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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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망원경으로 천체 관측을 했던 경험이 있다. 아득하게 멀게 느껴지는 밤 하늘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점 하나. 눈으로는 그렇게 보이던 별이 망원경 속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붉은 빛을 띤 구가 희뿌연 안개 같은 막에 뒤덮여 있었다. 하얗거나 연한 노란빛의 점으로 보이던 것이 붉거나 푸르다는 걸 알게 된다. 운이 좋으면 표면에 있는 무늬나 분화구 같은 것까지 발견할 수 있다. 작은 렌즈 안에서 보이는 별의 모습은 눈으로 보는 것과 전혀 달랐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아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다시 렌즈 속을 들여 다 보길 몇 번 반복했다. 두 이미지가 가지는 차이의 간극은 너무도 극명했기에. 세계에는 특수한 장치를 통해서만 들여다볼 수 있는 진실과 아름다움이 있다.

익숙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현실은 엇비슷하게 읽힌다. 다른 렌즈를 통해 바라볼 때 비로소 새로운 해석과 의미가 가능해지는 일이 있다. SF, 판타지라는 장르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르 귄의 소설이 그렇다. 르 귄에게 SF는 특수 장치 같은 것이다. 4D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특수 안경이 필요하듯 르 귄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에는 SF라는 독특한 장치가 필요하다. 인류학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일찍 다양한 문화와 세계의 사람들을 경험했고 상상 너머의 생활을 일상처럼 공유했다. 그런 그가 그려내는 세상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세상과 차원이 달라도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바람의 열두 방향>>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그의 세계에는 열두 방향, 혹은 그 이상의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 곳은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열린 문은 바로 SF라는 장르로 통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자 세상은 오히려 작아졌다. 집과 가족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시한 어른이 되어 버렸다. 르 귄의 소설을 읽는 동안 다시 어려진 것 같았다. 천체 관측을 하며 우주에 대한 꿈을 꾸던 시절로, 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던 때로, 오멜라스를 떠나 혼자 걸어갈 수 있는 무모함으로 가득했던 시절로. 세계는 나이가 든다고 확장되는게 아니었다. 가만히 있는 사이 세계는 지속적으로 축소했다. 어른의 세상은 자주 가능과 불가능으로 나뉘었고 대부분 가능의 세계가 선택되었다.

불가능의 세계를 가능의 세계로 옮겨온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 르 귄의 소설 속에는 불가능을 열망하는 과학자들과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 된 세상이 등장한다. 그에게는 다양성을 넘어 미래의 가능성을 예측하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때로 작가의 무의식에서 발원하여 내재적 잠재력을 가지고 은유라는 실타래로 풀려나왔다. 또 하나의 과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자의 발견은 대개 은유적 착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르 귄이 그려낸 세상이야말로 과학자의 은유적 착상과 같은 것이 아닐까. 외부 생명체의 감정을 감지할 수 있는 인간의 등장, 다른 윤리적 관점을 지닌 양성인의 출현, 외계 세계와의 교류와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동. 과학자와 차이가 있다면 르 귄은 은유라는 장치를 빌어 특정 메시지에 더 힘을 싣는다. 한정된 무대로 옮겨진 세계는 일면 좁지만 깊이가 있다. 현실에서의 복잡한 관계와 층위는 들어내고 작가가 강조하려는 세상이 단순하게 그려진다. 그 속에서 메시지는 더욱 강력해진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에서 그리는 타인에 대한 감정 이입과 공포라는 문제는 바로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발로 혼란을 겪는 세계를 암시하는 듯 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세워진 낙원국가는 공익을 중시하는 현대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소수의 인권 문제를 겨냥한 듯하다. SF이자 판타지 문학인 르 귄의 소설에는 분명 미래의 세계 혹은 미지의 세상이 담겨 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현 시대가 끌어안고 있는 민감한 문제와 불가피하게 맞닿는다. 새로운 세상, 판타지의 세상으로 옮아가면서 더 예민하고 밀도있게 다루어진다.

