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정판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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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출근하는 아빠를 현관에서 배웅하고도 아쉬움에 쫓아 나가 보면 골목은 늘 텅 비어 있었다. 그럴 때면 아빠의 걸음은 얼마나 빠른 건지, 아빠에게 초능력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아빠는 수퍼맨’이라는 상상으로 연결되었다. 키가 꽤 자란 후 우연히 동네에 다시 갔을 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하나의 장막이 깨어지는 경험을 했다. 넓은 대로라고 여겼던 길은 그야말로 좁고 짧은 골목길에 불과했다. 어린 아이가 서투른 걸음으로 현관을 나와 대문에 이르는 시간이면 성인의 걸음으로 충분히 골목을 벗어날 정도의 길이었다. 그 순간 어린 내가 우러러 보았던 하나의 세상이 작고 보잘 없는 것으로 무너져 내렸다. 각자의 삶에는 인생의 비밀을 터득하게 되는 어떤 절대적 순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섬』의 작가 장 그르니에는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p.21)고 말했다. 그는 어느 날 보리수 아래 누워 하늘을 바라보다 그 하늘이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무(無)’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다. 삶은 ‘공(空)’이라는 인식의 발로였다. 그러한 경험은 ‘왜 사는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했지만 그가 세상을 무심한 시선으로만 바라본 건 아니다. 작은 고양이의 움직임에서 생(生)의 비밀을 찾아내고 담장 너머에서 풍겨오는 꽃의 향기에도 걸음을 멈추었다. 병에 걸린 정육점 주인을 찾아가 책을 읽어주며 위로했고, 자기 앞에 놓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주저하지 않았다. 미시적 실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거시적 관점에서 삶을 성찰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던 한 철학자의 관조와 사상이 『섬』 전체에서 흘러나온다. 그렇기에 『섬』은 삶의 진리를 찾아 떠났던 한 철학자의 순례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가 떠났던 순례의 항로를 따라 독자는 몇몇의 섬에 발을 내딛게 된다. 케르겔렌 군도, 행운의 섬들, 이스터 섬, 상상의 인도, 그리고 보로메 섬들까지, 그를 매혹시키고 성찰하게 했던 철학적 사유의 지점들이 거대한 바다 위에 부표가 되어 떠 있다. 책읽기를 업으로 삼은 학자이자 서양과 동양을 아우르는 사상을 겸비한 철학자의 글은 안개와 황폐한 외관으로 덮인 미지의 섬을 닮았다. 매혹적이지만 단번에 다가가긴 쉽지 않다. 우리는 그가 찾아낸 비밀의 향기를 간신히 맡아 볼 따름이다. 인간과 삶의 유한성에 대해, 순간과 자연에의 합일에 대해, 그리고 비밀과 신비에 대한 끝없는 예찬과 절대와 신성에 대한 명징한 깨달음에 대해. 하지만 비밀은 늘 ‘방벽’ 뒤에 있다고 그는 말하지 않았던가.

 

 

 

어떤 열렬한 사랑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 두려 한다. 그 순간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80쪽, 『섬』, 장 그르니에,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20)

 

 

 

그르니에는 우리와 대상 사이에 놓인 것, 우리와 삶의 본질 사이에 놓인 것을 ‘방벽’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진지함, 의젓함, 체통, 소유 등의 감정은 그러한 몰이성적인 경멸들이 넘어 들어올 수 없는 방벽의 구실을 해 준다.”(p.86)) 우리와 진실 사이를 가로막고 (“저 방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항상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게 마련인 저 방벽, 항상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을 것 같은 저 신비”(p.92)) 우리를 매혹시키기도 한다. 그는 도처에 놓인 ‘방벽’-세상과 그, 고양이와 그, 낯선 도시의 담벼락과 그, 죽음과 그 사이-에 사로잡혀 그 너머의 진실에 닿고자 마음을 기울인다. 담 너머 존재하는 대상의 진실을 보기 위해 미천해지길 망설이지 않고 ‘비밀’과 ‘결핍’을 통해 영감을 길어 올리길 갈망한다. 그러한 노력을 그는 ‘사랑’이라 부른다.

 

 

 

독자는 『섬』을 통해 흐르는 그르니에의 사상에서 동양적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실존주의적 경향을 띠면서도 회의와 관조의 태도를 취하는 그의 사상은 ‘인간’ 외부의 것으로 눈을 돌려 자연에 집중한다. 비밀과 신비를 예찬하고 무(無)에서 가득 참을 발견하며, 끝없는 통찰을 통해 세계와 절대적 합일을 이루는 경지에 도달하는 그의 성찰이 우리에겐 친숙하게 느껴진다. 이탈리아 라벨로의 해안에서 “모든 지성을 혼미하게 만드는 바로 그 장관에 내가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p101) 속에 존재의 탄생을 경험한 그는 “제로에서 무한으로 옮겨”(p103)가는 깨달음을 얻는다. 알제의 카스바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던 길에서 저자는 “우리는 나나 저희들이나 한결같이 아무런 의지할 버팀대도 없지만 서로서로를 지탱해주고,(…) 그 자체로 환원된 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절대적 통일을 은밀하게 실감”(p.164)한다. 그의 이러한 경험과 사유는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떠올리게 하고, 불교의 ‘공즉시색(空卽是色)’과 ‘무아지경(無我之境)’의 경지로 이해되기도 한다.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 – 나는 또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103~104쪽, 『섬』, 장 그르니에,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20)

 

 

 

 

그르니에의 철학적 독특함의 발견과 더불어 『섬』이 가진 또 하나의 묘미는 단정하면서도 시적인 문장에 있다. 그 문장들은 저자가 깨달음을 얻은 찬란한 순간으로 일순간 우리를 데려간다. 공(空)에 매혹되고 존재의 탄생과 세계와 자신의 합치를 경험했던 순간, 그가 서 있는 그곳에 우리 자신이 서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그만의 비밀스런 경험이 독자의 삶 속으로 생생하게 겹쳐 들어오면 우리는 지나왔던 시간 속 엇비슷한 경험들을 되짚어보느라 골몰하게 된다. 그의 문장은 내달리려는 생각을 멈춰 세우고 막막한 침묵에 젖어 들게 하는 것이다.

