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수전 손택 & 조너선 콧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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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사명은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거라고 말했지만, 저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바 작가의 소명은 온갖 종류의 허위에 맞서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에요." p.196

 

 

1933년 태어나 2004년 골수성백혈병으로 사망한 수전 손택은 미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예술 문화 평론가로 연극 연출가, 영화 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열다섯에 버클리 대학교에 입학, 시카고대학교에서 철학과 고대사, 문학을 공부하고 스물다섯에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파리대학교, 옥스퍼드대학교 등에서 수학했으며 컬럼비아대학교, 뉴욕시립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1963년 첫 소설 <은인>을 출간했고 이듬해 <파르티잔리뷰 Partisan Review>에 <’캠프’에 관한 단상>을 발표하면서 문단과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 예술 작품에 대한 과도한 해석에 반기를 든 글로 수전 손택은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통해 전쟁과 미국의 허위를 고발했고, 내전 중인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상연하는 등 실천가적 행보를 걸었다. 주요 저서로 소설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 <인 아메리카>, 에세이 <해석에 반대한다>, <사진에 관하여>, <은유로서의 질병>, <타인의 고통>등이 있다.

 

 

<수전 손택의 말>은 <롤링스톤>의 에디터이자 작가인 조너선 콧이 파리와 뉴욕에서 두 번에 걸쳐 손택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터뷰에 대한 논평이 추가되거나 기사화를 위한 편집 없이 ‘육성’을 그대로 포착한 녹취록이라는 점에서 글은 생명력을 지닌다. 사유를 중심으로 정돈 수렴된 글로서 ‘책’을 읽었다는 느낌보다 사람으로서 손택을 ‘만났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손택은 <’캠프’에 관한 단상>과 <해석에 반대한다>로 일약 미국 지성계의 스타로 떠오른 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다 1974년 유방암 선고를 받고 2년간 투병 후 완치되었다. 책에 담긴 인터뷰는 손택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 살아 돌아온 시점, 질병을 앓으며 써낸 <은유로서의 질병>의 출간을 앞둔 1978년 이루어졌다. 마흔 다섯에 죽음과 싸워 이긴 승리자로 돌아온 그녀는 패기로 뭉쳐 있다.

 

 

그녀의 저서인 <은유로서의 질병>, <사진에 관하여>,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인터뷰를 중심으로 책과 사랑,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훑으며 그녀의 삶을 아우르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작가의 주요 저작에 대한 관심 뿐만 아니라 손택이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고조시킨다. 스스로도 ‘군더더기 없고, 정확하고, 요란하지 않고, 꾸밈없’는 문체를 구사했지만 ‘쓸데없는 걸 다 벗어던진 적나라한 특질 때문에’ 베케트와 카프카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작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최대한 책임감을 갖고’ 싶고 ‘로큰롤을 사랑’하며,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어떻든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두고 싶지는 않’다고 주저없이 말하는 여성. 손택의 첫인상은 당당하고 대범하지만 솔직하고 열정이 넘치며 삶과 사람을 사랑하는 매력적 여성으로 다가온다.

 

 

"적어도 은유에 극단적인 회의론을 품고 있다고 해야겠죠. 은유는 사유에 핵심적이지만 쓸 때는 은유를 믿으면 안 돼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허구라는 걸 알아야 하죠. 아니, 필수적인 허구가 아닐 수도 있어요. 은유를 품지 않은 사유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죠. 그러나 바로 그런 사실이 그 사유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거예요. 내 마음을 끄는 건 항상 그런 회의주의를 표현하면서 은유를 넘어 깨끗하고 투명한 무언가로 나아가는 담론이에요." p.101

 

 

"우리가 나이가 들고 피부가 좀 더 쭈글쭈글해진다고 해서 뭐가 어떻단 말이죠? 무슨 상관이에요? 나이가 몇 살이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무언가 유치하다거나 어른스럽다는 생각에 근거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어떤 관념을 부과하려 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p.146

 

 

손택은 좋은 사회란 주변인에게 너그러워야 하며, 여성은 물론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도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해서는 안되며, 지나친 은유와 해석으로 허위를 씌우기보단 ‘실재’에 주목할 것을 강조한다. 살기를 주저하는 자는 질병과 공범이나 마찬가지이며, 가슴을 뛰게 하고 삶을 바꾸기도 하는 음악과 예술의 힘은 대중과 고급 예술로 나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가까운 사람들 속에서 허위를 벗고 사랑을 나누는 삶을 찬미하는 그녀. 세상의 모든 이분법과 사회문화적 관념이 덧씌우는 시선에 철저히 저항하는 글을 썼던 작가이지만, 그를 수놓은 ‘명성’이라는 허위 속에 사람-손택은 가려져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런 이미지를 가졌던 독자에게 사람-손택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로서 이 책은 가치를 발휘한다.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인해 상황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고 하나의 주제를 깊이 파고들 수 없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로 인해 여성주의와 관련하여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발견된다. 문학에 있어 ‘여성적 시선’을 구분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는 입장은 이분법을 철폐한다는 명분으로 현실에 명백히 존재하는 차별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이런 질문들은 그의 저서를 찾아 읽은 후 다시 판단해볼 수 있겠다.

