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머무는 자리, 그네 인생그림책 29
브리타 테큰트럽 지음, 김서정 옮김 / 길벗어린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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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과 이후를 구분 지을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

내게서 사라진 어떤 부재를 오롯이 통과하는 자리.

어떤 상상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자리.

세대와 세대 사이 기억의 끈을 이어주는 자리.

온전한 쉼의 자리이자 충만한 기쁨의 자리.

슬픔을 마음껏 토로하는 자리이자 아픔을 나란히 나눠지는 자리.

계절의 변화를 유유히 느끼며 순간의 무언가를 담아가는 자리.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잊고서 순간의 무언가에 몰두하는 자리.

무한한 바다를 바라보며 삶에 대한 질문을 무한히 품어가는 자리.

만남과 이별이 켜켜이 쌓여가는 삶의 후경이 되어주는 자리.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함께 할 수 있는 자리.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던 순간의 책갈피가 되어주는 자리.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순간의 가름끈이 되어주는 자리.


저마다의 서사 안에서 단순한 ‘공간’이 아닌 고유한 ‘장소’가 되는 자리, ‘그네’. 16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두께 안에 담긴 것은 편안한 색채로 구현된 삶의 모든 찰나. 그네의 옆과 위, 앞과 뒤에서 그리고 찍어낸 장면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어본다. 활기차서, 외로워서, 흐뭇해서, 처연해서, 그리워서, 고마워서 아름다운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름답지 않은 순간에도 아름다울 수 있는 삶을 만난다.


원서의 제목은 단순히 ‘그네(Die Schaukel)’이지만, 김서정 선생님의 번역으로 만나게 된 이 책에는 ‘삶이 머무는 자리’라는 수식어를 품은 제목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쏙 들어간 제목의 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머무른다’는 표현이 머무를 수 있는 아무 곳을 생각해 본다. 누군가에게는 그네, 누군가에게는 산꼭대기의 표지석, 누군가에게는 집 앞 놀이터의 의자, 누군가에게는 강변의 트랙, 누군가에게는 집 근처 카페의 구석진 의자… 어느 마음과 어느 모습으로 머물러도 괜찮은 곳. 혼자여도 함께여도 괜찮은 곳. 멈출 수 있는 곳. 쉬어갈 수 있는 곳. 시작할 수 있는 곳. 언제든 괜찮아질 수 있는 곳.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곳. 모든 순간의 나를 환대하는 곳. 모든 순간의 나를 영원히 기다리는 곳. 모두에게 똑같은 공간 위에 새겨진, 각자에게 다 다른 장소.


이 작품을 만날 다른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먼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만 쭉 감상한 다음에, 글과 함께 그림을 다시 감상해 보시길. 그림의 한 장면, 그네의 한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시간을 먼저 가져보시길. 그 후 그네 옆에서, 그림 안에서 흐르는 문장의 ‘간결하며 묵직한 감동’을 경험해 보시길.


+


브리타 테켄트럽 작가의 전작 ⟪허튼 생각⟫ 삶을 지키고 세우는질문 책이었다면, 이번에 만나게 신작 ⟪삶이 머무는 자리, 그네⟫는 삶을 돌아보고 돌보는안부 책이라 말할 있지 않을까. 유년부터 노년까지의 생의 장면을 시간 순으로 그리고 담아낸 리사 아이사토 작가의 ⟪삶의 모든 색⟫ 함께, ‘인생 보고 묻고 듣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으로 권하고 싶다. 지금의 당신이 삶의 어느 맥락 위에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당신을 외면하지 않는 장면을 만날 거라고. 지금의 당신을 겹쳐보고 싶은 장면을 만날 거라고. 지금의 당신을 둥글게 끌어 안는 장면을 만날 거라고. 작은 메모 하나 덧붙이면서.



*길벗어린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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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브 농장
이민주 지음, 안승하 그림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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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는 세게 내려쳐야 하니까 포르테(f, 강하게)로 그린 걸까.