 

 

 

이 책 속에서 정말로 다 말해 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는 모두가 어떤 비길 데 없는 힘과 섬세함으로 암시되어 있다. 정확하면서 꿈결 같은 이 가벼운 언어는 음악처럼 흐른다. 이 언어는 빠르게 흐르지만 그 메아리들은 긴 여운을 남긴다.

(13~14쪽, 『섬』에 부쳐서, 알베르 카뮈, 『섬』, 장 그르니에,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20)

 

 

『섬』의 원제는 ‘섬들’(Les Iles)이다. 그르니에가 순례한 섬들의 진정한 의미는 섬과 섬 사이 바다를 뒤덮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그 침묵에 대한 해석은 저마다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렇게 그르니에는 우리를 각자의 순례로 이끈다. 생(生)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을 오가며 구도의 여행으로 삶을 살았던 저자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p.92)고 했다. 그르니에가 띄워 놓은 부표를 따라 저마다의 순례를 떠나보자. 자신을 벗어남으로 진정한 자아에 이르는 길을 찾았던 그의 비밀에 우리는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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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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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곳으로 생각한다면 장소는 멈춤이다. 움직임이 멈출 때 어떤 위치가 장소로 바뀔 수 있다.” (이푸 투안,<공간과 장소>)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장소place와 공간space를 구분한다. 공간 안에서 멈추고 경험하며 의미를 탐색할 때 비로소 장소는 발생한다. ‘사람을 이해하면 장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장소를 이해하면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p322)’고 아녜스 바르다는 말했다. 사람은 장소를 떠나 살 수 없고 그것을 제외하고 설명될 수 없다. 하지만 여성은 역사 이래 늘 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왔고 여성이 장소로 의미새김할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었다. 백화점의 등장이 여성의 자유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 여성의 자유는 도시를 제외하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여성이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는 공간, 공간이 더 나아가 장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도시’에서 였다.

 

‘산책’의 사전적 정의는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이다. (네이버 국어 사전) 프랑스어에는 ‘플라뇌르(산보자)’라는 단어가 있지만 휴식과 건강을 위해 걷는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 그러면서 사람들과 도시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뜻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시간과 돈이 있고 당장 신경 써야할 급박한 문제가 없는 특권과 여유를 지닌 인물형이 담겨있다. 단어가 발생한 19세기 초반의 더럽고 위험했을 파리의 거리를 상상하면 당연히 남성이었음을 의심할 여지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어디 있었을까? 여성들은 거리를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여성의 참정권과 권리 신장이 논의되던 때 도시를 걷던 여성들을 일컫는 ‘플라뇌즈(플라뇌르의 여성형)’라는 단어는 왜 없었을까?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저자 로런 엘킨은 ‘플라뇌르’가 남성형 명사만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은 거리에 있었을 무수한 여자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의 사회적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플라뇌르의 여성 버전은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해버리면, 여자들이 도시와 상호작용해온 방식을 남성의 방식 안에 가두게 되고 만다(p28)’는 중요한 문제를 지적한다. 그렇기에 ‘플라뇌즈’라는 여성 명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도시를 걷는 다는 게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엘킨은 여성이면서 ‘플라뇌즈’적 행보를 걸었던 인물과 배경이 되었던 도시를 씨실로 역사와 문화, 예술을 날실로 엮으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여기에 롱 아일랜드에서 뉴욕과 런던, 파리를 오갔던 저자의 경험을 덧입힌다.

 

진 리스의 소설 속 수동적으로 절망에 내맡겨진 여성들은 역설적으로 길 위에서 희망을 찾았고,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길을 나서는 여성의 자유에 형태를 부여했다. 조르주 상드는 스스로 남성처럼 옷을 입고 거리로 뛰어들면서 여성에게 놓인 억압과 불평등을 인식했다. ‘여성을 따라다니는 남성’의 개념을 전복시켜 남성을 추적하는 작품을 만든 소피 칼, 길 위에서의 관찰과 우연한 발견을 수집했던 아녜스 바르다와 자신이 목격한 것을 ‘증언’으로 바꾸고자 했던 마사 겔혼 등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넘나들며 엘킨은 ‘플라뇌즈’의 여성형으로서의 의미를 탐색한다. 그것은 <거리 배회>의 버지니아 울프처럼 군중 속으로 사라지며 익명성과 함께 자유를 얻는 것일 수도,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에서처럼 ‘‘시선의 대상’에서 ‘응시하는 주체’로의 전환(p325)’을 경험하는 일일 수도 있다. 혹은 조르주 상드나 마사 겔혼처럼 혁명의 현장, 전쟁의 현장을 두 눈으로 보고 기록하거나 증언하는 것까지 포괄할 수 있다.

