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옷장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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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같은 글쓰기’로 잘 알려진 아니 에르노의 문학은 자신의 과거를 낱낱이 드러내어 상처에 다시 칼을 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녀가 채택한 자전적 소설이라는 장르는 ‘기억에 대한 주관적 시선’은 있을지언정 ‘거짓’과 ‘허구’는 없다. 그렇기에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처음 접하는 독자는 충격와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상처를 바라보다보면 이내 자기 내부의 어딘가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장이란 부모의 세계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부정과 의심을 경험해보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뿌리와 과거로부터 떨어져나오는 과정은 일정 부분 수치심과 부끄러움, 죄책감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아니 에르노의 첫 소설 <빈 옷장>에는 파리 외곽, 도시의 끝에서 빈민층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부모를 둔 ‘드니즈 르쉬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소녀는 사립 학교로 진학하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학교와 선생님, 중산층 가정이라는 청결하고 예의바른 세계는 소녀에게 자신과 부모가 속한 곳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세상이 더 우월한 세계와 천박한 세계로 나뉘어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그녀의 고통스런 자아 분리는 시작된다. 학교에서 우등생으로 인정받고, 독서에 빠져들면서 소녀는 상상하기를 통해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기를 꿈꾼다. 자신이 ‘다른 여자애가 되는 것’을, 자신의 부모가 고상하게 바뀌길 상상한다.

 

 

 

“어쨌든 그들은 작은 소매상이자 동네 카페 주인, 벌이가 변변치 않은 초라한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것을 보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음탕한 년이 되는 것도, 숨기는 것도, 존재 자체가 순수한, 가볍고 자유로운 반 친구들 앞에서 더럽고 무거운 여자애가 되는 것도 이제 그만 충분하다. 나는 부모님을 더 무시해야만 했다. 모든 죄, 모든 악.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나뿐이다.”

p.113, <빈 옷장> 아니 에르노, 신유진 옮김, 1984 books

 

 

 

세계가 두 개로 나위어 있음을 알게 된 소녀는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끼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속한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온다. 그들을 무시하고, 학업에만 몰두한다. 성에 눈뜨며 자신의 욕망을 알아간다. 바칼로레아를 통과해 집을 떠나 대학 사회에 발을 들이고 부르주아 계급의 취향을 흡수한다. 고급 문학과 철학의 세계에 심취하면서 부모의 세계가 있던 과거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느낀다. 하지만 부르주아 계층의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낙태시술을 받는 처지에 놓인다. 자신의 몸에서 피가 쏟아지는 고통을 홀로 겪으며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반추한다. 다시, 천천히,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나는 둘로 나뉘었다. 바로 그것이다. 내 부모님, 소작농 가족, 노동, 학교, 책, 보르낭들. 여기도 저기도 아닌 그것이 증오를 키웠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내가 원했다고 해도, 나는 그들처럼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너무 늦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저 애가 공부를 계속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더 행복했을 거야≫라고 말했다. 나 역시, 어쩌면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이었다면, 그 부르주아들, 그 좋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지금 뱃속에서 내 수치심의 조각들을 힘겹게 꺼내는 것이라면. 나를 증명하기 위해, 구별되기 위해, 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이었다면……임신 그러니까 그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p.214~215

 

 

 

드니즈 르쉬르’를 둘로 나뉘게 하고 선택을 하라고 강요한 것은 사회와 문화였다. 그들은 자신을 부정하고, 더 나은 곳을 향해 거짓된 자아를 선택하라고 종용했다. 그들이 소녀의 마음에 증오를 자라게 했다. 부모에 대한 증오는 죄책감을 동반했다. 그러한 요구는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부장제와 이성애주의에서부터, 인종과 계층, 종교적 시선으로부터, 나이와 성별, 사회적 지위에 따라, 사회는 더 나은 것을 선택하고 맞추어 가라고 끊임없이 밀어붙인다. 그것은 여성에게 더 억압적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저마다의 빈 옷장에 얼마나 많은 욕망과 자신의 가면을 벗어두어야 했던가. 하지만 자신이라는 진실한 옷을 입고 온전하게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일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나는 늘 나만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 학교에 적응을 못하고 불편해하는 나 같은 여자아이가 또 있으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배를 움켜쥐고 두려워하고 있는 나 같은 여자아이가 또 있을까. 상상할 수 없다.”

p.76

 

 

 

“책은 그런 일에 대해 침묵한다.”(p.9) 문학과 책은 부모에게 애증을 느끼는 자식에 대해, 성적 쾌락을 탐하는 여성과 상위 계층에 진입하고자 하는 욕망, 낙태라는 낙인과 그 고통에 대해, 미화하거나 침묵해왔다. 아니 에르노는 <빈 옷장>에서 이 모든 침묵에 저항한다. 그의 자전적 소설이 의미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나는 늘 나만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고 비밀스레 품고 있던 의구심을,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소산임을, 개인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다수의 보편한 문제임을 폭로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소설을 읽고 경악하면서도 알 수 없는 위로와 다행감을 느끼며 자기만의 상처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헤르만 헤세의 성장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아니 에르노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여러 번 자신의 세계를 파괴했다. <빈 옷장>에서는 자신의 유년기를 파괴하고, <얼어붙은 여자>에서는 부르주아의 세계와 모성이라는 세계를 파괴한다. 그는 끝없는 글쓰기를 통해 세계를 파괴하며 진정한 자신을 찾아나아갔다. 어떤 허울도 없이 ‘아니 에르노’라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문학이라는 ‘진정한 장소’를 찾기 위해.

