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않는 소년 1~3 세트 - 전3권
이상무 지음 / 씨엔씨레볼루션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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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의 까치, 허영만의 이강토, 혹은 이두호의 까목이보다 앞서 만화가의 페르소나였던 캐릭터, 이상무의 독고탁.


독고탁은 어떤 의미에서 까치나 이강토의 원형이다. 물론 그보다 앞에는 황제의 흑나비도 있었지만 독고탁은 동시대의 인물로서 인생에 닥쳐온 불행을 웃음과 의지로 이겨내는 츤데레 캐릭터의 완성형이었다.


1978년부터 어깨동무에 연재됐던 울지않는소년은 축구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독고탁 이야기다. 만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80년까지도 연재된 것 같다.


연재될 때 본 뒤 거의 40년만에 다시 만난 울지않는 소년.


놀랍게도, 여전히 재미있다. (참고로 이두호의 임꺽정은 전질을 사놓고 1권만 보고 덮어버렸다


불행한 축구선수의 아들 독고탁이 '한국축구의 비밀병기가 돼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성취한다는, 어찌보면 뻔한 스포츠만화 스토리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캐릭터들이 살아 있다. 독고탁의 대부와 짝사랑 숙이, 엄마와 형, 심지어 축구장 경비원할아버지까지 그의 주변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인간미가 있다. 저마다 독고탁과 얽힐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고, 그와 부딪치는 사연들이 깔려 있다. 캐릭터마다 독특한 성격과 말투는 몸개그의 소재로 적절히 쓰인다.


독고탁이 마지막에 축구영웅이 될 것을 알지만, 도무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지 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스토리도 일품이다.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운다든지 하는 지금과 다른 그 시대의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내 어릴 적 친구 독고탁을 깔끔하게 인쇄된 새책으로 만난다는 기쁨이 크다.


내 기억에 울지않는 소년 뒤에 아홉개의빨간모자 라는 독고탁의 또 하나의 야구만화가 어깨동무에 연재된 것 같다. 그 작품도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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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다시 묻다 -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 비아 제안들 시리즈
후카이 토모아키 지음, 홍이표 옮김 / 비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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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회가 아닌 일본의 대학에 신학과가 필요한가?

도쿄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던 저자는 이런 질문을 가지고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개괄한다.

초대교회는 왜 신학을 만들어야 했는가? 중세 유럽사회는 왜 신학에 매달렸나?

(종교개혁 이후) 독일에서, 영국에서, 프랑스와 미국에서 당대의 신학은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가?

모두 8차례 일본의 일반인들에게 강연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강연한 내용이라 그런지 잘 읽힌다. 수많은 신학자가 언급되지만 주석이 충실하게 돼 있어서 신학을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들도 읽어나가기 어렵지 않다.

저자가 결론에서 하는 얘기가 요즘 한국사회를 보면서 내가 가지는 질문과 닿아 있어서 앞으로 그의 사상이 어떤 경로로 뻗어갈지 궁금해졌다.

"신학은 현대 사회에서, 현대인에게 진정한 상대화를 가르치는 학문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고 신학은 현대 사회의 관용 없는 그릇된 절대주의, 그 반대편에 있는 무절제한 상대주의, 그리고 그 양쪽에 잠복해 있는 자기절대화 모두를 거부하고 비판한다. .... 그리스도교가 본래 가지고 있던 모습과 사회적인 기능을 회복하는 일에 신학이 기여함으로써 신학은 오늘날 세계에 말을 건네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현대인, 특히 대한민국에서 사는 대다수는 초월에 대한 믿음이나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나'의 '느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 '나' 바깥의 세계와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나 바깥의 세계를 인정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SNS나 미디어를 통해 바깥의 세계를 만나는 것 같이 착각하지만 사실은 자신과 같은 시각의 무수한 변주를 보면서 "음 나와 같은 생각인 사람이 많군=내가 맞군"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더 크다.

굳이 타인을 만나야 할까? 왜 낯선 세계와 조우해야할까?

지난 대통령선거 때 일이다. 사전투표 첫날 투표를 하고 온 사람들 중 일부가 "후보자들 이름 사이에 빈틈이 없어서 엄청 긴장하면서 도장을 찍었다"고 온라인에 올렸다. 후보자 이름 사이에 빈틈이 없으면 공식투표용지와 다르기 때문에 무효가 될 수 있다고 누군가 지적하자, 많은 사람들이 "나도 같은 경험을 했다"면서 무효표를 만들기 위한 음모일지 모른다고 흥분했다. 이들은 "바로 몇시간전에 내가 투표하고 왔는데, 분명히 후보자들 이름 사이에 빈틈이 없었다"고 확신하고 맹세했다. 투표조작 우려가 점점 커졌다. 하지만 사전투표 이틀째에는 그런 보고를 한 사람이 없었고, 최종투표 뒤 개표에서도 그런 표는 나오지 않았다. 후보가 많아서 칸이 좁아졌는데, 신중하게 투표하느라 긴장한 사람들이 착각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서 더 큰 진실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같은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서로 착각을 주고 받으며 잘못된 확신을 키웠을 뿐이었다.

낯선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자폐적 나르시즘에 머무는 미숙한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초월적인 세계가 있든 없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So I don't care).