세발 괭이를 미(E)로 표현하다니, 정말 찰떡인걸.

홀로 밭에 남아 수확의 손길을 마저 기다리고 있는 비트는 마치 8분음표 같아.

수확한 농작물을 가득 실은 트럭에는 비플랫(B♭)이 그려져 있네. 농장에서의 하루를 끝마친 수고를 달래는 노래를 바장조로 연주하고 싶었던 걸까.

밭고랑도, 전신주 사이의 전깃줄도, 지붕 위의 안테나도 모두 오선지처럼 표현되어 있구나.

불 켜진 집 안의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으려나. 어떤 노래를 들으며 한 마음으로 한 밤을 함께 닫고 있는 것일까.


노란 초승달이 뜬 밤하늘 아래 페브 농장.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기분으로, 별의 자리를 이은 듯한 모습으로 제목을 표현한 앞표지를 구석구석 천천히 바라보았다. 삶을 음악으로, 음악을 그림으로 담아낸 아름다운 그림책을 이렇게 또 한 권 만나게 되었구나- 하는 기대감을 포근히 끌어안고서.


일상의 빠른 효율이 일반의 바른 정답처럼 여겨지는 도시의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 ‘나’. ‘나’는 할머니의 편지를 받고서, 반려견 프레스토(Presto, ‘매우 빠르게’를 뜻하는 음악 용어)와 함께 집을 나선다. 여러 교통수단을 번갈아 타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곳. 한적한 시골에 위치한’ 페브 농장’이다.


페브 농장에는 이곳에서만 자라는 씨앗이 있다. 그것은 심은 곳곳마다 갖가지 모양의 음표가 쑥쑥 자라나는 신비한 씨앗.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음표로 자라나 저마다 다른 음을 내는 채소들과 함께, ‘나’는 분주한 낮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고 나서 찾아온 고요한 밤의 시간. 공통의 검은색으로만 표현됐던 수많은 음표들은 밤이 되자 저마다의 고유한 색과 향을 찾고 갖게 된다. 밤하늘을 밝고 아름답게 수놓은 ‘쉼표’의 빛 아래에서.


한 곡의 음악은 ‘음표’로만 완성될 수 없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페브 농장의 밤. 그곳에서 저마다의 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은 밭이라는 오선지 위에서 색색의 꿈을 꾸는 열매뿐만이 아니다. 매일의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 매일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심고 채우고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려가는 그림책 안팎의 마음들. 그 또한 저마다의 오선지 위에서 저마다의 색과 향으로 은은히 물들어 간다. 고요히 분주한, 모두의 밤.


클래식 작곡을 전공한 이민주 작가님의 글에 안승하 작가님의 편안한 색채의 그림이 더해져 완성된 페브 농장. “낮과 밤이 함께 만들어 가는 페브 농장의 하루”라는 문장을 오래도록 곱씹어 보며, 충전의 기호와 기회는 일상의 곳곳에 있음을 그림책의 곳곳에서 반갑게 발견하며, 가만히 생각해 본다. 삶이란 오선지 위에서 하루씩 담아내고 있는 오늘의 음표를. 삶이란 오선지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오늘의 쉼표를. 삶이란 오선지 위에서 그려질, 영원히 눈 감기 전까지는 언제나 미완일 나의 악보를.



+

‘나’와 할머니가 따로, 또 같이 들었을 아름다운 노래는 페브 농장 뒷면지에 담긴 QR코드를 통해 함께 들을 수 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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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다정한 그림책 - 나에게 친절하고 싶은 당신에게
이상희 외 지음, 김경태 사진 / 새의노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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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올해 만나본 책 중에 보자마자 책꼴에 몹시 놀라며 감탄했던 책 3위 안에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정’이라는 키워드 아래 그림책을 읽는 이유, 그림책에 몰입하는 이유, 그림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양한 그림책 안에서 찾고 모은 글을 이렇게 큼직한 단단함으로 만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거든요.