 

 

 

우리가 닫아버린 빈 옷장의 문이 열린다. 간신히 그 어둠 속을 가늠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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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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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꿈꾸었지만 꿈꾸는지도 몰랐던 하나의 세계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책을 만나기도 한다. 프랑스 시인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은 파티 드레스>가 그렇다. 거기에는 침묵이 일상인 사람들이 있다. 작고 낡은 식탁 앞에 앉아 식탁보의 주름살을 펴는 시인이, 모두가 잠든 밤 부엌에서 글을 쓰는 여인과, 백마를 타고 달리며 바람으로 음악을 만드는 아이가, <닥터 지바고>를 읽는 중년의 남자와 ‘사랑’을 이야기하다 눈동자의 초점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온통 검은색인 세상에서 그들 주변으로만 하얀 침묵이 고인다.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그들 맞은 편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들이 잠겨 있는 침묵의 빛을 황홀하게 빨아들이면서. 그러다 기어코 슬며시 나를 포개어 보는 것이다.

 

 

 

 

"그녀는 글을 쓴다. 온갖 색깔의 노트에다, 온갖 피로 만들어진 잉크로. 글은 밤에 쓰는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 장을 보고, 아이를 씻기고, 아이의 학과 공부를 돌봐준 뒤이다. 그녀는 저녁상을 치운 뒤 같은 식탁에서 글을 쓴다. 밤늦도록 언어 속에 머무른다. 아이가 깜박 잠이 들거나 놀이에 빠진 사이, 그녀가 먹이는 이들이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 순간에 글을 쓴다. 이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그녀 자신이 되어 있는 순간 그녀는 홀로 종이 앞에 앉는다. 영원 앞에 나와 앉은 가난한 여자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얼어붙은 그들의 집에서 그렇게 글을 쓴다. 그들의 은밀한 삶 속에 웅크리고 앉아."

p.83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이창실 옮김, 1984books>

 

 

그녀는 글을 쓴다. 빨간색 표지의 몰스킨 노트에다, 하얀 몸통에 검은 뚜껑이 달린 빅(Bic) 볼펜으로. 글은 새벽에 쓰는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를 씻기고, 책을 읽어주고 잠을 재우느라 밤에는 시간이 없다. 그녀는 새벽마다 발소리를 죽이고 침실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서재방으로 들어가 책 상 위 작은 등을 밝혀두고 글을 쓴다. 아이가 깰 때까지 언어 속에 머무른다. 아이와 남편이 꿈 속을 헤매이는 사이, 세계가 아직 잠의 장막에 덮여 있는 사이, 그녀는 홀로 존재한다고 느끼는 순간에 글을 쓴다. 이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그녀 자신이 되어 있는 순간 그녀는 종이 앞에 앉는다. 영원 앞에 나와 앉은 가난한 여자이다. 수많은 여성이 얼어붙은 그들의 집에서 그렇게 글을 쓴다. 그들의 은밀한 삶 속에 웅크리고 앉아.

 

 

 

 

 

"내가 책을 읽는 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예요. 위안을 받자고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난 위로받을 길 없는 사람이니까.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에요. 이해해야 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내 삶 속에서 괴로워하는 생명을 보기 위해섭니다. 그저 보려는 겁니다."

p.88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이창실 옮김, 1984books>

 

 

내가 책을 읽는 건, 나를 잃기 위해서예요. 내 존재가 지워질 때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삶의 반짝이는 것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그제야 보이지요. 위안을 받자고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책에는 위로 이상의 것이 있으니까. 거기엔 또 다른 삶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있어요. 여기서는 눈을 씻고 바라봐도 볼 수 없는 세상이요. 내가 책을 읽는 건 발견하기 위해섭니다. 나를 잃어야 열리는 그 길을 발견하려는 겁니다.

 

 

 

 

"우리는 사랑하듯 책을 읽는다. 사랑에 빠지듯 책 속으로 들어간다. 희망을 품고, 조바심을 낸다. 단 하나의 몸 안에서 수면을 찾고, 단 하나의 문장 속에서 침묵에 가닿겠다는, 그런 욕구의 부추김을 받으며, 그런 욕구의 물리칠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다. 조바심을 내며, 희망을 품는다. 그러다 때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처럼, 일체의 조바심을 몰아내고 일체의 희망에 딴죽을 거는 무언가다. 그것은 위로하려 하지 않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유혹하지 않고 황홀감을 준다. 자체 안에 자신의 종말과 죽음의 슬픔, 어둠을 품고 있는 무언가다."

p.108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이창실 옮김, 1984books>

 

 

 

 

 

많은 페이지를 옮겨 적고 고쳐 쓴다. 그 속의 침묵이 내 삶으로 번져나오길 갈망하면서. 이 책을 내 삶 위에 포개어 두면 '작고 하얀 드레스'가 내 것이 될 수도 있을까, 상상하면서. 시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때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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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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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과 사, 정상과 광기에 대해 쓰고 싶다.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그것이 가장 강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 p.104

"오랫동안 <시간들>(뒤에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제목으로 바꾼다.)과 싸워 왔다. (...) 나는 스스로를 신선하게 하고 싶다. 둔하게 하고 싶지 않다." p.108

“내 등장인물들 뒤에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동굴을 파고 있는가에 대해. 그것들은 정확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을 줄 수 있다. 인간성, 유머, 깊이. 내 아이디어는 이 동굴을 연결해서 그것들 하나하나가 현재의 순간에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p.109

“아직도 분명치 않은 것은 댈러웨이 부인의 성격이다. 너무 경직돼 있고, 너무 번쩍거리고, 너무 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을 지탱하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을 등장시킬 수 있다. (…) 내가 터널 작업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하기까지 1년간의 모색이 필요했다. “ p.111

