압록강은 흐른다'가 출간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접하고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힘겨운 나날의 기록으로 여겼다.&nbsp;지난 주에 동료가 이 책을 구매했다고, 도서실 사서 선생님에게 추천 도서로 알렸다고 하면서 읽고 빌려주겠다고 했다. 읽어야 할 책, 읽을 책이 여러 권인데, 여기에 한 권을 더 추가해야 해서 마뜩찮았다.&nbsp;&nbsp; 3일 전 '우와, 엄청나요.'라는 감탄과 함께 이 책을 동료가 내밀었다. 그리고 2일 전 오후, 다른 책을 일별하고 스윽 한번 볼 요량으로 펼쳤다. 1쇄, 소제목, 수암, 첫 문장 '수암은 나와 같이 자란 내 사촌 형의 이름이다.'를 읽자마자 그냥 빠져들고 말았다. 독일어로 쓴 글인데, 한국어로 옮긴 글인데, 울퉁불퉁한 이야기가 매끄러운 글 위에서 산들바람과 함께 흘러간다. 어디쯤에서 덮고 잠을 청했는지 모르겠다. 반절 이상을 홀린 듯 읽으면서 '나' 미륵의 삶을 내 것인 양 관조하였다. 그 사이에 저녁 설거지를 하였다. 어제는 저절로 손이 책에 닿았고, 저녁 약속으로 2시간 외출, 설거지, 큰아이 운전 연습 사이사이에 압록강이 흐르듯 이미륵을 좇다가 자정을 넘겼다. 책과 내가 하나가 된 것인지, 평안하고 부드러웠다. 후회, 두려움, 설렘, 불안, 기쁨, 즐거운, 슬픔 등의 온갖 감정을 거칠게 드러내지 않고 드러내는 글의 힘의 원천은 온전히 이미륵에 있겠다. 여기에 여든 살을 넘긴 안삼환 님의 글은 원저자와 옮긴이의 일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물일 것 같다.&nbsp; 옮긴이가 '옮긴이의 말'에서 인상적인 대목으로 짚은 마지막 세 개 문단에서 나는 맨 마지막 문단을 적는다. '바로 그날 아침에 나는 먼 고향으로부터 첫 소식을 받았다. 첫째 누님이 내게 쓴 편지였는데, 우리 어머니께서 지난가을에 단지 며칠만 신고하신 끝에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는 사연이었다.' 이 문단에 앞서 이미륵은 어느 낯선 집의 정원에 있는 '꽈리 관목 한 그루'에서 '장과'의 새빨간 씨주머니를 발견한다. 주인집 아낙이 가지 하나를 잘라 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홍차에 적신 마들렌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시작점이라면, 이미륵에게는 꽈리 관목에 핀 장과(漿果)이었을까.&nbsp;13권 중에서 2권을 읽고 접어둔 마르셀 프루스트의 &lt;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gt;를 어서 읽고 싶은 마음이 인다.&nbsp; 모두에게 있는 과거의 시간을 죽기 전에 한 번은 봐야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75/12/cover150/89374650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751250</link></image></item><item><author>전주</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길게만 여긴 짧은 소련사 - [아주 짧은 소련사 - 러시아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현장]</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369342</link><pubDate>Thu, 02 Jul 2026 08: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7323149/1736934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935294&TPaperId=1736934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446/38/coveroff/k042935294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935294&TPaperId=1736934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주 짧은 소련사 - 러시아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현장</a><br/>실라 피츠패트릭 지음, 안종희 옮김, 허승철 감수 / 롤러코스터 / 2023년 09월<br/></td></tr></table><br/>소련은, 아니 러시아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란 이름으로 내 삶에 크고 굵은 획을 그은 국가이다. &lt;아주 짧은 소련사&gt;라는 책 제목을 보자마자 내가 그동안 소련을 러시아와 거의 동일시하고 무척 긴 시간을 인류와 함께했던 국가로 느껴왔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이 책을 내가 어디에서 보았냐면, 중학교 2학년 교실이다. 어떤 학생이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책이었다. 눈을 의심하고 내 느낌을 의심했다. 다 읽었다면서 선뜻 빌려주었다. 러시아, 러시아 역사에 끌렸다나. 자기가 읽던 책을 빌려준 중학생은 처음이다. 눈에 띄는 책을 읽고 있으면, “내게 빌려주면 안 될까?”라고 물으면 어물거리거나 ‘예’라고 답한 후에는 더 이상 학교에 가져오지 않은 학생이 몇 있었다. 