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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이
로미 하우스만 지음, 송경은 옮김 / 밝은세상 / 2021년 6월
평점 :
그럼, 당신은 누구죠?
내가 아무리 레나라고 주장해도 경찰이 믿지 않는 건 당연했다. 나는 그동안 오두막에서 겪은 일들이 야스민 그라스가 아닌 레나에게 벌어진 일로 치부하고 싶었다. 야스민 그라스는 이 세상 어디에선가 비 오는 날의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막대 초콜릿을 아래서부터 먹을지 위에서부터 먹을지 고민하고,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을 들으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커리 소시지를 안주로 밤새 맥주를 마시며 어떤 놈팡이와 밤새도록 놀아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p.105
레나는 뮌헨 출신 학생이었어요. 스물세 살이었고, 젊고 활력이 넘쳤죠. 대학에서 4학기를 이수한 레나는 어릴 때부터의 꿈인 교사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나는 사실 레나에게 작가나 예술가 기질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소질이 있었거든요. 영화배우를 해도 잘 해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레나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힐끔 쳐다보았을 정도로 매력이 철철 넘치는 학생이었죠.... p.108
책을 편 순간 깊이 몰입 되었다.
보통 소설을 많이 보는 편이 아닌데 이 책은 단숨에 읽어버리고 싶었다. 읽을수록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졌고 그 사람의 의도와 심리상태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매력적인 스물세 살의 여대생이 실종되고 사건이 미궁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여대생 레나는 14년간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모든 사람의 뇌리에서 사라져 갈 때쯤 엉뚱한 사고와 연관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고, 세상을 들썩이게 한다.
"한나와 요나단은 지금껏 열쇠 구멍을 통해서만 바깥세상을 내다볼 수 있었어요. 밤낮없이 오두막에 갇혀 지내야 했고, 아빠의 지시를 무조건 따라야 했죠. 철저히 고립되어 있는 환경이라 아예 비교 대상 자체가 없었기에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알지 못했어요.... 이를테면 한나와 요나단에게 오두막의 일상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진 거예요. 두 아이를 통해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나갈 뿐 자기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 한지 따지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죠." p.203
일상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오두막에서는 엽기적인 일들이 무수히 벌어진다. 그러나 그 안에서의 삶을 모르는 타인들은 무관심하고 오두막안의 인생들은 그들만의 루틴을 갖고 돌아간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이 소설이라서 너무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들과 심리들이 계속해서 묘사가 되었지만, 곰곰이 읽으면서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듯한 내용들이다.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스토리는 너무도 현실적이다.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진 않는다. 열명 이내의 중심인물들... 그러나 스토리는 400 페이지가 넘고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금쪽같은 딸을 잃고 밤의 숙면을 포기해야 했던 부모의 시간들도 절절히 공감이 되며 낯설지 않게 그려졌다.
레나가 실종된 이후 카린은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자주 몸을 뒤척였다.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거나 물이나 차를 마시려고 주방에 가기도 했다. 거실에서 책을 읽다가 눈꺼풀이 무거워지면 다시 침대로 오기도 했다. 카린이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물을 내리는 소리, 주방에서 차를 끓이는 소리는 이제 내 귀에도 익숙해졌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도 카린처럼 잠자리를 벗어난 적은 없었고, 기껏해야 자리에서 돌아눕는 정도였다... 마티아스 p. 325
납치된 여인과 그녀의 가족들, 그리고 납치된 상태로 오두막에서 살아가야 했던 레나의 어둠의 시간들. 그녀의 아이들. 그들이 만들어낸 오두막에서의 이야기들... 울컥이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했다. 화가 치밀고 납치범을 내 손으로 응징하고 싶은 충동이 드는 순간들도 있었다. 용납이 되지 않는 혐오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꿈을 꾸고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새삼 깨닫게 한다.
당신이 우리만 남겨두고 집을 비울 때 나는 세상을 우리의 벽안으로 끌어들인다. 나는 비밀도 만들고 사적인 일도 만든다. 한나와 나들이를 계획하기도 한다. 요나단이 꿀을 잔뜩 넣은 우유를 마시고 잠들어 있는 동안 한나와 나들이를 떠난다. 나는 수국이 가득 피어있는 야외 정원으로 한나를 데려간다. 정원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인사를 시키고 무당벌레가 아이의 손등 위로 기어가게 한다... p.444
스토리가 끝나고도 계속 마음에 남는 부분은 아이들의 심리상태이다. 아이들은 자라도 기억은 깊숙이 내면에 도사린 채 언제든 이들을 흔들어 댈 것이다. 무심한 듯 지나가는 그 부분이 좀 아쉬웠다. 마무리는 독자의 몫인가 보다. 세상을 쓸쓸하게 만드는 어른들의 행태들, 순수한 아이들의 눈과 마음을 어지럽히고 오염시키는 악행들이 단지 소설 속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현실에 갑자기 마음이 아파진다.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뤼치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