 

차가 없으면 어디도 갈 수 없었던 뉴욕의 외곽 롱 아일랜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로런 엘킨은 대학에 진학하고 뉴욕으로 이사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실제로 세상의 일부인 것 같고 내가 세상과 주고받을 수 있으며 우리가 모두 같이 이 안에 있다(p49)’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파리에 도착했을 때 낯선 도시를 걸으며 진 리스의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절망감을 느껴야 했고 힘겹게 적응한 파리 생활을 뒤로 하고 남자 친구를 따라 도쿄로 가야했을 때 도시, 즉 장소와의 부적응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관계의 의미를 되짚어 보기도 했다. 파리에 돌아와 2015년 테러에 대한 규탄 집회에 참여하면서 68 혁명의 진의를 깨닫고 과거의 혁명과 역사를 간직한 도시에서 장소와 공명하는 사람들의 삶을 발견하기도 했다. 저자 로런 엘킨은 ‘플라뇌즈’라는 여성형 명사의 의미를 더듬는 과정을 통해 뉴욕과 런던, 파리를 걸으며 복종과 전복, 경계와 전환을 몸소 체험하며 세상을 걷는 ‘플라뇌즈’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스스로가 도시를 옮겨야 하는 불안정함 속에서 타협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곳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려 했다. 고정성을 벗어 던진 경계에 서길 주저하지 않았던 그녀의 초상에서 울프의 자유, 소피 칼의 전복, 바르다의 우연과 발견, 겔혼의 증언과 엇비슷한 조각들을 찾게 된다. 그러므로 ‘플라뇌즈’는 성장한다.

 

문학과 예술, 사회 전반에서 통용되던 ‘플라뇌르’는 남성적 관념의 전유물이었다. 그 속에서 여성의 존재, ‘플라뇌즈’로서의 의미를 여성의 시각으로 더듬어본다는 점에서 책은 의미가 있다. 책에서는 ‘플라뇌즈’라는 여성형 명사의 의미를 하나로 한정지어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플라뇌즈’적 삶을 살았던 여성들을 통해 가능한 의미를 추적하려는 시도는 남성의 시선이 아닌 여성의 시선에서 ‘플라뇌즈’가 규정되어야 할 필요성을 촉구한다. 여기서 ‘핵심은 논쟁을 멈추지 않는 것(p308)’이며, ‘뿌리를 경계하라. 순수함을 경계하라. 고정성을 경계하라. (…) 유동성, 비순수성, 혼합을 받아들이라.(p409)’는 저자의 말을 따라 ‘플라뇌즈’의 의미를 만들어가야할 것이다.

 

“집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집 없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p409).” 한국인들은 지속적인 경쟁 속에 정신없이 달리다 중년이 되면 30평대의 아파트에 안주하는 공식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이 책은 정착만이 성장의 결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성은 여전히 집을 나서고 길 위에 서는 것에서 조차 자유롭지 않다. 그렇기에 ‘플라뇌즈’가 되려는 시도 자체가 성장일 수 있음을 일깨운다. 책의 초반에서 발견되는 다듬어지지 않은 사유와 문장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책 한 권을 저자의 성장 과정으로 바라보니 그 또한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집을 떠나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여성들, 혹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떠나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여성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안정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 불안정성과 불확실함, 예측 불가능 속으로 걸어갈 수 있어야 삶은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놀라운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진정한 ‘플라뇌즈’는 실제로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선다. ‘길을 택하고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보라.(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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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계획 중 하나인 버지니아 울프 전작 읽기를 시작했다. 울프 읽기에 결정적 방아쇠를 당긴 것은 올리비아 랭의 <강으로>다.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한 가장 지적인 여행'이라는 부제처럼 올리비아 랭을 우즈 강으로 이끌었고, 물줄기를 따라 걷는 내내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 준 건 버지니아 울프다. 강을 따라 걷는 여정에는 사멸한 존재를 좇아 예술과 삶의 의미를 길어올리는 사색만이 가득하다. <강으로>의 구석구석에서 울프의 작품과 삶의 편린이 등장하니 책을 읽고 나면 울프의 소설과 그의 생애가 더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책꽂이 있는 <댈러웨이 부인>부터 펼쳐 보았다.

 

 

 

 

 

 

 

 

 

 

 

 

 

 

 

 

 

 

 그 유명한 문장이 흘러나왔다. “꽃은 자기가 사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p.7) 철학자 김진영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삶의 마지막 순간의 심경을 담담하게 기록한 책 <아침의 피아노>에도 인용된 구절이다. 그 책에서 이 문장을 마주했을 때, 앞뒤 맥락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꽃을 사겠다는 건 삶을 사랑한다는 의미다. 그 문장을 빌어 삶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고 싶었던 철학자의 심경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클라리사는 그런 사람이다. 삶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 자기 앞에 펼쳐진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과 순간 순간 미세하게 번져 나가는 공기와 분위기, 감정 변화를 세밀하게 포착해내는 사람이다. 그녀의 머리 속에서 매 순간 솟아나는 감정과 생각을 고스란히 쏟아놓은 듯한 문장들, 섬세하고 시적인 단어들로 수 놓아진 문장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여러 해 전, 몇 번이나 읽으려다 실패하고 말았던 책이다. 도저히 몰입할 수 없고 생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울프의 문장, 아니 주인공 클라리사의 의식의 흐름 속으로 마법에 걸린 듯 빨려 들기 시작했다.

