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일본 소설에는 독특한 '맛'이 있다.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이다. 시큼달콤하기도 하고, 오싹할만치 강렬한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잔잔한 일상속에서의 사람살이가 느껴지는 편안한 맛도 더불어. 그래서인가 일본은 그 다양한 맛들처럼 문학상들이 유난히 많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유독 내가 좋아하는 나오키상 수상작. 왠지 재미가 '보장'된 책이라는 믿음이 생긴다고나 할까. 이 책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도 135회 나오키 상 수상작이다. 눈길을 끄는 예쁜 표지와 함께 나를 끌어당긴 이 책은 6개의 단편을 담아내고 있다.
얼마전에 읽었던 가쿠타 미쓰요의 '죽이러 갑니다'에서 주제 테마였던 '일상의 악의'를 첫번째 이야기 '그릇을 찾아서'에서 느낄수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가게를 가지고 맛난 케이크를 만들고 말겠다는 꿈을 지닌 주인공 야요이. 하지만 그녀의 보스인 히로미의 절대적인 맛의 재능 앞에서 포기하고 만다. 정말 맛난 케이크를 만들어 내고, 사람을 부리는 경영수완, 화려한 미모, 행운.. 히로미가 가진 그 모든 재능과 맞바꾼듯 연애운은 형편없다. 쉽게 반하고, 쉽게 버림받는다. 덕분에 야요이의 연애는 늘 그녀에게 질투의 공격대상이고 청혼을 준비해놓은 남자친구와의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망쳐버릴셈으로 그녀를 먼곳으로 출장을 보내버리는 히로미. 악의 아닌 악의가 물이 새듯 스며들어 온다.
이렇게 몇줄의 글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는 재능. 책의 마력이란 이래서 대단한게 아닐까. 화가나서 부르르 떠는것도 잠시, 출장간 곳에서 문득 느끼는 낯선 남자의 유혹에 너무도 자연스레 넘어가고 그러면서도 남자 친구와의 저녁을 상상하는 그녀를 보며 '아.. 역시 일본인'이라는 보수적인 편견이 자연스레 기어나와 버리며 피식 웃어버린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이렇게 '일상속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악의와는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마지막 이야기인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에서는 사람의 마음속 온기를 느꼈다고 할까.
매일매일의 바쁜 업무속에서 상사에게 '쓸데없는 교류'까지 강요당함에 지쳐 주인공이 새로이 선택한 직장, '국제연합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 그 길다란 이름만큼이나 절박함에 내몰린 난민들을 위한 국제기관이다.
늘 난민속을 뛰어다니는 현장직원인 에드와 결혼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의 정착을 바라고, 에드는 조그마한 바람이라도 불면 하늘로 날려올라가 언제라도 찢어질지 모르는 비닐시트처럼 아슬아슬한 난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녀마저 현장으로 이끌기 위해 애를 쓰고.. 책에서도 말하듯 '부부도 타인' 이란 말이 와닿는, 결혼이라는 정의가 가슴에 닿아왔다.
의견의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6년의 결혼생활을 접고 이혼한지 얼마되지않아 아프가니스탄의 난민 소녀를 강간범의 총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져버린 에드의 죽음의 소식앞에서, 살아남은 그 소녀의 장래 희망이 '국제기관에서 일하는 것'이라는 메세지를 전해들으며 오열하는 그녀의 떨림이 나에게도 번져왔다.
이렇게 책은 소소한 여섯명의 인생이야기를 들려준다. 맛난 케이크 한조각을 위해, 주인에게 버려진 개들을 위해, 인생에서 버려진 1억을 되찾기 위해, 불상복원에 관한 꿈을 위해, 동창들과 10년전에 약속했던 야구시합을 위해. 그리고 마지막, 절박한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그렇게 하나씩의 인생을 살아갈만한 아름다운 이유 한가지씩을 말이다.
내게는 어떤것이 살만한 인생이라고 이야기 할수 있는 가치일까?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가치일까. 아니면 그저그런 집착일까.
읽는 내내 일본소설 특유의 잔잔하고 세세한 묘사가 책에 빠져들게 했다. 약간은 기대에 못미친 느낌을 안겨다 주기도 했지만, 과장되지 않고 현실감이 느껴지는 삶의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 주인공 한사람 한사람이 되어 그들의 삶을 겪고 빠져나온, 그런 기분이다.
나는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가난한 나라의 참상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메마른 대지를, 난민들의 뼈만 앙상한 몸을, 눈앞에서 스러지는 무수한 생명을, 모진 바람에 휘날려 사라지는 것들을, 내 두 눈으로 직시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4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