내가 보기에는, 어떤 면에서 현대(한국)인은 자신의 세계에서 신의 존재를 지우면서 타인의 존재마저 삭제해버렸다. 나보다 더 큰 어떤 존재-그것이 생명이든 세계이든 에너지든 우주든-앞에 나를 상대화시키는 경험은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한대로 관용없는 절대주의나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오류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다.

그런 길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학이 이 시대에 해야하는 역할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깊이 공감이 된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비기독교사회에 사는 우리는 이 지점에 머물지 못하고, 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친다.

그 구원의 길이 굳이 기독교의 야훼여야 하는가? 그것이 굳이 예수이어야 하고, 그 세계를 교회에서 찾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도 우리는 비기독교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답을 내놓을 수 있는가? 오늘 한국(과 일본)의 모든 기독교인에게 놓여진 질문이다.

물론 기독교 신앙을 장식으로 걸고 있지 않는 한 기독교인들은 저마다 이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답들을 함께 내어놓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장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다.

교회에선 정해진 답만을 말하기를 바라고, 신학은 그런 교회에 복무하기만을 요구 받고 있다.

기독교인도 아닌 일반인들이 신학자와 이런 강연회를 가지고 또 그 내용을 책으로 정리해 펴내는 일본사회와 교회의 힘이 조금 부럽다.


신학은 현대 사회에서, 현대인에게 진정한 상대화를 가르치는 학문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고 신학은 현대 사회의 관용 없는 그릇된 절대주의, 그 반대편에 있는 무절제한 상대주의, 그리고 그 양쪽에 잠복해 있는 자기절대화 모두를 거부하고 비판한다. .... 그리스도교가 본래 가지고 있던 모습과 사회적인 기능을 회복하는 일에 신학이 기여함으로써 신학은 오늘날 세계에 말을 건네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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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다시 묻다 -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 비아 제안들 시리즈
후카이 토모아키 지음, 홍이표 옮김 / 비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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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들이 신학의 역사를 개괄하기에도 아주 좋은 책입니다.
˝기독교 사회가 아닌 일본에서 신학이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질문을 가지고, 답을 찾기 위해 초대교회부터 유럽-미국으로 이어지는 신학의 역사를 훑어봅니다. 한국교회도 같은 질문을 가지고 답을 모색해야할 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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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 개신교의 역사, 종교.문화적 특질, 그리고 미래에 대해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박규태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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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을 중심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개신교의 역사를 다이나믹하게 정리했다. 특히 유럽 중심의 개신교 등장 과정에만 치우친게 아니라 영국 미국을 거쳐 전세계로 교회가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개신교의 정체성을 흥미진진하게 서술했다.

자연스럽게 신학의 주요 논제와 현대 교회의 쟁점, 흐름을 파악할수 있게 해준다.

교회와 역사를 보는 시야가 확 넓어지는 경험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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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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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 쉽고 상세하고 명쾌하게 결정지어주는 책이다. 본문만 500쪽 가까운 긴 분량이지만 잘 읽히고, 정치나 정치사에 문외한이라도 가끔 주석을 참고하며 술술 읽어갈 수 있었다.


파시즘이 군부독재나 권위주의 등 다른 우익 독재정치와 다른 점은 대중을 적극적으로 동원해 팽창주의적인 정치를 펼친다는 점이다. 대중의 열광을 이끌어내기 위해 지도자는 신적 아우라를 지닌 인물로 연출된다. 대중의 열광이 이런 파시스트 지도자에게 힘을 부여하게 된 것은 20세기의 대중민주주의 덕분이었다. 여기까지가 파시즘 1단계다. 


전통적인 지배세력 즉 정치귀족과 경제적 부유층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파시스트 지도자와 타협하며 파시즘 정권에 길을 터준다. 대중의 힘이 두렵기 때문이다. 1단계에서 사회주의 못지 않은 공동체주의와 공동체 경제를 역설하는 파시스트 정당은 여기서 이념적으로 변화를 보인다. 열광과 퍼포먼스는 남아 있지만 경제정책은 우왕좌왕하고 정치제도는 1당독재로 치닫는다. 1단계에 동참했던 열정적 파시스트들이 떠나거나 숙청당한다.


3단계는 전쟁과 학살이다. 1,2단계를 거치며 집권한 파시스트 정권은 열정과 퍼포먼스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극장국가의 성격을 띄게된다. 마치 자전거가 앞으로 굴러가야만 넘어지지 않듯이 파시스트 정권은 대중의 흥분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만 정치경제 부르주아를 압도하는 힘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선택한 것이 학살과 전쟁이다. 결국 파멸을 불러온다.


군부독재나 권위주의 정권은 대중을 수동적인 피통치자로 머무르게 하는 방안을 선호하고, 1당독재가 아니라 관료와 종교, 문화 등의 영역이 사적 영역과 함께 자율적으로 통치에 협조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정권을 유지한다. 이 때문에 3단계 파시즘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도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


파시스트는 어느 나라에나 있다. 또 파시즘적인 정치세력 역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찾을 수 있다. 1단계 파시즘이다. 문제는 2단계와 3단계로 전진하느냐다.



"초기 파시즘이 권력 장악을 향해 더 나아갈 것인지는 위기의 심각성 정도와도 부분적으로 상관이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 특히 경제 사회 정치적 권력을 쥔 사람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파시즘이 세력을 불려나갈 때 적절하게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파시즘의 주기가 무턱대고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파시즘이 성공을 거두었던 과정을 이해한다면 제때 현명하게 대처할 가능성도 훨씬 커질 것이다. (4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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