 

 

시대의 지성으로 문화 예술의 중심에 있었고, 이름 자체로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던 손택. “전 자신을 스스로 창조했다는 생각을 해요.”(p.194)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중심에 서 있는 것이란 ‘공감’이며 ‘사람들이 편을 갈라놓은 것 이상’을 보게 해주는 의미라고 했다. 특출 나기도 했지만 스스로가 자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고 삶을 연출했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하지만 아직은 모든 판단을 유보하기로 한다. 이 멋있는 여성을 더 알고 싶다는 강렬한 호기심이 일고 있다. <수전 손택의 말>은 손택 읽기의 첫 단추로 적절한 선택인 것 같다.

 

 

"자기 공간은 스스로 창조해야만 해요. 침묵과 책들로 가득한 공간 말이에요."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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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에이드리언 리치 지음, 이주혜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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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헌법 불합치 결정으로 폐지된 낙태죄가 대체할 법안을 마련하지 못해 표류하고 있다. 여성은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과 재생산권, 건강권을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강화된 ‘희생적 어머니’의 이미지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현대 사회에서도 여성을 육아와 가사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다양한 채널로 포르노가 소비되면서 여성의 이미지는 왜곡되고 여성혐오와 성폭력의 위험은 증가했다. 혐오는 여성을 넘어, 인종, 종교, 성소수자 등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다. ‘여성에게 몸은 너무도 큰 문제’라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1976년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의식이 깨어난다는 것은 국경을 건너가는 것과 같지 않다. 한 발 내디디면 다른 나라에 도달하는 그런 일이 아니”(p.48)라고 말했다. 미국 시인이자 페미니즘 사상가로 모든 차별에 맞섰던 에이드리언 리치의 산문집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2020)를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유대인 병리학자였던 아버지 아널드 리치와 남부 상류층 기독교인이며 콘서트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헬렌 리치의 맏딸로 태어났다. 1951년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하고 첫 시집 <세상 바꾸기>로 ‘예일젊은시인상’을 받았다. 미래가 촉망받는 작가로 주목받았지만 1953년 결혼과 함께 세 명의 아들을 낳아 키우며 어머니, 아내로서의 전통적 역할과 시인이라는 자아 사이 분열을 겪으며 고통 받았다. 에이드리언은 1960년대 여성운동을 통해 가부장제의 실체를 깨닫고 레즈비언 정체성 탐구에 몰두하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후 여성, 레즈비언, 유대인으로서의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종교와 인종, 동성애 등 모든 차별적 시선에 저항하며 목소리를 냈다. 저서로는 <공통 언어를 향한 꿈> <문턱 너머 저편> 등 20여편의 시집과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해여: 경험과 제도로서 모성> <가능성의 예술> 등 6권의 산문집이 있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주요 에세이를 엮은 산문집이다. ‘개인적’이고 ‘고백적’인 산문은 자기 성찰에 대한 은유를 담은 시와 시인의 실천가적 삶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다. 시인 스스로도 자신이 쓴 산문과 시 사이에 분명한 교차점이 있다고 말했고 이 책의 서문을 쓴 샌드라 M. 길버트(문학평론가)도 에이드리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책에는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다시 보기로서의 글쓰기>,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하여; 경험과 제도로서 모성>, <피, 빵 그리고 시>, <가능성의 예술> 등 여러 편의 글이 연도순으로 실려 있다. 일련의 글을 통해 시인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글쓰기와 사회 운동으로 확장 시켜 간 과정을 더듬어볼 수 있다.

 

 

 

 

 

“다시 보기는 되돌아보는 행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행위, 새롭게 비판적인 방향에서 오래된 텍스트를 접하는 행위를 말하며, 여성에게는 단지 문화 역사의 한 챕터 이상을 의미하는 생존 행위이다.” (p.26)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다시 보기로서의 글쓰기>와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하여; 경험과 제도로서의 모성>는 여성이자 모성으로 삶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강렬하게 다가갈 것이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다시 보기로서의 글쓰기>에서 에이드리언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자기 존재를 인식하기 어려웠던 상황을 지적한다. 남성의 언어로 쓰여진 역사와 문학에는 극단적인 여성의 이미지(어머니 또는 마녀)만 존재할 뿐 제대로 된 여성상이 부재했다. 저자는 글쓰기를 통해 현실을 재정의하고 불균형을 깨는 일에 시인의 역할이 있음을, 가부장제의 파괴적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돌리는데 여성의 일이 존재함을 강조한다.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하여 : 경험과 제도로서 모성>에서 에이드리언은 ‘모성’을 다양한 사회와 정치 체제의 핵심으로 보고 남성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제도로서의 모성’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여성의 몸과 정신을 희생적이고 보수적인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에 가두는데 복무했다.