책의 띠지를 벗기자마자 마주한 표지에는 소복소복 쌓인 그림책들을 찍은 사진이 담겨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언제나 이렇게 그림책이 쌓여있지만, 표지 사진을 촬영한 방향으로 제 곁의 그림책들을 바라봤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표지에서부터 그림책을 바라보는 ‘신선한’ 시선을 느낄 수가 있었어요. 책을 펼치기 전, 표지 속 색색의 책발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며 어떤 그림책일지 유추해 보는 재미를 잠시 누려보았습니다.

 




“그림책 현장의 한복판에서 쉬지 않고 달려온(P.7)” 이상희, 최현미, 한미화, 김지은 작가님이 이토록 어여쁜 그림책 이후로 7년 만에 함께 펴내신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 타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다정한 마음을 품기 어려운 세상에서 그럼에도 그 마음을 잊고 잃지 않으려는 어른들을 위해, 네 분의 작가님이 그러모은 글과 마음이 모두 귀합니다.


드넓게 펼쳐진 여러 그림책의 장면을 바라보며(역시 그림책은 가운데를 쫙쫙 꽉꽉 눌러 보아야……), 네 분의 선생님이 각자의 자리에서 깊숙히 길어 올려 담아낸 그림책의 마음에 기대며,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은 지나온 삶의 다양한 장면들 속에서 내가 놓치거나 잊거나 지우거나 흘려보냈던 기억과 마음이 무언지 다시 되짚고 톺아보도록 그림책과 함께 안내하는 책이구나.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은 저마다의 치열한 매일의 분투 가운데에서도 함께 붙잡고 나아가길 바라는 삶의 방향점을 그림책 안에서 고민하는 책이구나.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은 나도 너도 그 누구도 각자와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서 따스하게 연결될 수 있는 마음, 그리하여 나와 네가 결국 ‘우리’가 되는 마음을 그림책 사이에서 찾아낸 책이구나.

이토록 다정하게.


이렇게도 그림책을 만날 있구나’, ‘이렇게도 그림책을 이해할 있구나라는 생각은이렇게도 나를 사랑할 있구나’, ‘이렇게도 너를 끌어안을 있구나’, ‘이렇게도 세상을 살아갈 있구나라는 마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바로 자신 위해 새로 만나고 다시 만나고 깊게 만나는 그림책을 경험하고 싶은 이를 만난다면, 이제 주저 없이 책을 선물로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실천하고 나눌 있는다정 방법을 책과 함께 그리고 다양한 그림책과 함께 고민해 보자고 말하면서요. 더불어 당신이 만들어갈 당신만을 위한 그림책 아카이브, 시작에 책을 살포시 놓아둘 있는 기쁨을 제게 주셔서 고맙다는 말도 함께 건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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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막대 파란 상자 Dear 그림책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 이지원 옮김 / 사계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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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이 그림책을 처음 펼쳤던 날을 기억한다. 두 개의 이야기가 한 권의 그림책에 담긴 만듦새를 신기해하며 한참동안 책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던 아이. 아직은 아이가 글밥 많은 그림책을 혼자 읽기 어려워 했던 때라, 아이 곁에 앉아 한 줄씩 이 책을 천천히 읽어주었던 것이 연초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난주. 같은 이야기지만 새로운 판형, 새로운 표지로 세상에 새로 나온 이 그림책을 보자마자 아이는 반갑게 외쳤다. “어, 이 책 얼굴이 바뀌었네?” 표지에 적힌 제목만 보고도 여전한 것과 달라진 것을 바로 알아채는 아이의 눈썰미와 기억력에 소리 없이 감탄하며, 어느샌가 소파에 앉아 홀로 이야기를 읽어내려가고 있는 아이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엄마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아이도 좋아하는 순간의 기쁨을 소리 없이 만끽하면서.