어떤 표현과 그것이 묘사하는 것 사이에 표면적 괴리가 클수록 은유적 긴장도가 높다고 한다. 사고의 추상화 레벨이 높아질수록 은유적 프로세스가 많이 개입된다고 문병로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는 말했다. 은유적 긴장도가 높아질수록 은유의 힘은 강력해지고 그 프로세스가 복잡해질수록 사고는 어려워진다. 소설의 세계는 현실에 있을 것 같은 가상 세계라고 배웠다. 하지만 르 귄은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다. 은유에 은유를 더해 복잡성을 쌓아가는 세계는 무엇보다 강력한 은유적 프로세스를 탑재하고 있다. 르 귄의 이야기는 미지의 별들이 촘촘히 쌓여 유유히 빛나는 은유의 은하수였다.

작아진 나의 세계에 구멍 하나를 뚫은 기분이다. 그런 기분으로 은유의 은하수를 지나는 탐사선에 올라탔다. 하지만 조심스레 묻게 된다. 그 중 제대로 본 별은 몇 개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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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 - 밀고자 외 8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승영조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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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읽기에 빠져들게 된 경험은 탐정 소설에서 비롯되었다. 동사무소 앞으로 오는 이동 도서관이 있었다. 거기서 일러스트레이션이 눈길을 끄는 책이 있어 집어 들었는데 탐정 소설이었다. 우연히 읽은 소설이 재미있어서 한 동안 그 시리즈만 찾아 빌려보았다. 다음은 자연스럽게 애거서 크리스티였다. 정말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갑작스레 일어난 사건이 오리무중에 빠져들지라도 주인공은 기어코 단서를 찾아내 하나씩 끼워 맞춰 나갔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의 뒤를 쫓고,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복잡하게 뒤엉키기도 했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날 결말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긴장감은 고조되어 숨이 막히고 덮어놓은 책장에서 범인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호기심은 강렬하게 타올랐다.

 

 오랜만에 잊고 있던 팽팽한 긴장감을 다시 맛보았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밀고자> 덕분이다. 탐정(필립 말로)의 눈으로 서술되는 이 소설은 인물마다의 하나하나 동작, 순간의 분위기를 조밀하게 포착한다. 미세한 구멍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묘사는 더없이 촘촘하다. 특히 인물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읽는 사이 필립 말로, 루 하거와 글렌, 카날레스와 프랭크 등 주요 인물의 프로필이 머리 속에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룰렛 테이블 끝 쪽에 있는 문이 열리고, 아주 호리호리하고 창백한 안색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곧고 윤기 없는 검은 머리에 널따랗고 앙상한 이마,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의 남자였다. 성긴 콧수염은 3센티미터는 됨직한 길이로 입가까지 늘어지고, 양 모서리가 거의 직각으로 다듬어져 있어서, 마치 중국인 같은 인상을 풍겼다. 두툼한 피부가 창백하게 번들거렸다.

그가 슬그머니 딜러 뒤로 가서 중앙 테이블 모서리에 선 채 빨강 머리 여자를 힐끔 바라보고는, 두 손가락으로 콧수염 끝을 만지작거렸다. 손톱 끝이 주홍빛이었다.


<밀고자>중에서, 레이먼드 챈들러

 

 

 레이먼드 챈들러는 탐정소설을 문학의 경지에 올려놓았다는 찬사를 받는 작가이다. 1930~40년대 전쟁 전후 미국 사회의 복잡하고 어두운 풍경을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 속에 녹아내었다. 아래와 같은 문단을 읽다보면 그 찬사의 이유를 알게 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흰색 이중문을 지나 조명이 흐릿한 로비로 나가서, 모자와 외투를 찾아 걸쳤다. 그리고 또 다른 이중문을 지나, 지붕 가장자리에 뇌문이 새겨진 널따란 베란다로 나갔다. 대기에 바다 안개가 끼고, 집 앞에 바람막이로 세운 사이프러스 나무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살짝 경사진 지면이 멀리 어둠 속으로 뻗어 있었다. 안개 뒤에는 바다가 숨어 있었다.

