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수지 13
존 맥그리거 지음, 김현우 옮김 / 미디어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소설이다. 이야기이다. 하지만 삶의 여정이며 누군가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 아닌 일상을 그려낸, 말 그대로 그리듯 서술해 낸 이야기이다.
8년만에 신작을 발표한 #존맥그리거 의 이야기에 기대감과 호기심과 설레임을 안고 읽기 시작한 이 책은 읽어내려갈 수록 상상력을 더해가며 마치 내가 소설속의 주인공들과 이웃한 느낌을 주게 하였다. 13개의 장을 모두 읽은 지금, 이 소설은 내게 더이상 소설이 아닌 나의 삶의 언어가 되고 있었다.
책에서 찾은 첫번째 언어, 마을
책의 처음은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한적한 마을에서 일어난 여자아이의 실종사건은 동네 뿐아니라 방송에까지 크게 알려진 사건이 되었고 마을 곳곳의 사람들은 여자아이의 실종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데서 시작한다.
하지만 곧 마을의 언어는 여자아이에게서 자신들의 일상으로 집중되어 간다. 저자는 마을 구성원들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일상의 언어로 그들의 삶을 표현해나가며 마을의 풍경과 그들의 신변잡기를 늘어놓는다.
마을의 언어는 사람에게만 집중되지 않는다. 저자는 마치 내가 그곳에 서서 그 마을을 관찰하는 것처럼 마을의 풍경을 언어로 서술해 나간다.
시멘트 공장이 작업을 재개했고, 도로에는 은빛 먼지가 가득 쌓였다. 언덕 사이를 지나온 화물열차가 가로수가 있는 긴 곡선 선로를 지나고 있었다. 희미한 햇빛이 황무지 위로 느리게 움직이며 물이 넘친 좁은 계곡과 도랑을 비추다가, 다시 구름이 머리 위를 가렸다. 강둑으로 이어지는 기슭엔, 해 질 녘이면 왜가리 한 마리가 서서 강물을 내려다 보았다. 밤에는 낮은 언덕에서 안개가 서서히 내려왔다.
p.19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상점을 열고 개를 산책시키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엄마들은 청소를 하고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이 모든 일상이 반복되는 듯 반복되지 않는 언어로 매 순간이 기록이 된다. 그리고 장이 거듭될 수록 마을의 언어는 곧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감정선을 넘실넘실 넘치지 않도록 절제된 표현으로 그려낸다.
두번째 찾은 언어, 이웃
작가의 절제된 언어는 마을사람들의 언어를 직접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작가의 손에서 재탄생된다. 그럼으로 책에는 마침표(.)와 물음표(?) 외에 다른 문장부호가 생략되어 있다. 처음에는 읽어가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적응하지 못했던 작가의 불친절한 듯한 서술적 표현은 책에 깊게 빠져 들게 하는 묘약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결국 저자의 화법에 익숙해진 나머지 다른 책들로 눈을 옮겨가며 읽는 것이 오히려 새롭게 생각되어지기도 하였다. 그 화법을 통하여 저자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스토리 하나에 곁가지를 그리며 서술해 나가고 결국엔 모든 곁가지가 하나로 이어지는 다른 장편소설들과는 달리 [ #저수지 13 ] 안에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웃 한 명, 한 명의 삶이 별개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야기는 여전히 그들의 일상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풀숲에 귀뚜라미가 있었고, 딱정벌레가 린지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양들은 그늘을 찾아 창고를 들락 거렸다. 사람들이 저기도 찾아봤을까? 디팍이 물었다. 당연하지, 리엄이 말했다. 내가 직접 수색했어, 열화상 카메라까지 빌려서 뒤져봤는데 아무것도 없더라고, 디팍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듯 리엄을 가볍게 철썩 때렸다.