<울프 일기>, 버지니아 울프, 박희진 옮김, 솔 출판사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주인공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파티를 준비하는 하루를 중심으로 그녀와 주변 인물의 심리 변화를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서술한 소설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러한 글쓰기에 대해 ‘등장인물들 뒤에 아름다운 동굴’ 또는 ‘터널’을 만들었다고 일기에 썼다. 그녀는 인물의 과거와 심리를 깊숙히 파고듦으로서 캐릭터를 구축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터널(캐릭터 또는 인물의 성격)이 소설의 주축이 된다. 서사보다 인물의 성격이 버지니아 소설의 핵심이다. 이렇듯 새로운 방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며 글쓰기를 했다는 점에서 울프의 소설이 현대적이며 실험적이라는 평을 받는 게 아닐까.

 

울프는 자신과는 너무 다른 클라리사라는 인물을 좀 싫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기가 작가로서 품고 있는 느낌(한순간 세상을 뜻있는 형체로 반죽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클라리사에게 투영하고자 했다. 쿠션과 교양이라는 완충재로 가득한 클라리사의 응접실에서 삶의 더럽고 끔찍한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했다. 울프는 브레넌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과제를 정리해보았다.

“응접실의 사람들이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 소설, 때로 머리털을 곤두서게 할 정도의 대화가 오가기도 하는 소설, 그런 응접실 대화가 전부인 소설, 그런 소설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p.105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알렉산드라 해리스, 김정아 옮김, 위즈덤하우스

 

<댈러웨이 부인>에는 클라리사가 파티를 준비하는 하루 중 옛 연인 피터 월시와 젊은 시절 사랑에 가까운 우정을 나눈 친구 샐리를 만나는 이야기가 하나의 축으로 전개되는 한편 퇴역 군인 셉티머스가 전쟁 후유증으로 환각(광기)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이야기가 나란하게 놓여있다. 버지니아는 소설을 통해 “생과 사, 정상과 광기",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그것이 가장 강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클라리사와 피터 월시를 통해 '생과 사'에 대한 관조적 시선을, 클라리사와 셉티머스(셉티머스와 주변 인물-닥터 홈즈나 브래드쇼경)를 중심으로 '정상과 광기'에 대한 탐색을 엿볼 수 있다. 클라리사의 남편 리처드와 영국 상류층에 기생하는 보수적 인물 휴, 응접실에서 정치를 쥐고 흔드는 레이디 브루턴 등을 통해서는 당시 영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이 비판적으로 그려진다.

 

버지니아가 가장 깊고 넓게 '터널'을 파고 들어간 인물은 클라리사와 피터 월시다. 그들은 현재의 순간 속에서 지난 시간의 잔해를 끌어올리며 삶과 죽음, 젊음과 나이듦, 그리고 사랑의 의미를 되새긴다. 삶이란 끝없이 흘러가는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듯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은 끝내 사라지거나 흩어져 버린다. 두 인물 모두 어떤 순간 삶의 공허함을 깨닫는다. 하지만 초로에 접어든 두 사람은 여전히 순간의 기쁨에 젖어 들고 삶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심각하고 진지한 문제에 골몰하다가도 일상의 사소한 일들-잡담이나 소일거리-로 한없이 가벼워진다. 무거움과 가벼움, 깊고 얕음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균형 감각이 우리 영혼의 진실이며 삶의 본질이라는 듯 말이다.

 

우리는 (그녀는 온종일 부어턴과 피터와 샐리를 생각했다) 늙어 갈 거야. 중요한 단 한가지, 그녀의 삶에서는 그 한 가지가 쓸데없는 일들에 둘러싸여 가려지고 흐려져서, 날마다 조금씩 부패와 거짓과 잡담 속에 녹아 사라져 갔다. 바로 그것을 그는 지킨 것이었다. 죽음은 도전이었다. 죽음은 도달하려는 시도였다. 사람들은 그 중심이 왠지 자신들을 비켜가므로 점점 더 거기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느낀다. 가까웠던 것이 멀어지고, 황홀감은 시들고,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죽음은 팔을 벌려 우리를 껴안는다.

p. 240

 