 

 

 

 

 

 

 

 

 

 

 

 

 

 

 

 

 

 

우린 참 바보라니까, 그녀는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건너며 생각했다. 왜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삶을 그렇게 보는지, 삶을 꿈꾸고 자기 둘레에 쌓아 올렸다가는 뒤엎어 버리고 매 순간 새로 창조하는지, 하늘이나 아실 일이다. 더없이 누추한 여인들, 남의 집 문간에 앉아 있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이들도 (자신의 몰락을 마시는 거지) 마찬가지야. 저 사람들도 인생을 사랑하거든. 바로 그 때문에 의회 법으로도 다스릴 수 없는 거야. 사람들의 눈 속에, 경쾌한, 묵직한, 터벅대는 발걸음 속에, 아우성과 소란 속에, 마차, 자동차, 버스, 짐차, 지척거리며 돌아다니는 샌드위치맨, 관악대, 손풍금 속에, 승리의 함성과 찌르릉 소리, 머리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의 묘하게 높은 여음 속에, 들어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삶이, 런던이, 유월의 이 순간이. p.9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지금 여기 이것, 그녀 앞에 있는 것이었다. 택시를 탄 뚱뚱한 저 부인이라든가. 그렇다면 문제가 될까? 그녀는 본드 스트리트 쪽으로 걸어가며 계속 생각했다. 그녀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이 모든 것은 그녀 없이도 계속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 점이 한스러운가? 또는, 죽으면 모든 것이 완전히 끝이라고 믿는 편이 위로가 될까? 하지만 어떻든 런던의 길거리에, 사물들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흐름 속에,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고, 피터도 살아 있으며, 서로의 속에 살아 있었다. 그녀가 고향집 나무들의 일부이듯이, 저기 보기 싫게 잡동사니처럼 늘어서 있는 집들의 일부이고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사람들의 일부이듯이. 그녀는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 엷은 안개처럼 펼쳐져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나무들이 안개를 떠받치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가지 위에 그녀를 받쳐 주고 있었지만, 그 안개는, 그녀의 삶은, 그녀 자신은 끝없이 멀리 퍼져 나갔다. p.16

 

 

 

 

일상의 평범한 풍경 앞에서 일순간 솟아나는 삶에 대한 사랑과 희열이 그녀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런던 거리를 걸으며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따라 그녀의 사고와 의식은 자유롭게 유영했다. 나는 그녀의 눈과 귀, 코와 입이 된 것 같았다. 아! 이런 생생함이라니! 그녀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이제 종종 자신이 걸치고 있는 몸(그녀는 네덜란드 그림을 보려고 멈추어 섰다), 이 몸과 그 모든 기능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아무것도 아니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존재. 더는 결혼을 할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을 것도 아니고, 단지 사람들과 더불어 본드 스트리트를 걸어가는, 이 놀랍고도 다분히 엄숙한 행진에 동참하고 있을 뿐이야. 클라리사조차도 더는 아니고 그저 미세스 댈러웨이, 리처드 댈러웨이의 부인으로서. p.16

 

 

 

클라리사는 거리의 활기 속에 한껏 들떠 올랐다가도 젊음을 잃어버린 존재, 노년과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깨달음 속에서 쓸쓸함을 떨쳐버리지 못하며 위축되기도 한다. 그런 급작스런 심경의 변화마저 낯설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내 안에서 타올랐다 꺼져버렸다, 다시 타올랐다, 잦아들길 반복했던 감정의 기색과 닮아 있었다. 처음 이 책을 읽으려 했을 때에는 알 수 없었던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제야 댈러웨이 부인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경험이 내게도 축적된 것일까.

 

 

 

이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현관 테이블 위로 몸을 굽히며 그녀는 마치 그 삶의 영향 아래 절하는 듯 축복받고 정화된 느낌이 든 나머지, 전화 메시지가 적힌 수첩을 집으면서 이런 순간은 마치 생명 나무의 꽃봉오리 같아, 하고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 피어나는 꽃이지, 그녀는 생각했다(마치 탐스러운 장미가 그녀만을 위해 피어난 듯했다). p.42

 

 

 

클라리사는 현관을 들어서며 익히 알고 있는 분위기, 바깥의 생동감과는 전혀 다른 정돈된 집안의 분위기에 ‘써늘’함마저 느낀다. 하지만 그 순간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이라는 인정 속에 피어나는 ‘꽃’을 발견한다. 그녀만을 위한 탐스러운 장미를. 이것은 자기만의 가정을 꾸려본 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완벽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지만, 밖에서 돌아와 현관으로 들어설 때 우리를 맞이하는 안도감 속에는 희미한 행복이 묻어 있다. 내 집, 내가 가꾼 가정만이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미소, 그걸 클라리사의 표현을 빌어 ‘꽃봉오리’라고 불러야겠다.

 

 

 

 

 

 

 

“웨스터민스터에 살다 보면-몇 년이나 되었지? 20년도 넘었어-이렇게 차들이 붐비는 한복판에서도, 또는 한밤중에 잠이 깨어서도, 간혹 특별한 정적 내지는 엄숙함을 느끼게 되지. 확실히 그렇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정지의 순간, 빅벤이 시종을 치기 직전의(독감 때문에 그녀의 심장이 약해져서 그런 거라고들 하지만) 조마조마함. 아, 마침 종이치네! 종소리가 퍼져 나간다. 먼저 음악적인 예종이 울리고, 이어 시종이 친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종소리가 겹겹이 묵직한 원을 그리며 공중으로 흩어져 간다. 우린 참 바보라니까, 그녀는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건너며 생각했다. 왜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삶을 그렇게 보는지, 삶을 꿈꾸고 자기 둘레에 쌓아 올렸다가는 뒤엎어 버리고 매 순간 새로 창조하는지, 하늘이나 아실 일이다.” p/8~9

 

 

*사소한 사건이 발생할 때, 미세한 찰나에 번져 나가는 분위기와 감정의 변화를 극도로 세밀하게 포착해낸다. 인물의 심리 변화가 인물 안에서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장소, 소리, 풍경 등과 같은-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벌어진다.

