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 인간의 일생을 책 한 권으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깨알같이 적는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인생을 모두 읽을 순 없습니다.
이 책 《앙리 뒤낭, 그가 진 십자가》 역시 읽으면서 누군가의 인생을 책 한 권에 깨알같은 글자로도 다 담을 수 없었습니다.
《앙리 뒤낭, 그가 진 십자가》는 보통의 책보다 더 작은 글자로 앙리 뒤낭이라는 인물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앙리 뒤낭의 전기는 시간의 흘름을 따라 집필되었고 또한 책에서 다루는 전체 주제들을 각 부분의 무게를 최대한 공평하게 분배했습니다.
앙리 뒤낭은 1828년 제네바의 부르주아 계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장자크 루소와 함께 잘 알려진 스위스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앙리 뒤낭을 좀 더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는 적십자입니다. 앙리 뒤낭은 적십자의 창시자이며 초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입니다.
앙리 뒤낭은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30세가 될 때까지 금수저로 아무런 부러움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31세 때 이탈리아 솔페리노 전투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게 되면서 인생이 바뀌게 되고 전쟁 구호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전쟁터에서 가장 긴급한 구호 활동을 조직화하기 위해 소매를 걷고 나섭니다. 부상자들이 어느 편인지 일절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앙리 뒤낭은 솔페리노 전쟁 부상자들을 돕고 간호할 자원봉사자 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이는 많은 지지를 받아 적집사 운동이 탄생하게 된다.
앙리 뒤낭이 솔페리노에 오게 된 것은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농업에 투자했지만 잘 되지 않아 사업 편의를 위해 나폴레옹 3세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앙리 뒤낭은 솔페리노에서 겪었던 일들을 책으로 썼고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제목입니다. 비매용으로 출판한 책 일부는 친구들에게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앙리 뒤낭의 사업에 실패해 파산하게 되고 적십자 운동에서도 배제되는 등 인생의 고비를 만납니다.
파산 후에도 실패를 거듭해서 사회적 직업적 성공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에도 뒤낭에겐 여전했던 것은 염세주의였습니다.
1901년 제 1회 노벨 평화상 후보자는 13명이었고 앙리 뒤낭은 공동 수상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낭은 단독 수상의 야심을 계속 추진했지만 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앙리 뒤낭과 프레데리크 파시의 공동 수상을 통보받습니다.
당시 뒤낭은 빚이 많았고 노벨 평화상 상금을 채권자들로붜 보호하려고 했고 그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앙리 뒤낭은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시신은 조카 세 명의 수행을 받으며 취리히까지 수송되었고 화장 절차를 거쳤습니다.
장례식 참석자는 몇 명 없었고 가까운 친지나 친구들 몇 명, 지인들이 전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