 

 

 

“나는 이 책 전반에서 모성의 두가지 의미를 구분하고자 한다. 한 가지 의미가 다른 한 가지 의미 위에 덧붙여진 것으로, 하나는 여성의 재생산 능력과 아이들에 대한 잠재적 관계로서의 모성이고, 또 하나는 그 잠재성-그리고 모든 여성-을 남성의 통제 아래 확보하는 것이 목표인 제도로서의 모성이다. 바로 이 제도가 다양한 사회와 정치 체제의 핵심이었다. 제도로서의 모성은 인류의 반 이상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없게 했고, 남자들을 진정한 의미의 아버지 됨으로부터 면제해주었다. 이 제도는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분리하는 위험한 짓도 저질렀다. 또 인간의 선택과 잠재력을 화석화했다. 이 제도가 빚어낸 가장 기본적이고 당황스러운 모순은 우리 여성들을 우리 몸 안에 가둠으로써 오히려 우리를 우리 몸으로부터 소외시킨 것이다.” (p.130)

 

 

 

 

 

 

시인의 정체성 탐구는 여성과 모성을 넘어 이성애주의와 인종, 종교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역사적 학문적으로 지워져 왔던 레즈비언 존재와 미국 사회의 동화 정책으로 억압받은 유대인 전통을 살펴본다. <뿌리에서 갈라지다>에는 모성과 여성, 레즈비언이면서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자기 정체성 이해를 위한 노력이 담겨있다. 시인은 백인과 기독교라는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감추어야 했던 유대인 혈통을 되짚어보며 편견과 차별의 메시지를 읽어낸다. 삶 깊숙이 침투한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주의, 이성애중심주의가 자신의 삶에 만든 빈 칸을 직시한다.

 

 

 

"이 글에도 결론이 없다. 내게는 또 다른 시작이다. (…) 남은 생애 동안, 다음 반세기 동안, 내 정체성의 모든 면이 전부 개입되어야 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정체성들 말이다. 특권을 얻고 싶으면 복종을 바치라고 배운 백인 중산층 여자아이. 이성애자 기독교인으로 길러진 유대인 레즈비언. 흑인 인권투쟁을 통해 처음으로 억압이 호명되고 분석되는 것을 들었던 여성. 남성 폭력을 증오하는 페미니스트이자 세 아들을 둔 여성.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저는 여성. 피 흘리는 사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멈춘 여성. 아름다운 언어도 거짓말을 할 수 있고, 억압자의 언어가 때로는 아름답게 들릴 수 있음을 아는 시인. 저항의 일부분으로 자신의 행동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하는 여성." (p.317)

 

 

 

 

 

 

에이드리언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를 언어로 바꾸는 일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는 것은 “젠더, 인종, 계급, 성적 지향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인식하고 분석하고 아는 것부터 시작”(p.473)된다고 그는 말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현실을 자신의 언어로 이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언어의 장악은 주체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거기서 변화의 힘이 발생한다. 해방을 위한 실천은 언어의 장악, 주체의 변화라는 역학 속에서 존재해왔다. 시인의 작업이란 존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 말할 수 없어 생각할 수 없는 것 까지를 언어로 표현해내는 일이다. 시는 “현실 속의 보이지 않는 구멍을 통해 길을 낸다.”(p.470) 에이드리언에게 시쓰기는 해방을 위해 현실에 길을 내는 작업이었다.

 

 

 

정체성(성, 인종, 종교, 계급 등)이야말로 정치의 핵심이라고 인식한 시인에게 ‘개인적인 것과 시적인 것, 정치적인 것’은 하나였다. 자신을 향해 던졌던 질문은 사회 정치 문제로 나아간다. 시인은 “어떤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침묵이 깨지고 있는가?”(p.470)에 주목한다. 개인의 정체성을 정치로 확장하고 시를 근본으로 하는 언어의 힘을 알기에 사회 변혁을 위한 작가의 역할을 고민한다. <나는 왜 국가예술훈장을 거부하는가>를 통해 자본의 논리로 차별을 일삼고 예술을 탄압하는 정부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가능성의 예술>에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특히 미국 자본주의)가 낳은 문제점을 비판한다. 또한 문제 해결을 위해 상상력 있는 질문을 만드는데 작가의 역할이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 메시지를 전했던 운동가적 면모를 강조하다 보면 에이드리언의 시적 예술성을 간과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도 자부심을 느낄 만큼 뛰어난 ‘미적 기교’를 갖춘 시인이다. 정제된 언어 감각은 산문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시인이 언어에 쏟은 노력과 시를 향해 품은 애정은 독자에게 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이는 에밀리 디킨슨, 엘리자베스 비숍, 월리스 스티븐스, 뮤리엘 루카이저 등 몇몇 시인에 대한 탁월한 비평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다. 그는 시 비평에서도 단순히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머물지 않고 작가의 삶 전반을 통해 폭넓게 시의 의미를 길어 올린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 우리는 역사의 한 토막을 통과하며, 그 안에서 살고 그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를 써야 한다. 수많은 다른 사람과 함께,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그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다.