시계가 종을 치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자살을 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계가 시간을 알린다. 한 점, 두 점, 석 점. 그녀는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여전히 계속되는 것이다. 저기! 노부인이 불을 껐다! 온 집이 어두워졌다. 이 모든 것이 여전히 계속되는 가운데, 하고 그녀는 되뇌었다. p.242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인생이란 젊음을 거쳐 나이 들어 가는 변화의 과정이다. 그 변화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 두려움과 죽음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물로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가 등장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게 각자의 방식으로 그걸 외면하거나 다른 감정으로 채워가며 삶을 살아간다. 그러는 사이 중요한 것들-순수함이나 진실, 어떤 신념이나 믿음-은 퇴색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중심’을 향해 끝없이 손을 뻗어보려 하는 사이 흘러가버리는 게 인생 아닐까. 젊은 시절에는 그걸 잡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죽음에 다가설수록 결코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게 인생이라고, 소설은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젊을 때는, 하고 피터가 말했다. 너무 흥분해 있어서 사람들을 알지 못해요.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정확히는 쉰두 살인데(샐리는 몸은 쉰다섯이지만 마음은 스무 살 처녀 같다고 했다), 이제 좀 더 성숙해지고 보니, 하고 피터가 말을 이었다. 바라보고 이해하면서도 느끼는 힘은 줄지 않아요. 그래요, 정말 그래요. 샐리도 맞장구를 쳤다. 매년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열정적으로 느끼는걸요. 갈수록 더 그렇지요. 불행하게도. 그가 말했다. 하지만 기뻐해야지요-그의 경험으로는, 갈수록 더 그런 것 같았다. (…) 저기 엘리자베스가 있군요, 그가 말했다. 저 애는 우리가 느끼는 것의 절반도 느끼지 않아요. 아직은요. p.252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클라리사와 피터는 지나온 시간이 남긴 쓸쓸함 속에 젖어 들면서도 순간 순간 삶을 풍성하게 채우는 일상의 활력을 놓치지 않는다. 마치 삶과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게 나이듦이 가져다 주는 축복이라는 듯.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나이듦에 대한 찬가’가 아닌가 싶다. 클라리사와 피터는 자신들 앞에 펼쳐지는 삶의 무대를 여전히 생생하게 감각하고 사고하면서 기쁨에 젖어 들고 젊었을 때는 알지 못했던 의미를 풀어낸다. 그들은 ‘나이가 들수록 깊어지는 게 인생’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풍파와 신체적 변화를 겪으며 살아온 시간은 우리 안에 어떤 깊이를 만든다. 나이가 든다고 해도 젊을 때 만큼 느끼는 힘은 줄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바라보고(관조) 이해(지혜)’하는 힘이 덧대어진다. 나이가 들수록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열정적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게 삶이라고 두 주인공은 말한다. 살아갈수록 깊이가 더해지는게 삶이라면,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쌓아가는 일이 아닐까.

 

소설을 쓸 당시 버지니아 자신이 삶에 대해 품은 감정 또한 그들과 비슷했던 것 같다. 40대 초반의 버지니아 울프는 작가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으면서도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며 출발선에 선 젊은이 같은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런던으로 이사하면서 도시의 활기에 사로잡혔다가도 다시 병에 걸릴 수 있다는 두려움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겪게 되지만 귀족 작가 비타 색빌웨스트와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사랑을 경험하기도 했다.

 

“더는 두려워 말라, 태양의 열기를

사나운 겨울의 횡포를.”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 4막 2장에 나오는 노래의 첫 구절

p.16

 

「더는 두려워 말라.」 클라리사는 읊조렸다. 더는 두려워 말라. 태양의 열기를. 레이디 브루턴이 자기를 빼고 리처드를 점심에 초대했다는 충격이 방금 그녀가 서 있던 순간을 전율케 했다. 마치 강바닥의 식물이 지나가는 노의 충격을 받고 떨리는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동요했고, 그렇게 전율했다.

p.42~43

 

그는 맑은 금빛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과도 같은 놀라운 감수성으로 장미꽃과 벽지 위에 어룽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바깥에서는 나무들이 아피리들을 대기의 심연에 던진 그물처럼 펼쳐 놓고 있었다. 물소리는 방 안까지 들렸고, 물결을 타고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모든 권능이 그의 머리 위에 그 재보들을 쏟아 놓았고, 그의 손은 거기 소파 등받이에 걸쳐져 있었다. 헤엄치며 떠다니던 때, 멀리 해안에서는 개들이 짖는 소리, 멀리서 짖는 소리가 들려오던 때, 파도 꼭대기에 있던 손처럼. 더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몸속의 마음이 말한다. 더는 두려워하지 마라. p.183

 

그녀는 왠지 그와-자살을 한 청년과-아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이,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린 것이 기뻤다. p.243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클라리사는 브래드쇼 부부를 통해 한 청년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그는 퇴역 군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로 전쟁 후유증으로 신경 쇠약을 앓다 난간으로 뛰어내리고 만다. 클라리사는 자신의 파티에 들어온 죽음의 흔적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셉티머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파티를 준비하며 삶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가도 그녀 또한 무심코 스쳐가는 두려움을 마주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양면적 내면은 인간의 본질적인 두려움(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읽히기도 하고 신경 쇠약(조울증)을 겪었던 버지니아 울프 자신의 내면에 대한 반영으로도 보여진다.

 

소설 속에서 한 번도 직접 마주치지 않는 클라리사와 셉티머스는 하나의 대사로 묶여 있다. 「더는 두려워 말라.」 셰익스피어의 극에 나오는 이 대사를 두 인물이 각자의 자리에서 의미심장하게 읊조린다. 이는 무관하게 동떨어져 존재하는 두 인물이 내적으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듯 하다. 두 인물의 이야기가 나란히 놓여 있는 구성에 대해 알렉산드라 해리스는 두 패널을 맞붙인 ‘두 폭화’같다고 표현했다. “두 그림을 잇는 경첩 같은 것은 없지만 두 그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들이 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클라리사와 셉티머스는 소설의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p.117,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40대 초반의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주인공이 되었다는 느낌과 겉돌고 있다는 느낌, 기운이 넘친다는 느낌과 당장이라도 병에 걸릴 수 있다는 느낌이 공존하고 있었다. (...) 울프는 자기 자신의 여러 버전을 함께 받아들이면서 그런 차이들을 <댈러웨이 부인>의 틀로 삼았다. <댈러웨이 부인>의 구조는 울프가 그때껏 썼던 글을 통틀어서 가장 독창적인 구조라는 것을 울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서로 어울리기 힘든 이질적인 요소들을 나란히 전개할 수 있는 구조였다.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자신의 하루를 살아가면서 자기의 파티를 열고, 퇴역군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는 같은 날 런던에서 참호의 환각에 시달린다.