아홉 살 생일을 맞아 클라라는 ‘파란 막대’를, 에릭은 ‘파란 상자’를 선물로 받게 된다.

“그 막대는 우리 집안의 모든 여자아이들에게 대대로 전해내려온 것이란다.”

“그 상자는 우리 집안의 모든 남자아이들에게 대대로 전해내려온 것이란다.”


몇 세대를 거쳐 내려온 파란 선물과 함께 건네받은 낡은 공책에는 앞선 이들이 각자 어떻게 이 선물을 사용했는지를 적었던 기록들이 담겨있다. 공책을 펼쳐 지나간 시간 속의 지나간 쓰임새를 하나씩 확인하고 상상하며, 클라라와 에릭은 연신 감탄한다. 동시에 자연스레 알아차린다. 시간과 비밀이 겹겹이 쌓여온,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로 전달된 이 ‘선물’의 쓰임새를 자신 또한 마음껏 결정할 수 있음을. 이 공책에 담긴 지나온 기록과 자신의 손으로 더할 지금의 기록 모두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귀한 생일 선물임을.


🔖 “다음 사람한테 물려주기 전에, 나도 이 공책에 멋진 이야기를 적어 놓을 테야.”


같은 시간을 살지 않은 이가 앞서 남긴 ‘사용기’를 들여다보며 같은 물건을 사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상상하는 시간. 파란 선물을 대하는 다 다른 마음을 알아채는 신비로운 시간. 여러 세대의 아홉 살을 거쳐온 낡은 공책이 지금, 클라라와 에릭의 아홉 살을 환영하는 시간. 클라라와 에릭은 파란 막대와 파란 상자와 함께 쓰이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앞서간 이들과 함께 쓰는 이야기의 ‘구성원’으로서 초대받았다. 생일을 맞은 아홉 살 아이들이 물려받은 것은 제 마음과 제 뜻을 깊이 들여다보고 고이 내보일 수 있도록 도울 용기와 응원의 파란 물성이었다.


각기 다른 두 이야기가 한가운데의 트레이싱지에서 만나는 장면 위에서, 둘인 듯 하나인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언지 짐작해 본다. 과거와 현재를 뛰어넘어 ‘교감’할 수 있는, 이곳과 저곳을 뛰어넘어 ‘이해’할 수 있는, 가상과 실제를 뛰어넘어 ‘연결’될 수 있는 우리의 가능성. 다 다른 생각과 마음이어도 얼마든지 서로에게 다다를 수 있다는 다정한 마음과 따듯한 믿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안에서 이야기 밖으로 전달된 온기가 급격히 추워진 날씨에 차가워진 두 손을 오래도록 덥히고 있는, 2023년 11월의 어느 날이 지나가고 있다.





2004년에 출간되어 20년 가까이 사랑받았던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작가의 파란 막대 파란 상자. 주어와 목적어만 다를 뿐 비슷한 전개로 흘러 마치 쌍둥이처럼 느껴지는 두 이야기는 이전보다 작아진 판형, 이전보다 밝아진 표지, 이전과는 달라진 서체와 구성으로 독자의 곁에 다가와 마음 문을 다시 두드리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달라진 모습도,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이야기도 모두 다 아름답고 반가운 작품 파란 막대 파란 상자.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낡은 공책이, 면지 위에서 각각 다른 포장지로 감싸져 있는 상자와 막대들이 여전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파란 막대를 어떻게 쓰고 싶나요?

당신은 이 파란 상자를 어떻게 쓰고 싶나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떤 쓰임도 틀리지 않다는걸, 어떤 이야기도 포개어질 있다는 막대와 상자로 표현해주세요.