 

 

"사랑은-하지만 또 다른 시계, 빅벤보다 언제나 2분 늦게 치는 시계 종소리가 들려왔다. 발을 질질 끌며 들어와 무릎에 가득 담아 가지고 온 잡동사니들을 쏟아 놓는 듯한 소리였다. 마치 빅벤은 워낙 위엄이 있으니까 엄숙하고 정의롭게 법을 제정하는 것은 극히 지당하지만, 자기는 자질구레한 것들을-마셤 부인이니 엘리 헨더슨이니 아이스크림 담을 유리잔들이니-기억해야만 한다는 듯이.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이 밀려들어와, 바다 위에 금괴처럼 납작하게 떠 있는 빅벤의 엄숙한 종소리가 일으킨 항적을 따라 철썩이며 춤추었다." p/168~169

*클라리사는 민감하게 사물을 감각하고 이를 통해 생각을 펼쳐 나가는 사유방식을 보여준다. ‘빅벤보다 2분 늦게 치는’ 종소리는 빅벤이 가진 엄숙함 뒤로 일상의 잡동사니를 다시 몰고 온다. 잠시 진지한 문제에 골몰해 있던 클라리사는 그 소리와 함께 당장 처리해야할 자질구레한 일을 떠올린다.

 

 

 

<댈러웨이 부인>에서 발견되는 두드러진 특징은 인물의 심리 변화가 인물 안에서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장소, 소리, 풍경, 등-의 자극과 관계 맺음 속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인물들은 풍경의 변화나 사소한 사건이 발생할 때, 미세한 찰나에 번져 나가는 분위기를 감각하고 섬세하게 반응한다. 그로 인해 생생한 생명력이 부여된 인물이 ‘클라리사’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서 로런 엘킨은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20세기 문학에서 최고의 플라뇌즈라 할 인물이다.” 라고 말했다. 또한 “도시의 분위기와 강렬하고 구체적인 관계를 맺은 듯한 느낌”을 클라리사에게 부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 ‘플라뇌르’는 ‘산보자(산책자)’라는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로 남성형이다. 로런 엘킨의 저서는 ‘플라뇌즈’라는 여성형 명사는 왜 없는지에서 시작되며, 역사, 문화, 예술사를 훑으며 ‘플라뇌즈’라 부를 만한 여성을 탐색한다.)

 

 

 

"서머싯 하우스구나. 아주 훌륭한 농부가 되어야지-이런 생각이 든 것은 미스 킬먼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거의 전적으로 서머싯 하우스 때문이었다. 그 회색 건물은 너무나 훌륭하고 진지해 보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일을 한다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스트랜드 거리의 인파에 맞서고 있는, 회색 종이로 오린 듯한 교회들도 좋았다. 웨스트민스터와 사뭇 달라, 그녀는 챈서리 레인에서 버스를 내리며 생각했다. 아주 진지하고, 아주 바쁜 동네 같아. 한마디로, 그녀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다. 의사나 농부가 되어 가능하면 의회에도 들어가고 싶었다. 모두 스트랜드 거리 때문이었다." p/180

*눈 앞의 풍경에서 비롯되어 확장되고 심화되는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머리 속에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풍경’에 있다고 말하는 듯 싶다.(도시와 인물 사이에 강렬하고 구체적인 관계가 맺어짐을 보여준다.) 멈추어 있던 생각을 깨워 ‘사고’의 창고 속으로 뛰어들게 하고, 상상력에 발동을 거는 일은 ‘풍경’ 속을 거닐 때(산책 또는 거리 헤매기) 일어난다고. ‘플라뇌르’로서의 버지니아 울프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클라리사 뿐만이 아니라, 피터 월시, 리처드 댈러웨이, 엘리자베스 댈러웨이 등, 소설 속 인물들은 거리를 걸으며 도시와 공명하며 모호했던 생각과 감정에 구체성을 갖추게 된다. 우리가 소설을 통해 마주하는 감정은 친숙한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늘 ‘느낌’이라는 모호한 정서로만 다가왔었다. 그런데 울프는 소설 속 인물들의 감정을 단지 ‘느낌’이라는 신비로운 영역에 남겨두지 않고 명확하게 이름을 붙이는데 열광적인 노력을 쏟는다. 의미를 축소시키지 않으면서 정확한 단어를 찾으려 했던 그 노력이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그 감정을 또렷하게 읽어낼 수 있게 하는 생생함을 선사한다.

 

 

 

"그녀는, 섀프츠버리 대로로 올라가는 버스에 앉아서 말했다. 자기는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고. <여기, 여기, 여기>가 아니라(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의자 등받이를 툭툭 쳤다) 어디에나. 섀프츠버리 대로를 올라가면서, 그녀는 손을 내둘렀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이라고. 자기를 알려면, 아니 다른 누구라도, 그들을 완성하는 사람들, 장소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그녀는 한 번도 말을 건네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어떤 여자, 계산대 뒤에 있는 어떤 남자, 심지어 나무나 헛간과도 묘한 친화력을 느낀다고 했다. 그것은 결국 초월적 이론으로 발전해서,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작용한 나머지, 그녀는 이렇게 믿기에, 혹은 적어도 믿는다고(자신의 회의주의에도 불구하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즉, 우리의 외현, 즉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나머지 부분에 비하면 너무나 일시적이며, 그 보이지 않는 부분은 널리 퍼져 나간다고,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살아남아서 이 사람 혹은 저 사람과 어떻게인가 결부된 채 다시 나타나거나, 심지어 죽은 후에 특정한 장소들에 출몰하게 된다고……." p/200

*울프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이 ‘클라리사’라는 캐릭터에 반영된 듯 보인다.