(…)

우리 작가와 지식인은 이름을 지을 수 있고, 설명할 수 있고, 묘사할 수 있고, 증언할 수 있다. 기교나 뉘앙스, 아름다움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거들 것이다." (p.490)

 

 

 

에이드리언 리치의 삶과 글쓰기에 있어 키워드는 정체성과 언어(시)다. 정체성 탐구는 자신과 사회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변화의 목소리를 발화 시키는 힘이 되었다. 특권을 지닌 토큰 여성으로 머물기를 거부하고, 레즈비언이자 유대인이라는 외부자의 신분을 명확히 드러냈다. 시인은 내밀한 고백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언어를 벼르고 깎았을 것이다. 그가 낸 용기는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을 끌어내고, 고통 속에 빚어낸 언어는 날카롭게 빛난다.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을 품은 이들과 소수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에게 에이드리언 리치의 존재는 ‘길잡이 실(서로에게서 빛을 찾게 하는 실)’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라는 시인의 질문이 우리 앞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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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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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은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1980년대부터 환경, 반핵, 인권 운동에 참여한 활동가이다. ‘맨스플레인’이란 단어로 세계적 반향을 일으키며 페미니스트로 더 알려져 있지만 『마음의 발걸음』, 『걷기의 인문학』, 『멀고도 가까운』 등 개인의 서사와 역사, 환경과 예술 문화 비평을 연결하며 서정적인 에세이를 써왔다. 『길 잃기 안내서』(김명남 옮김, 반비, 2018) 또한 그러한 저작들과 나란히 놓여 있다.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은 길 잃기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솔닛은 『길 잃기 안내서』에서 길을 잃으라고 권한다. “우리가 그 속성을 전혀 모르는 무엇이야말로 종종 우리가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찾는 일은 길을 잃는 일이나 마찬가지”(p.20)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길을 잃을 것인가. “길을 전혀 잃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길 잃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파국으로 이어지는 길”(p.31)이다. 길을 잃은 이들이 반드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길을 찾아 더 멀리 나아가고, 누군가는 다른 내가 되는 변화를 경험하지만 어떤 이들은 영영 길을 잃고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길 잃기에도 안내가 필요하다고 솔닛은 말한다.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p.26), 그리고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것이 길을 찾는 나침반이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책에서 솔닛은 갖가지 방식의 길 잃기를 보여준다. 신대륙을 정복하러 갔던 스페인 사람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는 길을 잃게 되자 정복자의 이름을 버리고 자신을 바꾸며 원주민의 삶으로 녹아 들었다. 금을 찾기 위해 캘리포니아를 찾은 ‘데스밸리 포티나이너스’는 황량한 사막에서 길을 잃고 부(금)에서 물로, 나눔과 생존으로 가치를 변경하면서 죽음의 사막을 살아서 빠져나왔다. 그들이 경험한 변형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퇴화를 수반하며, 급작스런 위기를 동반할 수 밖에 없다고 솔닛은 말한다. 이러한 사유는 유럽에서 고향을 잃고 미국으로 이민해 온 ‘디아스포라’로 변형의 과정을 경험했던 증조 할머니와 할머니가 정신병을 앓았던 내력에 대한 이해로 확장되기도 한다.

 

솔닛은 물리적인 길 잃기에서 형이상학적이고 은유적인 길 잃기로 나아간다. 자신의 부계 가족사와 청년 시절의 친구, 연애 경험을 통해 기억과 과거,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상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단순히 길을 잃는 것과 달리 슬픔과 아픔을 동반한다. 도시가 폐허로 변하고 지구에서 동물이 사라지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솔닛은 상실이 슬픔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상실의 감각이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이자 우리가 현재에 길을 찾도록 도와줄 단서들에 대한 기억”(p.43)이다. 또한 “세상 만물은 원래 사라지는 것이 섭리이지, 살아남는 것이 섭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익혀야 할 기술은 과거를 잊는 기술이 아니라 손에서 놓아주는 기술이다. 그리고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그 상실 속에서 풍요로울 수 있다.”(p.43)고 솔닛은 말한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북쪽처럼 이 책을 관통하며 ‘북쪽’ 역할을 하는 것은 ‘먼 곳의 푸름’이다. 어린 시절 입었던 블라우스와 15세기 원근법을 받아들였던 화가들의 그림, 자신의 기원을 갈망하는 블루스, 이자크 디네센의 도자기와 이브 클랭의 경계가 사라진 그림 등, 솔닛은 다채로운 푸른 색을 소환하며 우리의 시선을 먼 곳으로 이끈다. “먼 곳의 푸름은 시간과 함께, 멜랑콜리의 발견과 함께, 상실의 발견과 함께, 갈망의 질감과 함께”(p.66) 오기에 아름다우면서도 슬픔과 얽히어 있다고 솔닛은 말한다. 그리고 성숙은 “먼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주는 미감”(p.66)을 선사한다고 덧붙인다. 솔닛의 청년 시절 친구의 이름은 바다의 깊은 푸름을 담은 마린이었고 아버지가 계획자로 일했던 동물보호구역의 이름 또한 마린 카운티였다. 솔닛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는 “행운의 마주침, 우연한 일치, 심지어 그 이상의 수준까지 이르는 조화의 순간”(p.186)은 ‘먼 곳의 푸름’처럼 멀리서 관조할 때 비로소 찾아지는 아름다움이다.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는 『멀고도 가까운』과 쌍을 이룬다. 『멀고도 가까운』이 평생 자신을 질투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넘어 연대를 이야기하는 책이라면 『길 잃기 안내서』는 불안정했던 부계 가족사를 수용하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떨쳐내며 자신을 찾아나선 성장의 서사라 할 수 있다. 전자에는 극지방을 뒤덮은 눈과 얼음의 흰빛이 가득했다면 후자에는 광활한 사막과 먼 곳에 떠오르는 푸름이 넘실거린다. 책에는 개인사와 엇갈려 제시되는 역사적 사실과 문화 예술 비평이 쌓이면서 다양한 사유가 폭넓게 진폭한다. 하지만 솔닛 특유의 만연체 문장과 층위가 깊은 사유는 때로 독자를 버겁게 할 수도 있다.