울프는 셉티머스라는 인물을 상상하면서 자신이 병을 앓던 때의 경험을 되살려내고 있다. (…) 1924년 10월, 울프는 건강한 몸으로 <댈러웨이 부인>을 끝내는 쾌거를 올렸다. 병을 글로 옮겨냄으로써 병을 이겨낸 경우였다. p.116~117

 

<댈러웨이 부인>은 두 패널을 맞붙인 두폭화라고 할까, 두 그림을 잇는 경첩 같은 것은 없지만 두 그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들이 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클라리사와 셉티머스는 소설의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p.117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알렉산드라 해리스, 김정아 옮김, 위즈덤하우스

 

클라리사는 순간 그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삶으로 뛰어든 인물인 반면, 셉티머스는 비정상적인 광기에 사로잡혀 죽음으로 뛰어든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은 인간적 이해없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의사들이다. 그들은 의학적 기준과 권위를 바탕으로 세상과 셉티머스를 분리시키고 '전향'을 강요하며 그의 영혼을 강압한다. 이에 대한 도전으로서 셉티머스는 죽음을 선택한다. 그가 죽음으로 '중요한 단 한가지'를 지켜냈다면 클라리사는 거기 살아남아 의지대로 파티를 꾸려내면서 삶의 기쁨과 영혼의 자유로움을 지켜낸다. 클라리사가 창문으로 맞은편 집 노부인을 지켜보는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엄숙함 속에는 삶을 살아낸 자, 그 순수한 존재감에 대한 존경심이 어려있다. "거기 클라리사가 와 있었다." (p.253) 살아남은 자, 생으로 뛰어들어 삶의 기쁨을 누리고 영혼의 자유를 지켜낸 클라리사가 거기 있다. 자신의 병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소설을 완성한 버지니아 울프 처럼.

 

「나도 갈게요.」 피터는 말했지만, 잠시 더 앉아 있었다. 이 두려움은 뭐지? 이 황홀감은? 그는 생각했다. 나를 이토록 흥분으로 채우는 이건 대체 뭐지? p.253

 

양면적이고 때론 모순적이기까지 한 감정이 하나의 존재 안에 공존한다는 것은 클라리사와 피터 월시를 통해서도 보여진다. 파티의 공허함을 깨달으면서도 파티를 지속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클라리사, 파티장을 떠나면서 두려움과 황홀감을 동시에 느끼는 피터를 통해 우리 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혼재되어 존재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복잡하고 다층적인 감정이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 마음껏 세상과 삶을 누리는 방식이 아닐까.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순간 속에 깃든 삶의 기쁨과 인간 영혼의 자유로움에 대해 말하려 했다. 이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서술한 소설의 기법을 따라 인물의 모호한 감정을 구체적인 언어로 빚어낸 울프의 노력으로 빛을 발한다. ‘자기가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을 강조한 소설 속 대사는 작가 스스로 방점을 찍었던 작업을 대변하는 듯 하다. 찰나에 스치듯 우리를 지나갔던 무수한 감정들이 탁월한 언어 감각으로 지어진 섬세한 옷을 입고 책장 마다 놓여 있다. 그 속에서 존재 자체의 기쁨을 줍는 일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그녀는 각자 자신이 느끼는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말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똑똑해 봤자 별 소용이 없었다. 그저 자기가 느끼는 것을 말해야 했다. p.250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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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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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첫번째 소설 <출항>은 스물 네 살의 레이철이라는 여성이 자신의 진실한 목소리를 찾아 떠나는 내면의 여행기이다. 그녀는 일찍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나이든 고모들의 보호 아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다. 19세기 말 부유한 집 딸들이 받는 뻔한 교육을 받았고 그로 인해 ‘그녀의 지성은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초기의 남성 지식인 정도의 수준’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도 없거니와 들은 것을 맹목적으로 믿으며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주장할 줄도 모른다. 한마디로 우유부단하며 감정적이다. 소설은 그런 여주인공이 외숙모 헬렌을 따라 남미의 휴양지(산타 마리나)에 머물며 다양한 인물과의 관계 맺음과 독서, 여행을 통해 세상과 자아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바다나 바람처럼, 융합되지 않고 그 밖의 다른 것과는 다른 실제로 영속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모습, 그녀 자신의 존재 환영이 레이철의 마음에 문뜩 떠오르며,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완전히 흥분해 있었다.

“저는 저-어 자신일 수 있어요.”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p/125

***변화의 가능성을 내보이는 장면. 레이철이 자기 존재를 알고자 하는 욕구를 느낄 수 있다.

 

 

 

 

 

소설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 각자의 관점에서 몇몇 소재가 풀려나오지만 자연스레 주인공 레이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된다. 소설이 쓰이던 당시 사회는 여성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제공하지 않았고 이상적인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젊은 여성에게 성취해야 할 당연한 인생의 표본으로 제시되던 때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레이철은 아버지의 통제하에 철저히 가부장적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백지장 같았던 레이철이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게 되고, 성과 사랑에 대해 질문하고,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존재의 의미와 삶의 지향점을 발견하는 변화는 상당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춤곡이에요.”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스텝을 만들어보세요.” 그녀는 멜로디를 확신하며 방식을 단순화하기 위해서 리듬을 대담하게 표현했다.

(…)그들이 앉아서 귀를 기울이자 그들의 신경이 가라앉았다.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고 웃어대서 그들의 입술에 느꼈던 열기와 아픔도 진정되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들 자신과 자신들의 삶을, 그리고 음악의 지휘 아래 매우 고상하게 진전하는 인간 삶 전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

“음악은 우리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여요.”

p/248

***무도회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연주자들이 떠나자 레이철이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레이철의 숨겨진 열정이 가장 강렬하게 표출되었던 장면이기도 하고, 소설 전체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즐거운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부분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가식과 위선의 가면을 벗고 일체가 되어 즐긴다. 삶이 주는 축복과 같은 순간 속에서 레이철 또한 삶의 기쁨을 극적으로 맛보았을 것 같다.