<밀고자>중에서

 


 그 뒤로 이어졌던 가격 씬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담배 끝의 빨간 불빛이 서서히 화면을 가득 채우고 가볍고 빠른 발걸음 소리가 흩어진다. 뒤이어 암전. 아마도 많은 감독이 그의 작품을 영화로 찍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내 앞의 남자가 움직이며 왼손을 얼굴 위로 올렸다. 그가 둥그렇게 모아 쥔 손 안으로 담배를 빨자 빨간 불빛이 잠깐 그의 둔중한 턱과 넓고 검은 콧구멍과 각이 진 공격적인 코를 비추었다. 싸움꾼의 코였다.

그러다 그가 담배를 떨어뜨리고 발로 뭉갰다. 내 뒤에서 가볍고 빠른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돌아서기에는 늦었다.

무언가 홱 움직였고, 나는 불이 꺼지듯 의식이 나갔다.

<밀고자> 중에서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영상미가 뛰어난 장르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기분이었다. 말로가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쓰러졌던 안개 내린 밤 풍경이 눈 앞에서 출렁거렸다.

 

 소설 속에는 검은 돈과 결탁한 권력, 그것을 쥐고 뒤흔들기 위해 살인을 서슴지 않는 극악무도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필립 말로라는 탐정이 소영웅적으로 그려진다. 한낱 사립 탐정에 불과하지만 거들먹거리며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진중하게 상대를 대한다. 돈에 눈 먼 얄팍한 캐릭터도 아니다. ‘정직한 게임’이 아니라면 관여하지 않겠다는 원칙주의자. 레이먼드 챈들러 탐정소설의 품격은 필립 말로라는 인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숨가쁘게 책장이 넘어가는 탐정 소설을 읽으며 그 묘미를 맛보고 싶어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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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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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배운’ 여자라서 청소부들 사이에서도 잘 받아주지 않는 메기의 삶은 버스를 타고 도시를 떠도는 이방인의 것처럼 느껴진다. 42번에서 43번, 33번에서 40번으로, 버스에 몸을 싣고 쓸쓸한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을 관찰하는 그녀의 시선은 감정의 물기를 배제한 채 멀찍이 떨어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슬픔과 고통으로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은 그렇게 스스로를 이방인의 자리로 옮겨 두는 일일까. 루시아 벌린의 소설, <청소부 매뉴얼>에 등장하는 메기는 청소부 일을 하면서 틈틈이 수면제를 모은다.

 

 소설 속 메기가 청소를 하려고 찾아간 집들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남편이 바람을 피는 제슬 부인은 약을 먹으며 매사 깜박하는 게 일이고, 정신과 의사 부부인 블룸씨 댁은 여자가 각성제를 먹을 때 남자는 진정제를 먹는다. 치울 게 하나도 없이 언제나 변함없는 집의 버크 부인은 멈춰버린 삶과 같은 인상을 풍기고, 요한슨 부인은 여섯 달 전 남편을 잃은 이후 아침, 점심, 저녁이라는 일상의 시간을 상실한 채 조각그림 맞추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견고한 집에 청소부를 부릴 만큼의 여유가 있더라도 제각각의 문제는 있는 것이다. 메기는 집들의 사정을 살피면서 청소부로서의 매뉴얼을 작성하기도 한다.

 

나는 일을 마치고 가면서 언제 또 내가 필요하겠는지 물었다.

“알 수 없지(Who knows?).” 요한슨 부인이 말했다.

“네…….아무래도 상관없어요(Anything goes).” 내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웃었다.

테리, 사실 나는 전혀 죽고 싶지 않다.

<청소부 매뉴얼> 중에서

 

 버스를 타고 청소하는 집들을 오가며 거리를 담담히 훑어내는 메기의 시선은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이들을 놓치지 않지만 모르는 이가 손을 흔들어도 흔쾌히 하던 일을 멈추고 되받아 손을 흔들어주는 따스함도 찾아낸다. 세상에서 자신을 단절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사방에 두껍고 어두운 종이를 둘렀지만 종이와 종이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빛을 막을 수는 없다는 듯. 내내 감정을 도려내고 생략했던 그녀가 울음을 툭 터뜨릴 때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은 삶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열망이었을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와 비교되는 루시아 벌린의 소설은 감정의 절제와 생략으로 독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버스와 버스 사이, 집과 집 사이에는 무수한 공백이 있다. 비어있지만 무언가로 차오르는 공백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절망적인 고통과 아픔을 삼켜내는 힘이 그 곳에 비밀스레 담겨 있는 것이다. 