 

 

 

다른 책을 통해 얻은 ‘버지니아 울프’와 그의 작품에 대한 인상은 조각 조각으로 흩어져 따로 존재했다. 그런데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흩어져 있던 조각을 한나씩 연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울프 언어의 정확성과 구체성, 울프라는 작가의 정체성과 그녀에게 있어 ‘산책’의 의미 등, 이제야 그녀 자신의 문장으로, 직접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이 건네는 기쁨이라니. 책과 책이 연결되는 순간을 만끽하며 책을 쓴 저자들과 책을 읽는 이의 일부가 연결된다는 묘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어디에나 자신이 있다고, 모든 것이 자신이며, 사람들 사이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클라리사의 말이 그런 내 마음으로 스며 든다.

 

 

‘길잃기(걷기)’를 통해 정체성을 길어올렸던 울프(울프가 반영된 인물 ‘클라리사’)에 대해 서술한 리베카 솔닛의 글(<길 잃기 안내서>)과 '산책자(플라뇌즈)’로서 울프(또는 ‘클라리사’)가 걷기를 통해 도시와 교감한 방식에 대해 쓴 로런 앨킨의 글(<도시를 걷는 여자들>)을 덧붙여본다.

 

 

 

 

“날이 좋은 4시에서 6시 사이에 집을 나설 때, 우리는 친구들에게 알려진 자아를 잠시 벗어둔 채 익명의 보행자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화국 군대의 일부가 된다. 자기만의 방에서 고독을 맛본 뒤인지라, 그들과의 사교가 참으로 기껍다. [……] 우리는 그들 각각의 삶으로 조금이나마 들어가 볼 수 있고, 그 경험만으로도 자신이 실은 하나의 영혼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잠시라도 타인의 심신을 걸쳐볼 수 있는 존재라는 환상을 품게 된다.” 울프에게 길 잃기는 지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체성의 문제, 열렬한 욕망의 문제, 심지어 다급한 필요의 문제였다. 아무도 되지 않는 동시에 아무나 될 수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를 상기시키는 일상의 족쇄를 떨치고 싶다는 필요성의 문제였다. 이런 정체성의 용해는 낯선 장소나 외딴 은거지를 찾는 여행자가 빈번히 겪는 일이지만, 울프는 의식의 미묘한 뉘앙스를 예리하게 인식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낯익은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안락의자에서 잠시 고독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알아낼 수 있었다. 울프는 낭만주의자는 아니었다. 에로틱한 사랑이라는 길 잃기, 십칠 년 만의 노래를 기약하며 땅속에서 잠자는 매미처럼 내 안에 이미 숨어 있던 나 자신이 되게끔 나를 이끌어내는 연인의 손길에 따르는 사랑, 상대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미스터리 속에서 나 자신의 미스터리에 빠지고 싶은 욕망이기도 한 사랑을 칭송한 사람은 아니었다. 울프의 길 잃기는 소로의 길 읽기처럼 고독했다. p/33~34

<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

 

 

 

 

 

 

 

 

 

 

 

 

 

 

 

 

“훨씬 더 나이를 먹은 뒤에,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20세기 문학에서 최고의 플라뇌즈라 할 인물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소설에서 가장 처음으로 하는 대사가 이렇다. “‘전 런던 거리를 걷는 게 좋아요.’ 댈러웨이 부인이 말했다. ‘시골길을 걷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울프에게 혼자 도시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상상해보지 못한 자유였고, 울프가 본격적으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이사였다면 글쓰기의 소재를 제공해준 것은 산보였다. 거리에는 울프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울프는 머릿속에서 장면들을 그려보았다. 주변에서 보는 삶이 “거대하고 불문명한 재료 덩어리” 같았고 “나에게 전달되어 그것에 상당하는 언어가 되는 듯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하다 보니 “삶 자체”를 종이 위에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삶의 열정”인 도시를 계속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되었다. 거리의 소음도 일종의 언어여서 이따금 울프는 멈추어 서서 귀 기울이고 포착하려 했다. p/127~128

 

 

울프는 거리에서 이야기를 캐냈고 자기가 관찰한 사람들, 걷고 물건을 사고 일하고 멈추어 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을 채웠다. 특히, 여자들. 기차에서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묘사하면서 울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소설은 반대편 구석의 늙은 여자로부터 시작한다.” 아니면 상점의 젊은 여자. “나는 나폴레옹의 150번째 전기나, Z교수가 심혈을 기울이는 키츠가 밀튼을 어떻게 전도하여 사용했는지에 대한 70번째 연구보다는, 그 여자의 진짜 삶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p/129

 

 

도시와의 접촉 지점에서 우리가 줄여서 ‘느낌’이라고 부르는 모호한 정서가 솟아난다. 가장 흥미로운 것들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우리는 샛길에 공식 명칭을 부여하듯이 정식으로 이름을 붙여서 신비감을 줄여보려 한다. 의미를 축소시키지 않을 단어를 찾으려고 애쓴다. 바로 이게 울프가 작가로서 하려고 했던 일이다. p/132~133