다른 사람 손타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나이 탓이겠는데, 러시아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직접 구매해서 읽었다는 그 학생은 사회주의 소련의 공유 관념 유전자가 있었을까, 선뜻 빌려주었고, 나는 오래 읽었다. 돌려주면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도서상품권 2장을 내밀었다.&nbsp;&nbsp;159쪽, 미국인들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을 기억하듯이 소련 시민들은 자신이 어디에서 스탈린 사망 소식을 들었는지 항상 기억할 것이다.&nbsp;위 문장은 5장 ‘집단지도체제’에서 흐루쇼프까지, 첫 문장이다.&nbsp;위 문장을 읽고 나는 김일성 주석의 사망 소식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내가 항상 기억하고 있음을 떠올렸다. 1994년 7월 8일, 나는 열대야를 겨우 보내는 중, 점심 설거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후덥지근한 열기, 환한 여름 낮, 그리고 최악의 여름 밤을 보내면서 기진맥진하다가 8월 15일 지나면서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nbsp;&nbsp;282쪽. 결론의 마지막 두 개 문단&nbsp;&nbsp;&nbsp;세계 시민들은 많은 악행을 저지른 소련의 붕괴를 기뻐했다. 일부 사람들은 적어도 소련이사회주의를 위한 역사적 시도였다고 평가하며 애석해했다. 하지만 소련에서 태어난 많은 러시아인에게 역사적 서사는 달랐다. 러시아는 후진국에서 벗어나 20세기에 기적적인 위상을 차지했다. 러시아는 처음으로 세계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도록 이끌었고, 나중에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그 뒤 세계의 존경과 차르 체제로부터 물려받은 제국과 함께 모든 것이 불명확한 이유로 갑자기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서방은 199년대의 짧은 휴지기 이후 냉전 시기의 적대적 초강대국일 때와 똑같은 정도의 적개감으로 러시아를 대했다. 이것은 러시아의 눈으로 보기에 외국인 혐오증이나 다름 없었다. (예전에는 그들은 우리가 공산주의라자라서 미워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공산주의를 포기한 뒤에도 여전히 미워한다.)&nbsp;&nbsp;&nbsp;소련의 향후 복원과 관련하여 푸틴은 다음과 같은 경구로 일축했다. “소련의 붕괴를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심장이 없고, 그것을 복원하려 하는 사람은 머리가 없다.” 하지만 미래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머리가 있는 지도자(푸틴 같은 사람?)는 비록 ‘완전한 회복’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잃어버린 것의 일부를 회복하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푸틴은 2020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왜 러시아와 분리되어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탈산업화’ 피해를 입어야 하는가? ‘우리는 같은 민족으로서’ 언제 글로벌 주자로 함께 다시 뛸 수 있을까?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가까운 미래에는 그런 일이 실현될 가능성이 극히 낮아졌지만 이것이 헛된 말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소련의 유령은 소련 자체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레닌에서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소비에트 지도자에게 영감을 주었던 역사적 사명 의식은 회복 불가능해졌다. 학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운 훌륭한 소련 시민으로서 푸틴은 한때 역사적 합법칙성을 확고하게 믿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믿지 않는다. 1989~91년에 발생한 비상사태는 억누를 수 없는 결정적인 힘을 본 이후로 그는 달라졌다. 그는 2000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nbsp;알다시피, 불가능하고 믿기 힘든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쾅! 소련에서 일어난 일을 보세요. 소련이 그렇게 간단히 붕괴할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nbsp;&nbsp;&lt;결론&gt; 장을 두 번 읽었다. 실라 피츠패트릭의 책을 곧 읽을 예정이다. 훌륭한 옮긴이, 안종희 님에게 감사 인사를 보낸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446/38/cover150/k042935294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4463814</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