 

 

 

 

마치 그가 사물과 일체가 된 듯이, 그의 눈은 꿈꾸는 듯했고 푸른색의 생생한 눈은 레이철에게 달팽이의 녹색 살을 생각나게 하였다. 그녀 역시 그 옆에 앉아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크기의 경관이 자연스런 한계를 넘어 그녀의 눈을 확대시키는 것처럼 보이며 더 이상 바라보는 것이 고통스러워졌을 때, 그녀는 땅을 바라보았다. 남미의 이 한 줌의 토양을 아주 세밀하게 조사해서 땅의 모든 성질을 알아내어 그것을 자신에게 최고 권력이 주어진 세상으로 만든다는 사실이 그녀를 즐겁게 했다. 그녀는 풀 한 잎을 젖히고 맨 끝에 있는 솜털에 벌레를 한 마리 올려놓았다. 그녀는 이 벌레가 이 이상한 모험을 깨달았을지 궁금했으며, 그녀가 수많은 솜털들 가운데 이 솜털을 굽혔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가를 생각했다. p/210

*** 우연한 사건이나 자기 앞에 놓인 대상이나 자연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교감하는 레이철

 

 

 

 

 

 

도입부에서 그려진 레이철은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된 어린 아이 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외적인 교육의 강제가 부재한 탓에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풍부하게 소유하고 있다. 이는 그녀가 세상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특히 무도회 장면을 통해 열정적으로 순간에 뛰어들고 몰입하기도 하며, 피아노 연주로 사람들을 어떤 경지로 이끌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게 보여진다. 또한 '바다나 바람', '하늘'처럼 어디에 속하지 않으면서 실제에 영속하는 존재로 자신을 느끼기도 한다.

 

 

 

그녀의 마음은 햇빛 속에 걸려 있는 빛나는 것들을 응시함으로써 야기된 것과 같은 그러한 육체적 즐거움을 가지고 그 근원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것들로부터 모든 삶이 빛을 발산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책들의 단어들도 광휘에 젖어 있었다. (…) 그녀는 땅에 풀썩 주저앉아 무릎을 깍지 끼듯 움켜잡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노란색 나비가 평평한 작은 돌 위에서 아주 서서히 날개를 폈다 접었다 하는 것을 그녀는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사랑에 빠진다는 게 어떤 걸까?” 오랜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따져 물었다. 각 단어는 태어나면서 미지의 바닷속으로 떠밀려지는 것처럼 보였다. 나비의 날개에 의해 최면에 걸리고 삶에서 끔찍한 가능성을 발견한 경외심에 사로잡혀, 그녀는 좀 더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p/260

*** '사랑’에 대해 묻고 감각하게 되는 레이철, 그녀 의식 세계의 변화와 확장을 엿볼 수 있다.

 

 

 

 

 

 

헬렌의 의도대로 젊은 남성들과 여러 연령층의 여성들과의 만남, 아마존강을 따라가는 탐험 여행 등을 통해 레이철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휴잇이라는 인물과 교감을 나누고 ‘사랑’을 느끼며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시대 상에 의해 그 사랑의 결실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당위의 수순을 밟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랑 속에서 행복을 느끼면서도 가부장제하에서 ‘결혼’이 갖는 위선과 한계를 인식하고, 그로 인한 불안을 떨쳐내지 못한다. 레이철은 휴잇과의 관계가 긴밀해질수록 그 속에서 고립감을 느끼고 ‘결혼’이라는 선택이 지닌 편협함과 불완전함을 감지한다. 이는 소설이 ‘결혼’이라는 해피 엔딩으로 끝날 수 없음을 예감하게 한다.

 

 

 

가정에서 멋지고 단단히 짜 엮은 삶의 본질을 쌓아 올리는 것은 바로 고모들이었다. 고모들은 그녀의 아버지보다 훌륭하지는 못했지만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은 대부분 고모들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면밀히 검토하고 아주 격렬하게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리고 싶었던 것은, 바로 하루 네끼의 식사와 시간 엄수와 열 시 반에 하인들에게 층계 청소를 시키는 그들의 일상이었다. 이런 생각들을 따라가다가 레이철은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그 안에는 일종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이 순간에도 그들은 거기 리치몬드에서 세상을 쌓아나가고 있어요. (…) 그것은 아주 무의식적이고, 아주 겸손한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느껴요.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마음을 쓰지요. 늙은 노처녀들은 언제나 일들을 하고 있지요.”(…)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이 모래알갱이처럼 수많은 나날 동안 똑 똑 떨어져 내리며,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견고한 덩어리, 배경을 굳건히 쌓아올리는 것을 보았다. p/323~324

*** 레이첼의 입을 빌어 말하는 ‘여성’이 일구는 삶의 의미. 일상을 꾸리며 구체적인 삶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의 중요한 역할임을 강조한다. 이를 레이철이 자각하게 함으로써 그녀 인식의 각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여성이 스스로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녀는 그와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질질 끌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가 젊은 남자보다 더 외로워요. 그 누구도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그녀한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그녀가 아주 예쁘지 않으면 그녀가 하는 말을 듣지도 않아요……그리고 이것이 제가 좋아하는 점인데.” 그녀는 마치 그 기억이 아주 행복한 듯이 힘차게 덧붙였다. “ 저는 리치몬드 파크를 걸으며 혼자서 노래 부르며 아무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 좋아요. 저는 세상이 계속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아요-그날 밤 당신은 우리를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당신을 보았던 것처럼-그것은 바람이나 바다가 되는 느낌이에요.” p/325