 

 

형태가 바뀌고 의미가 바뀌는 아직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도시 산보자를 감싸고 안으로 스며들고 이해할 수 없는 계약으로 묶어 놓는다. 울프에게는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늘 알 수 없는 느낌에 알맞은 형태를 찾아내는 것이 평생의 과업이 될 것이었다. p/136

<도시를 걷는 여성들>, 로런 앨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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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롭게 살겠다, 내 글이 곧 내 이름이 될 때까지
미셸 딘 지음, 김승욱 옮김 / 마티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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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면 제목을 가슴에 품게 된다. 날카롭게 살겠다, 내 삶이 곧 내 이름이 될 때까지. 책에 등장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번역본으로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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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롭게 살겠다, 내 글이 곧 내 이름이 될 때까지
미셸 딘 지음, 김승욱 옮김 / 마티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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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미대선에서 역사상 최초의 ‘여성, 비백인’ 부통령이 탄생했다. 자메이카계 아버지와 인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카멀라 해리스가 그 주인공이었다. 당시 그의 당선 승리 연설문이 큰 화제가 되었다. 해리스는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흑인, 아시아계, 백인, 라틴계, 북미 원주민 등 “수세대에 걸쳐 싸우고 희생해온 여성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이들 덕분에 자신의 당선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100년 전에는 수정 헌법 19조(성별에 따른 투표권 차별 금지)를, 55년 전엔 투표권(여성 차별 불법화한 민권법)을 위해 싸웠던 여성들이 있었다면 2020년에는 목소리를 낼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표한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이 있다”고 덧붙이면서 자신의 성취가 개인적·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정치의 역사적 성취라는 토대 위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녀의 발언은 여성의 사회적 성취를 ‘여성주의’라는 정치 사회, 역사 문화적 연결 고리 속에서 고려해야 함을 깨닫게 했다.

 

 

문학사에서 여성의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20세기 미국 문학에 한해 훑어볼 수 있는 책이 등장했다. 저널리스트이자 비평가인 미셸 딘이 쓴 <날카롭게 살겠다, 내 글이 곧 내 이름이 될 때까지>(김승욱 옮김, 출판사 마티)이다. 20세기 미국 사회로 한정되어 있지만 여성의 투표권이 인정되지 않았던 시기 언론에 글을 발표했던 여성(도러시 파커)이 존재했으며 페미니즘의 물결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드러냈던 여성 작가들이 등장했음을 확인하는 것은 의미있다. 당시 활약했던 남성 작가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반면 여성 작가들의 활동은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지적인 역사’ 또한 남성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당대를 규정할 만큼 영향력을 발휘했던 작품을 내놓은 여성 작가들이 상당수 있었고, 이들은 때로 남성을 능가하며 지성 사회를 이끌었다. 미셸 딘의 문제 의식은 이들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들의 활동과 작품을 살펴보는 프로파일링 작업을 통해 문학사에서 ‘여성주의’라는 흐름의 의의를 확인하고자 했다.

 

 

이 책에는 도러시 파커, 리베카 웨스트, 한나 아렌트, 메리 매카시, 수전 손택, 존 디디언, 노라 에프런, 재닛 맬컴 등 열 명이 넘는 작가가 등장한다. 한나 아렌트나 수전 손택을 제외하면 한국 대중에게는 낯선 이름이 대부분이다. 국내에서는 작가 개개인의 번역본을 만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그들은 뉴욕의 일부 고립된 집단내에서만 유명하다”(p.11)는 미셸 딘의 설명을 읽고 나면 무지를 탓하기보단 그들이 알려지지 못했던 상황을 안타까워 해야할 것 같다. 개별 작가에 대한 배경 지식이 부족하기에 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높게 느껴지기는 한다. 분량의 한계로 인해 개별 작가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는 인상이 들 수도 있다. 한 작가의 삶 전반을 훑으며 많은 저작을 다루다보니 시기별, 저서별 평이 오가며 혼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사회 문화적 흐름을 바탕으로 저널리즘과 페미니즘, 연극과 영화, 픽션과 논픽션을 훑으며 개별 작가를 비평하고 작가들 간의 연결점까지 찾아낸다. 왠만한 내공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작업이다.

 

 

한나 아렌트나 수전 손택 등 지명도 있는 작가들에 대해 비평의 날을 세우는 일 또한 만만치 않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미셸 딘은 그들이 지닌 명성과 권위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작품과 글을 통해 개개인의 면면을 균형있게 들여다본다. 저자는 아렌트에 대해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는 ‘전제주의’가 인류 역사에 기능하는 문제에 있어 당대 주류 지식인인 남성의 의견을 넘어서는 통찰력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고 평한다. 하지만 미국의 흑인 차별 문제와 관련한 <리틀록에 대한 단상>에서는 '차별도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권리'라는 편협한 시선에 머무르는 우를 범했음을 지적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출판되었을 당시 아이히만과 유대인 위원회에 대한 아렌트의 애매한 태도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샀다. 저자는 그 상황에 대해서도 찬반의 입장을 거론하며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불편한 주제를 과감히 다루는 것을 두려워하는 법이 없”(p.140)었고 추상적 논리보다 개인적 관찰을 기반으로 인간의 어두운 본성에 대해 철저히 분석해 내었다는 아렌트의 업적을 놓치지 않는다.