* 사계절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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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 코끼리와 코요테 인생그림책 28
나현정 지음 / 길벗어린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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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쇠락으로 죽음의 순간을 목전에 둔 코끼리. 체리 나무 밑에 앉아 얕은 숨을 겨우 내쉬고 있는 코끼리에게 민첩하고 가벼운 발걸음의 코요테가 다가온다. 한 걸음 도망칠 기운 조차 없는 코끼리에게 코요테는 반가울 리 없는 존재다.


만약 당신의 마음이 코끼리의 낡고 늙은 몸에 기운다면, 천연덕스러워 보이는 코요테의 표정과 자세가 얄미워 보일지도 모른다. 내게서 뭔가를 취하거나 나를 이용할 목적만을 갖고서 내게 다가왔고 나와 관계를 맺었던 그 누군가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코끼리의 ‘적’으로만 코요테를 바라보며 경계하는 일, 그 자연스러움에 익숙한 서글픔을 느낄지도 모른다.


서사의 방향을 트는 순간은 이야기를 지켜보는 독자의 익숙한 관점을 바꾸는 순간과 동일하다. 코끼리와 코요테가 나누는 대화를 잠잠히 보고 들으며, 이야기 밖에 선 독자는 코요테를 그저 코끼리의 곧 죽을 몸만을 기다리는 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게 된다. 다 죽어가는 코끼리에게도 여전히 ‘가능’의 영역에 남아있는 ‘나다운’ 일이 남아있다고 말하는 코요테. 그를 향해 자연스럽게 품었던 경계의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어느새 이야기 곁에 선 당신은 코끼리와 함께 하나씩 톺아보게 될 것이다. 코끼리가 누볐던 생의 찬란한 장면을. 코끼리가 누렸던 생의 아름다운 변화를. 그리고 이 모두를 가능하게 했던 앞선 누군가의 필연적인 죽음을.


전작 너의 정원, 봄의 초대, 하루살이가 만난 내일을 통해 경험했던 찬탄의 순간을 여전히 아름다운 그림체와 그에 깃든 ‘순환’이라는 새로운 주제 안에서 다시금 만날 수 있어 반가웠던 나현정 작가님의 신작, 비밀 - 코끼리와 코요테. 몽환적인 그림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담담한 문장을 한 줄씩 읽어 내려가며 생각해 본다. 앞서 살다 간 모든 생명에 의해 유지되어 왔던 삶과 죽음의 ‘비밀’을. 나아가 그 비밀의 위에서, 그 비밀에 의해서 뿌리를 내리고 꽃잎을 틔운 새 생명을 바라보며 상상해 본다. ‘적’으로 둘 수밖에 없는 (혹은 ‘적’으로만 두고 싶은) 이들 ‘덕’에 가능했던 (혹은 가능할지도 모를) 삶의 찬란한 장면을.


어쩌면 삶이 비극이지만은 않도록 우리를 살려줄 지 모를 아름다운 ‘비밀’을,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코요테의 연갈색 털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만 같은 늦가을의 오후. 책 위로 한 잎씩 떨어지는 가을이 내게 속삭였다. 끝의 슬픔과 시작의 기쁨이 한데 엮여있는 이 순간, 이 장소, 이 계절에 지금 네가 앉아있다고.


+

나는 어떤 ‘똥’을 싸며 살다 갈 것인가. 내 몸에서 분비되는 (또는 분비될 수 밖에 없는) 무엇들에 대한 고민의 공간 안에, 이 그림책을 살포시 내려놓는다. 나로 인해 이 세상에 남는 것이 고이 썩지 못 할 쓰레기만은 아니어야 할텐데, 라는 생각을 놓지말기.


🔖두더지 잡기, 마크 헤이머, 카라칼출판사, p.84 /

인간과 관련된 것들 가운데 유일하게 영구적인 것은 인간의 쓰레기뿐이다. 자연의 존재들은 썩는다. 모든 자연의 존재들이 거치는 달콤쌉쌀한 존재의 상태, 그들이 예전의 모습을 관두고 무언가 새로운 모습이 되기 시작하는 단계가 있다.




* 길벗어린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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