***레이철의 변화 ; 존재에 대한 인식. 인형 같은 존재에서 ‘바람이나 바다’처럼 유동적이면서 세계를 스치거나 스며들거나 변화시키는 존재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는 지금에야 그가 말하고 잇는 것이 전적으로 진실처럼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한 인간의 사랑 이상의 훨씬 많은 것들을 – 바다, 하늘을 -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서 저 멀리 남빛을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하늘과 바다가 만난 곳으로 매우 평온하고 고요했다. 그녀는 아마도 단지 한 인간만을 원할 수는 없었다. p/455

***레이철의 변화 ; 사랑에 눈을 뜨고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결혼을 앞두고는 결혼이 지닌 한계까지 감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순순히 ‘결혼’에 이르는 결론에 다다를 수 없었을 것이리라.

 

 

거울 속에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그들을 오싹 소름이 끼치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대하고 나누어질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정말로 매우 작은 별개의 존재로 보였으며, 거울의 크기는 다른 것들을 비출 수 있는 넓은 공간을 남겨놓고 있었다. p/456

*** 두 사람의 결혼 이상의 더 큰 의미를 지닌 것이 세상에 존재함을 암시한다. ‘결혼’이 좌절될 수 밖에 없음을 감지할 수 있다.

 

 

 

 

 

 

레이철이라는 인물의 변화는 일견 소극적으로 드러나고, 그 또한 ‘사랑’과 ‘결혼’이라는 틀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그 외 인물-허스트나 휴잇, 헬렌-을 통해 당시 여성의 상황에 대해 날선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 내고, 혼자 살아가는 독신 여성(앨런), 자유 연애를 즐기는 여성(이블린) 등을 등장시켜 젊은 여성이 꿈꾸는 삶이 ‘결혼’만이 아니며 사회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려 고민한다. 그렇다면 레이철이 ‘결혼’에 대한 불안을 느낌과 동시에 열병에 걸리고 끝내 죽음에 다다르는 결말 또한 여성의 닫힌 현실(결혼)에 대한 투항의 제스처로 볼 수 있다. 그녀는 '결혼' 이상의 고귀한 무언가에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출항>은 레이철이라는 젊은 여성이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여성이 처한 현실에 저항하는 몸짓(가부장제가 강제하는 결혼을 뒤엎음)을 그려냄으로써 울프라는 여성 작가의 잠재된 힘을 짐작해보게 한다. 그런 의미를 지우더라도 이야기로서, 상상의 날개를 돋아나게 하는 문장력으로서 소설 읽기의 즐거움도 충분히 지닌 작품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풍경에 심상을 얹어 풀어내는 장면들이다. 단순히 눈 앞에 있는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을 대변하고, 혹은 인물의 감정에 깊숙히 개입해 어떤 작용을 일으키기도 하는 풍경, 그에 대한 생동감 있는 묘사는 '역시, 울프!'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 외에도 영국의 응접실 문화, 혹은 사교 문화에서 비롯되는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인물들 간의 상호작용을 즐기는 재미도 쏠쏠하다. 거기에는 언어를 통한 의사 소통으로 타자와의 진정한 교감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주제의식에 방점을 찍자면 다소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로, 관계과 삶, 존재와 영혼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했던 예리한 여성 작가의 시선을 느끼게 해준다. <출항>은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가 여성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첫 발을 내딛은 소설로 1904년부터 1915년까지 7회, 많게는 12회 정도 고쳐쓰며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녀는 여성의 정신 세계를 풀어낸 글이 드물던 시대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매달렸다. 가부장제의 폭압적 위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신만의 영혼의 경험, 진정한 존재의 순간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여성 언어'를 탐구하고자 했다. 그러한 울프 문학의 출항을 알리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육신은 죽음으로 가라앉지만 울프의 영혼은 그 너머의 것을 찾아 떠오르고 있다.

 

 

 

 

“물론, 나는 더 나이가 들었고, 거의 인생의 절반은 삶았지만, 너는 이제 막 시작하고 있어. 그것은 당황스런 일이지. – 때로는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아마도 위대한 것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아. – 하지만 그것은 재미있지. – 아, 그래, 너는 확실히 그것이 흥미롭다는 것을 발견할 거야. – 그리고 그렇게 계속 되지,”(…) “우리가 예상치 않았던 곳에 즐거움이 있어.” p/434

***결혼에 대해 걱정하는 레이철과 휴잇에게 헬렌이 하는 말이다. 결혼이라는 결합 혹은 제도 속에는 위선과 거짓, 억압이 존재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것은 삶 전반으로 확장시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삶이란, 역경과 어려움, 위선과 거짓, 온갖 억압이 존재하지만 반면 우리를 흥미롭게 하고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우리가 중단한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것이 삶이다. 그렇게 계속 되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이 숨어 있을 거라는 기대로 나아가는 수 밖에 없다. 두려움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떠나보는 것이, 출항해보는 것이 그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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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백수린 옮김 / 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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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들이 에르네스토의 부재에 익숙해져야 하며, 언젠가는 그들이 에르네스토 없이 지내야 할 것이고 게다가 언젠가는 모두 서로와, 영원히 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그들 사이에 머지 않아 이별이 하나씩 생겨날 거라고. 그다음엔, 남아 있는 이들이 자기 차례가 되면 사라져갈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인생이란다. (…) 인생이란 그런 것, 바로 그것,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런 것만이 인생이라고. 부모를 떠나는 것이나, 학교에 가는 것이나 다 마찬가지라고." p/18~19

 

 

인생에 드리워진 무수한 베일을 거두어 내면서 우리는 성장한다. 행복한 유년기, 타오르던 사랑, 열렬한 우정, 극에 달했던 모든 시절은 늘 무너졌다. 무너진 폐허를 넘어 삶은 지속되었다. 폐허 위에 쌓이는 것이 인생이다. 쇠락할 것을 예감하면서 나아가는 것,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소설이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여름비>다. <여름비>는 우리가 이별한 찬란한 순간을 되비추며 거기에 삶의 본질이 있다고 노래한다.