 

작가 정여울은 『길 잃기 안내서』에 대해 ‘이 작가가 지닌 감성의 엔진이 여기 다 모여 있구나’라고 추천사에 썼다. 정여울의 말처럼 이 책에서 독자는 리베카 솔닛이라는 작가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는지 그 내밀한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누군가는 자신의 경험을 확장하고 싶은 하나의 문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길 잃기는 두렵지만 성장을 위한 새로운 문을 발견하고 싶은 지적인 독자라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온 세상을 잃으라. 그 속에서 길을 잃으라. 그리하여 네 영혼을 찾으라.”(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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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세계문학 42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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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카프카를 읽는다는 것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답을 제시하지 않는 미완의 소설, 미로에 갇혀 ‘이방인’처럼 헤매 이는 주인공...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속에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소설은 당장의 위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이 지금의 시대에 마주한 유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인간이란 애초에 부조리한 존재이며, 삶 또한 근본적으로 부조리와 허위에 사로잡혀 있다는 명백한 선언. 그의 소설을 통해 마주한 이 고독한 선언이 역설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에 힘을 얹어준다. 그럼에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며, 그것이 바로 자유로운 인간 의지의 증명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카프카의 최후의 소설 <성>에는 불가능에 저항하는 K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토지측량사 K는 늦은 저녁 성 아래 있는 마을에 도착해 여관에 들르지만 성 관리인의 아들에게서 백작의 허락 없이는 마을에 머물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K는 ‘백작의 초빙을 받은 토지 측량사’라고 자신을 밝히지만 성에서 돌아온 답은 ‘착오가 있다’라는 것. 다음날 K는 허가를 받기 위해 산 위의 성으로 향하지만 성은 쉽사리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 성에서 돌아오는 답은 강력하다. “안돼!”, “내일도 안되고, 다음번에도 안돼!”,(p.32) “언제라도 절대 들어올 수 없어.” (p.35) 초빙을 받았지만 성에 들어갈 수도, 마을에 받아들여질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 토지측량사 K.

 

외딴 마을에 도착해 고군분투하지만 ‘이방인’의 자리에서 맴돌 뿐인 K는 카프카의 다른 작품 <소송>이나 <법 앞에서> 마주했던 주인공들과 유사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송에 휘말려 삶을 소진해버리는 요제프 K,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문지기에게 거부당하고 평생에 걸쳐 기다림만 지속하는 시골 사람의 처지가 떠오른다. 이후 전개되는 소설의 양상 또한 이전 작과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 자신의 처지를 구명하기 위한 K의 지난한 노력이 이어진다.

 

K는 심부름꾼 바르나바스가 전한 편지를 통해 자신의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가진 듯한 ‘클람’이라는 관리의 존재를 알게 된다. 편지에 언급된 촌장을 만나보지만 성에서의 업무 착오로 더 이상 토지측량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사실만 확인하게 된다.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클람을 만나보려 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다. 대신 관리들이 묵는 상급 여관 주점에서 일하는 프리다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약혼까지 하지만 여건은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한다.

 

다리목 여관의 여주인, 촌장, 바르나바스의 누이 올가와의 대화를 통해 K는 성과 관리들, 마을의 실체를 알아간다. 성과 관리 사회는 마을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으며 마을은 거기에 강력하게 귀속되어 있다. 사람들은 아무 의심없이 권위와 권력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성의 초빙을 받았다고는 하나, 성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K의 상황으로 그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 또한 냉랭하다. 성과 관련된 어떤 끈이라도 잡아보려 발버둥치는 K의 노력은 과연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소송>이나 <법 앞에서>와 유사한 주제와 분위기로 진행되는 <성>은 이전 작보다 더 해석의 폭이 넓다. ‘성’과 ‘관리들’의 의미와 ‘K’라는 존재, 그리고 그가 획득하고자 분투하는 대상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성> 또한 <소송>처럼 미완의 작품이기에 누구도 확정적인 해석을 내릴 수 없다는 데에 이 소설의 ‘완전함’이 거론되기도 한다.