 

 <청소부 매뉴얼>(원제는 <자살 유언 쓰기 매뉴얼>)의 작가 루시아 벌린은 한때 청소부로 생계를 연명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지만 둘째를 임신했을 때 남편은 새 여자를 데리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후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이후 홀로 네 명의 아이를 키우며 생계를 꾸려야했다. 청소부, 교환원, 병원 사무원 등 여러가지 일을 전전하며 짬이 나는 대로 단편을 쓰는 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 속에 녹여 내었고 인물의 이름만 바꾸어 다른 상황 속에 배치하기도 했다. 그런 이력을 알고 나면 메기가 찾아다니며 청소를 하는 집의 단면들 속에 작가의 삶이 퍼즐 조각처럼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혼자였다. 첫 번째 남편이 떠났을 때 나는 향수병에 걸렸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너무 어려서 결혼한 것도 모자라 금방 이혼했다고 나와 의절했다. 집에 가려고, 나는 집에 가려고 글을 썼다. 내가 안전할 수 있는 곳. 나는 현실을 교정하기 위해 글을 썼다.”
-루시아 벌린

 

 

 집에 가기 위하여, 메기는 청소를 한다. 집에 가기 위하여, 버스를 탄다. 그리고 사람과 세상, 그리고 삶을 관찰한다. 집에 가기 위하여. 자신이 안전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현실을 교정하기 위해 그렇게 돌고 돈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눈을 맞추며 큰 소리로 웃고 사람들의 환대가 비어져 나오는 빨래방 같은 곳을 만난다. 기적처럼 그녀의 눈에 비친 일상의 순간들이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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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와 영화 말들의 흐름 2
금정연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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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만기였던 가게는 코로나로 인해 보러 오는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겨버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놓여있다. 다음 세입자는 영영 나타날 것 같지 않고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들 것 같아 7월에는 가게를 빼기로 말해두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아쉬움 같은 건 없다. 오히려 하루 빨리 끝냈으면 싶다. 그러므로 7월이 되면 내 인생의 실패담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손해를 보고 물러 선 일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실패하기로 마음먹고나니 다 괜찮았다. 실패는 하겠지만 무언가는 남을 테니까. 실패하기 때문에 다시 시도할 테니까. 실패는 기필코 수선될 기회를 찾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금정연은 <담배와영화>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고 영화도 보지 않는’ 자신이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을지 회의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자신의실패를 예감하면서, 브래들리 쿠퍼가 토크 쇼에 나와 닐영의 노래 <강을따라 아래로>를 에어 기타로 연주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비평은 글로 가지고 하는 에어 기타라고 했던 데이브 히키의 말을 언급하면서. 영화 평론가 기리쉬 샴부, 고다르,유운성, 달론느, 이탈로 스베보, 오환기, 리처드 예이츠, 데이비드 실즈 등 무수한 이들의 책과 말을 언급하며 이야기는 돌고 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하는 질문보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누구지?, 하는 물음이 떠돌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용에 도대체 얼마나 책을 많이 읽은 거야!,하고 감탄하다보면 어느 순간 섬광처럼 눈 앞이 번쩍하게 된다. 뚜껑이 닫혀있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드뷔시를 언급했던 로베르 브레송의 문장때문이다. ‘현실로 현실을 수선하기’.