 

소설은 프랑스 파리 근교, 비트리에 사는 극빈층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실업자인 아버지와 어머니, 국가에서 주는 수당으로 연명하는 삶, 창고에 방치된 아이들. 지독한 가난에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삶이다. 그 속에 에르네스토와 잔이 있다. 아이들 중 맏이들인 이들은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책을 읽을 수 있고 일반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 둘의 사랑은 남매애 이상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로 연결되기도 한다. 소설은 그들만이 교감하는 어떤 신비로운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부모와 거기서 유래하는 아이들, 그 사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간극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삶의 의미를 상실한 부모, 삶 자체로 피어나는 아이들, 무능한 아버지와 무기력한 어머니,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에르네스토와 지극한 아름다움을 지닌 잔, 둘 사이의 극적인 대조는 긴장감 속에서 불가능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다. 에르네스토와 잔을 중심으로 비밀스럽게 짜여진 한 세계는 팽창하고, 둘은 지극한 사랑으로 서로를 존재하게 한다. 하지만 서로를 열렬히 사랑한다 해도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세계가 있고,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버림받은 존재란 걸 이해하고 있었다. (…) 아이들은 머릿속에 아주 어린 시절의 영역을 지니고 있었다. 어둠의 영역, 명료하지 않고 분별되지 않는 두려움, 예를 들어 황량한 고속도로, 폭풍우, 컴컴한 밤, 바람, 바람이 어떤 때 뭐라고 하는지 가서 들어 보렴, 뭐라고 소리 지르는지를. 아이들의 모든 두려움은 신으로부터 왔다, 거기로부터, 신들로부터. 모든 두려움은 신에게서 왔고, 생각하는 것은 그 두려움을 덜어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생각하는 것 역시 두려움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p/91

 

"잔과 에르네스토에게 있어 모든 것, 그리고 하루하루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시간, 같은 형태, 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

이러한 변화는 잔과 에르네스토에게만 겨우 감지된다. 그것은 아주 희미하고, 결코 드러나지 않지만, 매우 자연스럽고 일관된 방식으로 일어나, 온전한 미래로 향하는 듯한 변화다." p/168

 

에르네스토와 잔은 그들만의 세계가 붕괴할 것을 예감한다. 그 시간이 다가옴을 느낀다. 두려움은 아래의 아이들에게도 전달된다. 아이들이 현실을 인식하는 순간, 완벽하다고 믿었던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의 비극을 구체적으로 인지하면서, 유년의 세상을 떠날 채비를 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간다.

 

<여름비>는 잠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완벽한 결합이나 합일의 순간, 사랑이나 행복의 정점, 무언가로 충만했던 시절이 끝나가는 것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그 세계는 무너지고야 마는 것이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설은 그 순간을 여름이라는 계절에 녹여내고, 여름비로 장막을 거두어 낸다.

 

 

"여름은 단숨에, 난폭하게 들이닥쳤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여름은 그곳에, 움직임 없이, 슬픔에 잠긴 채 있었다. 하늘은 칙칙한 푸른색이었고, 열기는 이미 견디기 힘들었다." p/156

 

"비트리에 첫 여름비가 내린 것은 바로 그날 저녁, 어머니가 눈물을 머금은 「라 네바」를 오래도록 부르는 동안이었다. 비는 시내 전역에, 강과 파괴된 고속도로에, 나무, 오솔길, 아이들이 지나던 비탈길에, 세상의 끝까지 떠돌아다닐 창고 옆의 서글픈 의자들 위에도 오열하는 파도처럼 세차게, 격정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p/195~196

 

 

여름은 모든 것이 한껏 생명력을 뿜어내는 계절이다. 더위와 습기 속에 팽창하는 기운이 가득 차오르고 절정을 향한 아우성에는 긴장감이 뒤따른다. 폭발을 기다리는 침묵, 그 뒤에 일순간 퍼붓는 여름비. 세계를 가둔 장막은 찢어지고 열기에 썩기 시작했던 생명력은 분출한다. 그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다. 극을 향해 치솟는 것은 추락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무너져 내려야 다음으로 갈 수 있다.

 

<여름비>에는 소설의 문장과 희곡의 대사가 교차하며 등장한다. 낯선 형식은 한 편의 영화나 연극을 보는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뒤라스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를 글과 이야기로 빚어내고, 장면 장면이 연결되는 극으로, 구체적인 감각으로 재현해준다. 거기에 포착된 것은 존재의 내부에 잠자고 있는 불안과 고독한 실존이 지니는 욕망, 생과 사의 기운 속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긴장감이다. 외면적 사건은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농밀하다. 절제된 문장 속에서 감정은 폭발한다. 어떤 주술적 힘에 이끌려 끈적거리는 기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마는 것, 그것이 뒤라스 소설의 매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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