 

K가 마을에 도착해 성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일주일여의 기간 동안 마을 사람들 몇몇과 접촉하며 나누었던 대화가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K와 마을 사람 사이의 대화는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여러 장에 걸쳐 집요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서술된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절대적으로 합치될 수 없는 의미의 차를 변주하면서. 독자를 좌절하게 할 만큼 지리하고 답답하게 이어지는 대화의 서술에 카프카 소설의 묘미가 있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혹시 내가 무슨 다른 말이라도 했어요? 이 사람은 늘 이래요, 비서님. 늘 이렇다고요. 자신에게 제공되는 정보를 왜곡하고서는 잘못된 정보를 얻었다고 주장하는 거죠. 나는 그에게 지금까지 줄곧 말해왔고, 오늘도 말하고 있으며, 또 언제나 이렇게 말할 거예요. 클람은 이 사람과 면담한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이죠. (…) K가 말했다. “당신에게 용서를 구해야겠군요. 내가 당신을 오해한 것이니까요. 지금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지만, 나는 당신이 전에 한 말을 듣고 그래도 아주 적은 희망이기는 해도 한가닥 희망이 있다고 여겨졌거든요.” “바로 그거예요.” 여주인이 말했다. “물론 나의 견해지만요. 당신은 내 말을 다시 왜곡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반대로 말입니다. 내 생각에 당신에게는 그런 희망이 있는데, 물론 이 조서에만 근거해서 그렇다는 거요.(…)” p.163

 

지난한 대화에서 K가 실질적으로 얻는 것은 없다. K가 성의 승인을 받을 수 있을지, 마을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한 실낱 같은 가능성을 물고 늘어지며 끝없이 반복될 뿐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도는 대화는 영영 헤어나올 수 없는 미로에 갇혀버린 듯한 인상을 남긴다. 성과 관리들의 권위에 맹목적인 마을 사람들의 사고는 닫혀 있고, 이를 이해할 수 없는 K는 무의미해보이는 항변을 지속할 뿐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믿음에 따라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입장과 판단을 내놓는 등장 인물들의 대화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평행선처럼 이어진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어디에도 진실은 없다는 씁쓸한 확인이다. 이를 통해 카프카는 인간이 처한 삶과 사회의 바탕에 놓인 허위와 부조리를 극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성’이라는 절대적 대상에게 인정받기 위해, 벗어나지도 못하면서 헛된 노력을 지속하는 K는 일정 부분 우리 모두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답도 없고 진실도 감춰진 미로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때로 거부당하고, 때로 무언가를 성취한 듯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다다르는 곳은 ‘삶’의 반대편 혹은 그 끝인 ‘죽음’이다. K는 여러 면에서 ‘이방인’ 같은 삶을 살았던 작가 자신을 닮기도 했다. 거부당하면서도 끝없이 시도하고 투쟁하며 자기만의 고독한 글쓰기 속에서 생을 마감한 카프카의 답답하고 애처로운 삶이 엿보인다.

 

“K는 클람이 있는 먼 곳, 그의 난공불락의 거처, 아직 K가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외침에 의해서나 중단될 수 있는 그의 침묵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또 반박할 수도 입증할 수도 없는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 저 위에서 알 수 없는 법칙에 따라 그어놓아 순간적으로만 눈에 보일 뿐 K가 있는 낮은 곳에서는 깨트릴 수 없는 그의 세력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 모두가 클람과 독수리의 공통점이었다.” p.166

 

영영 다다를 수 없었던 ‘성’과 ‘관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부조리한 삶’ 자체이거나 유대인이었던 카프카의 배경을 고려해 절대적 권력이나 신의 영역으로 해석하는 의견이 있다. 유대교 전통에서 벗어나 서구지향적 삶을 살았던 작가는 그로 인해 유대교 전통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단절감과 이질감을 느꼈다. 전통적 유대교에 있어 ‘이방인’일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처지가 반영된 것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벤야민은 ‘부패한 아버지들의 세계’라고 말했다. 아버지와의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끝없이 노력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좌절만 경험했던 카프카 본인의 삶이 소설 속에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성’은 그가 그토록 도달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세계’일 수 있다.

 

“나는 이곳에서 토지 측량사로 받아들여졌지만, 단지 겉으로 보기에나 그럴 뿐이야. 사람들은 나를 갖고 놀았고, 집집마다 나를 내쫓았어. 사람들은 지금도 나를 갖고 놀고 있어. 그런데 지금은 더 많은 것이 관여되어 있어. 말하자면 어느정도 삶의 규모가 커져버렸고, 이것 자체만 해도 의미가 상당하지.” p.281

 

K는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알리고자 고군분투했지만 ‘성’과 연결된 관료 누구와도 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도록 K는 자신의 투쟁을 지속한다.(소설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카프카는 K의 죽음을 결말로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가야할 방향도 진실의 기미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자신을 대변하며 스스로 의미를 구축해간다. 그렇기에 K의 집념은 삶과의 투쟁을 벌여야만 하는 인간의 실존적 의지로 읽히기도 한다.