 

 금정연이 나열했던 무수한 인용들이 거기로 향하고 있었다. ‘현실을 현실로 수선하기’. 책의 도입부에서 그는 정의내렸다. 담배는 시간을 연기로 바꾸고 영화는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는 픽션이라고. 그리고 많은 인용을 풀어내고 안착한 지점에서 다시 한 번 말한다. 현실을 현실로 수선하는게 픽션이 하는 일이라고. 픽션은 현실을 또 다른 현실로 수선한다. 그런 픽션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야말로 반복이다. 브래들리 쿠퍼는 전설적인 뮤지션의 곡을 에어 기타로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고 했다. 허공에서 움직이는 손동작으로 연주하는 에어 기타지만 ‘닐영’과 같아지기 위해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어떤 순간엔 기적적으로 ‘닐영’이 되는 순간이 벌어진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으면서도(이전보다 덜 보면서) 담배와 영화를 픽션이라는 교집합으로 묶어내는데 탁월하게 성공한다. 그가 말하는 픽션이란 ‘현실을 현실로 수선하기’. 즉 반복에 반복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어 왕가위(내 사랑 왕가위와 양조위)와오손 웰즈의 영화를 통해 영화에서 다루는 픽션이란 무엇인지(‘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픽션)를 이야기하고 마지막 장에서는 야콥슨과 튀르포, 롤랑 바르트를 통해 글쓰기로도 이야기를 확장해나간다. 그러면서 픽션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것의 완성이 아니라 그것으로 향하는과정, 도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게 이 책의 주제는 명확해진다.

 

 담배와 영화는 픽션이다. 픽션은 현실을 현실로 수선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현실로 현실을 수선하며 가장 진짜 같은 픽션을 만드려면 반복에 반복을 지속해야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일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렇더라도 중요한 것은 끝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픽션)의 과정 속에 있다. 이야기(픽션)를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서 혹은 이야기(픽션)가 만들어지면서 이미 ‘삶은 견딜’만한 것이 되어있을 테니까. 이것이 <담배와영화>에서 금정연이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의 결론은 이랬다. 어차피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 라고.

 

 '책은 실패에 대한 책이 맞다. 나는 담배를 끊는 데 실패했고 영화를 증오하는 데 실패했으며 브루스 윌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 실패했다.'라고그는 말한다.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감했다는듯, 그리고 기껍다는 듯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가 실패를 두려워했다면 이 책이 나올 수 있었을까. 실패를 하더라도 반복과 반복을 거듭하는 과정의 의미를 알았기에이 놀라운 책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다양한 인용과 현실 속 픽션을 오가며, 픽션을 픽션으로 바꾸며, 담배를 피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으면서도<담배와 영화>라는 책을 쓰는데 멋지게 성공한다. 금정연 작가님, 실패해(실패를 모르는 책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패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린이미 실패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지금의 우리와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 페드로 알모도바르

<담배와 영화> 금정연, 시간의 흐름

 


 금정연도, 페드로 알모도바르도 실패 따위는 상관없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은 이미 여러 면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지만.) 그 말에는 패배감보단 무심한 의연함이 감돈다. 실패를 두려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실패를 하더라도 반복에 반복을 하겠다는 무모하지만 멋진 용기 같은 게 있다. ‘현실을 현실로수선하기’라는 픽션에 대한 정의가 삶에 대한 정의로 재해석된다. 오늘을 오늘로 수선하기, 즉 실패한 오늘을 내일의 오늘로 수선하기. 그렇게 반복함으로써만 우리는 더 나은 오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계속되는 동안 계속’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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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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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는다(외면이란 사실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인간은 내면과 내면과 내면이 파문처럼 퍼지는 형상이고, 가장 바깥에 있는 내면이 외면이 되는 것일 뿐. 외모에 관한 칭찬이 곧잘 허무해지며 진실로 칭찬이 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려면 이렇게. 네 귓바퀴는 아주 작은 소리도 담을 줄 아는구나, 네 눈빛은 나를 되비추는구나, 네 걸음은 벌레를 놀라게 하지 않을 만큼 사뿐하구나). 그런 다음 나의 내면이 다시금 바깥을 가만히 보는 것이다. 작고 무르지만, 일단 눈에 담고 나면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단단한 세계를.
그러므로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 보이는 거리는 좁지만, 보이지 않는 거리는 우주만큼 멀 수 있다. ‘나’라는 장시(長時)는 나조차도 미리 짐작할 수 없는 행들을 붙이며 느리게 지어진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다시 나 자신이 되었다.
로베르토 발저 <<산책>>” (25-26)

 