p.32
세번째 찾은 언어, 꿈
저자는 매 장마다 여자아이에 대한 사람들의 상상력 혹은 소문, 혹은 추측에 대한 서술을 아끼지 않았다. 이야기의 처음과 끝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꿈의 내용은 그럴 듯하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꿈의 서술을 통해 마을에서는 '실종된 여자아이'도 그저 하나의 이웃임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이제 열일곱 살이 됐을 테고, 경찰에서는 현재 모습을 컴퓨터로 합성한 이미지를 공개했다. (중략) 그녀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꿈을 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런던 거리에서 자동차에 쫓기고 있었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녀가 옷에 진흙과 타르를 잔뜩 묻힌 채 동굴 속을 기어 다니는 꿈을 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녀가 지하실이나 버려진 농가에 감금되어 있는 꿈을 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중략) 그런 이야기들을 막을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p.124-125
"그런 이야기들을 막을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아마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하여 가장 하고 싶었던 한 문장을 손에 꼽으라면 이 문장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꿈을 통하여 표출되는 그런 이야기들은 한 명의 입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상상으로 전이되는 방식을 따라 창조가 재창조가 되어 누군가의 삶에 투영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찾은 언어, 공감
저자는 굉장히 바쁘다. 이웃들의 집을 하나하나 방문해나가며 그들의 삶을 서술해야하기 때문이며 그들의 감정을 표현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삶을 표현할 뿐 그들의 극단적인 감정을 표출하지는 않는다. 또한, 시간의 순서대로 그들을 서술하지 않는다. 시간과 삶은 병행이 아니라 주객의 관계처럼 때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 같지만, 삶이 진행되기 때문에 시간이 마련된 것처럼 생각되어지기도 한다.
이내 나는 마을 사람들을 서술하면서 공감을 이끌어 내고 공감을 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 안에 동화되게 만들어 내는 저자의 독특한 서술방법을 곧곧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 나갔고, 그렇게 얻은 신뢰를 늘 품고 다녔다. 그건 자동차 트렁크에 돌멩이를 채우는 일과 비슷하다고, 언젠가 그녀가 주교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머지않아 트렁크가 너무 무거워져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차의 바닥이 땅에 닿게 된다고. 주교는 미소를 지으며 힘든 일임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녀와 함께 기도했고,그녀는 계속 돌멩이들을 지고 다녔다. p.150
신뢰와 돌멩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비유인데 너무 공감이 되어 몇번이고 같은 문단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삶을 공유한다는 것
누군가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
누군가의 삶을 수용한다는 것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
그것은 빈 마음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삶을 내가 함께 짊어질 각오와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돌멩이가 되어 목사 제인에게 담겨졌던 것이다.
잃어버린 것들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기도를 많이 했지만,아이가 정상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정상'같은 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중략) 앤드루가 일곱 살 때 테드가 죽었다.(중략)테드는 아직 50대 중반이었고 사람들은 비극적인 일이라고 했다. 그녀는 안도감 비슷한 감정이 드는 것만은 끝까지 인정할 수 없었다.p.152
늦게 낳은 아이 앤드루는 또래 아이들과 같은 성장과정을 보여주지 않았기에 엄마 '아이린'은 불안해 했고 학부모 모임에도 참석했지만 '소외감'에서 해방될 수 없었다. 아이가 '다르다'고 말하고 싶을 뿐 '잘못됐다'거나 '정상이 아니다'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양육하면서 남편 테드와의 갈등을 겪고 힘들었을때 그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고 드는 안도감을 애써 거부하는 그녀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어떤 사람들도 보여줄 수 있는 불안과 안도라는 양가감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책의 후반부에서 이야기의 훗날인 아이린이 웃음을 찾는 부분이 등장했을땐 나도 함께 웃을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아이린에게 많이 공감하고 있었기에 다른 이들의 모습보다 아이린의 모습에 더 많이 웃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도화지이다. 저자의 언어로 표현된 [저수지 13]의 그림을 내 맘껏 그려낼 수 있는 새하얀 도화지인 것이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기억과 회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그녀를 찾는 이야기가 아닌 그저 일상이 삶으로 전환되어 가며 나타나는 사람의 이야기들이며 한 마을의 이야기이며 공감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책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나도 이렇게 이런 삶을 살고 있구나.
특별하지않지만 큰 사건사고도 없지만 혹은 있을 수 있지만 나도 오늘을 살고 있구나 하는 그런 안도감을 바로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