 

“눈으로 본 것, 소문으로 들은 것, 그리고 왜곡을 가하는 몇가지 부수적인 의도가 겹쳐져서 클람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는데, 그 윤곽은 대략 맞을 거예요. 그러나 윤곽만 맞는 거죠. 그밖의 클람의 이미지란 가변적인데, 물론 그것도 클람의 실제 생김새만큼은 아니지만요. 그는 마을에 올 때와 떠날 때의 모습이 다르며, 맥주를 마시기 전과 마시고 난 후의 모습이 다르고, 깨어 있을 때와 잘 때의 모습이 다르며, 혼자 있을 때와 대화할 때의 모습이 다르다고 해요. 그렇게 보면 저 위 성에 있을 때의 모습이 거의 완전히 다르다는 점도 이해가 되죠.” p.249~250

 

마을 사람 누구도 '클람'(소설 속에서 클람은 K가 닿고자 애쓰는 실질적이며 우선적 대상으로 등장한다)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회자되는 말, 일부 허위가 뒤섞인 말을 진실인양 믿는다. ‘성’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인식도 그렇지 않을까. ‘성’에 대한 진실은 누구도 경험한 적이 없지만 마을 사람들의 인식 속에 성은 ‘절대적 권위’를 넘어 '신적 믿음'으로 자리 잡혀 있다. 어떠한 진실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허위로 가려져 있지만 거기에 의문을 던지고 저항하는 인물은 K가 유일하다. K는 성패를 떠나 자기 존재의 타당성을 증명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겐 불가능하고 무가치하게 보였던 K의 싸움이야말로 부조리한 사회구조(관료주의)와 거부당한 실존에 저항해 ‘인간의 자유 의지’를 지키며 자신의 의미를 길어내려 한 의미심장한 몸짓일 수 있다.

 

“관청에 대한 경외심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타고난 것이고, 이후에도 평생에 걸쳐 모든 방면에서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들에게 주입되고 있어. 또 당신들 자신도 가능한 최선을 다해 거기에 가세하고.”(…)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사람은 아무리 격려해주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법이지. 천을 벗어야만 볼 수 있어.” p.258~261

 

성에 대해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보이는 마을 사람들에게서는 현대인의 일그러진 초상을 발견할 수도 있다. 사회에 통용되는 가치, 규범, 체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행동과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을 배척한다. 소설 속에서 홀로 외롭게 싸우는 K의 노력이 무가치하거나 비효율적으로 느껴지는 시선 뒤에는 가능성이 낮다면 애초에 저항의 시도조차 하지 않겠다는 무기력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육체의 힘은 어느 한도까지만 이르는 법이고, 바로 그 한계 지점이 보통은 의미심장하다고 해도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아니, 그 점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어요. 세상은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교정하고 균형을 유지하면서 돌아가고 있어요. 다른 점에서는 암울할지 몰라도 탁월한 장치, 언제나 다시 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장치인 것이죠. (...) 어서 가보세요. 저편에서 어떤 일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여기서는 모든 것이 기회로 가득하니까요. 물론 어떤 기회들은 이용하기에는 너무 크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좌절을 맛보기도 해요. 그래요, 정말 놀라운 일이죠." p.382

 

소설은 일견 난해하게 다가온다. 미로에 갇힌 듯한 인간 군상들 속에서 자신을 구명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K의 시도를 통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삶에 대해 근원적이고 복잡 미묘한 의문을 던지게 한다. 각자의 마음 속에 남은 이 질문은 끝나지 않는 소설 속 K의 투쟁처럼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두꺼운 소설 속 한 귀퉁이에 K가 놓지 않았던 실낱같은 가능성을 두둔하는 메시지를 숨겨두었다. 부조리한 세상일지라도, 스스로를 교정하고 균형을 유지하려는 '탁월한 장치'가 존재하며 그 속엔 온갖 가능성이 가득하기도 하다고. 불운한 삶을 살았던 작가가,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우리의 등을 밀어준다. 각자의 성을 향해, "어서 가보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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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2021-04-08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성>에 대해 꼼꼼하면서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며 생각을 정리해주는 폭넓은 해석을 담은 리뷰를 읽으면서 감동하고 감사합니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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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과정이 교차하며 오가는 무수히 많은 순간에서 아주 가끔 의미가, 무언가 일치되고 연결되는 순간이 탄생하지만 그때가 지나면 그것을 표현할 수단은 사라진다. 그러한 경험은 공유할 수 없고 전달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히 남아서 존재하고 있다. 단지 망각할 뿐이다.

205쪽, <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 문학과 지성사

 

 

 

 

내 생각을 옮겨 놓은 듯한 문장을 만났다. “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과정이 교차하며 오가는 무수히 많은 순간에서 아주 가끔 의미가, 무언가 일치되고 연결되는 순간이 탄생”한다고 나 또한 믿어왔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금새 사라지곤 했다. 연결되고 교신했던 찰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글로 남겼다. 그래서 지금도 쓰고 있다. 누군가의 글에 내 마음이 포개어진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정지돈의 소설 <모든 것은 영원했다>를 읽었다.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였지만 미국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한 현앨리스의 아들 정웰링턴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현앨리스는 해방 이후 냉전의 분위기로 흐르던 세계 정세 속에서 비운의 운명을 살다 간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 정웰링턴의 삶은 더 기구했다. 급진적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미국을 떠나 체코를 통해 북한으로 들어가길 희망했지만 북한은 미국 시민이라는 이유로 그를 거부했다. 결혼을 하고 체코에 정착했지만 평생 비밀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했던 인물이다. 그는 미국과 체코, 북한,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부유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어떤 선택도 허락되지 않는 '불능'의 삶이었다.