 여기 산책의 시간을 무용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 오가는 길에는 버려진 사물과 풍경에 눈길을 보내고 기어코 주머니에 담아오는 사람이. 길고양이에게 먹이와 물을 챙겨주고 커다란 수퍼가 아니라 트럭을 몰고 다니며 과일을 파는, 다리를 절뚝이는 아저씨에서 과일을 사서, 길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단칸방의 아저씨에게 과일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그이는 애초 소록도나 폐쇄 정신 병동 같은 외딴 곳을 찾아 들어가 긴 시간 자원 봉사를 했던 이력을 갖고 있다. 있는지도 몰랐던 수도원을 찾아가 침묵 속에 머물기도 했다. 그이는 일찍이 어둠과 그늘 아래서도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배운 것 같다. 그가 쓴 글은 투명하도록 마알간 고백같아 이것이 시가 아니면 무얼까, 되묻게 된다. 그가 쓴 시 같은 글 속에서 또 다른 시를 만나고, 그가 걸은 산책 속에서 또 다른 산책을 한다.

 

“걷다가 죽어가는 벌레 곁에 있어주고, 창을 내다보는 개에게 인사하고, 고양이의 코딱지를 파주며 탕진하는 시간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 시간의 나는 진짜 ‘나’와 가장 일치한다. 또한 자연이나 스치는 타인과도 순간이나마 일치한다. 그 일치에 나의 희망이 있다. 부조리하고 적대적인 세계에서 그러한 겹침마저 없다면, 매 순간 훼손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견딜까.”
(157)

 

 처음에는 그 마음의 세계가 내가 서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아 그 사이의 거리감을 영영 떨쳐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돌아서서 걸어버린지 오래되어 다시는 닿을 수 없는 세계 같았다. 하지만 책장을 덮을 즈음엔 까마득했던 그 거리 속으로 이미 들어선 것 같았다. 멀어졌지만 전혀 다른 방향에 서 있지는 않다고 생각되었다.

 

“매 순간 ‘방향’을 선택한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방향이 아니라,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선한 길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른다. (…)
그러니 역시 ‘행복’이라는 낱말은 없어도 될 것 같다. 나의 최선과 당신의 최선이 마주하면, 나의 최선과 나의 최선이 마주하면, 우리는 더는 ‘행복’에 기댈 필요가 없다.” (34-35)

 

 

 어느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몸을 움직일 것인가의 문제였다. 삶의 구체적인 방식과 모습은 다르더라도 향해가는 곳은 같을 수 있다고. 혹은 영영 닿을 수 없는 선한 세계일지라도 바라보기라도 하자고. 나라는 장시(長時)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니까, 앞으로 뒤따를 행에는 조금 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향한 미약한 발걸음이라도 새겨보자고. 

 

“뚜렷하고 익숙하며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음을 알게 되어서이다.” (124) 

 

 

 모두가 ‘뚜렷하고 익숙하며 사라지지 않는 것’, 성공이나 안정 같은 것을 꿈꾸지만 작가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버린 것 같다. 그렇게 나와 세계의 불안정성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기에 그의 글은 초연한가보다. 잠시 그런 척, 하는 선함이 아니라 삶 속에 녹아 든 선함에는 진정성이 있다. 할머니 수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말처럼, 그의 삶에는 수도승의 것처럼 깨끗한 기운이 감돈다. 새벽의 어스름 속으로 아침의 빛이 스며들 때 열었던 책장이 이제 닫히려 할 때 등줄기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한없이 아름다워서.

 

 연약해서 고통스러운 것들, 버려지고 소외된 구석, 그것도 아니라면 한 조각의 빛과 하늘, 밤새 내린 눈에 마음과 몸의 방향을 향하게 하고 싶다. 지금 창 밖에 내리고 있는 비와 나 사이, 그리고 앞에 놓인 책과 나 사이, 그 사이에 흐르는 무엇을 쉽게 ‘행복’이라 부르지 않고 조심스레 다른 것으로 이름 붙이려는 마음으로, 그와 같이 걷고 싶다. 당신도 같이 걸으면 좋겠다.

 

“모든 시작이 이런 말이면 어떨까요. 같이 걷자는 말. 제 마음은 단번에 기울 것입니다.”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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