 

 

수전 손택에 대한 글도 그렇다. <캠프에 대한 단상>으로 일약 '대중문화의 예언자' 지위에 오른 손택은 특유의 스타일과 문체로 더 높이 평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개인의 취향을 좋고 나쁜 것으로 분류하는 제약에서 해방시키는 글을 통해 대중 문화의 편을 들어주는 셈이 되었고 이는 고급 예술에 냉담해지던 당시 분위기를 가속시켰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해석에 반대한다>에 대해서도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찬반의 입장이 존재했다는 것을 거론하고 손택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주장했지만 여성 집단을 공격하는 뉘앙스의 글로 인해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렇듯, 미셸 딘의 펜은 호평과 악평을 오가며 객관적인 입장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개인적인 호감을 일체 배제하고 균형있는 글을 쓰기 위해 미셸 딘이 사용한 무기야말로 ‘Sharp(책의 원제:날카로움)’가 아니었을까.

 

 

 

“그들 각자가 지닌 재능은 서로 달랐으나, 잊을 수 없는 글을 쓰는 재주를 지녔다는 점은 그들 모두의 공통점이었다. 도러시 파커가 자신의 삶에서 느낀 부조리함을 신랄하게 돌아본 글을 쓰지 않았다면, 세상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여행을 다룬 1인칭 글 속에 세상의 역사 절반을 쓸어담을 수 있었던 리베카 웨스트의 능력도 마찬가지다. 전체주의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생각, 트롤 무리 속에 떨어진 공주의 기묘한 의식을 주제로 삼은 메리 매카시의 소설, 해석에 대한 수전 손택의 생각, 영화 제작자들에 대한 폴린 케일의 정력적인 비평,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노라 에프런의 회의적 시각, 권력을 쥔 사람들의 결점을 나열한 레나타 애들러의 글, 정신분석학과 저널리즘의 위험과 보람을 돌아본 재닛 맬컴의 글 또한 그렇다.” p.9

 

 

 

저자 미셸 딘은 후기에서 여성주의에 ‘양면적인 반응’을 보이며 때로 적대적이기도 했던 이들 작가들을 통해 ‘여성주의 메시지’를 찾아내고자 한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친절하지’ 않은 여성, 무릎을 구부리지 않는 여성, 때로 대중 앞에서 실수를 저지를 용기가 있는 여성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p.481)했다. 그런 상황에서 예리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성 작가들에게는 “예리하다거나 못됐다거나 다크 레이디”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이 환상은 이런 여성들이 파괴적이고 위험하고 변덕스럽다고 주장”(p.481)하기까지 했다고 지적한다. 책에 등장한 여성 작가들은 개인적 성향에서부터 사회적 배경과 계급, 인종에 있어 저마다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 목소리의 높이와 음조를 결정하는 데에 ‘여성으로 살면서 겪은 일’이 배제될 수는 없었다.

 

 

러 작가의 삶을 추적하며 미셸 딘이 발견한 교훈은 “우리는 자신에게 부여된 목소리로만 말할 수 있다”(p.484)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목소리란, 결코 홀로 동떨어져서 만들어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살아간 사람들의 역사를 통해 축적된 경험의 영향 아래 형성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책에서 거론된 작가들이 ‘여성주의’에 있어 다른 태도와 시각을 지니고 있었더라도 역사와 사회 속에서 ‘여성’이기에 겪어야 하는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데 연결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다양한 목소리의 필요성을 끌어낸 것이 미셸 딘의 성취가 아닐까. 그녀는 여성 작가들이 반드시 같은 목소리를 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서로의 공통점만이 아니”(p.484)기 때문이다.

 

 

책의 곳곳에는 뉴욕 지식인 사회에 직접 발을 담궈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에피소드(잡지에 실린 가십이나 비하인드 스토리처럼 읽히는 사건)가 등장한다. 지성사의 뒤에 숨어 있던 이야기를 통해 개별적으로 흩어져 존재하던 여성 작가들을 연결해 독자의 시선 앞에 만남의 장을 펼쳐 보여 준다. 아렌트와 매카시는 오랜 우정을 유지했는데, 아렌트의 죽음 이후 매카시가 그녀의 원고 정리에 매진하던 시절, 헬먼과의 소송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이런 사건은 당대의 유명한 여성 작가로 꼽히는 인물들 사이에 페미니즘에서 강조하는 ‘자매애’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 때로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며 서로를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헬먼과 친하게 지냈던 애프런이 후에 매카시와 헬먼의 소송 관련 불화를 <상상 속 친구>라는 자신의 희곡 소재로 사용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소소한 이야기 속에 가려져 있던 지식인 사회의 진실과 작가라는 직업의 고충이 드러나 독자의 흥미를 끈다.

 

 

이 책의 진가는 책에 등장하는 여러 작가의 주요 저서까지 찾아 읽어야 제대로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성으로 대표되던 20세기 미국 문학사에 출중한 여성 작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렸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공은 크다. 그러한 작가들의 존재를 토대로 지금, 그리고 미래 여성 작가들이 자신의 활동 무대를 넓혀 나갈 것이다. 여성으로서 마주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장벽을 뚫고 ‘예리하게’ 자신의 글을 펼쳐냈던 그들의 삶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귀감이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여성으로 사회적 차별에 맞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며 살겠다는 열망이 셈 솟을 것이다. 남성 독자들에게는 이 책을 추천한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안다고 할 수 없음’과 ‘몰라도 되지 않음’”이라는 위치를 돌아보게 해줄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책의 제목을 가슴에 품었으면 싶다. ‘날카롭게 살겠다’, 내 삶이 곧 내 이름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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