 

 

작가는 그의 진실을 파헤쳐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려는 의도로 소설을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항상성과 돌연변이가 우연과 필연에 대한 논의를 거쳐 역사에 닿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p.158)는 소설 속 문장이 이 책의 모든 것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앞부분 절반에서는 정웰링턴의 삶이 다뤄지는 반면 나머지 절반에서는 ‘미래를 전망함’이라는 타이틀로 정웰링턴에 대한 소설을 쓰기 위해 체코를 방문한 ‘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을 흔한 역사소설로 분류할 수 없는 이유가 이런 구성에 있다. 소설 전반부를 통해 실존 인물의 쓸쓸한 흔적을 더듬어보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후반부에서는 ‘나’를 통해 현재라는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의 편린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총체성을 사유할 수 없는 시대, 복잡성의 정도가 정신이 파악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p.152) 선 시대를 살고 있다. 각자의 삶은 ‘개인적인 것’으로 한정되었고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정치적이길 포기’했다. “집중을 방해하고 강박적인 자본주의의 여건 속에서 사람들은 충분히 뭔가 잘못되고 뭔가 빠져 있고 뭔가 극심하게 불공정”(p.152)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개체로서만 사고하고 행동”(p.153)하는데 익숙해져 간다. “동시대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지 모르겠다.”(p.152)는 비밀스런 한탄이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숨어 있지 않을까.

 

 

 

 

나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매혹당했다. 관점에 따라 그것을 무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능력이야말로 가장 과대평가된 덕목이다. 능력은 사람의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안과 밖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며 결국에는 그의 밖에 자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능함이 자신을 증명하는 종류의 능력이라면 불능은 세계를 증명하는 능력이다. 정웰링턴의 불능은 그가 가진 가장 적나라한 능력이었다.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기록과 목소리, 망각으로서 그렇다.

135~136쪽

 

 

 

작가는 정웰링턴에게서 ‘부정의 능력’을 읽어냈다. 한때지만 그에게는 “여기보다 나은 곳이 있다고 믿는 희망”(p.141)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으로 ‘모든 것을 부정’했다. 그러니 ‘불능’은 지금의 우리에게 던져진 단어일 수 있다.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이념 전쟁은 사라졌다. 가능성은 무한히 확장되었고 변화의 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다. 하지만 시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른 채 우리는 개인의 삶과 새로운 이데올로기-돈과 이윤, 경제와 개발같은-에 갇혀 있는 듯 보인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현재를 바라본다면 우리의 뒷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정지돈은 다른 작품에서도(<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workroom) 급변하는 역사의 현장에 존재했지만 주목받지 못한 채 잊혀졌던 인물을 다루었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무수한 자료에서 끌어 온 지식과 작가의 상상력을 엮어 재구성한 소설은 경험하지 못했던 한 시대를 우리 앞에 촘촘하게 펼쳐 보여준다.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작가가 늘어 놓은 관념의 그물망을 연결하며 그 시대를 살고 나면 소설 속 인물과 세계가 막막한 그리움의 감정과 함께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리움의 실체는 의문이었다. 역사는 늘 진보해왔다고 강조하지만,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그때보다 나아졌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영원했다> 또한 그러한 작업의 연장선으로 읽혔다. 작가는 사회주의 혁명이 실현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거라 믿었던 격동의 시대를 소환했다. 하지만 변화의 소용돌이는 냉전이라는 삼엄한 기류로 뒤바뀌었고 그 속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사라졌다. 공산주의 사회에 강렬한 열망을 품었던 정웰링턴도 그들 중 한 명이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함으로써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던 그는 역사적으로 선명하게 기록된 시간을 살았지만 자신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부정함으로써 자취를 남겼다. 정웰링턴의 삶을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듯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나’라는 장치는 단편적인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현재를 과거와 잇고, 미래를 연계하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어준다.

 

 

그의 책에는 주류가 아닌 세상,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분야, 잊혀진 사람들이 종종 등장한다. 후기 대신 서너 페이지에 달하는 참고 문헌이 실린다. 그만큼 막대한 분량의 자료를 통해 이야기에 층을 쌓고 복합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는게 작가의 특기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낱장의 종이들이 시간 순에 상관없이 뒤섞여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분절된 서사는 어느 페이지든 마음껏 접속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기도 한다. 굵직한 서사없이 이미지와 대사만으로 울림을 주는 영화가 있다. 그의 소설은 그런 영화를 닮았다. 명쾌한 서사를 피해 불투명한 방향과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불친절하다고, 누군가는 ‘지적 허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적 허영’은 ‘호기심’을 낳기도 한다. ‘지적 허영’을 자극하는 그의 글 덕분에 나의 독서 목록은 지난해 많은 수혜를 입었다.

 

 

2020년의 가장 큰 수확으로 ‘정지돈’이라는 작가를 꼽았다. 그의 책은 편협적인 독서를 하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펼쳐주는 만화경이 되었다. 과거로, 미래로, 눈 앞의 현실 너머 가능성과 이상으로, 돌리면 돌릴수록 복잡 미묘하게 펼쳐지는 만화경 속 세상이 매혹적이다. 그가 다음 번에는 어디로 만화경을 옮겨 놓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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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2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춤추는바람 2021-08-03 15: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